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61
3월11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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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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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GeiEqC_8QTE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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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는 포장보다는 알맹이, 외형보다는 본질을 중요히 여기십니다!>
살레시오회에 입회 후 자주 듣게 된 돈보스코의 말씀, “교육은 마음의 일입니다.”라는 말씀이 처음에는 ‘대체 무슨 의미인가?’ 통~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본격적인 청소년 사목 현장에 뛰어든 후, 아이들과 동고동락하면서 그 의미를 명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교사에게 있어 ‘아이들을 향한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기준입니다. 아이들의 영혼을 위한 참 스승이 되는가? 아니면 그저 급여를 받으니 의무감에 교단에 서는 월급쟁이가 되는가는, 바로 이 마음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어떤 교사는 정말이지 아이들을 향한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에 대한 관심도 사랑도 없었습니다. 별 기쁨도 보람도 없이, 그저 마지못해 교단에 서니 하루하루가 지겹습니다.
어떤 청소년 시설 책임자는 마음은 있는데, 그 마음이 전혀 엉뚱한 마음, 사심(私心)이었습니다. 그에게 아이들은 자기 홍보의 대상이요, 공금 횡령과 착복의 대상이었습니다.
돈보스코께서 강조하신 그 마음은, 다름이 아니라 청소년들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청소년들의 미래를 활짝 열어주고픈 마음입니다. 청소년들이 홀로 설수 있도록 도와 주고픈 마음입니다. 청소년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고픈 마음입니다. 결국 청소년들의 영혼을 구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지닌 참 스승은 청소년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청소년들을 극진히 섬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청소년들이 자식 같고, 친구 같고, 연인 같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산상설교 중에 예수님 역시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에 따라, 외적, 실제적으로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계명을 준수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권위로, 시나이 산에서 주어진 율법 그 위에 새로운 해석을 추가하십니다. 외적, 실제적인 살인을 하지 않았다해도 마음으로, 내적으로 하는 살인 조차 안된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자주 마음으로 이웃을 신랄하게 공격하고, 해치고 죽였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선언에 따르면, 우리는 수십번도 더 재판에 넘겨지고, 지금쯤 전과 십범쯤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계명을 더 적극적이고 폭넓게 해석하고, 이해하고 실행할 것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이웃을 향한 분노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가득 한채, 제단으로 나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호통을 치십니다. 그런 예배는 마음, 영혼, 진정성이 조금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럴듯한 포장보다는 알맹이, 외형보다는 본질, 외적인 것보다는 마음을 더 중요시 여기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뭘 하든 마음이 담겨있어야겠습니다.
매일의 인간 관계 안에서도, 매일의 전례적 삶 안에서도 마음과 영혼이 담길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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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q_7Ny63cDL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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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안 내는 법; 에덴동산에서는 화 날 일이 없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주시려는 의로움과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비교하십니다. 그러며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라고 하십니다. ‘의로움’은 주님 앞에 나설 수 있는 자격입니다. 이것을 얻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데 우리가 자칫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라면 큰일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의로움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바리사이는 살인하지 말라는 말은 지키지만 화는 내고, 간음하지 말라는 말은 지키지만 음탕한 마음을 가지며, 자선은 하지만 남에게 보이려고 합니다. 그들이 행동은 바꾸지만 속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면 그리스도인의 의로움은 세속-육신-마귀의 욕구조차 발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의로움은 나의 의지로 행동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원숭이가 사람인 척하는 것은 언젠가는 힘이 빠집니다.
오늘 복음에 ‘성을 내는 것’이 나왔기에 이것으로 생각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성을 내는 것은 고칠 수 있는 것일까요? 무조건 화를 내고 말도 안 통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어린데도 우울증을 앓고 있습니다. ‘금쪽같은 내새끼’의 ‘폭언하는 두 얼굴의 아들’입니다. 아이는 게임머니로 아버지, 어머니 몰래 수백만 원을 결제하고 경찰서까지 데려간 아버지 앞에서 그냥 소년원에 보내 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부모는 매우 차분합니다. 부모를 닮았다면 아이가 이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알고 보니 부모가 바빠서 아이의 가장 중요한 성장 시기에 할머니와 함께 지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잔소리와 간섭이 심합니다. 무조건 말을 하면 다 고쳐지는 줄 압니다. 배가 나왔다고 살 좀 빼라고만 합니다.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이는 매우 불쾌합니다. 할머니의 잔소리는 자신을 존중해주는 말이 아니라 자신을 들어 높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결국 사랑한다고 사랑하는데 아이를 통해 자신의 무언가를 채우려 하고 있었습니다.
왜 화를 내는 것일까요? 부모에게 버려졌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죄를 짓고 하느님을 피해 몸을 숨기는 아담과 하와의 처지와 같습니다. 이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피’였습니다. 그들이 다시 에덴동산에 살 수 있게 만드는 ‘가죽옷’입니다. 그 피가 의로움입니다. 내가 의로워져 에덴동산에 살면 화를 낼 필요도 없습니다. 화는 에덴동산 밖에서 내는 것입니다. 가죽옷은 분명 창조자의 피 흘림을 전제합니다. 창조자의 피 흘림 없이는 에덴동산으로 복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본인들 힘으로 들어가려 하는 것입니다.
