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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카하시신지님의실천!팔정도! 원문보기 글쓴이: 오로지팔정도
7. 카사파 형제의 귀의
우루베라 카사파에게는 아우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난디야 카사파였으며, 또 한 사람은 쿠난다 카사파였다.
가야 다나의 계류의 하류에 있었던 난디야 카사파는,
형 우루베라 카사파가 소중히 사용하고 있던 제단이랑 제사의 소도구가
떴다 잠겼다 하며 떠내려 오는 것을 발견하고,
형에게 변고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매우 놀랬다.
그래서 그는 막내인 쿠난다 카사파의 수행장을 찾아가,
그를 데리고, 가야 다나의 산정으로 달려 올라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형의 모습도, 많은 제자들의 모습도, 제단도 없었다.
산정에 도착한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대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궁리에 빠졌다.
" 그토록 훌륭하고 당당한 형이다.
어쩌면 산적과 함께 죽음을 당한 것은 아닌가."
난디야 카사파는 불안에 시달렸다.
두 사람은 그들의 제자들에게도 지시하여,
정상 일대를 빈틈없이 수색해 보았다.
만약, 산적들에게 습격당했다고 하면,
피의 흔적이 있을 것이며, 형의 숙소도 혼란해 있을 터이다.
그런데 어디나 모두 깨끗하고 정리가 되어 있어,
무엇이 어떻게 된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급히 산을 내려와, 마을 사람들에게 형의 소식을 물었던 바.
젊은 사로몬과 라자그리햐로 간다는 말만 남기고,
산을 내려갔다고 하는 것이다.
" 형이 너에게 라자그리햐로 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느냐?"
" 혹시, 제사가 끝났기 때문에,
빈비사라 왕의 초대를 받은 것은 아닐까?
그런데 잠깐, 만약 라자그리햐로 간다고 하면,
언제나 우리들과 함께였다.
이번에는 무언가 급한 용무라도 있었던 것인가...."
쿠난다도 역시 난디야와 마찬가지로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두 사람에게 알 수 없는 것은,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제사 도구이다.
어째서 냇물에다 버렸을까?
난디야의 걱정은 보통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몇 명의 제자와 함께, 말을 달렸다.
불안을 없애 주는 것은, 라자그리햐로 가서,
형의 모습을, 이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라자그리햐에 도착하자,
형의 모습을 찾아헤매었다.
마을 사람에게도 물어보고, 수행자에게도 물어보았다.
그러나 형 같은 사람을 본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두 사람은 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산림으로 둘어가 형을 찾아 걸었다.
그러자 어찌 된 일인가?
형은, 완전히 삭발하고, 노란 승복을 몸에 걸치고,
제자들과 함께 명상에 잠겨 있지 않은가?
두 사람은 아연했다.
" 그렇게도 위대한 형이, 어째서 이런 곳에서 명상에 잠겨 있는 건가.
이것이 우루베라 카사파인가....."
난디야는 쿠난다의 얼굴을 보고, 선 채 꼼짝을 못하고 말았다.
두 사람은 제자들을 그 자리에 남겨두고, 맏형 옆으로 다가갔다.
" 형님, 형님, 저희들입니다.... "
쿠난다가 형인 카사파의 손을 잡았다.
카사파는 잠시 놀라는 듯했으나,
두 사람의 얼굴을 보더니,
마치 몇 년이나 두 사람을 만나지 않았던 것처럼
정겨움을 담아 말하는 것이었다.
" 오, 쿠난다냐, 난디야도 왔구나. 잘 왔다.
자, 거기에 앉아...."
" 형님은 개종을 했습니까. 우리와 상의도 없이.
게다가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시던 제사의 도구를 강에 버리기까지 하고,
어떻게 된 겁니까?
이유를 설명해 주세요."
쿠난다의 의문에, 카사파는, 하나하나 고개를 끄덕이면서,
여기까지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 너희들에게 사전 양해도 없이, 산정을 떠난 것은 내 잘못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이미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자신이 깨닫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터무니없는 잘못을 범하고 있었다.
내 마음속에 있는 자만심, 욕망, 분노, 비방의 마음이,
아그니 신을 숭앙하며 빈다고 해서,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니었다.
