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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 그러고 보니 성탄절입니다. 한 해 끝자락이라는 거지요. 아무튼 올해도 집콕 성탄절이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긴 이 나이에 성탄절을 집콕으로 하든 집밖으로 하든 큰 차이는 없습니다. 그래도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은 마음은 있는 거죠. 대부분 온라인 예배와 화면 속에서 부르는 캐럴이나 들으며 하루를 보낼 겁니다. 어차피 하늘에서는 내려다보는 예배일 텐데, 마음 띄워 보내면 그게 그거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이런 날을 예감하셨을까요? 전에 설교하면서 성도들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기념하는 신앙을 하시렵니까, 기대하는 신앙을 하시렵니까?
아무튼 다음 편지는 새해에 올립니다. 지지고 볶아도 가기는 갑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역시 팬데믹 속에 갇혀 있는듯하여 걱정입니다. 가기는 가는데 누가 이끌고 갈지 그것이 걱정된다는 말이지요.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선택해야 하는 불행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과연 국민이 주인이 되는 때가 다가오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 발전하는 나라 상황과 세계 속에 보이는 국가 위상에 견주어 그럴만한 위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국민 스스로가 만들어주자는 상상을 해봅니다. 다시금 역사상 유래가 없는 일을 만들어보자는 상상이지요. 역시 대 - 한민국 아닙니까?
3차 백신을 맞았는데 이번에는 전과 달리 조금 고생하였습니다. 일단 건강해야 희망이 있습니다. 건강하고 복된 성탄절과 건강하고 행복한 새해를 맞으시기 바랍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2021년 성탄절에
쉽게 읽는 요한계시록 21
김종우 목사
천년왕국과 하나님의 심판(계 20장)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 가운데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좀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여태 이야기해왔지만 약속(예언)은 묵시이고 비유입니다. 그러니 곧이곧대로 이해하려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소위 천국어를 알아야 풀립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 중에 천국에 대한 것과 장래사에 대한 것은 비유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천국이 겨자씨 한 알 같다는 말은 그냥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때를 말씀하신 것도 그렇게 들어야 합니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마 24장입니다. 소위 ‘종말 장’입니다. 여기에 전쟁, 기근 그리고 지진 등의 말씀이 나옵니다. 실제로 그런 사건들은 우리 인류 역사 속에 늘 있어왔던 일입니다. 종말에만 특별나게 일어나는 일들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것을 실제적 사건들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기근’이 실제 기근 보다는 하나님의 진리 말씀이 없는 기근이라 하였습니다.(암 8 : 11) 마지막 때가 되면 마귀가 교회를 장악하여 하나님 말씀이라 칭하지만 진리가 아닌 거짓말(사람의 계명)이 교회 강단에서 선포된다는 뜻입니다. 계시록에서는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만국이 무너졌다고 말씀하지요.
참으로 난해하여 수십 번을 읽어도 몰랐고 누구에게 물어도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던 말씀이 있습니다. 설교를 한다 한들 그 부분은 슬쩍 지나치고 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시고 나서의 일입니다. 마 27 : 50 - 53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예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러자 성소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여기까지는 설교도 많이 합니다.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무덤들이 열리고 자던 성도의 몸이 일어나고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성에 들어갔다, 그렇다면 ‘부활’ 아닌가요? 그런데 우리가 알기로는 당시 부활하신 분은 예수님 한 분뿐이었습니다. 이들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이 계시는 동안 죽은 자를 살려준 일이 몇 번 있습니다. 잘 아는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셨습니다. 요 11 :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그러고 나서의 일입니다. 43 - 44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그렇게 살아난 나사로가 얼마나 더 살았는지는 모르나 아무튼 지금은 이미 죽은 지 오래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12살 된 딸,(막 5장, 눅 8장) 나인성 과부의 아들,(눅 7 : 11 - 15) 이들이 지금도 살아있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죽었다가 살았으니 ‘부활’이지요. 그런데 다시 죽었습니다. 참으로 미안하지만 우리는 한번이라도 경험하고 싶지 않은 죽음을 이 사람들은 두 번이나 경험한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고 기다리는 부활은 이런 부활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다시 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왜 누구는 부활했다가 다시 죽고 누구는 부활해서 승천합니까? 무엇이 다르지요? 다른 것은 죄의 문제입니다. 저들은 부활했지만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러니 ‘죄의 삯은 사망’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몸으로 하늘에 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창 2 :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 때 아담은 ‘생령(살아있는 영)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뱀의 말을 먹었습니다. 아담이 죽었습니까? 그의 나이 930이 되도록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뱀의 말을 먹은 그 날 그는 이미 죽었습니다. 창 3 :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즉 (살아있던) 영이 (죽은) 흙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영이 죽은 사람은 결국 그 육신도 죽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이라 하면 육체가 다시 사는 것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이 다시 사는 것도 역시 부활입니다. 