에스키모인은 화가 나면 무작정 걷는다고 합니다. 화가 풀린 곳에 막대기를 꽂아놓고 오는 것입니다. 화는 본성이기 때문에 그 본성 안에 머물면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그 본성에서 벗어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본성에서 벗어나려면 에덴동산에 살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곳에서 살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주시려는 의로움이 곧 당신 가죽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입고 그분의 의로움으로 하느님 앞에 섭니다. 그런데 그 가죽옷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피 흘림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 오은영쌤 육아지침서’에 ‘분노 조절이 안 되는 우리 아이 어떻게 해야 할까요?’가 나왔습니다. 금쪽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분노 조절을 못 합니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누나에게도 막말을 쏟아냅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오은영쌤이 추천한 방법은 ‘몸 관찰하기’였습니다. 거울을 가져다 놓고 오은영쌤이 금쪽이를 보고 “네가 생각하기에 바른 자세로 앉아봐”라고 합니다. 아이는 일부러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 삐딱한 모습으로 앉습니다. 이때 “거울로 한번 봐봐. 바른 자세인지 한번 봐봐”라고 하니까 아이가 갑자기 자세를 바로잡더니 바른 자세로 앉습니다. 그리고 또 무언가 의미 없는 일을 시켰는데 잘 따라 합니다.
그런데 왜 엄마의 말은 안 들었을까요? 오은영쌤이 금쪽이를 에덴동산으로 데려놓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거울이 바로 가죽옷의 역할을 합니다. 가죽옷도 그렇지만 거울도 삼위일체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우선 ‘아버지’가 계셔야 합니다. 여기서는 오은영쌤이 있습니다. 성을 내는 것은 상대에 따라 다릅니다. 내가 자녀에게 성을 낼 수는 있지만, 직장 상사나 본당 신부님에게 와서 성을 낼 수 있을까요? 화가 나도 참을 것입니다. 금쪽이는 지금 오은영쌤과 수많은 제작진이 둘러싸고 있기에 그들 앞에서 힘에 눌린 것입니다.
그 다음은 ‘아드님’이 계셔야 합니다. 성을 내는 것을 자신이 보면 고쳐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거울 효과’라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를 바꾸는 것을 거울 혼자 할 수 있을까요? 아이는 매일 거울을 봅니다. 그러나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다를까요?
마지막으로 ‘피 흘림’이 필요합니다. 성령이 필요한 것입니다. 금쪽이는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수많은 사람의 ‘희생’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무라이가 되고 싶었던 아이가 이것을 바라며 성의 기둥에 들어가 있는 어머니 덕분으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그것을 누르고 사무라이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아이는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그 많은 사람의 고생을 무시할 만큼 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부모는 거울과 같은 모범, 창조자의 권위, 그리고 자녀를 위한 피 흘림, 이 세 가지를 반드시 갖춰야 합니다. 이 중에서 하나라도 없다면 자녀는 변하지 않습니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이 피 흘림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사이의 의로움과 그리스도인의 의로움은 창조자의 피가 섞여 있느냐, 섞여 있지 않으냐에 따른 차이입니다. 하느님의 피 없이도 하느님께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를 진정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교만이 표출되는 것이 성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조자의 피는 성낼 일이 없는 에덴동산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에덴동산에서는 감사만 남지 성낼 일이 없습니다. 성내고 사는 사람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화는 자아에서 나오는데 자아는 창조자의 피만이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내가 사는 곳이 에덴동산이 아니라면 화나는 것을 바꾸려 하기보다는 에덴동산으로 들어가려 노력해야 합니다. 본성은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태어남의 문제입니다. 어둠은 어둠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빛을 받아들이면 어둠은 저절로 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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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20-26 : 먼저 가서 네 형제와 화해하라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을 가지라고 하신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보다도 인간적 영광이라는 명예를 추구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의롭게 보이는 것을 중요시 하였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간의 찬사라는 역겨운 의로움보다 거룩한 의로움의 행실과 믿음의 공덕을 더 귀중히 여기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살인에 대해 말씀하시며,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1요한 3,15)라고 하시고, “자기 형제에게 이유 없이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22절)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행실에서 율법이 단죄하지 않는 것도 징계하신다. 업신여기는 말을 하려고 마음먹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23절). 이 말씀은 ‘예물을 바치고 나서’나 ‘예물을 바치기 전에’가 아니다. 그것은 예물이 제단에 놓인 순간에, 제사가 시작된 바로 그때,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23-24절)라고 하신다. 예물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동안 우리는 형제에게로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은 우선, 주님께서는 사랑을 가장 훌륭한 예물로 여기신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고, 사랑이라는 예물이 없으면 제물도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이다. 둘째로는 주님께서는 화해를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만드시어 어떤 핑계도 댈 수 없게 하신다. 화해하기 전에는 그의 제물은 봉헌되지 못한 채 제단에 그대로 놓여있을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먼저 화해하여야 한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25절) 우리를 고소하는 자는 우리의 양심이기도 하며 육체의 욕망과 악덕에 맞서시는 성령이시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갈라 5,17)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이미 죽음에로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느님과 영원한 친교와 평화를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령께서 우리의 고발자가 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제단에 나올 때에도, 우리가 이웃과 가지는 관계가 올바르지 못하면 하느님과의 관계도 올바를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웃과의 관계는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라는 점을 명심하여야 한다.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죗값을 모두 치루기까지 풀려나지 못한다고 하신다. 우리 이웃과의 진정한 화해를 통하여 주님과 화해하고 주님 앞에 참된 예물을 드릴 수 있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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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ㄴ)
이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살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위선자가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능가하지 않으면’이라는 말 때문에 ‘그들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들보다 더 잘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처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실 때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3)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라는 말씀도 “그들처럼 살지 마라.”입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1-22)
