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송(禮訟)의 배경
예송은 조선 후기 효종과 효종비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인조의 계비)의 복상기간(服喪期間)을 둘러싸고 일어난 서인과 남인 간의 두 차례에 걸친 논쟁을 말한다.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왕실의 전례문제(典禮問題)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성리학의 핵심 문제이면서 왕위계승의 원칙이자 사회구성의 근간을 이루는 종법(宗法 제사의 계승과 종족의 결합을 위한 친족제도의 기본이 되는 법)의 이해 차이에서 비롯된 서인과 남인 사이에 일어난 성리학 이념논쟁이었다.
그러면 이러한 예송에 대한 개략을 살펴보자.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삼전도 굴욕을 겪었던 인조는 자기 대신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던 소현세자가 돌아오자 그를 의심하고 끝내는 죽인다. 소현세자는 서구의 발달된 문물울 들여와 조선을 개혁하고자 했으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동생이었던 봉림대군이 인조의 뒤를 이어받으니, 그가 바로 효종이다.
1차 예송은 효종이 죽은 뒤 그의 계모인 자의대비(慈懿大妃)가 효종의 상(喪)에 어떤 복을 입을 것인가를 두고 일어난 논란이었다. 조선 사회의 지배이념인 성리학에 근거한 예론(禮論)에서는 자식이 부모에 앞서 죽었을 때, 그 부모는 그 자식이 적장자(嫡長子)인 경우는 3년상을, 그 이하 차자일 경우에는 1년상을 입도록 규정하였다. 인조는 첫째아들인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은 뒤 그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차자인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통을 계승하게 하였다. 따라서 효종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왕통은 인조-효종으로 이어졌지만 적장자가 왕위를 승계하는 관념에서는 벗어난 일이었다.
여기에 1차 예송의 예론적 배경이 있다. 즉, 왕가라는 특수층의 의례가 종법(宗法)에 우선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관점의 차이가 반영되어 있었다. 효종의 즉위와 같은 왕위계승에 나타나는 종통의 불일치가 문제로 등장한 것이다. 즉 이는 왕위계승이 종법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를 종법 체계 내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것으로, 왕가의 의례라 할지라도 원칙인 종법으로부터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관념의 표현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규정에 의거할 경우, 효종은 왕통상으로는 인조의 적통을 이었지만 종법상으로는 인조의 둘째 아들이므로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는 당연히 종법에 따라 1년상을 입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자의대비가 1년 상복을 입게 되면 효종이 인조의 왕위를 계승한 적장자가 아니라 차자라고 인정하는 일이 되었다.
송시열(宋時烈)을 중심으로 한 서인 계열에서 1년상을 주장한 데 반하여 남인 계열에서는 윤휴(尹鑴)·허목(許穆)·윤선도(尹善道) 등이 그러한 주장을 반박하고 나옴으로써 1차 예송이 본격화되었다. 남인측의 주장은 차자로 출생하였더라도 왕위에 오르면 장자가 될 수 있다는 허목의 차장자설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천리(天理)인 종법이 왕가의 의례에서는 변칙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남인측의 주장은, 왕이 된 자는 일반 선비와 같지 않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효종은 당연히 장자가 되는 것이며, 자의대비는 효종을 위하여 3년의 복을 입어야 할 것이었다. 서인과 남인의 왕실 전례에 대한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단순한 예론상의 논란이 아니라, 그들이 우주 만물의 원리로 인정한 종법의 적용에 대한 해석의 차이였으며, 이는 현실적으로는 권력구조와 연계된 견해 차이였으므로 민감한 반응으로 대립한 것이다.
1차 예송은 예론상으로는 종통 문제를 변별하는 것이 핵심을 이루었으나, 결국 경국대전에 장자와 차자의 구분 없이 1년복을 입게 한 규정에 의거하는 것으로 결말지어졌다. 결과적으로는 서인의 예론이 승리를 거두었으므로 서인 정권은 현종 연간에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종법 질서에 있어서 효종의 위상에 대한 논란은 결론을 보지 못하였으며, 이 문제는 결국 2차 예송의 빌미가 되었다.
2차 예송은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자의대비가 어떤 상복을 입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벌어졌다. 1차 예송에서는 국제기년복(國制朞年服)이 채택됨으로써 효종의 장자·차자 문제가 애매하게 처리되었으나, 인선왕후가 죽으면서 이 문제가 다시 표면으로 떠올랐다. 즉 효종을 장자로 인정한다면 인선왕후는 장자부(長子婦)이므로 대왕대비는 기년복(1년)을 입어야 하지만, 효종을 차자로 볼 경우는 대공복(大功服:9개월)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예조에서는 처음에 기년복으로 정하였다가, 다시 꼬리표를 붙여서 대공복으로 복제를 바꾸어 올렸다. 현종은 예조에서 대공복제를 채택한 것은 결국 효종을 차자로 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여 잘못 적용된 예제로 판정하였다. 2차 예송에서는 남인 중심의 주리론이 이겼다. 결국 자의대비가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논쟁에서 승리한 남인과 이에 동조한 세력이 권력을 잡았다.
예송은 17세기에 율곡학파로 대표되는 서인과 퇴계학파로 대표되는 남인이, 예치(禮治)가 행해지는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실현 방법을 둘러싸고 전개한 성리학 이념논쟁으로, 조선 후기 가장 이상적인 정치형태였던 붕당정치를 대표하는 정치적인 사건이었다.
이러한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그들 간의 철학적 입장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인들이 취했던 주기론의 입장에서는 왕도 엄연히 선비에 속한다. 반면 영남을 근거지로 한 남인들의 주리론은 왕의 지위는 일반 선비들과는 다르다. 주기론은 이(理)의 절대성을 인정하면서도 이가 기와 동떨어진 초월적 존재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주리론에서는 이의 절대성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이에는 기와 다른 무언가 초월적 성격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임금은 이(理)의 상징이다. 주기론자들은 임금 곧 이(理)를 기의 현실 속에서 이해하고자 했던 반면, 주리론자들은 임금 곧 이(理)를 기라는 현실과는 분리된 초월적인 존재로 이해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주기론자들은 임금 또한 선비와 같은 부류의 인물로 간주하고자 했던 반면, 주리론자들은 임금의 지위를 선비와는 다른 차원의 것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송의 본질이다.
첫댓글 저는 예송논쟁에 대한 이야기를 읽거나 듣는 중에 늘 '왕통이 적통이다'라는 쪽에 찬성표를 던지곤 했습니다. 저희 집안은 노론의 후예들입니다만, 남인 편에 손을 들고 싶습니다. 저희 어머니(星州 呂)가 시집(昌寧 曺)을 가니 시어머니가 치마를 반대편으로 돌려 입히시더랍니다. 어릴 때 들은 이야기지만 너무 교주고슬 (膠柱鼓瑟) 다운 행위라고 여겨 싫은 느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