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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1) 全國의 風景돌아보기, 慶北 慶州 佛國寺
慶州 佛國寺 -사적 제502호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록
慶州 吐含山에 있는 佛國寺는 大韓敎曹溪宗 第11敎區本寺로, 新羅 景德王 10년(751) 宰相 金大城이
發願·開創해, 惠恭 10년(774)에 완성했으며, 朝鮮 宣祖 26년(1593) 壬辰倭亂때 義兵駐屯地로 倭軍이
목조건물을 불태웠다. 이후 極樂殿, 紫霞門, 泛影樓 등 일부건물만 命脈을 이어오다가 1969년~1973년
발굴조사 뒤 復元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境內에는 東西길이 90m의 石築과 통일신라시대의
多寶塔과 釋迦塔(3층 석탑), 紫霞門으로 오르는 靑雲橋·白雲橋, 極樂殿으로 오르는 蓮華橋·七寶橋가
國寶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이러한 문화재는 당시 신라사람들의 돌을 다루는 솜씨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아울러 毘盧殿에 모신 金銅毘盧遮那佛坐像과 極樂殿에 모신 金銅阿彌陀如來坐像을 비롯한 여러
文化遺産도 당시의 찬란했던 불교문화를 되새기게 한다.
불국사는 화려하고 장엄한 부처의 나라이며 예술적 技倆이 어우러진 新羅佛敎美術의 精髓로, 1995년 12월
石窟庵과 함께 世界文化遺産에 등재되었다. (*霞: 노을 하 *泛: 뜰 범 *髓: 뼛골 수)
(01) 佛國寺 一柱門 -2007.10.17사진
(02) 天王門
一柱門과 不二門의 중간에 있는 문으로, 佛法을 수호하는 外護神(佛國淨土의 외곽을 지키는 신)인 四天王을
안치했다. 사천왕은 古代印度宗敎에서 숭앙하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釋迦牟尼에게 歸依해 부처와 佛法을
지키는 守護神이 되었다. 四天王은 동쪽을 지키는 持國天王(왼손에는 칼을 쥐고 오른손은 주먹), 남쪽
增長天王(오른손에는 龍을 움켜쥐고, 왼손에는 如意珠), 서쪽 廣目天王(三枝槍과 寶塔을 들었음), 북쪽을
지키는 多聞天王(琵琶를 잡고 줄을 튕기는 모습)이다. (*枝: 가지 지 *琵: 비파 비 *琶: 비파 파)
(03) 慶州 佛國寺 靑雲橋 및 白雲橋 -국보 제23호
불국사의 禮拜空間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靑雲橋와 白雲橋, 서쪽의 蓮華橋와 七寶橋가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大雄殿으로 향하는 紫霞門과 연결된 다리로,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는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체 34계단으로 위는 16계단의 청운교가, 아래는 18계단의 백운교가 있다.
靑雲橋는 푸른靑年의 모습으로, 白雲橋는 흰머리老人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이며, 경사면을 45°로 구성해 정교하게 다듬었다.
다리아래는 무지개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 視線을 부드럽고 生動感있게 했다. 統一新羅 景德王 10년(751)에
세운 것으로 보이며, 당시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귀중한 遺物이다. 무지개모양을 이룬
다리 아래부분은 우리나라 石橋나 城門에서 보이는 아치모양 虹霓橋의 시작점을 보여주고 있다.
(*虹: 무지개 홍 *霓: 무지개 예)
=紫霞門
統一新羅때 건립이후 여러 차례 重建·重修를 거쳐 1966년 크게 補修했다. 靑雲橋 및 白雲橋를 올라 자하문을
들어서면 大雄殿을 비롯해 佛國土가 전개된다. 이름을 ‘紫霞(붉은 노을)’라고 한 것은 부처님의 광명을
형용한 것이다.
(04) 慶州 佛國寺 靑雲橋 및 白雲橋의 側面모습
紫霞門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은 經을 보관하는 左經樓이다.