평온의 마음을 찾으면서,
내 마음은, 교만함과 허위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똑똑하게 알았다.
그것도 전 요자나에 단 한 분밖에 없는 위대한 붓다를 뵙고 ,
나는, 지금의 자신의 마음을 직시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가야다나의 제사 때,
그 붓다님이 오셨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 행동하여 왔던 것을,
하나하나 지적하시어, 잘못을 가르쳐 주셨다.
이 나이가 되어서, 나는 진짜 붓다님과 상봉했다.
지금의 나는 행복하다.
나는 붓다에게 한낱 사로몬으로서 제자로 들어오도록 허락받아,
이렇게 반성의 명상을 하고 있었던 중이다."
두 사람은 형이 하는 말에 다시 한번 놀랐다.
그토록 당당했던 형이 이렇게 까지 순진하게 변했단 말인가.
어제까지의 형과 지금의 형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지금의 형의 고요한 심경은, 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떠나지 않았다.
" 형님, 붓다의 가르침이란, 어떤 것입니까?"
난디야는, 지금까지의 의구심은 이미 어딘가에 두고 잊어버리고,
형을 이렇게까지 개종시킨 위대한 붓다가 뇌리에 떠올라
자기를 잊고, 그 도(道)를 알려고 했다.
우루베라 카사파는 조용히 눈을 감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 시작했다.
" 우리는, 부모의 인연에 의해 태어나서,
인연으로 해서 형제가 된 것이다.
인연이 있어야만, 결과가 생기는 법이다.
고락(苦樂)도 인(因)과 과(果)에 의해 나타난다.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을 생각하여, 괴로워한다.
하지 않아도 될 것을 해서, 괴로움을 만들어내고 있다.
모든 것은 연생(緣生)이라고 말하겠다.
먼저 우리는 나쁜 인(因)을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고락(苦樂)은, 육체와 마음으로,
자기가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그니 신을 제사 지내고, 불을 배례하며,
병마(病魔)나 아수라, 킨나라, 마고라로부터 지켜주신다 해도,
자기의 마음과 행동이, 중도를 벗어난 생활을 보내고 있으면,
같은 고통을 만들어내서,
도리어 집착의 마음을 싹트게 하고 마는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와서, 악마를 쫓아주는 것이 가능한 것은,
올바른 치우침이 없는 생활 이외는 없다' 고 하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붓다의 가르침은, 정도를 마음의 척도로 하여,
하루하루를 올바르게 생활하는 것 이외는 없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형의 말을 수긍했다.
그리고 그들도, 그 말대로다' 하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쿠난다 카사파는 형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나,
이미 마음속에서는 자기도 아그니신을 버리고,
붓다가 설법하는 붓다 스트라로 귀의하려고 작정했다.
형을 발견할 때까지는, 붓다도, 형의 일도 전혀 몰랐었다.
오히려 위대한 형을 받들어 배화교를 전파시켜,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형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에,
지금까지의 굳은 그 결심이 흔적도 없아 사라지고,
붓다의 모습이 자기 마음속에 크게 퍼져가는 것을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 형님, 우리에게도 붓다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은, 이미 형님의 말씀으로 알겠습니다마는,
한번, 이 눈으로 그 모습을 뵙고 싶습니다.
형님을 그렇게도 단번에 바꾸어버린 위대한 붓다를 만나 뵙게 되면,
내 마음도, 필시, 형님과 마찬가지로 귀의하겠지요."
쿠난다는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말했다.
" 잘 말해 주었다. 역시 내 동생이다.
붓다께 말씀드려, 너희들을 소개하겠다.
붓다도 틀림없이 너희들을 만나 주시리라."
형인 우루베라 카사파는 비로소 미소를 띠며, 두 아우를 붓다에게로 안내했다.
붓다는 많은 사로몬들 앞에서 방금 법화(法話)를 마치고, 잠시 쉬고 있는 중이었다.
세 사람이 붓다 앞에 나아가자,
붓다는 이미 그들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어,
그들이 나누고 있던 다음 말을 계속하는 듯이 이야기를 꺼냈다.
" 형인 우루베라 카사파가 신리에 대해 말한 바와 같이,
정도를 마음의 척도로 하여,
하루하루를 올바르게 생활하는 것 이외에,
마음의 평안을 얻을 길은 없다.