죽었던 영이 다시 산다면 그것도 부활이지요. 예수님 당시 하나님의 백성이라 칭하였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지만 진리가 아닌 거짓(사람의 계명)을 먹고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요 6 : 56 - 57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앞에서 배웠듯이 예수님의 살과 피는 곧 예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의 말씀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먹는 자는 그 영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여태 서기관 바리새인들의 거짓말로 살았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 곧 진리의 말씀을 듣고 믿으면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쉽게 믿어지는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신자들이 생겼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습니다. 제자들조차 그랬습니다. 그러나 차츰 믿어지게 되었지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장면에 감동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방인까지도 그랬으니까요. 마 27 :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우리가 잘 아는 전도 표어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란 말은 이럴 때 적용되는 것입니다. 요 1 :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으면 죽었던 영이 살아납니다. 생령이 되는 것이지요. 부활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사건 이후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점점 늘어갔습니다. 소위 영적인 부활이지요.
요한이 또 봅니다. 계 20 : 1 - 3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신앙생활 수 년 동안 처음 창세기 에덴동산에 심방 왔던 뱀을 뱀으로 알았습니다. 오랜 시간 후에 보였습니다. 뱀이, 뱀이 아니라 사단 마귀로구나 하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참 오래 걸렸습니다. 아무튼 마지막 때 전쟁에서 하나님 소속이 이기고 이 뱀이 붙잡힙니다. 그런데 천년 동안 잡혀 있다가 또 다시 놓인답니다. 참으로 끈질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것이지요. 왜 그러실까요? 분명 거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요한이 또 봅니다. 4 - 6절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 하는 천년, 소위 ‘천년왕국’을 이야기합니다. 여기 좀 생소한 용어들이 나옵니다. ‘첫째 부활’과 ‘둘째 사망’입니다.
첫째, 둘째 하고 말하니 도대체 몇 번째까지 나올까 하는 생각도 가집니다. 그러나 어쩌면 둘째로 끝나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우선 ‘부활’부터 보겠습니다. 히 11 :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바랐던 신앙의 목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지금 우리도 소망하는 바입니다. ‘더 좋은 부활’이지요. 그런데 그 부활은 앞에 나오는 부활과 비교가 됩니다. 즉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이 부활은 무엇이고 더 좋은 부활은 무엇입니까? 앞의 부활의 예는 왕상 17장에서 선지자 엘리야가 한 여인의 아들을 살려준 이야기와 왕하 4장에 기록된 선지자 엘리사가 수넴 여자의 아들을 살려준 이야기입니다. 이 부활은 죽은 육체가 살아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좋은 부활’은 그 이상의 것이어야 합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육체가 부활한다 해도 결국은 다시 죽습니다. 더 좋은 부활은 다시 죽어서는 안 되겠지요. 어떤 이들은 그 부활을 소망하며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답니다. 쉽게 말해서 순교했다는 말입니다. 육체는 죽었지만 그 영은 분명 살았습니다. 그들은 4절에서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입니다. 신앙을 위해서 기꺼이 육체를 버린 성도들입니다. 때가 되면 그들의 영이 육체를 입게 되는 것이지요. 언제요? 마지막 때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6 :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그러니 더 좋은 부활은 마지막 때 곧 주님 재림 때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어떤 육체를 입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런 육체는 안 됩니다. 죄로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부활해봤자 다시 죽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비밀을 보았습니다. 그가 명백하게 선언한 것이 있습니다. 고전 15 :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니 이미 썩은 것은 하나님 나라와 상관없습니다. 육은 육이고 흙은 흙일 뿐입니다. 우리가 부활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있습니다. 겔 37 : 5 - 6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 말씀으로 상상합니다. 부활 때에는 죽은 내 뼈에 살과 힘줄 등등 다시 찾아서 붙고 가죽이 덮이겠구나. 다시 말씀드립니다. ‘에스겔’은 예언서 곧 묵시입니다. 선지자는 환상을 본 것이고 비유로 기록되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실제로 보면 엉뚱한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전에는 화장을 기피했습니다. 뼈가 남아 있어야 하니까요. 그러나 환상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는 성도가 두 부류입니다. 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 첫째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입니다. 둘째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입니다. 이들이 첫째 부활에 참여합니다. 이들은 살아있는 영에 새로운 육체를 입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입은 육체이겠지요. 우리와는 다른 육체 달리 표현한다면 ‘신령체’입니다. 그 외 죽은 자들은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했으니 기다려야 합니다.
