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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거룩한 주의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오늘도 구별하여서 성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우리 존귀하신 성도님들의 삶과 가정과 일터 가운데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앞뒤 좌우에 계신 분들과 사랑의 고백, 축복의 인사 나눕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인생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각자 생각하는 것이 있을 텐데 어떤 분은 돈 버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고요. 어떤 분들은 내가 학생 때를 다 지나서 그렇지 공부하는 게 제일 어렵더라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고, 지금도 나는 공부하라면 안 한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야 이제는 건강 관리하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듣다 보면 결국 이렇게 말하죠.
그런 것들도 어렵지만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제일 어렵습니다. 이것이 이제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말합니다. 일이 힘든 건 견딜 수 있습니다. 일이야 내가 해야 될 거니까 견디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힘들면 정말 마음이 힘들고 결국 무너져버립니다. 이렇게 봐야죠. 실제로 많은 직장인들이 하는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업무 때문에 힘든 것보다 사람 때문에 힘들어서 퇴사를 고민합니다고 말하는 것이죠.
사실 그렇습니다. 일은요 하면 익숙해질 수 있어요. 그렇죠. 내가 하는 만큼 훨씬 더 익숙해집니다. 그런데 사람과의 갈등은 쉽게 익숙해지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죠. 별일 없다가도 식탁 앞에서 말 한마디가 그날 하루의 분위기를 바꿔놓게 되는 것이죠. 그 한마디 때문에 하루 종일 꼭 그 이야기를 해야 했어라면서 하루 종일 기분이 언짢은 않게 지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는 예외일까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는 은혜롭게 잘 드렸습니다. 그런데 사람 때문에 시험에 듭니다라고 말하죠. 그래서 어떤 분은 농담합니다. 목사님 제가 천국은 가고 싶은데 사람은 안 만나고 싶습니다. 천국 가서 사람 만나기 싫다는 것이죠. 예전에 어떤 목사님이 아버님도 신앙생활을 안 하시고 어머님도 신앙생활을 안 하셨어요. 아버님은 맨날 술 드시고 오셔서 집에서 행패 부리시다가 돌아가시기 전에 예수를 영접하셨어요. 어머니께서 소천하시기 전에 어머니께 말씀을 잘 드렸더니 어머니도 예수를 믿겠다고 결국 그렇게 고백을 하신 거예요. 그래서 이 목사님이 너무나 행복하고 즐거워서 어머니 이제 천국 가실 겁니다. 천국 가셔서 아빠 만나서 행복하게 사세요 이렇게 얘기했더니 이 엄마가 갑자기 고민을 하더라. 아빠가 있는 천국이라면 안 가고 싶다 그렇게 얘기했거든요.
이게 무슨 얘기냐면 그만큼 사람 관계가 어렵다는 이야기죠. 여러분 그런데 천국이라는 곳은요 혼자 보는 것이 아니죠. 그렇죠 어떤 분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과 관계가 힘드니까 차라리 나 무인도에 가서 혼자 살고 싶습니다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번 생각해 보세요. 무인도에서 혼자 있으면 싸울 일이 없어요. 너 되게 좋죠 싸울 일이 없어요. 그런데 싸울 일만 없으니까 사랑할 사람도 없죠. 우리는 사랑하면서 살아야 되는데 싸울 사람도 없지만 사랑할 사람도 없는 거예요. 용서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섬길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을 떠나서는 사랑도 용서도 섬김도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혼자 살라고 창조하지는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확인을 시켜드릴까요?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순서대로 쭉 나열하시면서 붙였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좋았더라 그리고 심히 좋았더라.
그렇게 하나님은요. 창조하시면서 좋다는 표현만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좋지 아니하다는 표현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어요. 정반대의 이야기죠. 그 표현이 언제 나온 줄 아십니까?
성경 창세기 2장 18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어요. 우리 한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창세기 2장 18절 말씀이 안 띄어지나요? 제가 읽어드릴게요.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기 보니까 좋지 아니하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것을 보시면서 다 좋았다 좋았다고 말씀했지만 결국 사람이 혼자 사는 것 좋지 않게 보였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세워주신 것이죠.
가정만 세운 것이 아니죠. 공동체를 주셨고 더불어서 교회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즉 함께 살아가도록 하나님은 만들어 주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죄가 들어온 이후에 모든 관계가 깨어지기 시작한 것이죠.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너무나 좋은 관계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죄라는 것이 관계를 깨뜨린 것입니다.
