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열흘 전인 지난 4일 미국 블룸버그통신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오보를 냈다. 블룸버그 통신은 이날 오후 4시쯤(현지시간) 홈페이지 첫 화면에 ‘실시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다’라는 제목의 속보를 올렸다.
러시아·동유럽 지역 국제정치 분석가인 올가 로트만가 이 기사를 보고 클릭하자 ‘서버에 오류가 발생해 요청을 수행할 수 없다’는 내용의 페이지로 연결되는 것을 확인하고 캡처해 트위터에 올렸다. 만약 제대로 된 속보이었다면, '(뉴스) 보완 중' '추후 재송고' 등의 페이지로 연결됐을 것이다. 문제의 기사는 30여분 만에 홈페이지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블룸버그 오보를 다룬 얀덱스 기사 묶음(위)와 트위터/캡처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최고급 정보 분석을 통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D데이를 16일로 확인하고 이를 유럽 동맹국들과 공유했다는 특종(첫 보도)이 미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에 실렸다. 이후 급박하게 푸틴-바이든 대통령간에 전화 접촉이 이뤄지고, "러시아는 언제든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수 있다", "푸틴의 최종 결심만 남았다",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끝나기 전에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것"이라는 확신적인 발언들이 미국 측에서 쏟아지면서 '16일 우크라이나 침공설'은 이제 기정사실처럼 굳어졌다.
그러나 정작 한쪽 당사자인 러시아는 이를 "광적인 전쟁 히스테리"라고 반박했다. '폴리티코' 기사의 사실 여부는 이틀 후면 판가름날 것이니 오래 기다릴 것도 없다.
현재로서는 미국이 '16일 침공' 쪽으로 완전히 분위기를 잡아가고 있다. 우크라이나 체류 자국민들에게 "48시간 이내 떠나라"고 대피령을 발령했고, 우리나라를 비롯해 영국 이탈리아 일본 등 많은 국가들이 뒤따랐다.
생활 터전을 우크라이나에 두고 있는 현지 교민들도 출국 여부를 심각하게 고민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모든 것을 그냥 두고 떠나자니 당장 경제적 손해가 막심하고, 그렇다고 그냥 눌러 앉자니 불안하고, 법적 처벌도 두렵다. 일단 출국 준비를 서두르면서 16일까지는 지켜보겠다는 교민의 이야기도 들린다.
세르비아, 우크라이나 위기로 식품류과 원유제품 긴급 구매/얀덱스 캡처
재미있는 것은 발칸반도에 있는 친러시아 성향의 세르비아다.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알렉산다르 부치치 세르비아 대통령은 '16일 침공설'이 나온 뒤 현지 TV채널과 가진 인터뷰에서 "밀은 충분하다"며 "(유사시를 대비해) 소금 1만톤, 콩과 완두콩 1천톤, 분유 3만톤을 주문했다"며 소개했다. 그러면서 "전 세계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무슨 일(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난리를 치고 있는데, 우리만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러시아가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나라마저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든 미국발 '침공 시나리오'다.
블룸버그는 이후 홈페이지에 올린 사과문에서 “우크라이나 위기와 관련해 몇가지 시나리오에 따른 제목을 미리 준비했는데, 이 중 하나가 부주의로 송고됐다”며 해명했다. 이에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크렘린 대변인은 “이제 '가짜뉴스'라는 말 대신 ‘블룸버그 뉴스’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비꼬았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위한 구실을 만들기 위해 우크라이나가 먼저 공격하는 가짜영상을 준비 중'이라는 등 (러시아가 보기에) 미국발 '가짜뉴스'가 판을 치니, 크렘린으로서는 블룸버그 통신의 실수에도 각을 세울 수 밖에 없다. 만약 이틀 후(16일 후) 우크라이나 국경이 지금과 달라지는 게 없다면, 크렘린은 어떤 표현을 쓸지 자못 궁금하다.
러시아의 매우 잦은, 강력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최고위급 정보(?)를 근거로 러시아 침공설을 날짜까지 지정해 가며 밀어붙이는 이유가 뭘까?
일부 전문가들은 '그 자체로 전쟁 억지책이 될 수 있다'고 본다. '16일 침공할 것'이라고 미리 얘고했는데, 이를 실행에 옮길 만큼 '푸틴 대통령이 바보는 아닐 것'이라는 진단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언제까지 침공 날짜를 지정해가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막을 것인가? 미국이 '늑대가 나타났다'고 거짓말을 한 양치기 소년 꼴은 되지 않을런지.
미국이 러시아에 대한 여론 압박 효과를 노리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안보협상'에서 나토의 동진정책 폐기와 나토군의 동유럽 철군 등을 주장하는 러시아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여론전에서 '러시아의 악마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러시아 혐오를 뜻하는 '루소포비아'(russophobia)와도 통하는 대목이다.
개인적으로는 바이든 대통령이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 격은 아닌지 심히 우려스럽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전격 합병(당시 부통령)에 지난해 아프가니스탄 미군 철수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역할과 능력에 대한 온갖 비판에 시달린 바이든 대통령이 이를 한방에 만회하기 위해 러시아를 향해 너무 무리수를 두는 듯하다. 기획된(?) 대형 가짜뉴스의 운명은 이제 얼마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