(05) 泛影樓
紫霞門과 安養門중간에 있으며, 法鼓가 있으나 원래는 梵鐘閣이었다고 한다. (*泛뜰 범)
<佛國寺古今歷代記(佛國寺古今創記)>에는 이 건물을 須彌山모양의 樓閣을 짓고
그 위에 108명이 앉을 수 있는 크기라고 기록하고 있다. 須彌山은 불교에서 세계의
중앙에 있는 거대한 산으로 靑雲橋 및 白雲橋의 층계가 33단으로 33天을 상징하고
泛影樓는 須彌山頂上 곧 世界窮極의 위치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景德王 10년(751)에 창건하고 壬辰倭亂 때 소실되어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지었다가
1973년 復元工事 때 지금모습으로 重建했다. (*須: 모름지기 수 *彌: 미륵 미)
(06) 慶州 佛國寺 蓮華橋 및 七寶橋 -국보 제22호
蓮華橋 및 七寶橋는 極樂殿으로 향하는 安養門과 연결된 다리로, 世俗사람들이 아닌 西方極樂世界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한다. 전체 18계단으로, 아래는 10단의 蓮華橋가, 위에는 8단의 七寶橋가 놓였다.
靑雲橋 및 白雲橋보다 규모가 작을 뿐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경사면 45°, 다리 아래가 무지개 모양 등 구조나
구성형식 등이 매우 비슷하다. 그러나 독특한 특징은 연화교의 층계마다 연꽃 잎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오랜
세월 스쳐간 사람들 발자국 탓에 彫刻이 희미 해져 지금은 통행금지이다.
통일신라 景德王 10년(751)에 세운 것으로, 창건때부터 사람들이 이 다리를 오르내리며 極樂往生을 祈願하고,
比丘尼가 된 신라 憲康王妃도 이곳을 오가며 왕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한다. 동쪽의 청운교 및 백운교가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비해, 섬세한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어, 佛國寺造形에 調和와 變化를 보여주고 있다.
=安養門
안양문은 極樂殿 앞의 中門으로. 安養은 極樂淨土의 다른 이름이다. 현재의 안양문은 1960년 重建한 건물로
高麗樣式으로 건축했다.
(07) 側面에서 본 慶州 佛國寺 蓮華橋 및 七寶橋
佛國寺 安養門, 蓮華橋 및 七寶橋-泛影樓-紫霞門, 靑雲橋 및 白雲橋가 보인다.
(08) 慶州 佛國寺 多寶塔 -국보 제20호 (문화재청 사진)
(*2007.10.04 현재 補修工事中임으로, 문화재청 사진을 올린다.)
多寶塔과 釋迦塔(佛國寺三層石塔)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29m,
10.75m로 비슷하다. 大雄殿과 紫霞門 사이의 뜰 東西쪽에 마주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多寶塔은 特殊形塔을, 釋迦塔은 우리나라 一般形石塔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釋迦如來가
說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 <法華經>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했다.
多寶塔은 層數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十字모양 平面基壇에는 四方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塔身과 그 주위에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佛國寺를 창건한
신라 景德王 10년(751)으로 보고 있다. 木造建築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發想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角, 8角, 圓을 한 탑에서 짜임새 있게 구성하고,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統一新羅美術의 精髓를 보여주고 있다.
多寶塔은 1925년경에 日本人들이解體·補修했는데 기록이 없으며, 塔속의 舍利와 舍利裝置,
그 외 遺物들이 모두 사라졌다. 또한 基壇의 돌계단 위에 있던 네 마리의 돌獅子 중에서
3마리가 약탈되어 行方을 알 수 없으며, 현재 1마리의 돌사자만 남아있다. (*髓: 뼛골 수)
(09) 慶州 佛國寺 三層石塔 -국보 21호
佛國寺 三層石塔은 ‘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줄여서 ‘釋迦塔’이라고 하며
‘無影塔’이라고도 한다. 釋迦塔은 2단의 基壇 위에 3층의 塔身을 세운 석탑으로,
慶州感恩寺址 東·西三層石塔(국보 112호)과 慶州高仙寺址 三層石塔(국보 38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2층의 基壇과 塔身은 목조건축을 본 따
모서리마다 돌을 깎아 기둥모양을 만들었으며, 지붕돌의 모서리들은 모두 치켜 올려
탑 전체에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더한다.
