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2국기』의 정치 세계관과 유교의 천명사상.hwp
소설 『12국기』의 정치 세계관과
유교의 천명사상
제출자: 철학 16번 강화랑
제출일: 2016. 10. 17(월)
철학 강좌 시간에 일본의 애니메이션 《12국기》의 일부 회분을 보면서 여주인공의 소신 있는 발언을 듣고는 역사학을 선호하는 학도로서 흥미가 생겨 일본 소설가 오노 후유미(1960~)가 지은 원작 『12국기』의 내용을 알아보았다. 작중에서는 열두 개의 나라와 열두 명의 임금 그리고 열두 마리의 기린이 작품의 세계관을 관통한다. 허해(虛海)라고 불리는 끝없는 바다 위 연꽃 모양의 대륙에 열두 나라가 펼쳐져 있고 그 한가운데에는 황해가 있으며 각 나라들은 왕이 다스린다.
각국에는 신수(神獸)인 기린이 존재한다. 이 기린은 각국의 민심을 대변하고, 기린의 성격도 대체로 그 나라의 국민성을 나타내므로 왕은 기린의 품행을 보면서 백성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기린은 왕을 선정해 보필하며, 선정된 왕은 신선이 되어 불로불사하면서 나라를 다스린다. 다만 왕은 다른 신선들에 비해 수명이 짧으며 혹시라도 크게 다치면 죽게 된다.
기린 역시 왕과 비슷한 불로불사의 몸이라고 한다. 그러나 왕의 폭정에 백성들의 괴로움이 커지면 하늘[天]의 버림을 받아 ‘실도(失道)의 병’에 걸린다. 실도는 왕이 도를 잃음을 뜻하는데, 기린이 병들었는데도 왕이 계속 실도를 하면 기린은 결국 죽고 그 이치에 따라 왕도 자연히 죽는다. 단 예외적으로 왕이 스스로 물러나면 기린은 죽지 않고 실도의 병이 나아 국민 중 한 사람을 왕으로 뽑는다. 왕이 권좌에 없게 되면 나라에 각종 재앙이 터지고 요괴가 출몰해 점점 피폐해진다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이치는 나라가 유지되려면 왕은 불로불사하여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민심에 순응하여 선정을 베풀어야만 한다는 논리를 성립시킨다. 본인은 이 사상이 유교의 천명사상과 매우 닮아 있다고 본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작가가 천명사상을 모티브로 하여 이러한 세계관을 구축했다고 하여도 좋을 정도이다.
천명사상은 전근대 동양의 군주정 사회에서 가장 선진적인 정치사상으로, 하늘의 명령을 받은 군주는 덕과 인의에 의하여 정치를 하는 자이며 실덕을 하면 다른 유덕자에게로 천명이 옮겨 간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이론이다. 전근대 동양에서 동서를 막론하고 최상의 신적(神的) 존재로 추앙된 하늘[天]은 우주 만물을 창조한 조물주이자 자연의 이치를 운행하고 인간사를 제어하는 주재자이며 천벌을 내리는 불가항력적인 존재이고 유덕자에게 천명을 내리는 최고신이었다. 하늘을 대신하여 지상의 만물을 다스리는 군주가 덕을 잃고 폭정을 일삼으면 하늘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징벌을 내리는 신권으로써 그 군주에게서 천명을 거두고, 새로운 유덕자가 이를 부여받아 역성혁명을 한다.
이 천명사상은 군주의 혈통적 정통성이 중시되던 전근대 사회에서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유덕자라면 누구나 천명을 받을 수 있다는, 이론적으로 가장 혁명적인 정치사상이었다. 중국의 바깥에서 세력을 떨쳤던 부여, 고구려, 백제 등의 왕조들이 천제의 핏줄로 태어난 천손(天孫)에 의한 통치를 당연시하여 이론상 역성혁명이 절대 불가능했던 것에 비해 중국은 귀족, 장상, 서민 가릴 것 없이 유덕자라면 천명을 받아 천자가 될 수 있었다는 점으로 보아도 천명사상이 군주제 사회에서 얼마나 발전된 이론인지 알 수 있다.
소설 『12국기』의 세계관은 유교의 천명사상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 많다. 작중에서 왕이 실도를 하면 하늘의 버림을 받게 되며 스스로 양위를 한다는 전제 하에 신수인 기린이 새로운 유덕자를 택하여 왕으로 삼는다. 이 기린은 유교 사상에서 새 유덕자에게 천명을 부여하는 하늘과 동일한 역할을 하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유교에서의 추상적 존재인 하늘의 역할이 작중에서는 실체적 존재인 기린에게로 이식되어 있는 셈이다. 또, 왕은 기린의 성격이나 품행을 보고 민심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유교에서는 민심은 곧 천심(天心)이라는 논리가 보편적으로 작용하였다. 작중의 왕은 기린만 보면 민심을 짐작할 수 있고 유교에서 군주는 매개자가 없이 민심을 직접 살펴야 알 수 있다는 차이는 있지만, 결국 민심이란 군주의 명암에 따라 갈리고 하늘은 민심에 순응하여 복이나 재앙을 내리므로 기린의 품행은 곧 민심이자 천심인 것이다.
이렇게 두 사상이 공유하고 있는 모든 내용의 총 결론은 바로 덕치(德治)로 귀결된다. 작중에서 임금이 덕으로써 백성을 다스리면 불의의 사고를 당하지 않는 한 불로불사하며 이에 따라 나라는 영구히 유지되고 재앙이 일지 않는다. 유교 사상에서 천자가 덕치를 하면 왕조의 수명이 오래 유지된다는 점과 상통한다. 덕치를 하지 않음으로써 천명이 떠나가 기린은 실도의 병에 걸려 왕과 함께 죽고 백성은 요괴들의 출몰에 아무 방법도 없이 고통을 겪게 되며 나라는 천재지변과도 같은 재앙에 휩쓸려 크나큰 불행을 맞이한다. 소설 『12국기』는 이와 같은 극단적인 설정을 통하여 덕치야말로 천명을 잃지 않고 나라의 영구한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길임을 시사하고 있으며 작가가 정치와 민심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고 세심하게 고찰하였는지 생각하게 해 준다.
첫댓글 역사를 좋아하는군요. 유학의 정치철학을 <산해경>이라는 도교사상을 담고 있는 백과사전에 기초하여 서술하면서, 현대 정치철학까지도 포함하고 있어서 상당히 매력적인 애니메이션이랍니다. 잘 이해하고 있군요.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