아담이 하와를 탓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습니다. 사람과 사람, 형제와 형제가 서로 미워하는 구조가 발생된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예수를 믿고도 가장 변하기 어려운 것이 뭔가 그것이 관계라는 거예요.
우리 사실 교회 와서 예배도 드립니다. 하나님께 열심히 찬송도 합니다. 성경도 보고 기도도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 가운데 기록된 용서라는 것이 참 하기가 쉽지가 않아요. 그렇죠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고 그 사랑이 성경의 기초고 기본이고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될 건데 사랑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아 양보하며 산다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는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관계는 이미 옛 사람이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옛 사람 죽어야 할 옛사람이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것이 관계 문제라는 거죠. 그래서 성령께서 하시는 중요한 사역 가운데 하나가 바로 관계 회복이라는 거 그래서 성경에 기록돼 있잖아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시는 우리가 인간의 마음과 노력으로 애쓰고 노력해서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건 쉽지 않다는 거예요. 성령께서 우리에게 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성령의 사람은 말만 달라지는 거예요.
우리 지난주에 말에 대해서 얘기했잖아요. 성령이 우리 안에 있으면 말이 바뀌어질 수 있고요. 더 나아가서 관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아담 한 사람 때문에 관계가 깨어졌다면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 때문에 이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의 장을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수 믿는 증거는 다른 게 아니고요. 내가 예수 믿었습니다. 십자가가 우리 집에 달려 있습니다. 제가 성경을 들고 다닙니다. 이런 것보다도 예수를 믿으면 미워하던 사람을 이제는 품기 시작하는 거죠. 원망하던 사람을 용서하기 시작하는 거죠. 다투던 사람과 화목하기 시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 믿는 사람의 증거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서로 품으라고 말씀하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서로 품고 살 수 있을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함께 배우시고 저와 여러분 오늘 말씀 제목처럼 이제는 품으며 살겠습니다. 그런 고백이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선포되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첫 번째는요. 예수님처럼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12절 13절 말씀 우리 한목소리로 읽어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은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여러분 이 두 구절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단어가 있다면 옷 입고예요. 옷 입고 여러분 옷 입고라는 이 표현은 단순히 옷을 걸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선택해서 입는다는 거예요. 의도적으로 선택해서 내가 이 옷을 입어야지라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 나오실 때 다 옷을 입고 오셨잖아요. 고민 없이 입으신 분도 있겠지만 오늘은 이 옷을 입어야겠다 선택하신 분 있어요. 저도 넥타이가 이렇게 있으면 이번 주에는 무슨 색을 낼까 지난주에는 저 색을 했으니까 오늘은 이 색을 내야겠다 하면서 제가 선택을 하게 됩니다. 누구나 다 선택을 하죠. 그래서 중요한 모임 갈 때는 어떻습니까?
그래도 좀 더 반듯하게 입으려고 애를 쓰고 노력하지 않으면 되죠. 그렇게 우리는 중요한 모임을 생각하면서 나가죠. 운동하러 나갈 때는 정장 입고 나가는 사람 없습니다. 그렇죠 운동하러 갔는데 오늘 정장 입고 한번 열심히 뛰어보자 이러고 나가시는 분 없잖아요. 운동복을 입게 되는 것이죠. 결혼식장 갈 때는 반대로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가는 것이죠. 장례식장 갈 때는 이왕이면 검은색으로 입고 가는 거예요. 어쨌든 그 상황과 환경에 따라서 우리는 옷을 입습니다. 그리고 그 옷이 결국 그 사람의 정체성과 지금의 목적을 분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다는 것이죠.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날마다 의도적으로 입어야 하는 것이 있는데 오늘 본문에 뭐라고 돼 있어요?
보니까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이라는 이것을 의도적으로 입으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는 꼭 알아야 됩니다. 그래 이것이 내가 그냥 거저되는 것이 아니라 긍휼의 옷을 입고 오늘 긍휼의 마음을 베풀어야겠다.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내가 예수님처럼 자비를 베풀어야겠다. 예수님께서 온유와 겸손 내게 배우라 했으니 그래 저 온유 겸손 내가 오늘은 의도적으로 조금 더 노력해 봐야겠다. 오래 참음이라는 것을 내가 그래 인내가 중요하다는 거 오늘도 참고 또 참고 한 세 번 정도 참아보자. 그렇게 의도적으로 읽는 것이죠.