1966년 解體·復元工事中 2층 塔身舍利孔에서 金剛舍利函과 많은 遺物이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8세기초 木板으로 인쇄된 <無垢淨光大陁羅尼經>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임이 밝혀졌다. 基壇이나 塔身에 아무런 彫刻이 없어 간결해
보이며 각 부의 비례가 균형이 잡혀 안정되고도 아름다운 느낌을 주는, 新羅石塔의 표본이
되는 탑이다. 이 탑을 ‘無影塔’이라고도 하는데, 석가탑을 지은 百濟의 石工 阿斯達을 찾아
신라 서울 徐羅伐에 온 阿斯女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진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垢: 때 구 *陁: 비탈질 타)
(10) 慶州 佛國寺 大雄殿 -보물 제1744호
佛國寺의 中心法堂으로 新羅 때 建立, 壬辰倭亂때 燒失되어 英祖 41년(1765) 天龍寺 승려 采遠이 重建했으며,
基壇과 礎石은 창건당시의 모습 그대로이다. 정면 5칸, 측면 5칸의 長方形多包式 팔작지붕建物로, 전체 높이는
13m이며, 중앙의 御間(17.7尺)은 夾間(8.7尺)이나 退間(8.2尺)보다 넓게 꾸몄다. 大雄殿의 東·西側面은 翼廊이 놓여
東·西回廊과 연결되고 南回廊의 동쪽 모서리에는 左經樓가, 서측 모서리에는 泛影樓가 연결되었다. 내부에는
彌勒菩薩과 竭羅菩薩이 釋迦牟尼佛을 夾侍하는 木造釋迦三尊佛을 안치했다. 건물 앞쪽에 多寶塔(국보 20호)과
釋迦塔(국보 21호)과 石燈이 있으며, 뒤쪽에는 無說殿이 있다. (*采: 풍채 채 *御: 거느릴 어 *泛: 뜰 범 *竭: 다할 갈)
(11) 佛國寺 大雄殿앞 石燈
통일신라시대의 8角石燈으로 新羅石燈의 樣式發達의 典型樣式을 충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新羅首都 慶州에 전하는 대표적인 석등이다. 下臺石은 4각 地臺石과 1석石으로
조성했는데, 윗면에는 複葉八의 覆蓮을 彫飾했으며, 下臺石의 蓮花紋은 8세기에 조성된
대부분의 조형물과 같은 양식이다. 8각형의 竿柱石은 彫飾없는 순박한 모습으로, 이런
형태의 간주석이 실물로 現存하는 것으로는 최초라고 한다. 火舍石이 一石으로 조성된
상대석은 8각형의 평면으로, 신라석등에서 이처럼 화사석 받침을 조출한 예도 이보다
이른 時期의 석등에서는 볼 수 없는 양식이다. 一石으로 조성된 屋蓋石도 8각으로 윗면에는
複葉八瓣의 蓮花紋이 覆蓮臺를 이루고 있다. 이 석등은 新羅石燈 發達史 제2기,
즉 8세기중반에 건립된 것으로 佛國寺 極樂殿앞 석등과 더불어 제자리에 그대로 보존된
유일한 石燈이다. (*覆: 다시 복 *飾: 꾸밀 식 *瓣: 외씨 판)
(12) 佛國寺 無說殿
大雄殿 뒤쪽에 있는 無說殿은 佛經을 강의하는 강당이다. 眞理의 本質과 불교의 깊은 뜻은 言語로는 도달할 수
없는 言語道斷의 경지에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 ‘無說殿’이라고 命名했다. <佛國寺古今創記>에 따르면 佛國寺內
건물 중 가장 먼저 건립했으며, 670년경 義湘大師가 이곳에서 최초로 說法했으며, 당시 규모가 32칸에 이르렀다고
한다. 壬辰倭亂때 燒失되어 肅宗 34년(1708) 重建하고, 몇 차례의 重修를 거쳐 1973년 현재의 건물을 復元했다.
정면 8칸·측면 4칸의 柱心包式 맞배지붕건물로, 전면 4곳과 兩側面, 후면에 계단을 설치했다.
