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옛날 이야기 -30-
(두만강을 넘어서 38선까지 -1-)
새해가 되고 내나이 이제 18살이 되었다.
3월부터 당숙께서는 한국에 갈 준비를 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정보를 수집하며
계획을 짜기 시작 하였으며 4월이 되어 엿방을 정리하기 시작하면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날씨는 아직 쌀쌀했다.
우리 집안에 또 한 분의 당숙이(셋째 할아버지 아들 백규아저씨) 계셨는데 內
鮮一體(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다)라는 명목으로 일본군대에 끌려갔다가 남방
에서 해방을 맞고 다음해 평산으로 돌아오시던 날이 5월18일이었다.
그때 아성현(阿城縣)의 평산(平山)은 겨우 얼음이 녹기시작하였으며 길은 온
통 곤죽같이 되어 엉망이었다. 평산(平山) 보다 훨씬 남쪽인 두만강 역시 4월
중순이 되었는데도 얼음이 녹질 않고 두껍게 얼어 있어서 얼음위로 사람이 다
녀도 된다해서 얼음이 녹기 전에 두만강을 건너기로 하였다.
우리 일행은 모두 9명이었다 즉 둘째 할아버지와 할머니 당숙의 딸 넷(큰애가
15살 맨밑의 애가 8살), 형님과 나 그리고 엿 기술자인 이선생이 일행이였다.
김선생은 한국에 가도 반기는 사람이 없다고 용정에 남는다 했다. 우리는 당숙
과 김선생 그리고 금실이와 은실이 모녀들을 용정에 남겨두고(당숙은 엿공장을
마저 정리한 후에 뒤따라 온다고 했다) 먹을 것을 싸고 보따리를 짊어지고 한국
으로 가기 위하여 길을 떠났다.
한국으로 가기위해서는 두만강을 건너 이북땅인 회령(會嶺)을 거쳐 철원(鐵原)
쪽으로 남하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 이북땅인 회령으로 가기위하여 용정
(龍井)에서 따라즈(大砬子)를 거쳐 회령이 마주보이는 삼합(三合)으로 가야했
다.
삼합(三合)까지 약 60km 정도 이어서 노인과 애들이 있기에 중간쯤에 있는
따라즈(大砬子)에서 하룻밤을 잤다. 따라즈(大砬子)는 그 유명한 명동(明東)
학교가 있던 곳이며 초기 이민의 정착지였으며 많은 독립투사들을 배출했던 곳
이고 유명한 분들의 제2의 고향이기도 한곳이다.
이곳 명동학교 출신 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윤동주 시인(후꾸오까 감옥에서 해
방직전 옥사한 젊었던 시인)의 생가가 있으며(지금 그 윤동주 시인의 생가를 보
존하고 있다 한다)그리고 유명한 아리랑의 나운규 영화감독, 문익환 목사, 이원
경 목사등 혜아릴수 없는 많은 유명한 분들의 출신지라고 한다.
우리는 다음날 따라즈(大砬子)에서 다시 길을 떠나 유명한 오랑캐 고개를 넘어
저녁 무렵 삼합(三合)에 도착하였다. 이 오랑캐 고개는 옛날에는 호랑이가 나
와 해가지면 얼씬도 못했다는 험한 고개라 했다.
회령(會嶺)이 보이는 강 언덕에는 우리와 같은 목적으로 온 일행들이 있었으며
얼어붙은 두만강의 중국 쪽 강 언덕에서 이북 땅을 바라보며 어두워지기를 기다
렸다.
중국쪽에서 바라본 회령
저 멀리 보이는 마을이 회령이다 (삼합에서 바라본 회령)
조국은 해방이 되고 1년8개월이 지났으나 미국과 소련이 우리나라를 남북으로
갈라 놓았고 아직 질서가 안 잡혔으며 서로가 탐색전을 펴고 있던 중이기에 남
쪽으로 가는 사람들을 그래도 고향 찾아가는 동포로서 관대히 대해주던 때였다.
남북을 오가며 장사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단속이 그리 심하지 않았기에 우리
도 감히 남쪽으로 가기 위해 여기까지 와 있는 것이다.
사방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였고 강 건너의 인적이 없어졌음을 확인한 후 우리
들은 두만강의 얼음 위를 서로 손을 잡고 조심조심 건너가기 시작하였다. 즉 무
단으로 국경을 넘는 것이다. 그리 넓지 않는 강이기에 우리 일행은 곧 이북 땅을
밟을 수가 있었다.
드디어 조국 땅을 밟은 셈이다.
가슴이 벅차오름을 가눌 길이 없었다.
오늘밤 즉 1947년 4월18일 밤은 나에게는 영원히 잊지 못할 감격의 밤이었다.
일행은 곧 회령(會寧)시내로 들어섰다. 조금은 두려운 마음이 있었으나 무작정
가까운 여인숙을 찾아가 하룻밤을 지냈다.
다음날 아침 우리 일행은 청진(淸津)을 가기 위해 회령(會寧)역으로 갔다. 회령
역에 가는 도중 여학교 앞을 지났는데 등교하는 여학생들이 교문으로 몰려 들어
가고 있었다. 그 여학생들이 모두 미인임에 놀랐다. 참으로 남남북녀(南男北女)
를 실감케 하였다.
회령(會寧)역에서 청진(淸津)가는 기차표를 산후 우리는 기차에 올랐다. 기차
에는 사람이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차 있었다. 얼마 안 있다가 사람들로 꽉 찬
기차 칸을 두 사람의 검표원과 공안원이 그 많은 사람들을 헤치며 검사를 일일
이 하며 저쪽에서 오고 있었다.
나는 가슴이 콩닥거렸다. 할아버지나 할머니 또 애들은 문제가 없으나 나와 형
님은 젊은이였기에 반드시 증명서를 보여 달라 할 것이다.
형님은 휴가증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소위 도망병이기에 아무 증명서도 없는
젊은이기에 혹시 끌려갈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까지 와서 끌려가면 만사가 끝나
는 것이다. 가슴이 콩닥거리고 등에서는 진땀이 흘렀다.
이곳 용정의 명동학교 출신 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윤동주 시인(후꾸오까 감옥
에서 해방직전 옥사한 젊었던 시인)의 생가가 있으며 (지금 그 윤동주 시인의
생가를 보존하고 있다 한다) 그리고 유명한 아리랑의 나운규 영화감독, 문익환
목사, 이원경 목사등 혜아릴수 없는 많은 유명한 분들의 출신지라고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