타오르는 불을 아무리 숭앙해도, 마음의 안주는 기대하기 어렵다.
신리는 단 하나,
정도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대들 두 사람은, 형과 같이 마음이 결정되어 있으나,
제자들의 일도 생각하여, 잘 상의해보고 나서 결정할 것을 바란다."
붓다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법화(法話)의 도중이므로 가볍게 인사하고, 자리를 일어났다.
" 형님, 틀림없는 붓다입니다.
형님이 하신 말까지도 죄다 알고 계십니다.
내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던 결심마저 말씀하시는,
정말이지, 나 자신의 마음의 자세를 올바르게 하지 않으면,
깨달음에의 길은 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형님 고맙습니다."
두 아우는 형의 손을 잡고 고마워했다.
" 잘 됐다. 잘 됐다. 우리 함께 지금까지의 일은 깨끗이 버리고,
첫걸음부터 다시 내딛도록 하자.
그리고 붓다 스트라를 우리의 마음과 몸으로 터득하여 가자.
닷새 후에 내 제자들이 이곳으로 오게 되어 있다.
자신의 마음에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착한 마음으로,
전원이 지금까지의 인생에 있어서, 범한 죄를 참회하고 나서,
붓다를 뵙게 되어 있다.
너희들도 지금부터 돌아가, 모두 모여 상의하여,
붓다 스트라로 귀의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하도록 하여라."
이렇게 하여, 두 아우는 데리고 온 제자들과 함께 일단 가야다나의 마을로 돌아가,
양쪽 제자들을 한 곳에 모으고
우루베라 카사파에 대한 지금까지의 경위를 설명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 우리 형제를 따라오고 싶은 자는 오도록.... "
하며 결정 여부를 물었다.
그의 형이 겪은 것과 마찬가지로, 제자들 사이에, 역시 동요가 일어났다.
" 아그니 신이야말로 절대적이며, 만물은 타오르는 불로 성립되어 있다.
그런데 그 불을 버린다는 것이 웬 말인가.
나는 죽을 때까지 아그니를 버리지 않는다."
하며 장로 격인 한 사람이 주장했다.
이에 대해 어떤 자는
" 카사파 형제를 그토록 믿게 한 붓다라는 사람은 보통 인물이 아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말을 들어 본 후에도 늦지는 않다."
하고 반론하는 자도 있었다.
대세(大勢)는 연로한 카사파 형제가,
마치 어린애처럼 반짝이는 눈빛으로, 붓다 스트라를 칭찬하며,
아그니 신을 버리는 이상은,
자기들도 그에 따라 반성의 명상을 실시하여,
결과를 보는 것도 헛된 일은 아닐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렇게 되어 두 형제를 포함한 970 명의 수행자들의 마음이 모여졌다.
그리하여, 이들은 머리를 깎고, 노란 승복을 몸에 걸치고,
붓다가 있는 라자그리햐로 향해 이동을 시작했다.
이 소문은 사방으로 널리 퍼져 나갔다.
먼저 산과 숲을 유행하는 사로몬, 사마나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누구보다도 먼저 붓다를 한번 보려고,
승복의 집단 이동에 끼어드는 자도 나타났다.
드디어 이 소문은 마가다 국의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수년 전, 고타마 싯다르타를 한눈에 보고,
이 사나이는 위대한 붓다가 될 것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지금 이렇게, 자기가 믿는 카사파 형제를 귀의시키고,
슈바라로서, 많은 제자를 거느릴 만큼 성장했다는 말을 듣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반다바 산은 승복을 입은 집단으로 갑자기 북적대기 시작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 겨우 다섯 명의 제자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열 사람이 80명이 되고, 지금은 1700 명의 제자로 들어찼다.
그런데 그 불어나는 모양이 보통이 아니었다.
이 지상계는 3차원적이어서, 모든 것이 물리적이기 때문에,
돌연변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물질의 증감이 크게 변하는 것은 없다.
증가 방법 중, 가장 큰 산법은, 기하급수 산법이다.
이 식은, 1이 2가 되고, 2가 4가 되어,
물질이 가속도적으로 넓어져, 불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확실한 순서가 있어서,
2가 5가 되고, 5가 32로 된다고 하는 것은 없다.