이 말씀은, 하느님의 계명을 완전하게 지키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람을 실제로 죽이지만 않으면 “살인하지 마라.”라는 계명을 지킨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형제에게 성을 내고, 형제를 모욕하는 일도 살인과 같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분노와 모욕은 살인의 원인이 되니까 그런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분노와 모욕 자체가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죽이지 않아도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증오하는 것, 그 증오심을 분노와 모욕으로 드러내는 것, 그 일들은 모두 정신적인 살인입니다. 여기서 “재판에 넘겨진다. 최고의회에 넘겨진다. 불붙는 지옥에 넘겨진다.”라는 말은, 뜻으로는 같은 말입니다. (점층법을 사용한 표현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법정에서는 정신적인 살인도 살인으로 처벌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이 말씀은, “형제에게 상처를 준 일이 있다면, 먼저 가서 그 형제에게 용서를 청하여라.”라는 가르침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형제를 용서하는 일도 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내가 형제에게 상처를 준 경우에 대한 말씀입니다. ‘생각나거든’이라는 표현은, ‘혹시라도 생각이 안 나면 어쩔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형제에게 상처를 주었으면서도, 그 일을 모르고 있거나 잊어버리는 것도 잘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모르고 있어도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시고, 내가 잊어버려도 하느님께서는 기억하고 계십니다. (상처를 입은 그 형제는 평생 한을 품고서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항상 ‘양심 성찰’이 중요합니다. “예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라는 말씀은, 이웃 사랑 없는 하느님 사랑은 위선이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은, 이웃과 화해하고 서로 사랑하는 일과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1요한 4,20-21) 지금 이 상황에서,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또는 “그쪽 잘못이 더 크다.”고 주장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 주시는 가르침입니다. 그의 죄가 아니라 ‘나의 죄’를 반성해야 합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 5,25-26)
여기서 ‘고소한 자’는 ‘내가 상처를 준 그 사람’일 수도 있고, ‘그 사람의 수호천사’일 수도 있습니다. 뒤의 18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천사들이 하느님의 얼굴을 늘 뵙고 있다는 말씀은,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하느님께 곧바로 말씀드린다는 뜻입니다.) ‘내가 상처를 준 그 사람’이 직접 고소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수호천사’가 고소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법정에서 천사가 검사 직분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법정으로 가는 도중’은 ‘지금의 인생’을 뜻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인생은, ‘의인’의 경우에는 상을 받기 위해서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고, ‘죄인’의 경우에는 심판을 받기 위해서 ‘출두’하는 길입니다. “얼른 타협하여라.”라는 말씀은, “미루지 말고 지금 바로 회개하고, 화해하여라.”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법정에 서게 되면 회개할 기회도 없고, 화해할 기회도 없습니다.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은, “보속을 완전히 마치기 전에는”입니다. 여기서 ‘감옥’은 ‘연옥’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회개가 부족했거나 보속이 부족했던 사람은 연옥에 가서 보속을 해야 합니다. <지옥은 보속을 하는 곳이 아니라 벌을 받는 곳입니다.> 옛날부터 연옥의 보속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고통은 아마도 ‘부끄러움’과 ‘후회’ 때문에 생기는 고통일 것입니다. 그래도 보속을 마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습니다. 나중에 겪게 될 일을 미리 생각하고 지금 대비하는 것, 그것이 ‘지혜’입니다. 반대로, 나중에 자기가 겪을 일은 생각하지 않고, 지금의 편안한 생활에만 만족하는 것, 그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연옥에서 겪게 될 ‘보속의 고통’을 생각해서, 지금 철저하게 회개하고, 완전하게 보속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신앙의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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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구의 짧은 역사’를 읽으면서 지구와 생명의 상호작용을 보았습니다. 지구의 환경은 지구에 사는 생명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지구의 물, 대기, 온도는 생명이 번식하고 성장하게 합니다. 에너지를 얻고 진화하게 하였습니다. 아울러 생명의 활동이 지구의 환경에도 영향을 줍니다. 24억 년 전에 지구에는 산소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이는 산소를 통해서 호흡하는 생명은 자리할 곳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24억년이 지난 후에 지구에는 산소가 생겼다고 합니다. 이는 남세균이 광합성을 통해서 산소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뒤 지구의 환경은 산소를 통해서 호흡하는 생명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지금 지구의 환경에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생명은 인간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생명활동은 공기, 강, 바다, 땅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은 생명의 서식지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탄소사용의 증가로 지구온난화라는 엄청난 기후변화가 생기고 있습니다. 지구를 보호하고 있는 오존층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활동에 획기적인 변화가 없으면, 지금의 방식대로 삶을 살아간다면 변화된 지구의 환경에 많은 생명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지구생명의 최상위에 있는 인간도 결국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욕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을 사랑해야 합니다. 지구를 보호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상호작용으로 성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한 마음으로 선과 악을 아는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 결과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나와야 했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이방의 신을 섬겼던 솔로몬은 지혜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공격으로 이스라엘은 무너지고, 이스라엘 백성은 낯선 땅으로 유배를 가야 했습니다. 다윗이 비록 죄를 지었지만 회개하였을 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유배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향 땅을 그리워하였고,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70년이 지난 다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그러나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고, 악인이 저지르는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하면, 살 수 있겠느냐? 그가 실천한 모든 정의는 기억되지 않은 채, 자기가 저지른 배신과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죽을 것이다.”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하느님께서는 축복을 주실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우리는 유다와 베드로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유다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님께서 보는 세상을 보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자신이 보고 싶은 세상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려고 하셨던 십자가를 보지 않았습니다. 신앙과 진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결국 유다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있습니다. 지식이 위선과 가식을 포장하는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종교의 거룩함은 사라지고, 종교라는 제도와 틀만 남게 되었습니다. 채우려 했지만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유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유다는 자기 죄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유다의 죄가 크기 때문에 용서 받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유다는 뉘우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의 곁을 떠나 주십시오. 주님 저도 물위를 걷게 해 주십시오. 