여러분 그러기 위해서 그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바울은요. 뒤에 이제 용서를 말하기 전에 12절 앞부분에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아주 중요한 사실을 먼저 이야기하는데,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거 바울은 그러니까 너희가 옷을 입기 전에 어떤 존재인지를 먼저 인식하라는 거예요. 그 존재에 맞게 옷을 입으라는 거죠. 그러면 여러분 바울이 말한 그 존재는 어떤 존재냐 여기 보면 세 가지 은혜가 나오는데 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이죠.
두 번째는 거룩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완벽하다는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그죠 구별되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세상 사람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식을 가지고 자는 것이죠.
그리고 세 번째는 사랑받는 사람이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말씀입니까?
우리가 잘해서 사랑받는 것 아니잖아요. 실수해도 혹 우리가 넘어져도 우리가 부족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를 자랑하신다. 왜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사랑을 표현해 주는 그것이 바로 은혜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어서 우리는 사랑받는 자 그래서 여러분 은혜를 알 때 용서라는 다음 단계가 되는 거죠. 왜냐하면 내가 사랑받았기 때문에 내가 용서받았기 때문에 내가 긍휼을 입었기 때문에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받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사랑하기가 어렵습니다. 용서받지 못하면서 살았던 사람 용서하며 살기가 쉽지가 않다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오늘 말씀에도 나 같은 사람도 용서하셨는데 그 마음이 다른 사람을 품게 하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피차 용서하라 이렇게 말씀을 하세요. 여러분 사실 용서라는 것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용서하기 어려우시죠. 내 마음의 미움과 그리고 저 사람에 대한 안 좋은 마음인데 어떻게 용서가 되겠어요? 용서가 참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선 상대방의 잘못이 기억나서 내 머릿속에 그 사람의 잘못이 생각나고 기억나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제게 와서도 그렇게 질문 목사님이 잊어버리고 용서하겠는데 잊어버리 머릿속에서 맴버도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 맞아요. 사람은 원래 잘못된 것 잘못한 일 잘 안 읽게 되어 있다는 것이죠.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신기하게도 칭찬 열 마디 받은 것은 다 잊어버려도요. 나에게 상처 준 한마디는요. 10년이 지나가도 잊어지지가 않아요. 머릿속에서 뱅뱅 도는 거예요. 그래서 용서는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용서는요. 상처보다 은혜를 선택할 때 가능해지는 거예요.
요셉을 통해서 그 원리를 한번 좀 말씀을 드려볼게요. 용서가 어떤 원리로 되는지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렇죠 그리고 결국에는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20년이라는 세월 동안 가족과 단절된 생활을 해야만 했죠. 생이별한 거예요. 나중에 요셉이 어느 자리에 올라갔습니까?
총리의 자리에 올라갔습니다. 그러면 얼마든지 그의 권력, 그의 위치, 모든 것을 봤을 때 복수할 수 있을 만한 자리에 선 거예요. 그런데 요셉은 형들을 보고 이렇게 말하죠. 당신들이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으니 여기에서 당신들이 나를 해하려 했으나 이거는 상처지 이거는 좋지 않은 생각 아픈 기억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것만 생각하면 난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바꿔주셨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선하심이 더 크게 보이기 때문에 그걸 나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고 말하는 것이죠. 요셉은 상처보다 하나님의 섭리를 더 크게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위해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을 못 박는 사람들을 향해서 용서를 선포하신 예수님 여러분 이것이 바로 성도의 용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상대가 용서받을 만해서가 아닙니다. 상대는 여전히 용서받을 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내가 먼저 용서받았기 때문이 용서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은 말한 것이 이거예요.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하라는 것을 넣어준다.
그게 없으면 사실 어렵다는 거예요.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심 같이 그 마음을 가지고 서로 용서할 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워갈 수 있다는 것이예요.
