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끝나는 길목에 찬 바람이 불자 나무들은 일제히 늘어놓은 나뭇잎을 버리고 있다 어둠이 길게 누운 숲 파장을 일찍 끝낸 나무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서 있다
저녁 숲에서 어둠이 밀려오는 시간 서둘러 계절을 마감해야 한다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푸른 나뭇잎들을 힘겹게 붙잡고 있는 전나무 파장을 할 수 없는 저 뾰족뾰족한 이파리는 아무도 찾는 이가 없다 한 계절을 떠나보내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만 그에겐 아무도 곁을 주지 않는다
칼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내리쳐도 무거운 어깨를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저 나무는 아직도 파장을 모르는 어둠을 꾹꾹 삼키고 있다
보기에 따라 사물은 달리 보인다. 전봇대도 멀리서 보면 하나의 이쑤시게로 보이고 철길의 끝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개개인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고 사물의 시점은 거리와 환경에 따라 달리 보이는 현상에 의해서다. 우리는 상록수를 좋아한다. 다른 나무들이 헐거벗은 채로 겨울을 황량하게 지내는데 상록수는 산야에 홀로 우뚝하게 서서 푸르름의 기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득야청청은 선비들의 바램이었고 절개와 지조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런 상록수도 보는 사람마다 느낌은 다르고 상징의 초점은 같지 않다. 류연경 시인의 파장이 그렇다. 파장은 장의 끝마무리를 말한다. 계절의 끝과 시작의 끝이다. 시인은 겨울나무의 준비과정 앞에 서서 푸름을 간직하고 우뚝하게 선 전나무을 바라본다. 왜 다른 나무들과 달리 계절을 잊고 푸르는가. 왜 추위에도 버티고 서서 홀로 도도한가. 시인의 의문은 사물의 관찰에서 끝나지 않고 사물과 사람과의 인과관계를 그린다. 사람의 삶도 나무와 같다. 봄 여름 가을 계절의 사계에서 그 변화를 그대로 감지하고 희노애락을 느낀다. 청춘의 시대를 보내고 늙음에 들어서서 자연의 변화를 받아드려 삶의 허무와 종말을 보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시인은 새롭다. 그런 나무즐 중 유일하게 푸르름을 간직한 전나무가 신비롭다. 사람은 저런 나무를 닮을 수가 없는 것일까. 칼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몰아쳐도 파장을 모르고 어둠을 꾹꾹 삼키고 있는 전나무의 삶이 된다면 무엇을 더 바랄까. 시인의 시선은 자연과 사람이 하나로 동화되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이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