주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하나는 주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은 주님을 배반할 지라도 저는 주님을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 안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주님께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너는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나를 3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열정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지만 베드로 사도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는 소나무와 전나무만 푸르다고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함께하는 이가 진정한 친구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고난의 시간이 다가오자 예수님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나약한 베드로의 모습을 간직하며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와 유다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닭이 울자 눈물을 흘렸고, 회개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용서 받은 것은 죄가 작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가 천국의 열쇠를 받았던 것은 배반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부족한 자신을 인정하고, 회개의 눈물을 흘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해주시고 있습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는 사순시기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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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강진기 안드레아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며칠만 보지 못하여도 간절히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꿈에서라도 만나질까 두려운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만나면 먼저 달려가 인사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걱정되고 마주치는 것이 두려운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삶이 그만큼 다양하고 복잡한 이해관계에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내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잘해주고, 내게 잘 못하는 사람이나 상처를 주고 피해를 주는 사람은 멀리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게 잘해주면 친구고, 내게 잘못하면 원수가 되는 단순한 논리로 세상을 살 수 없습니다. 때로는 원수 같은 사람과 가까이 지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를 아껴주고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 있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더나가 어제까지는 원수였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동지요 친구가 되고, 평생을 형제처럼 가까이 지내온 사람이 하루아침에 원수가 되는 어이없는 일도 생깁니다.
하지만 이런 우리의 상황을 잘 아시는 예수님은 오히려 우리가 어느 누구보다 더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살인하지 말라는 일반적인 원칙에서부터 형제에게 성내고 욕하고 비난하는 것까지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때문에 원수마저도 사랑해야하는 숙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부담스럽고 힘들고 때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지만 당신이 원하시기에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형제와 이웃을 용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12장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여러분의 힘으로 되는 일이라면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원수가 배고파하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 놓는 셈이 될 것입니다.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 내십시오."(로마 12,18. 20-21)라구요.
이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원수를 원수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로 맞아들이고 용서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나를 위한 현명한 선택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원수 같은 형제와 이웃을 용서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하늘나라의 기쁨을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다보면 만나면 부담스럽고 싫은 사람 분명히 있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단 한 번이라도 그렇게 부담스럽고 싫은 사람과 진심으로 화해하고 용서 해 보신 적은 있습니까? 화해할 때의 큰 기쁨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누군가와 화해하고 용서할 때의 후련함과 행복한 느낌! 그 순간이 바로 하늘나라의 기쁨을 미리 맛보는 때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족과 형제, 이웃을 용서함으로써 참된 행복과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죽어도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 든다면 이것이 상대방을 위한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을 먼저 위하는 일임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용서와 화해는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큰 예물이고,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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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형길 안젤로 신부님]
화해하라! 용서하라! -- 같은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다른 모든 존재와 화해해야 합니다. 사람과도 화해하고, 자연과도 화해하고, 하느님과도 화해해야 합니다. 자신의 운명과도 화해해야 합니다.
상대가 화해를 받아들이든지, 않든지 그것은 상관없습니다. 자신은 모든 것과 화해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특히 사람과 사람사이의 화해가 중요합니다. 여기에 서로 다른 것의 화해가 필요합니다.
종교와 종교가 화해해야 하고, 문화와 문화가 화해해야 하고,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개인과 개인이 화해해야 합니다. 의견과 의견, 취미와 취미, 성격과 성격, 주장과 주장, 역할과 역할 이 화해해야 합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것도 똑 같이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서로 다른 것 사이의 평화 -- 이것이 화해입니다. 마지막에는 삶과 죽음이 화해하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말과 말이 많이 화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가 지나가면, 내일은 완전히 새롭게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어제 미워한 사람을 오늘도 미워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성인조차도 결함이 있습니다. 성인은 다만, 늘 자신의 결함을 살필 줄 알고, 다른 사람을 늘 용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적을 친구로 만듭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 모든 피조물, 심지어 하느님 하고도 우정을 맺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사람이 친구입니다. 성경에 “제물을 들고 나에게 오기 전에 먼저 서로가 화해하라”하였습니다.
화해는 서로가 해야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혼자서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상대가 화해하려하지 않을 때에는 마음으로 그를 용서하고, 그에 대한 모든 감정을 해방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어쨌거나, 인간이 매면 매이고, 인간이 풀면 풀립니다.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악인데, 사람들 중에는 악의 화신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 땐, 악은 경계하고, 사람에게는 변화의 가능성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과의 화해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십니까? 혹시 아직도 부모님 탓, 가정 탓으로 여기십니까?
물론 배우자가 문제가 되고, 부모 형제가 문제가 될 수도 있고, 자신의 능력, 조건들이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것”-- 남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의 조건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진정한 화해의 삶입니다.
나를 남과 비교하는 것, 남을 나의 판단에 옭아매는 것 -- 그런 것들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TV를 볼 때 여러 신분의 얼굴들을 보면서 비교해보면 정치인,재벌,성직자,서민들,연예인들,농부들,어부들,학생들 -- 그들 가운데, 화해하는 얼굴을 발견하면, 마음이 기쁩니다.