2009년 泰國王室이 世界平和를 기원하며 만든 釋迦牟尼佛坐像을 봉안했다.
(13) 佛國寺 回廊 안쪽 (*廊: 행랑 랑)
(14) 佛國寺 毘盧殿
毘盧遮那佛을 모신 법당으로, 8세기중엽에 제작한 金銅毘盧遮那佛坐像(국보 26호)을 모셨다. 신라 때인
751년에 건립했으나 그후 여러차례 重修·重建을 거쳐 1973년 창건당시의 基壇과 礎石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朝鮮後期樣式으로 重建했다.
(15) 慶州 佛國寺 金銅毘盧遮那佛坐像 -국보 제26호 (*문화재청 사진)
佛國寺 毘盧殿에 安置한 높이 1.77m의 佛像으로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毘盧遮那佛을
形象化한 것이다. 머리 위 머리칼은 작은 소라모양으로 표현했으며, 얼굴은 위엄이 있으면서 자비로운 인상을
풍기고 있다.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의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 옷주름의 표현은 寫實的이다.
손모양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어 毘盧遮那佛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과 반대로 표현했다.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慶州 佛國寺 金銅阿彌陀如來坐像(국보 제27호),
慶州 栢栗寺 金銅藥師如來立像(국보 제28호)과 함께 統一新羅 三大金銅佛像으로 부른다. (*栢: 측백 백 *栗: 밤 률)
(16) 慶州 佛國寺 舍利塔 -보물 제61호
보호각에 보존된 사리탑으로, <佛國寺事蹟記>의 '光學浮屠'가 곧 이 사리탑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으나 如來의 사리탑인지 僧侶의 사리탑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겉모습이 石燈과
비슷하게 생긴 舍利塔으로, 사리를 모시는 塔身을 중심으로 아래는 받침이 되는 基壇을,
위는 머리장식을 두었다. 기단은 연꽃잎을 새긴 반원모양의 돌을 위·아래에 두고, 그 사이를
북[鼓]모양의 기둥으로 연결했다. 塔身은 가운데가 불룩한 원통형으로, 네 곳마다 꽃으로
장식된 기둥모양을 새겼으며, 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안쪽으로 움푹 파 놓은 후, 그 안에
如來像과 菩薩像을 돋을새김 했다. 평면이 8각인 기본형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화려한 조형과 섬세한 彫刻手法으로 보아 통일신라의 樣式을 계승한
高麗前期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1905년 日本人에 의해 東京의 우에노[上野]공원으로 불법
반출되었다가 1933년에 반환된 것으로, 日帝時代에 모진 受難을 당한 우리 문화재의 아픈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다. (*龕: 감실 감)
(17) 佛國寺 觀音殿
751년에 創建, 朝鮮 成宗 1년(1470) 重修했으나 壬辰倭亂때 燒失되어 宣祖 37년(1604) 重創하고 다시
肅宗 21년(1695), 44년(1718) 두차례 중창했으며 그 후 廢墟된 것을 1973년에 복원했다. 無說殿 후방 동쪽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長方形建物로 法堂에는 千手千眼觀世音菩薩을 安置했다.
(18) 佛國寺 極樂殿
極樂淨土를 주관하는 阿彌陀佛을 모신 殿堂이다. 우리나라에서는 新羅時代부터 淨土信仰이 유행해 極樂殿을
매우 重視했다. 불국사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3칸의 多包系栱包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극락전에는 慶州 佛國寺 金銅阿彌陀如來坐像(국보 27호)을 봉안했다.
