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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26장 6-13절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여인
요즘 사람들은 부모님이 돌아가실 것을 대비해 장례 보험을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조회사에 보험을 들어서 돌아가시면 모든 것을 상조회사가 담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가시는 분들이 워낙 많다보니까 나중에는 상조회사가 부도가 나는 일도 발생합니다. 장래에 일어날 일을 대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어떤 것들은 이렇게 믿었던 일들이 부도가 나서 사람들을 당황시킬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상조회가 그렇게 부도를 내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죽기에 죽음을 준비하고 살아야 합니다. 창세 이래로 사람들이 죽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되어 왔습니다. 영생을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래서 영생을 시도해 불로초를 구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언제쯤 죽을 것인가?하는 것이라든지 아니면 죽기 전에 무엇을 할 것인가라든지 하는 것, 또는 죽을 때 가까운 가족들에게 무슨 유언을 남길 것인가? 또 내가 죽으면 누가 가장 슬퍼할 것인가? 죽고 나면 후손들은 나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화장해서 납골당에 둘 것인가 아니면 산이나 바다에 뿌릴 것인가 하는 등의 많은 일들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노인은 자신이 묻힐 산을 사가지고 자기를 위시해서 후손들이 함께 묻힐 것을 생각하면서 아주 기분 좋아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죽기 전에나 죽은 후에나 오로지 이 땅에 집중된 삶을 살아갑니다. 그것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말입니다. 이런 분들은 교회에 다녀도 땅에 대한 집착이 좀처럼 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되면 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 잡혀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임을 당하신 후에 무덤에 묻히게 될 것과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날 것임을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부활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만을 생각하고 죽지 마시라고 만류를 하며 마음에 두려움을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감람산에서 종말과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베다니 시몬의 집으로 초청을 받아 가셨습니다. 예수님을 초청한 시몬은 바리새인으로서 예수님께서 나병을 고쳐주셨기 때문에 자기 집으로 초청한 것입니다. 이 시몬은 나사로와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모두 모여 있을 때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와서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마태와 마가와 누가는 이 여자가 누군인지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이 여자가 나사로의 누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절입니다.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제가 생각하기에는 복음서를 기록한 마가나 마태나 누가가 있을 때는 이 마리아가 살아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분을 밝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리아 본인도 그것을 원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100세가 넘는 세월을 살았기 때문에 요한 사도가 요한복음을 쓸때는 마리아도 역시 죽은 후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은 여인이 바로 마리아임을 밝혔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꾸만 자신의 곤고함을 살아있는 어떤 사람에게서 찾는 속성이 있어서 마리아가 살아있을 때 그녀의 이름을 성경에 기록했다면 그로인해 많은 괴로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 뿐 아니라 기독교를 박해하는 대적들로부터 말입니다. 거기다가 유대인들은 그런 산 증인을 살려두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신분을 은폐 시키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입니다.
어쨌든 마리아는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 향유는 처녀가 시집가서 첫날 밤을 보낼 때 신랑과 잠자리하기 전에 바르기 위해 준비하는 향유입니다. 마리아가 이것을 예수님께 부어드렸다는 것은 일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주님을 섬기겠다는 결단의 표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으면 사람들은 잘했다고 칭찬을 해야하지만 오히려 비난을 퍼붓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헌신을 하셨다면 사람들로부터 잘했다고 칭찬받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행위보다 그 돈에 가치를 두기 때문에 아까운 돈을 허튼데 썼다고 책망을 합니다. 제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은 세리였다가 예수님을 믿었던 마태가 그 자리에 있엇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기록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뭐라고 하면서 이 여인을 책망했습니까? 우리 8-9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이것이 이 시대에도 땅을 하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10절입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값진 것을 알아보는 눈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값진 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천차만별입니다. 대부분의 샤람들은 그런 값진 것이 있을 때 자기나 아니면 자기 가족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아니면 투자 가치가 있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말하는 “어떤 의도”들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은 자기 영역과 둘레에서 사용하는 것을 벗어나 누군가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쓸 때 사람들은 많이 칭찬합니다. 심지어 그런 사람들을 영웅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로 묘사합니다. 우리 나라도 그런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람들에게 기부를 받아서 나누어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드러나 보이는 사람도 있고 숨겨진 사람도 있지만 아마 수백명이 넘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들이 모두 예수님에게 칭찬받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그런 일을 하는 마음의 동기를 알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 칭찬과 보상의 영역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우편에 선 양들을 칭찬하셨듯이 말입니다.