붓다로의 귀의는, 그러한 기하급수 산법으로도 납득이 안되었다.
그야말로 돌연변이와 같은 상태였으며,
집단 전부 귀의한다는데 특징이 있었다.
그러므로 보통의 산술 방식으로는
계산이 성립되지 않는 증가 방법으로 불어나갔다.
따라서, 이런 상태로 10년이 지나면,
붓다의 교단은 민족적 대 집단이 되는 것은 분명했다.
인간은 신의 자식이며,
신에 귀의하는 것은 당연하며,
붓다 스트라가 인류 전체에 침투하는 것은 기쁜 일이겠으나,
당시의 세상과 인심을 고려해 보면,
교단의 확대를, 그대로 보아 넘긴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의 세상은, 소위 전란의 세상으로,
무장이나 노예는 언제 어디서 적의 습격을 받아
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세상이었다.
계급제도도 엄격해서, 사람들의 마음은, 물질이냐, 정신이냐,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시대였다.
그런 만큼 물질에 집착하는 자와, 세상을 비관하여 신을 숭배하는 자로 나뉘어,
후자를 선택한 자는 산림으로 들어가,
육체 고행에 전념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으로 말하면,
붓다에 귀의하는 것은, 출가를 뜻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일상의 일을 버리고, 승직에 종사하는 것이다.
산에 들어가면 열매도 있어서, 먹을 것에 그다지 어려움을 받지 않으며,
입는 것도, 한벌이면 족하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인간의 생활은,
끝내는 피폐 해져, 지상에서의 생활환경을 풍요하게 하기란 불가능하다.
붓다 스트라의 본래의 목적은, 색심 불이(色心不二)에 있었다.
물질과 마음의 조화에 있다.
사람들이 물질과 마음의 올바른 순환의 법을 아는 것에 의해,
올바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쓸데없이 출가자를 늘리는 것은 아니었다.
붓다 스트라는 재가(在家)에 있고,
신리의 실천을 해 가는 것이어야 했다.
따라서 출가는 극히 일부에 한정되고,
재가(在家)의 사람들에게 신리를 전하는 데 있었다.
출가자가 민족적으로 집단화되어 가면,
상부상조의 생활환경을 피폐시키고 마는 것이다.
팔정도의 정업(正業)이란,
그런 의미에서 의의(意義)를 가지게 되는 것이며,
정업의 한 가지 목적이,
상부상조라고 하는 조화와 생활환경의 풍부성을 찾는 것이라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붓다는,
귀의자에 대해 먼저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게 되었다.
그래서 장래의 과제로서, 함부로 출가를 권하지 않고,
야사의 부모처럼 재가(在家)로 있으면서,
신리를 실천해 가는 자를 기르기로 했던 것이다.
2,500여 년 전의 인도는, 전란의 시대라고는 하나,
문명은 번창하고 있었다.
인도 미술은 기원전 2,500년부터 1,500년경까지,
인더스 강 유역에서 번창하여,
그 후, 아쇼카 왕 시대가 되어, 영내에는 가는 곳마다 불탑, 석주 등,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것이 건조되어, 현존하고 있다.
문학으로 말하면, 기원전 2,000년,
인도 북서부로 이주해 온 아리아인이,
자연현상을 찬미한 서정시가가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인도의 역사는 오래된 것이다.
그리고 문화 수준도 높았다.
그런 인도가 오늘날에는 서양 문명보다 월등히 후퇴하여,
5억의 인구를 안고 있지만,
대부분의 주민은 생활에 대한 활기조차 잃고 있다.
오랜 식민지 생활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그러나 붓다를 낳았으면서도, 그 신리와 문화는 차츰 형식화되고,
동시에 잘못된 신앙이 사람들의 마음에 둥지를 만들어,
무기력한 생활 습관을 몸에 붙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늘날의 지구를 크게 나누면,
서양 문명의 합리주의 사고방식 아래에서 발전되어 왔으나,
동양 문명은 잘못된 신앙의 해독으로,
현실적으로는 서양보다 두 걸음, 세 걸음이나 후퇴하고 말았다.
