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숨을 쉬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빗나간 입술
비어있는 공간을 굳이 채워 넣을 필요는 없다
거리의 밀도가 나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뒤돌아서는 그때의 너를 오후의 크기에 더했다
너와 처음 여행을 다녀오던 날에도 나는 쓰레기였다
그저 네 고양이의 단면이 얼마나 흘러내리는 모양인지 알려주고 싶은 것
떠나간 자리에서 남아 있는 날개의 흔적에 글자를 그렸다
니야옹, 니야옹
우리가 아직도 한 우주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이곳에서는 볼 수 있는 별의 최소 유통기한은 4년
너는 달의 공전 주기를 뒤적이고 나는 지구의 나이를 달력에 표시했다
4월의 꽃잎들을 잘게 찢어 한입에 털어 넣었다
구부러진 햇살 ㄷ 자로 웅크린 거실의 오후 4시
공중을 떠다니던 먼지들도 소파의 안으로 점점 파고들 것이다
이곳은 내가 없어져야 모든 것이 완벽하다
매일 거울 앞에서 이빨을 하나씩 뽑아 선반에 얹었다
면도를 할 때마다 창가의 꽃병들은 어째서 죽어가야만 하는지 궁금했다
의사가 먼지보다 많은 이곳인데!
아직 마르지 않은 세면대의 상처에 물기로 뒤덮인 심장을 가만히 맞춰본다
핏줄을 타는 붉은 것 너무 뜨거워 나의 마음도 언제나 4도 화상
너는 숨 쉬는 대신에 휘파람 부는 법을 마지막 가르쳐 주었고
내가 노래를 완성했을 때 너의 모든 것은 나의 세상이 되었다
머리 위로 기차가 지나갈 때, 한껏 벌린 가랑이 사이를 기어나갈 때
여름의 한복판을 거니는 고양이의 소리로 실컷 울었던 것도 같다
막다른 골목의 담벼락에 천천히, '굿바이, 로맨스' 라고 긁는다
로그아웃 로그아웃
주의사항!
내 몸을 마신 벽의 혈관은 너무 축축해서 발이 빠지기 쉽다
우선 이 방 안에서 가장 어두운 한쪽 벽을 무너뜨렸다
알 수 없는 사실은 그 너머에 사는 도트 벽지까지 절대 숨이 닿을 수 없다는 것,
흘러내리는 잠도 고개를 끄덕이고,
딱딱한 시선이 살갗에 닿았을 때 뒤쪽 벽에 부딪히면서 귀를 때리는 뇌파,
뒤집어진 손톱이 덜덜 떨린다
커피로 알약을 마신다
생쥐, 기생충, 벌레, 개새끼
바닥을 기어 다니며 타자를 친다
ㅅ ㅏ ㄹ ㄹ ㅕ ㅈ ㅜ ㅓ.
오른쪽 스피커 안에서 온종일 소리만 지르는 외국인 아가씨
'백색소음'이라는 말을 라디오에서 들어본 적 있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나는 왼손이 필요하고 너는 12월 달력만을 넘기길 바랐으니까.
테이블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기 위한 도구일 뿐,
어쩐지 이 장면을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상관없지.
말 못할 생각들을 곱게 접어서 입속에 구겨 넣었다
벽은 손목을 긋는다
분수가 쏟아지면서 연주를 멈추는 바람과 어색한 숲.