죄로 더럽혀진 우리 육체는 반드시 죽습니다. 이것을 첫째 사망이라 할 것입니다. 아담이 생령에서 다시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영이 죽은 것입니다. 이것이 둘째 사망이고 결과는 잘 아는 대로 ‘지옥’입니다. 사실 영은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이 없는 영을 가리켜 죽었다고 표현합니다. 마지막 때 그의 결과는 지옥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둘째 사망’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둘째 사망이 건드릴 수 없습니다. 영이 살아있으니 당연하지요.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왕국에서 왕노릇합니다. 세상 나라를 다스린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성경은 세상 이야기, 땅의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미 말했습니다. 하나님 나라 이야기입니다. 바로 앞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6절 다시 봅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세상의 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사장’입니다. 하나님 말씀 진리를 선포하는 목자라는 뜻입니다.
문제는 그 천년이 지나고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7 - 10절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마귀의 미혹 사건이 또 한 번 있게 되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하나님 나라가 아직은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제사장들이 왕으로 다스리는 시절이기는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가 시작이 되어 확장되어 갈 것입니다. 마치 초림 때 예수님이 다녀가시고 제자들에 의하여 하늘 복음이 전파되었듯이 이제 신약의 약속이 이루어졌음을 새로운 제사장들이 전파할 것입니다. 초림 복음은 지금껏 2천년을 전해져 왔습니다. 재림 때 신약의 성취된 말씀은 천년 동안 전파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으로 시작하여 새로운 영적인 이스라엘 12지파가 창조되어 2천년을 흘러왔습니다. 마지막 때 또 새로운 이스라엘이 창조되어 천년을 전파하며 확장되어 나가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앞에 12지파 인 치는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계 7장)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12지파를 만들고 그 후 흰무리를 창조합니다.(계 7 : 9) 그렇게 세상은 점점 하나님 나라로 변화되어 갈 것입니다. 초림 복음이 세계를 돌았듯이 말이지요.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면서 곳곳마다 그리스도인들, 곧 하나님 백성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이름만 하나님 백성이고 신자이지, 도무지 분간하기 어려워집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마 7 :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러니 다시금 걸러내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마귀가 하나님의 쓰임을 받게 됩니다. 계 20 : 7 - 8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그래서 또 한 번 놓아주는 것이지요. 걸러내는 작업이 마치면 당연히 그가 갈 곳은 지옥입니다. 지옥을 가리켜 ‘불과 유황 못’이라 표현합니다. 계 20 : 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지옥에 누가 갑니까? 마귀는 마땅히 갈 것이고 마귀 짓거리를 한 자들도 갑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버리고 그에게 빌붙어 배불리던 자들도 갑니다.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지옥행입니다. 소위 하나님 말씀을 빙자하여 거짓말 곧 사람의 계명을 전해주고 가르치던 목자들입니다. 그들은 소경이 되어 소경된 백성들을 인도하였습니다. 함께 구덩이에 들어갑니다. 우리는 그런 가르치는 자들이 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멋모르고 따라가는 신자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니 스스로 알아서 배우고 깨닫고 알고 신앙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심판을 봅니다. 11 - 15절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불못을 가리켜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앞에서 불못은 지옥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니 영이 죽은 자들이 갈 곳은 지옥이란 말이지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들어봅니다. 마 19 : 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분명 마지막 때의 일입니다. 