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문화제, 길 위로 걷다
영월의 봄은 유독 시리도록 푸르다. 굽이치는 동강의 물빛이 그러하고, 산허리를 감싸고 도는 바람의 결이 그러하다. 4월의 끝자락, 제59회 단종문화제가 열리는 영월 땅에 발을 디뎠다. 거리 곳곳에 나부끼는 현수막들이 일상적인 풍경 위로 수백 년 전의 시간을 소환하고 있었다. '관풍헌에서 장릉까지'. 단종의 가슴 시린 궤적을 따라 걷는 가장 행렬과 국장 행렬을 알리는 붉은 글씨가 봄 햇살 아래 선명했다. 4월 25일, 바로 오늘. 멈춰 있던 역사의 수레바퀴가 영월의 거리를 무대 삼아 다시 굴러가기 시작하는 참이었다.
가장 먼저 발걸음이 머문 곳은 영월부 관아의 객사인 관풍헌(觀風軒)과 자규루(子規樓) 앞이었다. 단청의 화려함 뒤로 서늘한 비애가 묻어나는 이 공간은, 어린 나이에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 온 단종이 머물렀던 곳이자, 끝내 사약을 받고 승하한 비극의 현장이다. 안내판의 글귀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며, 스스로를 피를 토하며 우는 소쩍새(자규)에 빗대어 슬픔을 노래했다는 어린 왕의 애끓는 시구를 입속으로 가만히 굴려본다. 굳게 다문 자규루의 기둥 사이로 수백 년 전 그가 바라보았을 첩첩산중의 막막함이 밀려오는 듯해 가슴 한구석이 묵직해졌다.
그러나 오늘 영월의 거리는 슬픔에만 잠겨 있지 않았다. 과거의 비극은 후대 사람들의 지극한 정성과 기억을 통해 찬란한 문화의 꽃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차량 통제로 텅 빈 아스팔트 위를 오색찬란한 깃발과 전통 의상을 갖춰 입은 행렬이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붉은 관복을 입은 이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붉은 가마를 메고 지나가는가 하면, 푸른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뒤따르는 행렬이 굽이치는 강물처럼 거리를 수놓았다. 현대적인 간판이 즐비한 상가 건물들 사이로 조선의 시간이 유유히 흘러가는 풍경은 그 자체로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진 초현실적인 디카시(디카詩)와 같았다.
길모퉁이에 세워진 둥근 볼록거울 앞을 지나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에는 회색빛 콘크리트 건물과 현대식 대형 버스, 그리고 상모를 돌리며 징과 꽹과리를 치는 농악대와 전통 모자를 쓴 사람들의 무리가 한데 엉켜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만다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대가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 이토록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니. 카메라를 들어 그 거울 속의 나를 담았다. 뷰파인더 너머로, 관찰자가 아닌 이 거대한 역사의 물결 속에 온전히 스며든 나의 모습이 보였다.
단순히 길가에 서서 행렬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는 이 축제의 심장 박동을 온전히 느낄 수 없을 것 같았다. 머리에 정갈하게 흰 수건을 두르고 밀짚모양의 전통 모자를 썼다. 한 손에는 선명한 태극 문양이 그려진 앙증맞은 소고를 쥐었다. 가슴팍에 '시상식'이라는 명찰을 달고 자규루 앞을 서성이는 기분은 묘했다.
글을 쓰고 예술을 논하는 사람으로서, 문자와 물감으로만 좇던 전통의 아름다움을 직접 내 몸에 두르고 그 숨결 한가운데 서 있다는 사실이 묘한 긍지와 설렘을 안겨주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와 같은 복장을 한 수많은 사람들이 환한 얼굴로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오늘 하루, 수백 년 전 영월 땅을 밟았던 어느 촌부가 되고, 선비가 되어 단종의 넋을 기리는 장엄한 퍼포먼스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농악대의 흥겨운 가락이 거리를 울린다. 꽹과리의 날카로운 파찰음이 잠든 영혼을 깨우고, 둥둥 울리는 북소리가 길을 걷는 이들의 심장 박동과 동기화된다. 화려한 색동옷을 입고 머리 위로 상모의 긴 끈을 유려하게 돌려대는 농악대의 발걸음에는 슬픔을 승화시킨 우리 민족 특유의 신명과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차가운 아스팔트 위를 걷고 있지만, 내 발끝에 닿는 감각은 영월의 따스한 황토 흙길을 걷는 듯 폭신하고 다정했다. 소고를 쥔 손에 가볍게 힘을 주어 장단을 맞추며 걷는 길, 뺨을 스치는 봄바람이 이토록 달게 느껴진 적이 있었던가.
관풍헌을 떠나 장릉으로 향하는 길은 단종의 영혼을 위로하는 애도의 길이자, 살아남은 우리가 과거의 역사를 딛고 내일로 나아가는 생명의 길이다. 비운의 왕을 가슴에 품고 수백 년을 살아온 영월 사람들의 끈끈한 연대감, 그리고 잊혀져 가는 전통을 현대의 축제로 찬란하게 부활시킨 이들의 열정이 행렬의 걸음걸음마다 깊게 배어 있었다.
단종문화제, 길 위에서 나는 참으로 많은 풍경을 낚아 올렸다. 슬픔을 머금은 묵직한 처마의 곡선, 붉고 푸른 관복의 강렬한 색채, 흥겨운 농악 가락에 맞춰 덩실거리던 사람들의 웃음, 그리고 볼록거울 속에 비친 과거와 현재의 기막힌 앙상블까지. 가슴에 단 명찰의 무게만큼이나, 오늘 길 위에서 마주한 이 모든 순간들은 작가로서의 내 내면에 깊고 풍성한 영감의 우물을 파놓았다.
자규루를 배경으로 소고를 번쩍 들고 활짝 웃음 짓던 내 모습은, 영월의 찬란한 봄날이 내게 준 가장 아름다운 트로피일 것이다. 오래도록 이 길 위의 여운이 내 글의 행간마다 따스하고 푸르게 피어날 것임을 안다. 영월의 봄은 아프도록 시리지만, 또 그만큼 눈부시게 찬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