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브랜드 백과 - 생 로랑[ Saint Laure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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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3.13. 20:13조회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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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브랜드 백과
생 로랑
[ Saint Laurent ]
요약 이브 생 로랑이 1961년 프랑스 파리에서 론칭한 럭셔리 패션 브랜드로, 남녀 기성복, 핸드백, 여행용 가방, 소형 가죽 제품, 구두, 주얼리, 선글라스 등을 제작 · 판매함
1. 생 로랑의 정의 및 기원
생 로랑(Saint Laurent)은 1961년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이 프랑스 파리에서 론칭한 패션 브랜드로서, 2012년 이브 생 로랑에서 생 로랑으로 브랜드명을 변경했다. 생 로랑은 1960년대의 일반적 패션 형태였던 고급 맞춤복인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로 브랜드를 시작했으나 1966년에 기성복 전문 브랜드 ‘리브 고시(Rive Gauche)’를 선보이며 우아한 것이 전부였던 당시 패션에 젊은 스트리트 감성을 도입했다. 생 로랑은 여성을 성차별로부터 해방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르 스모킹(Le Smoking)’, 예술을 패션에 도입한 대표적 사례인 ‘몬드리안 컬렉션(Mondrian Collection)’ 등을 선보이며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 코코 샤넬(Coco Chanel)과 함께 20세기 패션을 대표하는 디자이너이자 브랜드가 되었다.
2. 생 로랑의 탄생 및 설립자
이브 생 로랑
1936년 8월 1일, 이브 생 로랑은 당시 프랑스령이었던 알제리 오랑(Oran)에서 태어났다. 그림 그리기, 글쓰기, 영화 등에 관심이 많았던 이브 생 로랑은 11세였던 1947년, 루이 주베(Louis Joubet)가 감독한 연극 ‘아내들의 학교’(L’Ecole Des Femmes, 몰리에르(Molière)가 1662년 발표한 희극으로 나이 든 남자가 순종적 아내를 얻기 위해 인위적 교육을 시키지만, 그녀가 젊은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을 막지 못하고 좌절한다는 내용)를 보고 크리스티앙 베라르(Christian Berard, 디자이너, 화가)가 디자인한 작은 정원, 침실, 샹들리에 등으로 구성된 무대 세트와 섬세한 고전 의상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브 생 로랑은 이 연극 무대와 의상을 직접 만들어보며 창작에 대한 꿈을 키웠다.
이브 생 로랑은 17세가 되던 1953년, 그동안 작업한 코트, 드레스, 수트 등의 디자인 스케치를 국제양모사무국의 디자인 콘테스트(International Wool Secretariat Competition)에 제출했다. 국제양모사무국 디자인 콘테스트는 크리스찬 디올, 위베르 드 지방시(Hubert de Givenchy), 쟈크 파트(Jacques Fath) 등 유명 디자이너가 심사하고 신인 디자이너를 발굴하는 권위있는 대회였다. 이브 생 로랑은 이 대회에서 3등을 차지해 부모님과 함께 파리에 시상을 하러 갔는데 당시 ‘보그’(Vogue) 프랑스판의 편집장인 미셸 드 브루노프(Michel De Brunhoff)를 만나게 되었다. 이브 생 로랑의 재능을 눈여겨본 미셸 드 브루노프는 이후 이브 생 로랑에게 도움을 주는 조력자가 되었다.
1954년, 이브 생 로랑은 미셸 드 브루노프의 조언에 따라 디자인과 재단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 의상 조합(Chambre Syndicale de la Haute Couture)에 입학했지만 정규 디자인 수업에 실망하고 3개월 만에 자퇴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국제양모사무국의 디자인 콘테스트에 참가하여 1등을 수상했다. 1955년 이브 생 로랑은 미셸 드 브루노프에게 자신의 새로운 스케치를 보여주었고 미셸 드 브루노프는 이 스케치가 아직 발표도 하지 않은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 가을, 겨울 컬렉션의 A라인 스커트와 비슷하다는 사실에 강한 인상을 받아 즉시 이브 생 로랑을 크리스찬 디올에게 보냈다.
크리스찬 디올은 이브 생 로랑의 스케치를 보고 그 자리에서 이브 생 로랑을 어시스턴트 디자이너로 채용했다. 이브 생 로랑은 크리스찬 디올의 오트 쿠튀르 컬렉션과 액세서리 디자인을 도우며 크리스찬 디올이 가장 많이 의지하고 조언을 구하는 디자이너로 성장했다. 1957년 크리스찬 디올의 가을, 겨울 컬렉션에서 이브 생 로랑이 디자인한 의상은 35벌에 달할 정도로 이브 생 로랑의 영향력은 커졌다. 1957년 10월, 디자이너 크리스찬 디올이 심장마비로 급작스럽게 사망했고 1957년 11월 15일, 이브 생 로랑이 21세의 나이로 크리스찬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었다.
다음 해인 1958년 1월 30일, 이브 생 로랑은 디올에서의 첫 컬렉션으로 트라페즈 라인(Trapéze Line)을 선보였는데 사다리 형태를 띈 원피스와 스커트는 매우 참신하다는 호평을 받았다. 같은 해인 1958년 8월, 이브 생 로랑은 디올에서 두 번째 컬렉션을 통해 루즈한(Loose, 느슨한) 실루엣에 길이도 무릎 밑까지 내려오는 드레스 류를 발표했고, 이에 젊은 사람들은 열광했지만 보수적인 중년층에서는 이브 생 로랑의 과감한 디자인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음 해인 1959년, 디올 경영진은 이브 생 로랑에게 보수적인 고객들의 취향에 맞는 컬렉션을 선보일 것을 권유했고, 이브 생 로랑은 안정적이고 우아하며 길이도 긴 옷을 선보이며 다시 한번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브 생 로랑은 크리스찬 디올에서의 네 번째 쇼에서 다시 호블 스커트(Hobble Skirt, 밑이 좁아지는 스커트로 걸을 때 ‘절룩거린다’는 의미로 이름 붙여짐)라는 대담한 컬렉션을 발표하여 크리스찬 디올의 옷을 입는 보수적인 고객들의 외면을 받았다.
이에 크리스찬 디올 경영진은 이브 생 로랑에게 경고를 했고 이브 생 로랑은 다섯 번째 컬렉션을 통해 점잖은 수트를 선보였지만 여섯 번째 컬렉션인 1960년에 젊은 사람들의 스트리트 패션에서 영감을 받은 비트 룩(Beat Look)을 선보여 보수적인 크리스찬 디올 고객을 다시 한번 경악하게 했다. 비트 룩은 검은색의 니트 터틀넥, 가죽 재킷 등 캐주얼한 아이템이 주를 이루어 디올을 입는 고객들의 우아한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국 크리스찬 디올 하우스는 이브 생 로랑을 군대에 보냄으로써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공석으로 만들고 여기에 마르크 보앙(Marc Bohan)을 새로 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