그 때 심판권을 가지고 심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선 제자들입니다. 계 2 : 26 - 27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마지막 때는 교회 안의 사단의 무리와 싸워 이기는 자에게 철장 권세를 주어 심판하고 다스리게 합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하늘의 영이 이 땅에서 직접 활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육체 안에 들어와 함께 하여 역사하는 것이지요. 하늘의 영들이 이 땅에 있는 이기는 자에게 올 것입니다. 또한 그를 따르는 자들 곧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고 짐승의 표를 받지도 않은 자들입니다.(4절)
그들이 함께 하여 심판하고 다스립니다. 기준이 무엇입니까? 당연히 하나님 말씀입니다. 말씀이 기준이고 말씀대로 심판합니다. 보좌 앞에 책들이 펴있으니 당연히 하나님 말씀 성경 66권이고 또 하나 생명책이 있습니다. 말씀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진작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6 : 27 “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갚으리라” 육체가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모두 예외 없이 말씀에 따라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니 마귀가 다시 한 번 나와서 미혹하였을 때 넘어진 자들도 이 때 끝장이 날 것입니다. 마귀 사단을 비롯하여 그에 붙은 자들과 하나님을 배역하고 마귀 짓거리 한 자들(목자와 신자 모두) 모두 정리가 되어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임해 옵니다. 이 심판으로 이 땅에는 마귀에게 소속한 자들은 모두 사라지고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 백성만이 거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계 20 :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우리가 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는지 어찌 알 수 있을까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눅 10 :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장래 일일진대 이 ‘하늘’이 행여 이 땅의 하나님 처소(교회)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봅니다.
<리슨>
근래 우리나라에서도 아동학대로 인하여 사회가 들썩이며 아파하고 분노하고 슬퍼하였습니다. 아이를 돌보는 기관에서의 학대도 문제이지만 부모에게서 받는 학대로 인하여 죽음까지 이르게 된 현실에 할 말을 잃고 비탄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짐승도 자기 새끼에게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요. 목숨을 걸고 새끼를 지킵니다. 말 그대로 짐승만도 못한 셈입니다. 그런데 생각 외로 그렇게 잔인한 지경은 아니더라도 부모에게서 학대를 당하는 아이들이 꽤 된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연히 아동 보호를 위한 조치가 날로 강화되어 왔습니다. 우리도 조만간 서구사회 수준까지 이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서구사회 수준은 어떠할까요?
아이에게 가장 바람직한 것은 부모의 보살핌 아래 자라는 것입니다. 생활 형편은 고사하고 일단 아이는 부모의 손안에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러니 가능하면 부모의 손에 맡기는 것이 우선순위라고 봅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면 그 전후 사정을 확실하게 알아보는 작업도 필요합니다. 무작정 부모에게서 아이를 분리시키는 일은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한두 가지 나타난 정황만으로 일방적 조처를 행하는 것은 자칫 섣부른 판단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와 아이의 분리는 자연법칙을 깨뜨리고 인륜을 어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 모두에게 일생일대의 상처를 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잘 살아보자고 이민을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언어가 소통에 지장이 없을 만큼 되었으니 시간도 얼마간 지났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러나 일자리부터 안정되지 못합니다. ‘조타’는 임금도 제대로 못 받고 실직 중입니다. ‘벨라’가 가사도우미를 하면서 간신히 가정을 지키고 있지만 다섯 식구 살아가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아들은 겨우 십대에 들어섰으니 한창 공부해야 할 때입니다. 여섯 살 ‘루’는 청각장애인입니다. 사회복지과에서 마련해준 보청기를 사용하고 있지만 고장이 났습니다. 어쩔 수 없이 수화로 소통합니다. 이제 몇 개월 된 ‘제시’는 누군가 옆에 지켜줘야 합니다. 정기적으로 사회복지과에서 확인방문하고 있습니다.
