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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으리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넉두리
스탠포드 발 3신 ***이기택 총재님과 함께*** 저희들의 정치적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이기택 총재님께서 평통 수석 부의장 자격으로 11일부터 19일까지 미주 순방길에 오르다. LA를 거쳐 이곳 샌프란에서 1박을 하면서 평통위원들과 간담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은 기쁜 마음에 일찍 공항으로 향했지만 시간을 못 맞추어(이 나라에도 러시아워가 있군요)바로 중국식당으로 허겁지겁 들어오는 우리들에게 "어! 너희들 어떻게 잘 찾아오네. 둘이서 운전해 다닌다니 똑똑 하구나" 이국 만리에서 만난, 지각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어른의 첫 애정표현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91년 도의원 선거시 처음으로 뵈었는데 그때 연세가 지금의 우리쯤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4.18당시 고대 학생회장으로 4.19의 분수령을 만든 장본인으로 67년 제 7대 국회의원(그때가 29세)부터 정치를 시작하여 7선을 하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아득한 옛날 이야기이지요. 안동서 행사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시는 길엔 수안보에서 꼭 꿩 샤브샤브를 즐겨 드셨습니다. 그 때만 해도 뒤에 따라 다니는 사단 들이 많아 총재님이 이동 하실 때마다 대식구가 이동을 하였지요. 총재님 덕분에 맛 본 꿩 샤브샤브를 작은 아들이 좋아하여 서울 올라 갈 때는 꼭 수안보에 들러 아들과 함께 꿩 샤브샤브로 휴식을 취하며 여유를 부렸는데 이젠 수안보도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지날 일이 없어졌네요. 40년 야당 생활에 처음 여당직 명함,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라는 직함을 가지시고 이곳 미주로 날아오셨습니다. 오랜 세월 샌프란에 사시면서 총재님과 연을 맺어 선거 때 마다 한국을 들락거린 김 선배님은 멀리서 총재님을 뵈면서 그저 흐뭇해 할뿐이네요. 30대부터 총재님이 좋아서 수행하시다가 총재님께 투표 할 기회가 있을까하여 시민권을 취득하지 않고 있다가 올해 이제서야 시민권을 취득했다는 그분도 이젠 50을 훌쩍 넘어 머리가 희끗희끗, 공식적인 직함을 갖고 고국의 전국을 다니시고 이곳 미주까지 오신 총재님을 뵈면서 만감이 교차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총재님 스스로도 오랫만에 하시는 공식적인 업무출장이라 무척 긴장하시는 눈치인 것 같았습니다. 반사적 광명이랄까. 이기택 총재님을 이틀 동안 옆에서 뵈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드네요. 우리나라 오랜 야당 정치인의 산 증인 중 한분으로서 간혹 던지는 말씀에서 아랫사람을 사랑하는 표현을 저렇게 하는구나하고 느꼈습니다. 점심을 먹으면서 이곳 평통회장이 남편에게 '저녁 공식행사에도 참석하지요' 하고 물으니 총재님께서 대뜸 "걔들 할 일도 없고 밥 얻어 먹을 곳도 없는데 참석해야지"하시면서 이곳 평통회장 주최의 모임에 우리가 참석하는 것의 당연함을 자연스럽게 표현하시는 모습에서도 많은 연륜을 느꼈습니다. 계속 한국에서의 빡빡한 일정과 이곳 LA에 도착하여 시차적응도 안된 상태에서의 일정 등을 이야기하시면서 힘들다고 토로하시지만 남편은 연신 "총재님! 좋지요. 피곤하시다고 하시면서 즐거워 하시잖아요". 하면서 농을 주고 받곤 합니다. 잠시 쉬시라고 하여도 쇼파에 앉아서 조시면서 괜찮다고 하십니다. 그냥 오랫만에 만난 친구가 좋고, 후배 동지들이 좋고, 당신이 공직자로서의 직함을 가지신 것이 좋으신 것 같았습니다. 