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군 월선면 용흥사에는 정읍출신으로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담양향토문화연구회 자료를 인용한 글을 재인용하면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은데, 이는 태인 대각교와 숙빈최씨에 얽힌 정읍지역의 전승과 어긋나는 점이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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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빈최씨관련 안내문, 숙빈최씨와 대각교의 사연은 장봉선 편저 정읍군지에 처음 수록되었다고 한다. 여성문화해설사란 직업이 있는데 지난 봄에 숙빈최씨에 대해 문의를 받고 원문을 전해준 경험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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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빈 최씨는 정읍 태인 출신 아닌 담양 창평 출신?
숙빈최씨는 담양 창평 태생으로 본명이 최복순이다. 그는 일가족이 전염병으로 마을을 떠나온 뒤에 다른 가족들이 모두 사망함에 따라 홀홀단신이 되어 거지로 살았다.
이후 복순은 가끔 용구산에 있는 암자를 찾아가 지성으로 부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꿈을 꿨는데 용구산 산신령이 현몽하여 "네 정성이 갸륵하니 너에게 살길을 알려 주겠노라, 내일 아침 날이 밝는대로 장성 갈재에 나가 보거라. 그곳에서 기다리면 나주목사 부임행차가 있을 것이니 그들에게 애원하여 살 길을 찾아보도록 하여라"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장성 갈재에 가보라"
그 다음날 아침 일찍 복순이 장성 갈재에 당도하여 기다리니 과연 목사의 행차가 있는지라 복순은 땅에 엎드린 채 그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했다. 이에 민중돈의 처가 그를 보고 남편에게 말하기를 ' 저 아이가 비록 거지이나 영특하게 보이므로 우리가 데려 가십시다' 하였다.
이후 대궐에 무수리로 입궁한 복순은 이차저차해서 연잉군을 낳았고 그 연잉군이 왕이 되니 그가 바로 영조였던 것이다. 그후 영조는 어머니가 생전에 몹시도 그리워했던 용구산 암자터에 절을 지으니 그 절이 바로 용흥사였다.
숙빈최씨가 못잊어하던 용구산 암자터는 담양 월선의 용흥사
용흥사는 다르게는 몽성사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이곳에서 숙빈최씨가 기도하여 영조를 낳았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원래 몽성사였다는 설과 나중에 몽성사라 개칭(숙종 19년, 1693년)했다는 두가지 설이 있는데 임금이 될 아들을 꿈꾸었으므로 몽성이며, 임금을 낳았으니 바로 용흥일 터이다.
용흥사는 전란통인 1950년 12월 29일에 완전히 불에 탔으며, 1970년에 효월스님이 15평의 임시법당을 세웠다. 그후 1988년 10월 5일에 전통사찰로 지정받기에 이르렀다.
태인 대각교 설화와 어긋나는 담양 용흥사 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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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인 대각교 인근에 세워진 기념공원, 부족하나마 이렇게라도 해놓으니 대각교가 외롭지 않은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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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용흥사에 얽힌 이러한 이야기는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용흥사의 구전설화와 태인에 전해지는 숙빈최씨와 대각교의 사연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장성 갈재와 대각교는 모두가 지금의 1번국도상에 위치한다. 한양에서 제주도까지 이어지던 이 길은 추사 김정희가 유배차 간 길이며, 우암 송시열이 가다가 정읍에서 사약을 받은 길이 또한 그 길인 것이다.
오늘날의 1번국도를 따라 대각교를 지나 장성으로 갔을 나주목사의 행차와 담양에서 장성을 찾아갔을 최복순이 만난 운명의 장소는 대각교였을까 아니면 갈재였을까?
장성 갈재도, 태인 대각교도 걸쳐있는 1번 국도에서 해답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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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리가 3개나 있는 바로 그 현장, 거산교는 1번국도, 새로운 대각교는 21번국도, 낡은 대각교는 차량통행불가, 다리 아래에는 동진천 물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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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빈최씨 부친의 신도비가 경기도에 있다하나 가비일 것은 분명해 보인다. 숙빈최씨가 태인에서 끝내 일가친척을 찾지 못한 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그의 태생지는 담양일 가능성도 있다할 것이다.
장성 갈재에 '노아의 전설'은 있으나 숙빈최씨에 대한 전설은 없는 것으로 보아 복순은 갈재에서 나주목사 행차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큰고을인 태인에 가서 기다리는 방법을 택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무래도 거지소녀에게는 곡창인 태인이 산골인 갈재 보다는 배고픔을 해결하기에 훨씬 유리했을 것이므로.
아들이 임금된 후 파주 소령원에 묻힌 숙빈최씨, 칠궁에서는 장희빈과 함께
숙빈최씨의 무덤은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있는 사적 358호인 소령원이다( 세자와 후궁의 무덤을 말함). 숙빈최씨는 영조가 즉위하기 5년전에 별세하여 영조 29년에 소령원으로 옮겨졌다. 영조는 자신의 생모가 묻힌 무덤이 릉으로 격상되길 강력히 원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끝내 그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한편, 청와대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자리한 궁정동의 칠궁에는 숙빈최씨와 장희빈 등이 모셔지고 있는데 장희빈은 정식 왕비가 된 덕에 그를 모신 집의 기둥은 크고 둥근데 비해 나머지는 사각기둥을 하고 있어 격이 차이가 난다고 한다.
살아서 원수가 되었던 숙빈최씨와 희빈장씨는 죽어서도 영원히 칠궁 안에 함께 하고 있다. 혹여 그 영혼들이 아직도 구원을 풀지 못하고 서로를 째려 보고 있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정조 신드롬'에 숙빈최씨 설화도 복제에 복제 거듭
희빈장씨에 의해 옹기에 가두어져 하마터면 죽을 뻔 했던 숙빈최씨, 어머니가 그렇게 죽었다면 태어나지도 못했을 영조, 그리고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 숙빈최씨가 살아서 그 모습을 보았더라면 3대에 걸친 그 비통한 운명을 어찌 생각했을런지 궁금하기만 하다.
그 치열을 극했던 시기와 암투, 죽고 죽이고 서로를 짓밟고 올라서고자 했던 욕망의 그날은 지나간지 오래이다. 인생무상 권력무상은 만고의 진리이건만 희빈장씨와 인현왕후 그리고 숙빈최씨의 3각구도, 영조와 사도세자와 정조를 둘러싼 이야기는 오늘도 회자에 회자를 거듭하고 있으며, 복제에 복제를 거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