여러분 성령의 사람은 상처를 안 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의 사람들이 상처받아요. 말 한마디에 상처가 되고요. 행동 하나의 상처가 됩니다. 직분이 있으면 상처가 안 받는 것이 아니라 목사는 저도 상처받습니다. 여러분 한마디에 상처받을 수 있고요. 괴로울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 상처받는다고 해서 용서를 못하는 건 아니지 예수님처럼 우리는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때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거죠. 내 감정으로는 안 되지만 주님이 나를 용서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한 걸음씩 나아가 보는 거죠. 그래서 어제는 안 됐지만 오늘 말씀을 이은 예수님처럼 예수님이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해 봐라. 그 말씀 앞에 한번 순종해 보는 거예요. 그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의 삶 가운데 회복이라는 것으로 찾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변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 내가 예수의 옷을 입으면 비율의 옷을 입고, 자비의 옷을 입고, 겸손의 옷을 입고, 온유의 옷을 입고 오래 참은 옷을 입 할렐루야 별로 이 옷이 탐탁지가 않으세요? 굉장히 아름다운 옷입니다.
여러분 이 옷을 입고 예수님처럼 용서하는 사람이 될 때 성령께서 우리 가정에도 이 목장에도, 우리 교회에도 아름다운 관계로 회복시키신다는 이 사실을 기억하셔서 저와 여러분들이 먼저는 기억해야 될 것. 내가 택함 받은 사람이구나, 내가 거룩한 사람이구나 내가 사랑받는 사람이구나. 그래 내가 죄인인데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해 주셨고 나를 거룩하게 구별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나를 사랑하신다 하니 나도 그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옷을 입어보자. 옷을 입, 긍휼의 옷도 입어보고, 자비의 옷도 입어보고, 겸손의 옷도 입어보고, 고유의 옷도 입어보고 오래 참는 옷들 그리고 그렇게 한 번 나도 예수님처럼 용서의 첫 한 발을 내딛는 삶을 살아보자.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먼저 용서하는 삶을 선택하는 은혜가 우리의 삶 가운데 부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는요.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하라는 거예요. 첫 번째는 옷을 입는 거예요. 그다음에는 더해져야 될 게 있어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우리 14절 말씀 한번 읽어보실까요?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이 구절에서 중요시 봐야 할 것은 더하라는 동사입니다. 바울은 이미 긍휼, 자비, 겸손, 오유, 오래 참음이라는 옷을 입으라.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용서해라라고 이야기했다면 거기에서 끝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여기에다가 무엇을 더하라는 거예요?
바로 사랑을 더하라. 왜 그럴까요? 왜 바울은 그렇게 옷을 입었으면 됐지 사랑을 더하라고 이야기했을까요?
그 이유는 사랑이 없으면 앞에서 말한 모든 것들이 오래 가지 않아 사랑이 없으면 금방 끝나버린다는 거예요. 용서도요. 사랑이 있어야 지속적으로 갈 수 있는 거예요. 오래 참는 것도요. 사랑이 있어야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겸손도 사랑이 있어야 진짜가 되는 것이 그래서 바울은 사랑을 온전하게 매는 띠다.
여러분 당시의 옷이 이렇게 풍퍼짐한 옷인데 이 띠로 매지 않으면 되게 지저분해지고 흐트러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b로 매서 단정하게 하는 것 그러니까 내가 입은 옷을 단정하게 하는 것은 결국 b의 역할이라는 것이죠. 사랑이 없으면 여러분 우리가 옷을 입었지만 흐트러질 수 있다는 거예요. 오래 유지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 따라서 사랑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b가 된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여러분 솔직히 제가 말하는 것에 동의가 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변에 내 주변의 사람들을 쭉 한번 이렇게 쭉 생각하면서 사랑하기 쉬운 사람이 많습니까?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이 많습니다. 사실 사랑하기 쉬운 사람보다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이 제 주변에 바 누구나 그럴 거예요. 나와 생각이 다르죠. 성격도 다릅니다. 상처 준 사람도 있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도 있어요. 주변에 다 막 내가 좋다고 나를 응원해 주고 나에게 힘 주고 격려해 주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내 주변에 더 많을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사랑할 만한 사람만 사랑하라고는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까지 품어야 되는 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왜냐하면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12 제자를 끝까지 사랑하셨죠 그렇죠
그런데 여러분 아시다시피 12제자 중에 특이한 세 사람만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렇죠 특이한 세 사람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베드로는 세 번 부인해 버렸어요. 그렇죠 예수님 입장에서는 배신을 배신 도마는요 의심을 했잖아요. 그렇죠 아니 내가 구하는데 그걸 못 믿고 이거 만져봐야 하나 이렇게 호통을 칠 수 있잖아요.
또 한 사람 누가 떠오릅니까?
