https://youtu.be/06G2HOYhSww
조용필이 부른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 노래의 작사자인 양인자 시인은 이렇게 읊는다.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
한 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 / 빛나는 불꽃으로 타올라야지”
그렇다. 지금도 팽창 중인 광대무변 우주, 그 안에 존재하는 약 2000억 개의 무수한 별들, 그중 ‘창백한 푸른 점’(1) 하나에 불과한 지구별 위에 태어나 찰나의 순간을 살다가는 우리 인생일 뿐이지만 ‘내가 산 흔적’을 점 하나 정도는 찍어야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내가 여생 끝에 뼈를 묻을 거창군 대야 마을, 이 곳 땅과, 그리고 더불어 어울려 사는 존귀하고 아름답고 사랑해야 마땅한 대야 마을 사람들(2), 한사람 한사람 모두 하나의 독립된 외로운 우주, 혼신을 다해 살아가는 각각의 목숨과 운명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점 흔적으로 남기고자 이 글을 시작한다.
《대야 마을 향토지(鄕土誌) I: 자연지리》
예수 탄생 기준 21번 째 백년,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에 매달린 쥐불알 크기만 한 한반도, 그 남쪽 끝단에 자리한 경남, 경남에서도 서북부 내륙에 위치한 거창군.(3) 백두산에서 발원한 백두대간이 반도의 등줄기를 타고 남으로 내닫다가 강원도 태백산 부근에서 남서 방향으로 갈래 지어 소백산맥을 이루고, 휘돌아 덕유산 거쳐 광주 무등산, 영암 월악산까지 치닫는 그 소백산맥 덕유산 아래 터 잡은 거창. 북으로는 덕유산(1614m), 동으로는 가야산(1432m), 서로는 가까이 지리산(1914m), 남으로는 황매산(1113m)이 연접한 오지, 1000m 이상의 높은 산, 물경 21개의 봉우리로 둘러싸인 천애고아 같은 분지.(4)
거창 땅을 한 역(域)으로 잡아 풍수지리로 논해보자면 주산(主山)(5)이 덕유산 향적봉이요, 안산(案山)(6)이 감악산이다. 고을 이름이 살(거주할) 거(居), 창성할 창(昌), ‘거창하게 창성하면서 사는 고을, 居昌'. 이 거창군역의 남쪽 아래 위치하여 이름이 남하면(南下面). 남하면에서도 마을 뒷산 줄기 조감도(鳥瞰圖)가 큰 이끼 모양을 닮았다 하여 이름이 클 대(大), 이끼 야(也)인 대야(大也) 마을.(7)
다시, 이 대야 마을을 한 역(域)으로 보자. 북쪽 뒷산은 감투봉(518m)(8), 남으로는 서출동류(西出東流)(9)의 길수(吉水)가 흐르는 황강(黃江), 강 물줄기를 따라 흐르는 야트막한 ‘흐르메’(10)가 있고, 남서로는 감악산(952m)이 솟아 있다. 마을 전체가 정남향이다. 동양권 전통의 인식론에서 말하는 배산임수(背山臨水),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남주작(南朱雀) 북현무(北玄武)를 골고루 갖춘 전형적인 길지(吉地)다.(11) 마을이 길지라는 증빙이 하나 더 있다. 길지는 양택(陽宅: 산 사람이 사는 주택), 음택(陰宅: 죽은 이를 위해 터 잡는 묘터) 둘 다에게 좋다 한다. 우리 마을 바로 동쪽에 연이어 동래 정씨의 가문 묘지터에 묘소가 100기(基) 정도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이 길지라는 세 번째 증빙이 있다. 잘 아시는 조선 후기 《정감록(鄭鑑錄)》이 연원한 도교(道敎)사상, 도참(圖讖)사상에서 말하는 것처럼 상서로운 길지는 그 역(域)이 매우 넓고 기운이 세다. 흐르메 바로 너머 지척 간에 임불(壬佛)이란 동네가 있다. ‘임불’이란 동명(洞名)은 도참설로 말할 짝이면 ‘마을 북쪽 임방(壬方)(12)에 새벽에 부처님께 예를 드리는 명당터가 있다(효승예불 曉僧禮佛)’하여 그리 명명되었다 한다.(13) 임불의 북쪽이 우리 대야 마을이다. 이 터에 고려 말에는 ‘사임사(沙任寺)’란 절, 17년 전부터는 ‘행복한 절’이 들어서 있다. 그렇다면, 수백 년 전, 임불 촌락을 지나치던 도인(道人) 한 분이 수백 년 후 북쪽 방향 한 마을에 ‘사임사(沙壬寺)’와 ‘행복한 절’이 터를 잡을 것이라는 예견을 했더란 말인가? 믿거나 말거나.