사용하다 고장이 나면 그것도 복지과에서 도움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일까요? 오히려 트집 잡힐까 두려워 고장 난 사실을 숨기려 합니다. 어린이집에서 제대로 듣지 못하는 루가 설명을 하지 못하자 선생님은 아이를 살펴보다 멍 자국을 발견합니다. 복지과에 신고가 되고 복지과에서 집으로 들이닥칩니다. 변명을 들을 필요도 없이 부모와 아이들이 강제 분리됩니다. 아이들은 모두 복지과 직원들이 데려가 빠른 시간 내 입양 수속을 밟습니다. 변호사를 부를 만한 경제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행히 전 복지과 직원이었던 사람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입양절차가 성공하면 복지과에 그만한 혜택이 주어진답니다. 어찌 보면 그들만의 사업이기도 하다 싶습니다. 그러니 그들도 자기네 실적 쌓기에 힘쓰겠지요.
얼마 후 면회가 허락됩니다. 면회 자리에는 복지과 직원이 배석합니다. 모두 반드시 자기네 언어, 영어만을 사용해야 합니다. 감시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루와는 수화밖에 되지 않는데 허락되지 않습니다. 자기가 알아들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면회는 강제 중단됩니다. 수화 통역사를 준비하든지, 복지과에서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자기 방침만 있을 뿐, 정작 도움을 필요로 하는 대상자의 편의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과연 ‘사회복지과’란 무엇을 하는 곳인가 묻고 싶어집니다. ‘복지’라고요? 누구의 복지를 위한 기관인가요? 내 자식인데 왜 너희들이 나서서 야단이냐고 아우성 쳐봐도 소용없습니다. 법이니까요.
비교적 똘똘한 아들 ‘디에고’가 제일 먼저 입양되어 갑니다. 그리고 어린 제시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루는 장애를 가지고 있으니 입양하려는 사람에게도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남아 있습니다. 이민자의 약점 때문인지 재판도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행히 도움을 받아 벨라가 판사 앞에서 하소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습니다. 그리고 루에게는 학대가 아니라 몰랐던 병이 있음을 알게 된 사실을 말합니다. 내 자식과 대화를 하려는데 소통할 수 있는 언어는 수화밖에 없는데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항변합니다. 어쩌면 복지과에서도 루는 처리 곤란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순순히 내주었겠지요.
참으로 답답하고 아픈 이야기입니다. 어린 제시는 아마도 새 부모에게 빨리 적응하리라 생각합니다. 아니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무슨 복지가 이런 복지가 있는가 싶습니다. 물론 앞에서 말했듯이 이민자의 약점이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리고 복지과의 사업(?)이 연루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늘 느끼는 일이지만 조직이 움직이는 것과 개인의 생활이 엇박자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지요. 개인은 감정과 정서로 움직이지만 조직은 규정으로만 움직입니다. 가능하면 조직과 대칭이 되는 일은 생기지 않기를 바라며 살아야 합니다. 영화 ‘리슨’(Listen)을 보고 생각해보았습니다.
<가타카>
사람은 누구나 현재보다 나아지는 자기를 그리곤 합니다. 또한 그렇게 되기 위하여 나름 노력을 합니다. 소위 자기개발이라고 하여 시간과 노력을 투자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스펙 쌓기라고 할 것입니다. 노력하는 만큼 성과를 보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꼭 바라는 대로 되는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그 목적이 단순히 자기개발인 경우도 있지만 어쩌면 그것으로 인하여 생기는 생활의 개선을 기대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이렇든 저렇든 대부분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하며 살고 있고 그것을 위해 각자 애쓰며 살고 있습니다. 목적과 목표를 설정하면 그것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 따라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공상일 뿐입니다.
그러한 개인적인 노력도 있지만 사회적 노력도 생길 수 있습니다. 한 때는 우생학적 우등인간을 선별하려는 작업을 한 집단도 있었습니다. 그 결과 인류사회에 엄청난 악행을 저지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창조주의 작업을 인간이 자기 임의로 조작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학이 발달하다 보니 유전자 조작까지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하여 보다 우수한 인간을 조작해 만들어 내려는 것입니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이런 일이 가능한 단계까지 온 줄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윤리 도덕적으로, 무엇보다 종교적으로 문제가 되리라는 것은 불 보듯 환한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신을 대적하는 일은 역사 속에 종종 일어났습니다.