가룟 유다는 아예 예수님을 팔아버렸잖아요. 이런 대응만큼 하실 수 있지 그렇잖아요. 12명 중에 3명이면 여러분 적은 있습니까? 굉장히 많은 숫자에 포함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요한복음 13장 1절 한번 읽어보실까요? 요한복음 13장 1절 말씀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시작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어떻게 사랑하셨다고요?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어요. 여러분 끝까지라는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라는 의미도 있고요. 완전한 사랑을 말하기도 하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거 우리는 종종 저 사람이 먼저 변하면 내가 사랑하겠습니다. 저 사람이 먼저 사과하면 내가 품어보겠습니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 예수님을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 그래서 로마서 5장 8절은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이렇게 주시잖아요.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시작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여러분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이 아니라 은혜였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 믿고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요. 사랑을 감정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결단하는 거예요. 내가 말씀에 따라서 주님의 마음처럼 결단해 봐야 돼 사랑을 선택하는 겁니다.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이를 용서할 것인가 사랑할 것인가, 얘를 미워할 것인가 사랑할 것인가에 대해서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죠. 사랑은요. 포기하지 않는다. 내가 그래 이 사랑을 놓치지 말아야겠다. 그래서 끝까지 품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을 따르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가정을 세우는 힘도 사랑임을 믿으시죠.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나의 사랑으로 가정이 세워지는 은총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목장도요. 여러분 사랑의 이름으로 세워져 교회가 건강해지는 거고요. 서로 사랑할 때 건강해지는 거. 사람들은 능력 있는 사람을 좋아하지만 끝까지 남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똑똑한 사람은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마음에 남는 것은 사랑이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 말씀하죠.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 일은 뭐라고요?
사랑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서만 하고 끝나지 마시고 그 위에 사랑을 더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오래 참음, 참음으로만 잊지 마시고 거기에 사랑을 더하는 은총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관계를 유지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관계가 묶여지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그래서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조건을 따지기보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를 품모음으로 말미암아서 그래서 맡기신 우리 신앙 공동체를 함께 아름답게 세워가는 은혜가 있기를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세 번째는요. 그리스도의 평강을 선택하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 15절 말씀 이어서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15절입니다. 시작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바울은 앞서서 옷을 입어라 이렇게 말씀했죠. 그리고 거기에 뭘 더하라고요?
사랑을 더하라 옷 입고 사랑을 더하는 거 그리고 이제 이어서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주장하게 하라 그렇게 말씀 이 단어 주장하게 하다라는 이 단어는 운동 경기에서 심판이 판정을 내리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경기 중에 여러분 의견이 다를 수 있잖아요. 그렇죠 하다 보면 이쪽 편 의견과 이쪽 편 의견이 다를 수 있어요. 여러분 우리 윷놀이만 해도 지역마다 법칙이 달라서 그 때는 늘 기준을 정하잖아요. 이게 되는지 이게 뒤집어진 건지 이게 있는지 아닌지 그러니까 의견은 다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선수들은 자기 생각이 다 있단 말이죠.
관중들도 마찬가지예요.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는 그런데 결정은 결국 누가 합니까?
심판이다 마찬가지입니다. 관계 속에서 내 감정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어요. 내가 지금 이런 감정에서 어떻게 용서할 수 있어 내 감정의 모습이죠. 내 자존심이 말할 때도 있어요. 내가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자존심이 말할 수도 있지 내 억울함 아니 내가 손해 보는 건데 어떻게 내가 그럴 수 있어? 내 억울함을 말할 수 있어.
그런데 성령의 사람은요.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평강이라는 것. 최종 결정은 평강을 찾는 곳에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관계가 깨어지는 이유 대부분 큰 사건 때문이 아닙니다. 정말 작은 문제 때문에 시작이 돼요. 내가 먼저 사과해야지 왜 내가 먼저 해라는 이 작은 부분 내가 틀린 것이 아닌데 그렇죠 내가 옳아요.
근데 거기에서부터 갈등이 시작되는 거예요. 나한테 먼저 연락을 하라고 그랬죠. 여러분 이런 생각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결국에는 그 사이가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것이죠. 가족 간의 관계도 그렇고요. 친구 간의 관계도 그렇고 교회 안에서도 벽이라는 것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강은 그냥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이것 또한 우리의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좋은 예를 한 가지 들려드릴게요. 성경에 나온 예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이 가축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니까 목자들끼리 다투는 거예요. 서로 좋은 곳에서 이 양들을 키우기 위해서 다투는 거예요. 충분히 싸울 수 있는 상황이잖아요. 그렇죠 좀 적으면 서로 잘 분배가 될 텐데 서로 많아지니까 다툼이 생긴다. 그 상황에서 여러분 아브라함은 그것보다 연장자였습니다. 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든지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먼저 말합니다.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서로 다투지 말자.