제자들의 눈에 허비하는 행동이 예수님이 보실 때는 온 세상에 알릴 만큼 가치있는 행동이었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도 아닌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이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마지막 행동이라고 불 수 있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그 몸에 향유를 부은 것입니다. 그것은 기념할 만한 행동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사무엘이 찾아가 기름을 부은 행동은 분명 기념할 만한 행동입니다. 그것은 그 후에 기름을 부은 백성들보다 더 위대한 행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대행자로써 기름을 부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한 기름을 부었지만 백성들은 자기들을 위한 기름을 부은 것입니다.
지금 이 여인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향유를 붓는 대행자로써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향유를 부음으로써 그녀는 하나님이 아들에게 하시고자 하셨던 그 일을 대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한 가칙가 있는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여러분들은 허비와 예수님이 보시는 참된 가치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안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서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실 때에야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많은 기부를 받아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받은 돈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습니다. 초대교회도 역시 이 일을 했습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일차적인 구제대상은 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본토 유대인의 과부들과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들이 그 구제 대상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그녀들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사업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그런 차원이 아니라 온 세상으로부터 외면을 받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위한 기름을 붓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죽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시점에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누누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녀를 성령께서 감동시키신 것 아닐까요?
물론 성령이 내주하신 것과는 다릅니다. 성령이 내주하시는 일은 오순절날부터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에는 성령께서 사람에게 감동이나 감화를 주심으로 자신을 일을 이루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파송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할 때 일어난 일 역시 이런 부류의 일입니다. 하지만 성령은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준비된 사람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마리아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매우 극진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마리아를 통해 향유를 붓에 하셨고 마리아는 온전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머리에 자신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향유를 부은 것입니다.
이런 산 제사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1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여러분들은 많은 선한 일을 할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일들은 무척 중요한 일들입니다. 하지만 어떤 때는 선한 일보다 더 중요한 선한 일을 해야할 때가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한 일처럼 말입니다. 그 행동은 앞으로 살아갈 자를 위해 한 것이 아니라 얼마 안있다가 돌아가셔야만 하는 분에 대한 행동도 포함합니다. 그런데 그런 분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부어 드리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들 주변에 내일까지 밖에 못사실 분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분을 위해 1000만원을 드려야 한다는 마음의 부담감이 왔습니다. 그것을 그 일에 써야할까요? 그 돈은 여러분의 곁을 떠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돈입니다. 사람들로부터 그 귀한 돈을 왜 허비하느냐고 질잭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러분들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진정한 가치는 바로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에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예수님이 오시는 날까지도 계속해서 나타날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그들을 돕는 일을 여러분 개인과 교회에게 하실 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들은 최근에 양선의 열매를 교회적으로 맺는 일에 헌금을 드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으신 줄로 믿습니다. 베트남에 있는 교회는 이제 건물을 지었고 내부공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사닥다리 선교회 역시 사역을 하고 있는 데 노숙자에게 찰밥을 해서 주는 데 김값이 많이 올라서 힘들어하셨는데 그나마 조금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 말고도 많은 물질로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라도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가 하는 일로 지속해야 합니다. 꼭 사닥다리 선교회가 아닐지라도 하나님이 하고자 하셔서 여러분들 개인이나 교회 전체를 감동시키셔서 행하라고 하신다면 그 일을 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설사 그 대상자가 오늘 우리의 도움을 받고 내일 돌아가신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일이라면 그보다 값진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들과 같이 하셔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고 주님의 일에 여러분들을 동참하게 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으심에 동참한 것처럼 말입니다. 12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이 시점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제 베다니에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마가 다락방에서 최후에 만찬을 하시던 그 날이거나 바로 그 전날 이라고 불 수 있습니다. 베다니에서는 예루살렘이 그다지 많이 떨어져 있는 거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참된 가치가 어디에 있는 지 또 헌신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하여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 여인에 대한 매우 특별한 명령을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13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제 예수님의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될 것을 아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이 사명을 감당하고자 자신들을 드린 교회를 통해서 일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행한 헌신을 같이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진정한 헌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역시 성령이 주시는 감동을 따라 하나님의 선한 일에 참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증인으로써 쓰임받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