그런 얼굴은 서민들 -- 어려움 가운데서도, 남을 돕고, 말없이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에게서 발견합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얼굴은 모든 것과 화해하는 얼굴이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웃어주고, 남에게도 웃어주고, 자연에게도 웃어주고, 하느님에게도 웃어드리는 사람이 됩시다.
세상은 비교하는 곳이 아니고 조화를 이루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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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주홍 티모테오 신부님]
우리는 삶 안에서 참 많은 만남을 가집니다. 기억은 할 수 없지만 태어나는 순간 부모님과의 첫만남을 시작으로 해서 친구와의 만남, 이웃과의 만남,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마지막으로 가지는 만남이 있습니다. 이처럼 만남이 없이는 우리의 삶에 대해서 말할 수 없기에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되는 만남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존재시켜주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그 자체로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만남이 우리에게 마냥 기쁨을 주는 것만은 아닙니다. 갈등, 불화, 다툼으로 인해서 그러한 만남은 우리에게 괴롭고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경험하는 만남은 기분 좋은 만남보다는 힘든 만남이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만남들은 우리의 마음속에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 마음속에서도 그러한 상처를 남깁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의 몸을 모심으로써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해 미사에 참례하러 성전 안에 들어오면 그분의 사랑 때문에 더욱 나와 다투었던 가족이나 친구, 또는 이웃의 얼굴이 생각나며 마음이 괜히 무거워 지기만 하는 경험을 해 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미사에 집중하기 보다는 계속 그 사람과의 갈등들이 생각나며 화가 나기도 하고 그 사람에 대한 미움 때문에 가슴이 답답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나도 잘못했지만 그 사람도 잘못했다. 어쩔 수 없다. 내 할 일만 하면 된다. 내 맘은 사람들과 화해하고 싶지만 다른 사람이 화해를 하지 않으면 그건 그 사람의 문제라고 혼잣말을 합니다.
그러한 갈등 구조 속에서 나 자신을 배제시킵니다. 마치 타인의 일처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화해하려는 노력보다는 그 사람과의 만남을 더 이상 가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그 만남 속에서 이뤄질 수 있는 화해를 결코 경험할 수 없게 됩니다. 만남은 일방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 우리가 함께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만남 속에서 생기는 갈등과 불화는 타인의 노력으로 화해가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노력할 때 가능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상대방에게 미루는 것보다 내가 먼저 노력할 때 화해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등이 생겼을 때 먼저 나의 잘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화해하는 행동을 먼저 보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참 쉬워 보이지만 막상 실천하려니 너무도 어렵습니다.
화해한다는 것은 마치 나의 살과 뼈를 깎는 듯한 아픔을 줍니다. 그러기에 화해하는 것이 너무도 두렵습니다. 그러한 아픔을 극복하라고 주님은 격려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이 아픔을 주는 요인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주님께서는 제단에 나오기 전에 먼저 나를 아프게 하는 나 자신과 화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족과 이웃 간의 아픔을 극복해야 하는 맘을 가로막는, 도저히 함께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내 맘의 고집으로부터 벗어나라고 하십니다.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상 안에서 현실을 바라보았을 때 가장 먼저 부딪히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나 자신과의 화해는 바로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찾는 것입니다. 자신의 맘 안에 계신 하느님을 찾지 않으면서 내 형제와 이웃 안에서 하느님을 어떻게 찾을 수 있겠습니까?
형제와 이웃 안에서 주님을 보는 것은 바로 신앙인의 행동입니다. 믿음이란 하느님에 대한 믿음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에 대한 믿음도 함께 있어야 진정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양심이 재판하고 형리에게 넘겨주기 이전에 먼저 나 자신과 화해해야 합니다. 나 자신과의 화해는 다시 내 이웃과의 화해를 이끌어 냅니다.
내가 힘든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상처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기쁠 때 우리는 진정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배려하게 되고 그들에게 우리의 손을 내밀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시간들 속에서 우리는 진정 주님의 참 사람을 경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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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우리는 지금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큰 주제 중의 하나는 “의로움”입니다.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맺음”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회개와 화해를 요구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참된 의로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대체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은 무엇일까?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여섯 가지의 대당명제로 제시하십니다. ‘대당명제’란 한 명제를 먼저 내세우고, 그 다음에 그에 대한 반명제를 내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라고 이르는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라는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여섯 가지 의로움 중에서, 첫 번째의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살인하지 말라”는 구약의 율법에 대해서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형제를 ‘바보’ 혹은 ‘멍청이’라고 모욕하고 멸시하는 것까지도 ‘살인’에 포함시키십니다. 곧 형제에게 ‘성’내고 ‘바보’ ‘멍청이’라고 말하는 언어폭력도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참으로 혀를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집회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이들이 칼날에 쓰러졌지만, 혀 때문에 스러진 이들보다는 적다.”(집회 28,18)
또한 이는 “혀”의 살인뿐만 아니라, 죄의 뿌리인 내면적인 면도 살인에 포함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이다.”(1요한 3,1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살인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더 나아가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곧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이 “화해”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살인하지 않는 것이 본질인 것이 아니라, 화해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화해하면 살인하지 않게 되지만, 살인하지 않는다고 화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우선하는 일이 화해하는 일입니다. 먼저 화해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바칠 때, ‘먼저 화해하라’ 고 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3-24)
이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물은 결국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그러니 예물을 바치는 ‘우리 자신’이 곧 예물입니다. 마치, “야훼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지 않으시고”(창세 4,4) 예물과 예물을 바치는 이를 하나로 간주하셨듯이, 예물을 바치는 이를 바로 ‘예물’로 삼으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제단의 예물보다 예물을 바치는 사람의 ‘의로움’을 바라십니다. 우리가 바치는 예물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 앞에 나서기에 합당한 사람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니, 불목한 형제가 있는지 살펴보고, ‘얼른’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늦기 전에 기회가 있을 때 지체치 말고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비를 가리고 따지기 전에, ‘먼저’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고 것이 의로움인 것이 아니라, ‘화해’를 이루는 것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마태 6,24) 그리고 “먼저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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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 예물을 바쳐라.”(마태 5,24)
주님!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지체치 말고 기회가 있을 때,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원망을 품은 이의 아픈 마음을 보게 하시고,
제 불찰을 먼저 살피게 하소서.