그리고 룻에게 먼저 선택권을 양보했다는 걸 알겠어요. 왜 그랬습니까?
땅을 선택하는 것보다 관계가 더 중요했다. 재산보다 평강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 하나님은 요이 떠난 후에 어떻게 했어요? 더 좋은 땅 내어줬으니까 아브라함이 손해 봤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지 않아요. 우리가 볼 때 아브라함이 손해 본 선택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내 동서남북을 보면서 이거 너에게 다 줄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하나님의 마음 여러분 이 평강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죠.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어떤 복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이라는 이거 대단한 복이에요. 하나님의 아들 됨의 복 화평케 하는 여러분 주님은 화평을 좋아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화평이시기 때문에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사목, 이웃과 이웃의 사목 이것이 십자가의 진짜 목적이잖아요. 여러분 따라서 성령의 사람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요. 갈등을 키우는 사람이 아니라 화평을 만드는 사람이에요. 문제를 확대하는 사람이 아니라 관계를 회복시키는 사람이 돼요.
여러분 가정 안에서 누군가는 화평의 사도가 돼야 돼요. 목장 안에서도 누군가는 화평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누군가는 먼저 손을 내밀어야 된다는 것이죠. 그 사람이 바로 성령의 사람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그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보십시오.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라고 돼 있어요. 하나님께서 부르셨잖아요. 저와 여러분들이 부르신 거예요. 그런데 뭐 하라고 부르셨어요? 평강을 위해서 부르셨어요?
우리로 하여금 경쟁하라고 부른 게 아니고요. 싸우라고 부른 게 아니고요. 질투하라고 부른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평강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다. 그러므로 여러분 내 감정보다는 그리스도의 평강을 앞세우는 사람이 바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다. 내 자존심보다 공동체를 먼저 세울 줄 아는 마음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이죠.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평강의 마음의 채워지고 채워져서 서로에게 평강을 세워가는 믿음의 동반자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결론입니다. 우리 서로를 향해서 이렇게 한번 이야기해 볼까요?
이제는 서로를 품읍시다.
그동안 안 품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제는 좀 복음 안에서 말씀에 기초해서 좀 잘 알고 품자는 거예요. 여러분 그동안 안 품었다는 얘기 절대 아닙니다. 우리가 품으면서 살지만 성경의 원리에 맞춰서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품으면 훨씬 더 좋겠다 그런 마음이에요.
그래서 성령의 사람은요. 관계가 달라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상처를 붙들고 살 수도 있지만 여러분 그 상처 위에다가 무슨 옷을 입어야겠어요?
극명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이라는 옷을 입으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이제 용서의 마음을 갖게 하는 기본 장착이잖아요. 이 장착을 한 다음에 그것과 더불어서 뭘 더하라고요?
사랑을 더하세요. 사랑은요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핵심 이 핵심을 놓쳐버리면 안 되잖아요. 사랑을 통해 그리고 뭘 주장하라고요?
평강 평강 그 사랑 가운데 우리가 만나는 관계 속에서 다툴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지만 그래 주님이 우리를 평강하라고 부르셨지라는 마음으로 대하는 거죠. 서로에게 맞아 내가 집사님과 권사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 평광을 누리라고 우리에게 이 자리를 만들어주신 것이 그럼 여기에서만 이 거 아니죠 세상 가운데서도 맞아 우리를 평강의 사도로 세상 가운데 보내주셨지 그래 내가 이 자리에서 나로 하여금 평강이라고 사실 그렇잖아요.
어떤 사람이 있어서 그 우리가 다툼이 일어나는 경우 어떤 한 사람으로 해서 그 공동체가 화목해지는 경우가 있어요. 그 어떤 한 사람이 내가 돼야 되는데 내가 될 때 여러분 분쟁에 앞장서는 자가 돼야겠습니까? 평강에 앞장서는 자가 돼야겠습니까? 평강의 앞장에 서니까 여러분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저와 여러분들이 조건에 따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끝까지 평광을 세워가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드는 저와 여러분 우리 신흥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