한 부모에게서 두 아들이 태어납니다. 형 ‘빈센트’는 자연 출산으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나자 유전자 검사를 통하여 그 아이의 미래가 예견됩니다. 어떠어떠한 질병이 있을 수 있고 어떤 특징과 약점이 있게 될 것이며 기대수명이 어디까지 이를 것이다, 까지 판명이 됩니다. 약점을 가진 열등인간이란 말입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허드렛일이나 하며 살아야 할 운명을 짊어집니다. 그러니 우주여행에는 절대 부적격자입니다. 여행을 위한 그 어떠한 훈련에도 참가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결론은 겨우 30세에서 생명이 끝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반면 동생 ‘안톤’은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우등인간입니다. 그 당시 사회에 적격자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자랄 때는 한 부모 아래서 같이 성장하였습니다. 늘 바다 수영시합을 하면 동생에게 지기만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엔 지쳐 물에 빠지려는 동생을 구해줍니다. 내가 약한 것만은 아니라는 확신을 가집니다. 성인이 되고 나서 형제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빈센트는 ‘가타카’라는 우주항공회사 청소부로 일합니다. 매일 창밖으로 날아가는 우주선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간직해온 꿈을 그립니다. 나도 반드시 저 무한한 공간으로 나가보리라.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부적격자입니다. 방법을 찾습니다. 그리고 유전자 중개업자에게서 방법을 듣습니다. 우성 유전자를 가진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마침 사고로 인하여 불구가 된 ‘제롬 모로’를 소개받습니다. 그의 유전자를 제공 받기로 거래합니다. 이를 위해 그의 모습으로 고쳐야 합니다. 소위 뼈를 깎는 아픔을 견디며 제롬 모로가 되어 가타카에 들어옵니다. 매일 유전자 검사를 함에도 그 과정을 용케 통과하며 우주비행 훈련 검사까지 모두 우수하게 합격합니다. 그 사이 함께 일하는 직원 ‘아이린’과 사랑에 빠집니다. 아이린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던 사람입니다. 사랑은 하면서도 어딘가 수상한 면이 있음을 눈치 챕니다. 그래도 사랑하는 마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우주로 나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곧 자기 차례가 오는 것입니다. 조심조심 매일의 검사를 통과하며 지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내에 살인사건이 발생합니다. 우주비행 감독관이 살해되었습니다. 수사관들이 들락날락거리고 외부 사람이 아닌 내부에서 비롯된 사건임을 알게 됩니다. 직원들 모두에 대한 조사가 진행됩니다. 그럼에도 빈센트는 제롬과 긴밀하게 연락하며 아슬아슬 잘도 넘어갑니다. 그러나 끝까지 넘어가기에는 한계가 있지요. 범인은 의심받던 빈센트가 아님이 확인됩니다. 그래도 사랑을 택한 빈센트는 아이린에게 사실을 고백하고 자수하려고 가타카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수사를 하던 수사관이 동생 안톤임을 알게 됩니다. 사기죄로 붙잡으려는 안톤에게 다시 수영경기로 확인하자고 제의합니다. 과연 누가 우생이고 누가 열등인간인가?
제롬은 유전자 검사용으로 빈센트가 충분히 사용할 만한 신체조직 샘플과 편지를 남깁니다. 빈센트에게 감사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나는 너에게 몸만 빌려주었지만 너는 나에게 꿈을 빌려주었지.’ 그렇게 한 사람은 우주로, 한 사람은 영원의 세계로 떠납니다. 생각해봅니다. 사람은 인위적으로 보다 나은 사람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유전자 조작으로 우생인간이 만들어지면 그가 과연 우수한 인간이 되며 바람직한 인생을 만들 수 있다는 보장이 될까요? 사실 어떻게 태어났는가보다는 어떻게 배우고 자라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요? 사람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가타카’(Gattaca)를 보았습니다. 1998년 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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