공식적인 행사 중간 중간 쉬시는 시간 마다 총재님 방에서 터 놓고 우리끼리 웃고, 지난 이야기하며 즐거워하였습니다. 어디든 담배 피우기가 힘든 곳에서 총재님의 담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긴장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회의 중에도 슬그머니 나가야 하고 비행기 타기 전에도 또 한 대 하여야 하니... 50대의 멋진 총재님으로 첫 대면을 하다가 이제 70이 넘으신 분으로 가까이서 뵈니 나이듦 또한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이듦이란 주위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줄 수 있고, 연륜을 보여 줄 수 있고, 자신에 대한 욕심이 없어지며 세상사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산 증인으로서 흘러간 비화를 자연스럽게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뉴욕으로 떠나시는 총재님을 우리 모두는 마치 보채는 어린 아이를 보내는 양(검색시 벨트 풀고, 구두 벗고, 상의 벗고도 무엇에 걸렸는지 한참을 따로 격리되어 있는 모습을 유리 건너편에서 모두 보고 있었음. 아마 라이터가 아닌지) 그렇게 공항에서 배웅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총재님! 미주에서의 나머지 공무수행 잘 하시고 건강하게 고국 돌아가시길. 지금의 그 모습으로, 훈훈한 총재님으로, 저희들 곁에 오래 계서주시길 바랍니다. 2008년 10월 13일 ****CASA DE FRUTA(스페인어로 과일로 가득한 집)**** 우리가 사는 팔로 알토시에서 101하이웨이를 타고 40분 정도 남쪽으로 가서 마늘로 유명한 길로이를 지나 152번 국도를 타고 동쪽으로 한 20여분. 미국의 농촌은 어떤가 하고 혼자서 길을 나섰습니다. 아직 너무 먼 거리는 무리이고 1시간 30분 정도의 거리이니 한번 시도를. 간식 조금 넣고 출발을, 한국서 잘하던 운전도 미국의 하이웨이에 올라서니 괜한 두려움이. 일단 40분정도 하이웨이를 달리면서 옛 서부극에서나 봄직한 사막과 같은 풍경을 보면서 일종의 쾌감을 느낍니다. 난 혹시나 이 광활한 대지의 딸은 아니었는지. 드디어 긴장을 하고 이차선의 좁은 지방도로를 들어서니 길 곳곳에 과일이름이 쓰여진 팻말 들이 즐비하네요. 우리나라 국도에서 복숭아, 사과, 옥수수 등 그 지방의 제철 과일들이 거리에 나와 있듯 이곳 미국의 농산물도 좁은 국도거리에 나와 앉아 있습니다. 지나다 차가 많이 서있는 가게에 일단 나도 서 봅니다. 우리나라보다는 종류가 많군요. 문 입구에 옥수수가 제 멋대로 많이 싸여있고, 토마토, 복숭아, 사과, 포도, 그리고 제가 모르는 열대과일 몇 가지와 마늘이 많이 쌓여 있네요. 우리만 마늘 먹는 줄 알았더니 갈릭이라고 껍질이 희고, 또한 피클로도 많이 만들어 져있습니다. 서울서 8월에 출발하느라고 올해 옥수수를 충분히 못 먹고 와서 여기서 처음 먹었더니 크기는 한데 한국처럼 쫀득한 맛이 없어서 실망을 했지만 자꾸 먹어 보니 물이 많고 달콤한 것이 오히러 담백한 맛에 요사이는 고구마보다 옥수수를 간식거리로 자주 삶아먹습니다. 옥수수 몇 자루와 복숭아, 토마토, 마늘 피클을 사서 또 정처없이 차를 몰아 봅니다. 혼자 다닌 다는 것이 조금은 허전하면서도 오랫동안 바쁜 남편과 산 나에게 붙어진 나쁜 버릇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곳에 와서도 남편은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만남이 더 중요한지 항상 후배니, 동문이니 하면서 휴일에도 혼자 나가기가 바쁘군요. 허긴 처음와서 식사약속 장소에 남자끼리 인줄 알고 혼자 나갔다가 상대방 부인이 나온 것을 보고 급히 집으로 달러 온 적도 있으니까요. 가정보다 바깥을 더 중요시 여기는 남편에게 한 달간 만이라도 다른 사람과 약속하기 전에 아내와 같이 밥 먹고 아내야 무엇을 해야 할 지 생각해 보라고 주문을 했는데 어찌 실행을 잘 할지 모르겠군요. 일단 저는 남편과 상관없이 저의 집에서 편도 2시간 거리의 볼거리를 모두 총 집합하고 있습니다. 