그러면, 서양의 합리주의가 올바르냐 하면,
오늘날의, 멈출 줄 모르는 기계 문명의 앞길에는,
인류의 생존에 절망적인 어두운 그림자마저 던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욕망과 이익 추구의 끝에는, 혼란과 전쟁,
그리고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멸망이 기다리고 있다 해도 될 것이다.
어느 쪽을 보아도, 인류가 이상(理想)으로 하는 조화 있는 세계라고는 하지 못한다.
마음이 없는 기계 문명도,
기계 문명이 없는 편협된 정신주의도,
인류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류를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마음을 알고 있는 올바른 생활이다.
인간의 목적인 조화에 바탕을 둔 상부상조,
인류는 모두가 형제이다'라고 하는 평등 호혜의 마음과,
정법이라고 하는 올바른 순환에 입각한 생활 행위이다.
이것은 새로운 이념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생활 방법은 석가의 시대부터,
모세의 시대에도 자연은 인간에게 가르치고 있었으며,
붓다는 그것을 설파해 왔던 것이다.
붓다에게 귀의한 자들은 돌연변이적으로 증가했으나,
붓다는 출가자를 무제한으로 늘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또한 붓다 자신도 아무리 귀의자가 늘어나도, 초심을 바꾸는 일은 없었다.
그는 항상 자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육신을 가진 인간은,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지지자가 많아지면,
그만 교만에 빠진다.
괴로움에 방황하며, 겸허했던 마음을 잃고,
사람들 위에 서고 마는 것이다.
특히 신앙의 경우는 그러한 경향으로 더욱더 되기 쉽다.
초인간적인 힘이, 사람들로 하여금 한층, 경외의 염(念)을 품게 하고 말기 때문이다.
악마는 이러할 때에 살며시 다가와서, 차츰 당사자의 마음을 점령해 버린다.
10년 전의 그 사람 모습은 변하지 않아도,
마음속의 내용이 크게 변해,
부자연스러운 언동이 많아지게 된다.
마음은 시시각각 움직이고 있고, 변화하고 있다.
어제의 마음은 오늘의 마음이 아니다.
향상하고 있거나,
후퇴하고 있거나,
그 자리에 멈추고 있거나,
셋 중의 하나이다.
그만큼 마음은 움직이기 쉬운 것이다.
붓다는,
인간의 동요하고 변하는 마음을 깨닫고 있어,
마음의 구름을 만들지 않도록 사람들에게 설법하고
자신에게도 또한 그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반다바 산은 붓다의 귀의자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붓다는 가장 높은 곳에 앉았다.
얼마 후, 설법이 시작되었다.
붓다의, 굵직하고, 느긋한, 그리고 중후한 그의 어조는
주위의 공기를 진동시키며, 산림이랑 들로 퍼져 나갔다.
" 모든 사로몬들이여.....
그대들의 눈은 활활 불타고 있다.
불타고 있는 그 눈으로 사물을 올바르게 보려고 해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욕망으로 마음이 움직여, 족함을 잊어버린 마음이 있는 한,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평안의 경지도 얻을 수 없다.
그대들의 귀는 불타고 있다.
불타고 있는 귀로, 올바른 것을 듣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독선적인 자만심이 그런 귀를 만들어내서,
남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이다.
마음의 교만을 버리지 않으면,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리라.
그대들의 입은 불타고 있다.
입에 거품을 물고, 감정을 드러내 놓고,
상대방의 마음을 잊고 논쟁을 한다.
논쟁은 감정을 자극하여, 대립을 낳아, 투쟁으로 발전한다.
어디에 자비의 마음이 있는가
하는 말에 자비가 있으면, 상대의 마음을 불태우는 것은 없을 것이다.
말에 의해, 상대에게 의지(意志)가 정확하게 전달되어야만,
불타고 있는 마음도 진정된다고 하는 것이다.
미각이 불타면, 미식에 탐닉하여, 과욕의 마음이 불타오르게 된다.
그 불이 타며, 꺼질 줄 모르면,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 몸을 빠뜨리는 것이 된다.
냄새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마음속을 불태우는 원흉이 될 것이다.
몸의 감촉에 마음이 불타면,
정욕의 포로가 되어, 스스로의 본성을 잃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오관은 마음을 불태워,
마음은 더욱더 오관에 휘둘리어 간다.