얼른 화해하게 하소서!
시비를 따지기보다, 이기려 하기보다,
화해한 제 자신이 당신께 드리는 참된 예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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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 가는 길>
마태오 5,20ㄴ-26 (화해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께 가는 길>
사람을 만나
사람을 품고
사람과 함께
늘 그렇게
하느님께
갑니다
오직 그렇게
하느님께
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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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바보, 멍청이>
저는 지옥을 갔어도 벌써 몇 번은 갔어야 할 사람입니다. 짧은 생을 살아 오면서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행위를 보거나 접하면서 ‘바보, 멍청이 같은 이’라고! 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이 이렇게 무서운 말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5,22) 하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살아있는 것은 분명 주님의 자비 덕분입니다. 주님께서 죄에 대한 마땅한 처벌을 내리셨다면 저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덕을 입었으니 이제 정신을 바짝 차려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고 하였지만, 오히려 말로 상처를 주고 일을 어렵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다재다능한 사람이 혀를 다스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 혀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복됩니다. 말이 많으면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지기 쉽습니다.”(알베리오네)
성녀 데레사는 “여럿이 있는 가운데 말을 적게 하십시오! 말 많은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말이 많은 사람일수록 소리만 요란한 꽹과리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감정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말을 골라서 하고 모든 이에게 후회되지 않을 말을 찾으십시오.”(십자가의 성 요한)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에페4,29)
다른 사람을 욕하고 미워하면 욕과 미움은 독이 묻은 화살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혹시라도 뜻하지 않은 말로 상처를 주고 서먹해진 관계가 있다면 상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서둘러 화해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마음에 담긴 것이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선하고 거룩한 마음을 지녔으면 선한 것이 나오고, 그렇지 못한 미움과 분노를 담고 있으면 화가 나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호감을 사지만 어리석은 자의 입술은 자신을 삼켜 버립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시작은 어리석음이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끝은 불행을 초래하는 우둔함이다.”(코헬10,13)
아무리 조심을 해도 마음 한 번 흔들리면 안에 있는 것이 쏟아져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 초점을 두지 않고 ‘성 내지 말고’, ‘바보’, ‘멍청이’라고 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뿌리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을 치료하기보다 뿌리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제 입이 맺는 열매로 배를 채우고 제 입술이 내는 소출로 배부르게 된다. 혀에 죽음과 삶이 달려 있으니 혀를 사랑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는다.”(잠언18,20-21)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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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이 있어 함께 나눕니다
<침묵의 소중함 -토마스 머튼->
침묵은 양선함 입니다.
마음이 상했지만 답변하지 않을 때
내 권리를 주장하지 않을 때
내 명예에 대한 방어를 온전히 하느님께
내맡길 때 바로 침묵은 양선함 입니다.
침묵은 자비입니다.
형제들의 탓을 드러내지 않을 때
지난 과거를 들추지 않고 용서 할 때
판단하지 않고 마음 속 깊이 변호해 줄 때
바로 침묵은 자비입니다.
침묵은 인내입니다.
불평 없이 고통을 당할 때
인간의 위로를 찾지 않을 때
서두르지 않고 씨가 천천히 싹트는 것을
기다릴 때 바로 침묵은 인내입니다.
침묵은 겸손입니다.
형제들이 유명해지도록 입을 다물 때
하느님의 능력의 선물이 감추어졌을 때도
내 행동이 나쁘게 평가되든 어떻든
내버려둘 때 바로 침묵을 겸손입니다.
침묵은 신앙(믿음)입니다.
그분이 행하도록 침묵할 때
주님의 현존에 있기 위해 세상 소리와
소음을 피할 때
그분이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기에 인간의
이해를 찾지 않을 때
바로 침묵은 신앙입니다.
침묵은 흠숭입니다.
"왜"라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옹할 때
바로 침묵은 흠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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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마태오 복음 5장 21-48절은 예수님과 율법의 관계에 대한 말씀(5,17-20 참조)에 이어서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과 가르침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지켜야 하는 여섯 개의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주제는 살인, 간음, 이혼, 거짓 맹세, 보복,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율법 규정을 제시하시고, 이어서 각 율법 조문에 대한 해석을 새롭게 제시하십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유다교 전통을 받아들이시면서, 또한 제자들에게 율법의 근본정신, 곧 율법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것을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도록 요청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율법 규정을 준수해야 하는 이유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함입니다.(5,20 참조) 예수님께서는 살인 금지에 관한 율법의 가르침(탈출 20,13; 신명 5,17 참조)과 규정 위반에 따른 결과를 설명하십니다. 살인은 율법이 금지하고 있는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을 금지하는 율법의 가르침에 동의하시지만, 제자들에게 살인을 유발하는 원인까지 살피게 하십니다.