북쪽의 와인 집산지(나파 밸리) 쪽으로도 가봐야 하고, 서쪽의 바닷가(몬테레이) 보러가야 하기도 하고, 국립공원(요세미티)쪽으로 트래킹도 하고 싶고, 어떻든 주중에는 열심히 영어 공부와 학교의 행사와 공짜 공연 보러가기에 바쁘고 주말이면 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좁은 국도길 주변엔 캘리포니아 포도주가 유명한 것 만큼 포도밭이 많고, 30센티 정도 키의 푸른 색 작물은 무엇인가하고 가까이 가보니 토마토 밭이 아닌가요. 우리나라에서는 하우스에서 정성스레 키우는 토마토가 여기서는 끝없이 자유로이 자라고 있군요. 오래 살지 않았음직한 집들과 폐사들이 간혹 보이는 것은 어느 나라 농촌에서나 볼 수 있는 풍물이군요. 다른 점은 농장이 너무 넓어서인지 농장 안에 간이 화장실이 곳곳에 세워져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드디어 가슴 조이며 운전하여 오늘의 목적지인 CASA DE FTRUTA에 도착. 인디언들이 수백년 동안 평화스럽게 거주해온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라군요. 먼저 백년은 되었음직한 오래된 농기계들이 여기저기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있네요(일부러 관광지로서 수없이 많은 농기계를 즐비하게 늘어 놓음) . 물레방아는 돌고 아주 큰 호박(요사이 여긴 Pumpkin 축제가 한창입니다)들은 여기저기 널 부러져 있고, 장난감 같은 작은 기차는 사람을 태우고 칙칙폭폭 거리고, 가게 안에는 갖가지 과일과 열매들...... 정말 종류가 너무 많아 저런 것을 어디서 다 재배하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와 똑 같은 밤이 있고 땅콩이 있고 추석 때 못 먹은 밤을 조금 광주리에 담아 봅니다. 아니 대추는 왜 그리 큰지 우리나라 보통크기의 자두만하군요. 옆 가게에 들러 이 지방에서 나는 와인 한 병과 쵸코렛을 사고 누구에겐가 선물 할 요랑으로 3불짜리 사탕을 몇 통 사봅니다. 가을 주말이면 르네상스 축제라고 장터에서 1500명가량의 스텝들이 중세기사람처럼 분장을 하고 그 시대의 언어를 외치며 호객 행위를 한다는 데 오늘은 장이 잘 서지를 않고 있군요. 대신 뚱뚱한 여인이 휘저으며 직접 만드는 아이스크림을 한컵 사서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햇살을 마음껏 쬐며 벤치에 앉아 여유를 부러봅니다. 옛 농촌의 추억거리를 더듬는 듯 주로 백인 노인 부부를 실은 관광버스는 끊임없이 들어오고 나는 혼자서 또 호기심에 다른 곳을 향해 떠나봅니다. 2008년 9월 28일 한 달 넘게 호기심에, 공짜라는 것에, 자연이 너무 좋음에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는데 이젠 좀 조용히 지내야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남편은 요사이 낮에는 영어수업에과 세미나에, 저녁에는 테니스를 많이 쳐서 총각처럼 몸이 날렵해 졌습니다. 저는 이제 갱년기인지 아님 너무 싸 돌아 다녀서인지 피곤이 자주 오네요. 나이 생각을 하고 좀 주저 앉는 법도 배워야겠지요. 모두 잘 지내시길 바라며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 2008년 10월 15일 저녁에 스탠포드 웨스트에서 배영숙
샌프란의 소살리토에서
이기택 총재님의 오랜 그림자 샌프란의 김대이님, 한국서 같이오신 이정충님(남선이 처가), 샌프란의 김대부
첫댓글 스텐포드발 3신 수정본(사진 첨가 등)입니다. 제가 좀 성급히 퍼 오다 보니 번거로움이 발생했습니다. 이전의 댓글을 옮길 수 있는지 쥔장께 문의 중입니다.
댓글을 옮길 순 없구요. 그냥 지금 그대로 남겨 두는게 좋을 거 같아요
알구, 괜히 번거로움을....돈오님 부끄럽습니다. 앞의 것이든 뒤에 것이든 하나는 삭제 해주세요.
어떻게든 댓글과 조회수를 같이 옮기려 했더니 안 되네요. 저의 불찰입니다. 이전의 글에 댓글을 달아주신 김지영님, 김대원님, 조정은님, 이혜숙님, 김삼진님 그리고 안동댁님께 감사와 더불어 죄송하고 참고로 열람수는 83이었습니다.
용서해 드릴테니 술 한 잔 사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