카페의 천장에서는 이상한 수채화가 무반주로 춤을 추고
외팔이 화가도 남은 한쪽 팔을 마저 테이블에 못질한다
최백규:
1992년 대구 출생 . 현재 대구광역시 교육청 문예창작영재교육원 강사이며, 텃밭시인학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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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나날 외
정기석
오전과 오후와 저녁과 밤이 지나자
아침과 오전과 점심과 오후와 저녁과 밤과 새벽이 왔다
대체로 당신이었으나 때때로 나인 시간을 나누자
당신의 나날은 무리수가 되었으므로, 완전하지 못했다
당신의 시간은 대체로 일요일 오후였으므로
때떄로 나인 시간도 대체로 일요일 오후에 머물렀다
대체로 당신이었으나 때때로 나인 시간에서
달력은 대체로 빨간 색이었으므로, 우리는 불온했다
달력의 빨간 날들에 당신은 오후에 일어나
마른기침을 하였으므로 시간의 순서는 대체로 뒤섞였다
뜯기듯 나누어진 서사의 셈에는 피가 고였으므로
때때로 나인 시간 속 당신의 부재는 불투명했다
당신을 잃지 않기 위해 오후를 기억해야 했으므로
햇빛이 수평으로 눕는 오후마다 커피를 마셨고
남은 커피가루를 창틀에 놓아 말렸다
커피는 때때로 말라 갔으나, 대체로 눅눅했다
대체로 내 오후는 당신의 오후를 따라잡지 못했으므로
오후 뒤에는 노을이 뒤따르기 일쑤였다
어떤 밤에는 별이 없었으므로 서러웠고
어떤 새벽에는 수평의 해가 하도 길어 외로웠다
새벽 다음에 새벽이 오고 또 다시 새벽이 올 떄에는
기다림의 장력(張力)에 벽에 걸린 기타의 줄이 끊어지곤 했다
그럴 때에는 창문을 떼어다가 절반으로 접고 한 번 더 접었다
때로 더 접어질 수 없을 때까지 접었으나, 사라지지는 않았다
당신으로 산 시간의 겹이 정갈하게 나눠지지 못했으므로
커피 속에서는 버짐처럼 하얀 아몬드 꽃이 피곤했고
당신의 오정(午正)과 자정(子正) 사이 어딘가에서는
때때로의 내가 당신의 네 시를 관통한다고 착각하곤 했다
은하의 배열
송곳 묵직하게 뭉뚱거려가며
금속 같이 새긴 뼈의 기억들
눈 깊은 곳에 입은 상처같이
망막에 박아둔 별의 화인(火印)들
손이 병렬구조로 굽게 된 이유가
펜을 잡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으므로
눈에 반짝이던 것이 별 뿐은 아니었으므로
소환했다 너라거나 , 혹은 너이거나
부식은 광년만큼 요원하므로
아직도 오고 있는 빛이 있으므로
차라리 은하의 배열을 바꿨다
길 잃겠지. 너라거나, 혹여 너이라도
당신이 모르는 행성 두 개쯤
주머니 속에 넣고 달그락거리며
값싼 허세를 입 꼬리에 걸고 기다렸다
끝내 마주치기 싫었던 마주침이 빨랐다
접합할 열쇠구멍을 위해 마모된 것은 사랑
이제 마지막으로 손을 직렬로 맞잡아도 괜찮아
찰칵, 열릴 때 변하는 건
우주뿐만이 아닐 테니까
당신의 생몰연대
당신의 생몰연대를 기록하며
여타한 부사는 버리도록 해요
실은, 아직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설령, 모든 것이 일어나는 중이라 해도
벚꽃과 아카시아 사이에 라일락이 펴요
혹은 4월과 5월 사이에 라일락은 펴요
당신은 초여름과 늦봄 사이에 태어났지요
어느 사이들에 더 틈이 많을까요
그 모든 틈들의 사이를 사랑했어요
어느 늘어진 전선도 붙들어 매지 못한 채
시간은 전신주처럼 지나가고 있네요
당신은 봄에 떠나기 시작한 것 같은데
지금은 여름이에요. 그 사이
몇 번의 여름이 지나갔는지는 헤어려보지 못했습니다
위도 36도 경도 129도 사이 30입방미터의 방
지구 위에서 유난히 당신 짙은 부분을 살짝 오려내
오후 햇살 속에서 이불 털듯 탈탈 털어 보아요
하지만 우리, 바람 많이 받는 사람들
잘 넘어지지만 날아오르지는 못해요
그럼 차라리 그 부분의 바닥을 뜯어
녹슨 골재를 세워 이젤을 만들고
창틀을 떼어내 캔버스로 올리고
노을 진 당신을 여백으로 그려요
비워내지 못하므로 온전히 채워요
그리곤 당신 그린 그림을 관처럼 포개
내 생의 일몰연대와 만나기까지, 혹은
이 방의 지평선과 접할 때까지 수평으로 뉘어요
그러면 우리가 만들어 낸 소금물들이
부풀어 오르는 해류와 만나는 때가 있을 거에요
누구도 섬이 아니기 위해선
누군가는 기필코 사이에 있어야 하고
섬의 사이에 있기 위해선 부력이 필요하니까
그때가 되면 당신 그린 그림은 해류를 타고
닿지 않던 섬과 닿지 않을 섬 사이를 지나
언젠가 당신이 두 번 연이어 발음했던 지중해의 일몰로 갈 거에요
당신은 늦봄과 초여름 사이에 태어났지요
혹은 당신은 초여름과 늦봄 사이에 태어났지요
그 사이, 몇 개의 계절이 지나갔는지는
미쳐 헤아려 보지 못했고
다만, 지나간 계절만큼 돌아오는 계절도 사랑했습니다
어쩌면, 라일락이 피는 4월과 5월의 그 사이에는
당신의 생몰연대에 대한 기록을 마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정기석
1982년 포항 출생. 동국대 광고홍보학과와 동국대 영어영문학과 석사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