성을 내는 행위는 살인의 첫 단계가 될 수 있습니다. 살인과 성냄의 대조는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완성하러 오셨음을 확인시켜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언급된 율법의 요점은 인간관계와 관련됩니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화를 내면 극한 상황에서 살인까지 이어질 수 있지만, 화해를 통하여 회복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이라는 죄의 뿌리를 볼 수 있도록 안내하시면서, 한편으로는 화해함으로써 인간관계를 회복하도록 요청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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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5,20)
<능가하는 의로움!>
오늘 복음(마태5,20-26)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이란 어떤 모습의 의로움일까? 지금의 모습으로 표현하자면, 매일 미사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자주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필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능가하는 의로움이란 어떤 모습의 의로움일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은 머리와 입으로 그리고 율법 규정 안에 머물러 있었던 의로움이었습니다. '능가하는 의로움'은 이것과 함께 나의 몸으로 드러나는 구체적인 의로움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구체적인 '이웃 사랑'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5,23-24)
너를 용서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제는 참으로 답답하고 우울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마음도 많이 아팠습니다. 그 두 사람이 해왔던 과거의 모습과 지금 현재의 모습 때문에 그랬습니다. 이렇게 큰 간절함이 함께 했던 선거는 처음입니다.
어제 경기도 이천에 있는 어머님 산소에 다녀오면서 마음이 많이 안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에게 주시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대한 묵상도 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에제18,23)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의 큰 화두입니다. 우리는 때가 되면 반드시 죽습니다.
그러니 얼른 회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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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형제님께서 명절 제사를 지내고서는 아내와의 관계가 나빠져서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제사 지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자기가 솔선수범해서 도와줬지만, 그런데도 힘들다며 형식적인 이 제사를 매번 치러야 하냐면서 푸념하는 아내가 너무 미워서 멀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웃으면서 “얼마나 도와주셨는데요?”라고 묻자, “제가 밤도 까고 전도 부치고 청소와 음식물 분리수거도 해줬습니다. 이 정도면 많이 도왔다고 생각하는데요?”라고 답하십니다.
정말로 많이 도와주신 것인가요? 그러나 제사의 주체가 누구일까요? 제사 지내는 이 조상님은 형제님의 조상님이었습니다. 아내는 형제님과 결혼하지 않았으면 아무 상관 없는 조상님입니다. 따라서 엄격히 따지면 남편이 돕는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아내가 도와주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즉, 아내의 일이 아닌, 남편의 일입니다. 남편은 돕는다는 마음이 아니라, ‘내 일’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해야 했습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서 당연히 아내의 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미워할 일이 아니라, 감사할 일입니다.
미움이 생기면 얼른 사랑의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율법주의에 빠져있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보다 더 의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율법 완성의 첫 대목으로 ‘살인해서는 안 된다.’라는 계명을 제시합니다. 율법을 없애러 오셨다면, 이 계명은 폐기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 계명을 더 확장하십니다.
사랑의 법을 우리 마음에 심기 위해, 악한 마음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긴 살인은 악한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악한 마음이 뿌리 뽑혀 사라진다면, 굳이 ‘살인해서는 안 된다’라는 계명이 등장할 필요도 없게 될 것입니다.
악한 마음을 뿌리 뽑기 위해,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고,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진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바보, 멍청이’는 종교적인 뜻이 있는 단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느님을 모른다고 하는 자, 하느님을 거역하는 자, 하느님께 불경스러운 자를 가리킵니다.
스스로 형제를 판단하고 단죄해서 아주 못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미움을 어떻게 사랑으로 바꿀 수 있는지를 늘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니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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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탄력 좋은 삶과 믿음>
-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 -
결과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결과의 성공보다는 과정의 충실함이 우선입니다. 한결같은 분투의 과정이 바로 성공이요 결과는 그 다음입니다. 말 그대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믿음의 삶을 뜻합니다. 삶이든 믿음이든 참으로 한결같음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절대적입니다. 바로 이것이 영적탄력 좋은 삶입니다.
30년전 초창기 참 많이 강조했던 영적 탄력입니다. 세월 흘러 노쇠해 가면서 육신의 탄력은 떨어져도 영혼의 탄력인 믿음은, 희망은, 사랑을 날로 좋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를 위해 간절하고 항구한 한결같은 기도가 절대적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정주영성의 핵심이자 주님의 전사로서의 필수 요소입니다. 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기도 첫 연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 불러 주신 이 자리에서
한결같이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작은 나무들이 이제는 울창한 아름드리
나무들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바로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서 한결같이 살아가는 베네딕도회 정주 수도승들의 모습에 대한 묘사이기도 합니다. 불가에서는 이런 정주의 불승들이 모인 사찰 공동체를 나무들이 우거진 숲을 뜻하는 뜻하는 말마디 “총림叢林”이라 일컫기도 합니다. 또 아주 예전 그러니까 24년전 여름철에 써놓고 주님의 전사로서 영적 전의戰意를 새롭게 했던, 그리고 자주 인용했던 담쟁이란 고백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작년 가을
붉게 타오르다 사라져 갔던 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
힘차게 하늘 향해
담벼락, 바위, 나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붉은 사랑으로 서리 내려 사라지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제자리 정주의 삶에도
지칠 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다만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향해 타오를 뿐 내일은 모른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행복이요 충만이요 영원이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오늘 하루만 사는 초록빛 영성이다”-1998.6.3.