(19) 慶州 佛國寺 金銅阿彌陀如來坐像 -국보 27호(*문화재청 사진)
불국사 극락전에 봉안한 높이 1.66m의 佛像으로 머리에는 작은 소라모양의 머리칼을, 정수리부근에는
상투모양의 肉髻가 솟아 있다. 눈썹은 반원형이고 콧날은 오뚝하다. 健壯한 남성의 體軀에, 두 무릎을 넓게 펴
안정된 느낌을 준다.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주름진 옷은 옷깃 안쪽에서 밖으로 늘어지는 옷 접힘을 寫實的으로
표현했다. 떡 벌어진 어깨, 量感있는 당당한 가슴, 잘록한 허리 등에서 사실적이면서 세련된 統一新羅時代 佛像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慶州 佛國寺 金銅毘盧遮那佛坐像(국보 제26호), 慶州 栢栗寺 金銅藥師如來立像(국보 제28호)과
함께 統一新羅 三大金銅佛像이라고 한다. (*髻: 상투 계 *軀: 몸 구)
(20) 佛國寺 梵鐘閣
梵鐘閣은 法具四物 중에서 梵鐘을 안치하는 堂宇로 범종은 衆生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도구로,
이 범종은 聖德大王神鐘(국보 제29호, 속칭 에밀레종)을 모방해 近間에 鑄造했다고 한다.
(21) 慶州 佛國寺 架構式石築 -보물 제1745호
불국사를 重創한 8세기중엽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花崗巖石材構造物로, 불국사는 北高南低,
東高西低의 地形的特色을 지니고 있어 垈地를 평탄하게 만들기 위해 지대가 낮은 남쪽과 서쪽에 석축구조물을
설치했다. 安養門과 紫霞門 앞에는 아름답게 꾸민 架構式石築이 동서로 놓였는데 밑에서부터 거대한 자연석을
쌓고 그 위에 架工石材를 石柱와 引枋石을 架構式으로 짜 올린 특이한 형태이다. (*枋: 다목 방)
(22) 慶州 佛國寺 架構式石築 정면모습
(23) 佛國寺 幢竿支柱 -경북 유형문화재 제446호
사찰에서 法會나 儀式이 있을 때는 ‘幢’이라는 깃발을 매달았던 긴 장대를 ‘幢竿’,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양쪽에
세운 2개의 돌기둥이 ‘幢竿支柱’이다.佛國寺 幢竿支柱는 나란히 2쌍이 서 있는데, 높이는 동쪽 당간지주가 3.6m,
서쪽 당간지주는 3.45m이다. 서쪽 당간지주 사이에는 幢竿을 받쳤던 둥근 받침대가 남아 있다. 동쪽 당간지주는
統一新羅때 세운 것이며, 서쪽 당간지주는 각기 다른 部材를 後代에 조합한 것으로 추정된다.
(*幢: 기 당 *竿: 낚싯대 간)
(24) 佛國寺境內의 烏竹 -벼科의 여러해살이 식물.
대나무의 일종으로 높이 2~20m, 지름 5~8cm이다. 줄기는 첫해에는 녹색이나 다음 해부터 紫黑色으로 변하고,
잎은 披針모양이다. 6~7월에 綠紫色꽃이 圓錐花序로 피고, 열매는 穎果로 11월에 익는다. 약 60년을 주기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은 후 말라 죽는다. 성숙한 것은 竹細工材料로 쓰고 관상용으로 재배한다.
(*披: 헤칠 피 *錐: 송곳 추 *穎: 이삭 영)
(25) 吐含山佛國寺 復元記念碑 (前面)
佛國寺는 壬辰倭亂 때 燒失된 후 大雄殿, 紫霞門, 經樓 등 일부건물만 재건된 채 방치되어
있었으며, 荒廢寺址에는 遺構가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고, 境內에 鐵道觀光호텔과 같은
숙박시설과 진입로 주변에는 가게, 식당, 여관들이 어지럽게 群集헤 있는 것이 1960年代末
佛國寺의 모습이었다. 1969년 5월 朴正熙大統領의 ‘佛國寺發掘 및 復元’指示로 復元計劃이
수립되어 1969.11.14 佛國寺현장에서 起工式을 가졌다. 그러나 復元工事 중에 財源인
經濟人施主金 확보가 어려워 工事中斷狀態에 이르게 되어 1971년 7월 靑瓦臺秘書室에
觀光開發企劃團이 發足되고 ‘慶州觀光綜合開發計劃’이 수립되는 등 慶州開發이 活氣를
찾게 되었다. 2년 8개월만에 完工되어 1973.07.03 大統領 참석한 가운데 竣工式을 가졌다.
(26) 自然保護憲章塔
- (5-9-2) 全國의 風景돌아보기, 慶北 慶州 石窟庵 石窟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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