괴로움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불을 숭배하여, 내세의 행복을 바란다 해도,
올바른 마음을 잃으면,
괴로움에서 해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로병사는, 타력의 고행으로는 결코 해방되지 못한다.
항상 불안과 불신이 동거하고,
의문이 있어도 밝히지 못하고,
오랜 습관에 마음마저 유연함을 잃어 간 것이다.
불타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마음과 행동에 의한 여덟 가지 올바른 도(道)를 살리는 것에 있다.
생활의 척도로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불타고 있는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아직 남아 있는 불씨로 인해,
다시 타오르게 될 것이다.
마음은 항상, 둥글고, 크고, 풍요로워야 한다.
불타면, 연기도 날 것이고,
그 연기는 마음을 가려,
신의 자비의 빛을 가로막아 버리고 만다.
바른 여덟 가지 도를 척도로 하여,
반성하는 가운데서, 남은 불씨마저도 근절시켜버려는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마음은 자비의 빛에 싸여,
고통에서 해탈하여, 광명이라는 세계가 열려 온다.
오관에 사로잡힌 육신의 허무함, 무의미함,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고,
평안의 마음을 깨닫는 것이다.
광명의 세계를 실재계(實在界)라고 한다.
그 실재계는, 결국은 그대들이 돌아갈 안주의 땅이다.
진짜의 세계이다.
육체는 무상하여, 인생 항로를 건너가는 배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그대들이 가지고 있는 육체와 동거하고 있는 실재계로 돌아가는 배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붓다의 말은 엄했으나, 자비에 넘치고 있었다.
붓다의 설법은 빛의 파동을 타고 반다바 산 전역을 진동시켰다.
숲도 사람도, 붓다의 빛의 파동 속에 싸여, 빛으로 가득 차 넘치고 있었다.
사람들이 앉아 있는 장소는 그대로
천상계의 영위기(靈圍氣)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카사파 삼 형제는, 붓다가 말하고 있는 설법을
전신이 뜨거워질 정도의 마음으로 경청하고 있었다.
" 보이지 않는 세계로 돌아가는 마음과 배는,
지금, 그대들과 함께 있다.
실재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 와를 영원히 윤회하여,
지금, 그대들은 내 설법을 듣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대들의 육체주(肉體舟)는, 그 환경에 적응이 되어,
인연에 의해 약속이 되어서 나타났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루베라의 숲에서 라자그리햐로 오려면,
길을 걸어오는 자. 말을 타고 오는 자, 코끼리를 타고 오는 자,
가지가지였을 것이다.
타고 온 것이 말이었건, 코끼리였건,
라자그리햐에 온 당사자 자신은 변함이 없을 터이다.
인생에서의 그대들의 육체도, 말이나 코끼리와 같은 탈것이다.
즉, 인생 항로에 적응한 배인 것이다.
그 배에 집착을 가져서는 안 된다.
생로병사의 고뇌 괴로움은,
그러한 배에 집착을 가지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여덟 가지의 도(道)야말로, 생로병사에서 해탈하는 길이다.
수십 년 동안이나 믿어 온 신앙을 모두 버리고,
내 제자가 된 카사파 형제는 훌륭하다.
용기 있는 사로몬이다.
자기의 결점을, 용기와 지혜와 노력으로 수정한 자야말로,
타오르는 마음의 불길을 끈 사로몬이라 할 것이다.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나쁜 습관을 타파하고,
정도에 힘쓰는 자에게, 신은 아낌없이 빛을 내리실 것이다."
설법은 끝났다.
어느 누구의 얼굴에도 싱싱하게 생기가 되살아나고 있다.
그러나 설법이 끝났는데도, 누구 한 사람 일어서는 자는 없었다.
붓다의 말을 가슴에 새겨,
붓다의 말을 빛의 척도로 해서,
반성의 명상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앞에서도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라자그리햐로 모인 붓다의 제자는 1,700 명에 이르러,
승단이 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상가의 조직이 구체적으로 검토되어야 하게 되었다.
이미 붓다의 존재는 북 인도를 비롯해서 중 인도 전역에 전파되어,
붓다의 신리에 닿으려고,
많은 중생이 계속해서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 석가 - 다카하시 신지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성불하소서
나마스테~~~~
합장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