시공을 초월하여 지금도 여전히 공감, 감동하는 좌우명 같은 고백시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 묵상중 떠오른 두 편의 시입니다. 오늘 복음은 참으로 믿는 자들의 삶과 믿음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어떤 상황에도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고, 좌절이나 절망하지 말고 한결같이 새롭게 시작하는 탄력좋은 삶과 믿음, 기도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바로 죽을 때까지, 살아 있는 그날까지 깨어, 끊임없이, 한결같이 시도하는, 도전하는 삶과 믿음, 기도의 자세를 뜻합니다. 이런 이들이 참으로 주님의 전사요, 참으로 살아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어떤 형태로든 하느님 방식대로 참 좋은 응답이 있음을 말해 줍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바로 이것이 백절불굴의, 진인사대천명의 믿음의 본질입니다. 이래서 좌절이나 절망함이 없이 한결같이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도하다보면 하느님의 뜻을 깨달아 알 것이며 하느님은 당신 생각에 가장 적절한 때 가장 좋은 최선, 최상, 최고의 방식으로 응답해 주신 다는 것을 체험할 것입니다. 참으로 최종의 영적 승자는 이런 탄력좋은 기도의 사람, 믿음의 사람에게 있습니다.
전화위복轉禍爲福, 인간만사 세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도 있습니다. 무엇이 잘되고 무엇이 못되는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합니다. 죽음의 순간에 깨달아 밝혀지는 일도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일희일비함이 없는 한결같이 영적 탄력좋은 삶이 정말 바람직합니다. 당장은 모르지만 지난 뒤, 내 고유한 삶의 성경책을 렉시오 디비나 하면 깨달아 알 것입니다.
바로 이런 기도의 모범이 재1독서의 기도의 여인, 에스텔입니다. 본문에는 장장 2페이지에 걸쳐 계속됩니다. 전후의 사정을 보면 하만의 중상 모략으로 온 유다인들이 절멸할 수 있는 풍전등화, 절체절명,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상황입니다. 바로 에스텔의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절멸의 위기에 처한 유다인들을 살립니다. 몇 감동적인 대목을 인용합니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주소서.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는데, 이몸은 위험에 닥쳐 있습니다. 기억하소서, 주님, 저희 고난의 때에 당신 자신을 알리소서. 저에게 용기를 주소서. 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에는 안 나오지만 왕비 에스텔의 기도의 결과 사필귀정, 해피엔딩으로 끝나 에스텔의 사촌 오빠이자 양부인 유다의 지도자 모르도카이의 승리로 귀결됩니다. 마침내 모르도카이 대신 유다인들의 절멸을 꾀하던 하만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짐으로 완벽한 에스텔의 승리, 하느님의 승리로 유다인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기도가, 한결같은 끊임없는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답임을 절감합니다. 이래야 영적 탄력 좋은 신망애의 삶이요 믿음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에게 탄력 좋은 믿음을 선물하십니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소서.”(시편51,12.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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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8RuhZawAc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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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 24)
형제를 다시
바라보는
은총의
사순이다.
새로워지는
삶이란 먼저
형제와
화해하는
삶이다.
화해하는 삶을
다시 배우는
화해의
시간이다.
기도의 관계란
다름아닌
화해의 관계이다.
화해가 생활이고
화해가 기도이다.
옳고 그름의
얼어붙은
관계를
다시 녹이는
화해이다.
하느님 나라의
희망은 화해로
흘러간다.
화해는
과거 안에
갇힌 우리가
과거에서
빠져나와
오늘의 사람을
다시 만나는
현실의
기쁨이다.
비로소 삶을
다시
사랑하게 되는
은총이다.
모든 사랑의
역사에는
화해가 있었다.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화해를 일깨워
주신다.
정지한 마음이
다시 흘러가는
화해이다.
마음과
사람을 다시
얻는 화해이다.
화해는
마음을
건드리기에
실패와
어울리지
않는다.
복음의 심장은
화해의 심장이다.
화해는 심장 뛰는
하느님의 것이다.
화해의
뜨거운 눈물이
십자가의
화해처럼
아름답고 기쁜
소식임을 믿는다.
사람과 사람
형제와 형제
사이에는
하느님을 닮은
화해가 있다.
화해보다
더 큰 기도와
마음은 없다.
다시 찾고
다시 살게하는
인격과 인격의
소중하고
진실된
화해가 우리가
갚아야 할
가장 뜨거운
마지막 한 닢이다.
마지막 한 닢의
화해가 서로를
살리는 공동체의
심장임을 믿는다.
다시
화해는 형제를
향하고 형제는
다시 화해를
향한다.
하느님께
바쳐야 할
화해의
기도이다.
하느님의
방향은
옳고 그름까지
내려놓는
사랑의
화해이다.
화해가
지고 가야 할
우리의
십자가임을
믿는다.
화해를
지고가는
사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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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마태 5, 24)
우리가
맺는 관계들이
실은 하느님께
올려드리는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화해의 기도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라는
예수님 앞에서
화해를 배우게 됩니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모두는
형제들입니다.
형제로 연결되어
있는 우리의
관계입니다.
화해로 새롭게
맺어져야 할
우리의 관계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형제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화해야말로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선물이며 예물입니다.
화해의 연결점이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찾습니다.
서로의 상처를
겸손하게 인정하는
화해로 다시 맺어지는
사순의 오늘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상처에 필요한 약은
화해라는 뜨거운
눈물같은 예물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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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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