이 마을이 길지라는 내 나름의, 네 번째 진단도 곁들인다. 마을 앞에는 거창에서 합천, 고령으로 연결되는 국도가 있다. 차량이 하루에도 수 백대 왕래한다. 만약 산높고 골 깊은 심심산골에 자리한 명당이 있다 치자. 시야가 꽉 막히고 바람도 안개도 제대로 흐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마을 앞의 전망은 그런 명당에는 없는, 정중동(靜中動), 동정중(動中靜), 움직이면서도 고요한, 고요하면서도 움직이는 조화가 있는 셈이다. 바다나 호숫가에 사는 사람들은 늘 똑 같은 경치를 보기에 우울증에 쉽게 걸린다고 하지?
앞서 언급했듯, 제대로 된 명당 길지는 기가 세고 그 면적도 넓다. 대야에서 앞 들판과 황강을 건너 감악산 기슭에, 손에 잡힐 듯 건너다 보이는 ‘명산(名山)’이란 마을이 있다. 이 마을 전설에는 이 마을이 ‘죽은 나무에 꽃이 피는 고목생화(枯木生花)’의 명당터라 한다. 바로 옆 동네는 ‘전척(煎尺)’, ‘고척(古尺)’이다. 옛날, 척법(尺法)을 가르치는 서당이 있다 하여 ‘척(尺)’자가 들어가는데, 이 마을들은 금상옥척(金箱玉尺), 즉 ‘금상자(金箱) 속에 옥으로 된 자(玉尺)가 있다’고 칭하는 명당이라 한다.(13) 믿거나 말거나?
대야, 이곳 마을에 선사시대 이후 일만 수천 년 터를 잡고 살았던 억조창생 조상님들이 마을 근처의 곳곳에 붙인 이름을 소개하는 것으로 <자연지리>를 마무리한다. 아시다시피, 사람이 인지하는 모든 사상(事象)에 이름을 지어 부른다는 일은 마치 부모가 자식의 이름을 작명하고 호명하듯, ‘내가 너를 알아본다.’, ‘너는 내게 소중하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행위이리라.
마을 뒤쪽 골짜기는 각각 ‘큰골’, '작은골'이라 부른다. 마을 앞 정남쪽 흐르메에는 ‘새추당(14)’, ‘성지골(15)’이라는 작은 골이 있다. 마을에서 국도 따라 동쪽으로 가면 금방 대호주유소 북방으로 ‘도장골(또는 가장골)’이 있다. 바로 옆의 거창레미콘 북방 골짜기는 ‘방마골’이다. 그 옆이 '중성골'. 역방향으로, 마을에서 국도 따라 서북방 거창읍 쪽을 가면 금방 '아까시아골', 바로 옆 ‘명주골’이 나오고 그 다음, 괘리 마을 맞은 편 골짜기는 ‘신꼬골’이다. 심지어 마을 안 골목도 '큰골목'(마을회관 옆의 오르막길), '작은골목'(마을 동편, 국도에서 서당을 지나 '행복한 마을'로 가는 오르막길)이라 이름하였다.(16) 참으로 정겹고 편안한 이름들이라, 이 마을에서 태어나 한 평생 살다 떠나신 뭇 사람들의 고운 심성, 이 이름을 불렀던 그님들의 부드러운 숨결이 내 귓볼 솜털에 느껴지고, 목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 하다. 저녁 무렵 동네 아이들이 깔깔대며 뛰어노는 소리도 들린다. 어머니 목소리도 들린다.
"순하야, 밥 묵으로 빨리 온나~~~~!"(17)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하략)
(김춘수 詩 <꽃>)
https://youtu.be/FAweIU6qu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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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백한 푸른 점’. 1990년 2월 14일, 우주 탐사선 보이저 1호가 태양계를 벗어나면서 지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위치에서 지구를 촬영한 사진을 일컫는 말이다. 우주학자 겸 과학저술가 칼 세이건이 그 사진을 보고 감동하여 이렇게 명명하고 동명의 책을 뚝딱 저술했다. 사진에서 지구의 크기는 0.12화소에 불과하며, 작은 점으로만 보인다. 촬영 당시 보이저 1호는 태양 공전면에서 32도 위를 지나가고 있었으며, 지구와의 거리는 무려 64억 킬로미터였다. 태양이 시야에서 매우 가까워 좁은 앵글로 촬영했다. 사진에서 지구 위를 지나가는 광선은 실제 태양광이 아니라 보이저 1호의 카메라에 태양빛이 반사되어 생긴 우연한 효과이다.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 지구별! 이 작은 점을 대하면 누구라도 인간이 이 우주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누리는 유일한 존재, ‘만물의 영장’이라는 환상이 헛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채널예스’ 칼럼 “이 사진을 보고도 당신은 오만할 수 있을까? -- 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 일부 인용.
(2) “집은 열 냥 주고 사고, 이웃은 아홉 냥 주고 산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멀리 사는 피붙이 보다 이웃사촌이 더 소중하다는 뜻.
(3) [참고] 디지털거창문화대전―삶의 터전―자연지리
http://www.grandculture.net/geochang/toc/GC06300010?search=A1
(4) 1997년 겨울, 거창대학 교수 모집 공고가 떴다는 소식을 남해대학 근무하는 후배로부터 전해 듣고 서류 제출과 면접에 응하기 위해 거창으로 차를 몰았다. (88고속도로가 4차선이 되기 전.) 마산에서 구마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대구 쪽으로 오다가 88로 접어드는 옥포 분기점을 놓쳐 대구 시내까지 갔다가 U턴, 가까스로 88을 탔다. “젠장, 구곡양장도 정도껏이지, 이런 미로가!”, 산을 돌아 또 산, 산을 넘어 또 산, 가도 가도 꼬부랑길 오르막길...... 운전 중, 어릴 적 어른들 하시던 말씀 한 토막이 생각났다. 사방이 꽉 막혀 길도 끊기고 사람 살 곳이 못되는 오지 중의 오지, 귀향 살이 하는 사람들이나 유배되는 곳을 “애맹(함양)산청”이라 하셨다. “이런, 거창은 애맹산청 보다 더한 오지로구나, 과연 이 길 끝에 사람이 살기나 할까?”
(5) 후산(後山), 혹은 진산(鎭山)이라고도 부른다. 주산(主山)은 문자 그대로 주인 산이다. 주산을 중심으로 하여 좌청룡, 우백호 및 주작을 경계로 하는 하나의 국(局)이 형성된다. 작게는 무덤에서 크게는 도읍지까지 모두 주산을 갖게 된다. 주산이 의미를 갖는 것은 입지 선정 및 좌향 정하기에서 중심축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그 입지의 성격이나 역량을 규정하기 때문이다.(출처: 위키실록사전)
(6) 주산(主山)·청룡(靑龍)·백호(白虎)와 함께 풍수학상의 네 가지 요소 중 하나이다. 여러 산이 겹쳐 있으며, 내안산(內安山)과 외안산(外安山)으로 구별된다. 안산과 떨어져 있는 또 하나의 산을 조산(朝山)이라 하는데, 이들 산이 남주작(南朱雀)에 해당된다. 안산은 혈 위에 있는 주산(主山: 北玄武)에 대하여 책상 혹은 안석[几案]과 같은 구실을 맡고 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7) 나는 2004년, 아버지를 모시고 처자식과 함께 거창읍에서 이 동네로 이주하였다.
(8) 「감토산 어원 추적」(다음 카페 ‘차연’에 올린 글) 참조.
https://cafe.daum.net/cafe.differance/Jtbc/950?svc=cafeapi
(9) ‘서출동류’에 관한 블로그. ‘박순택의 daily post'
https://m.blog.naver.com/pstag/220826035715
(10) 마을 앞, 서에서 동으로 황강을 따라 합천호 쪽으로 펼쳐진 야산이다. 고도가 낮아 이름을 갖추지 못한 산. 그러나 내가 하루 종일, 삼백 육십오일 바라다보는 산줄기라 내가 ‘흐르메’라 이름하였다.
(11) 수년 전, 마을 주민 차성민 씨가 대구 계명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풍수지리를 강의하는 한 교수가 우리 마을에 들렀을 때 만나서 나눈 대화를 전해 들었다. 그 교수가 동네의 풍치를 한참 둘러보고 하신 말씀, “참, 기가 막히는 명당자리에 사시는군요. 자손만대, 하늘의 발복을 많이도 받겠습니다.”
(12) 임방(壬方): 우리 고유의 방향 표기법.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 10간(干)으로 방향을 표기함.
(13) [출처] 박종섭 엮음 《거창군의 마을 신앙》(거창문화원: 뜨란, 2003), pp. 321~327.
(14) 마을 토박이 정순하 씨의 제보.
(15) 어원 추적. '새추당' = 새추(겨울철 소먹이용으로 말린 풀) + 당(집 당堂). 소 사료용 풀이 많이 나고 공짜기 위에는 당집이 있었다 한다.
(16) 한자 '이름 명(名)'자를 들여다 보면 '저녁 석(夕), 입 구(口)'로 이루어져 있다. 말 그대로, 저물녁 (어머니의) 입에서 나오는 (자식을 부르는) 말이란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