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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20년전의 오늘,
추억속 시간으로 돌아간 1995년 오늘 5월 10일은
개인에게 있어서 현재까지도 큰 울림울 주는 인생의 공연관람이 되는 날이다.
바로 당대 세계 최고 전성기에 진입한 본조비의 크로스투어를 내한공연으로 보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생 최초의 콘서트 관람 이기도 하다)
요즘은 나도 그냥 덤덤히 보는 공연들 뿐, 누구에게는 언제 어디서 무슨 공연 봤어.. 로 쉽게 끝날 말이지만,
나에게 있어서 본조비 공연 관람 만큼은 공연 소식을 들은 그 순간 부터 시작해서 공연이 끝나고도 20년이 지난 지금 까지도
큰 설렘을 주고 모든 경험의 기록들이 다 최초인 추억의 집약체를 가졌다고 봐도 될 정도로
큰 것을 포기하고 맨바닥을 파면서 치열하게 만나야 했던 현재에는 없는 나만의 열정 넘쳤던 사연들이 숨어있었다.
한달 후인 1995년 6월 25일, 영국 웸블리에서 7만 5천 대규모 앞에 펼쳐진 초대형 본조비 콘서트
큐시트, 무대의상, 춤, 관객 피드백 하나하나가 한달앞서 보여준 내한공연의 전개와 동일했다'
1999년 인천 문화예술회관에서 김경호 단공을 보러 갔는데 본조비가 한 것 똑같이 하더라. 아마 공연 같이 본 것 같음 ㅎㅎㅎ
대한민국에서 선보인 내한공연 오프닝 의상 그대로 웸블리에서 공연한 본조비
바로 이 점퍼, 머리띠까지 그대로 역대 최고로 손꼽히는 본조비 웸블리 공연의 모습은 언제나 내한공연도 역시 동시에 떠오르게 했다
나는 이것을 당시 청계천 다리 밑 시장에 가서 런던 라이브를 최초로 LD 구입하게 된다.
그리고 20살 당시 인천 심지 음악감상실 사장님께 부디 자주 틀어달라며 LD를 기증했다.
1990년 중 1학년 시절, 같은반 친구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
그 친구가 약속을 꼭 지키겠다는 담보로 테이프를 하나 주었다.
그것은 바로,
본조비 라는 외국 가수의 Slippery When Wet 이라는 앨범..
돈을 빌려주니까 친구가 요걸 주더라
이것이 나를 현재의 나를 만들 것이라고는 어린 나이에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흰색 플라스틱 사출커버에 투명색 판이 합켜진 촌스런 흰지 커버는
예술그림 흉내낸 듯한 종이 커버에 Slippery when wet 이라고 적혀 있었다
테이프 하는 것을 자비로 산 적이 없는데다가
일주일 용돈이 하루 100원씩 7백원이던 나에게 3500원에 달하는 카셋트 테이프는 귀한 보증금 이나 마찬가지였다.
카셋트를 틀자마자 느낀것은 그야말로 신세계.
가요에만 익숙했던 나에게 처음 들어보는 강한 사운드와 거친 보컬이 나의 귀를 자극했다.
본조비 이전까지 중1때 최고 가수를 친다면
김흥국, 이치현과 벗님들, 이정석, 올림픽 건전가요 등등 딱히 주관없는 음악취향을 갖고 있었는데,
본조비를 처음 알게된 1990년, 서태지 이전에 대한민국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당대 톱가수 김흥국
본조비의 음악은 강한 울림이 귀를 깜짝 놀라게 했지만
이상하게도 처음 듣자마자 거부감이 없는 신나는 사운드로 나의 흥을 돋우게 했다.
이는 다른건 몰라도 본조비 만큼은 듣는다는 신조로 가게 했다.
그런 그가 5년 후에 한국을 올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팝키드, 락키드 이전에는 보물섬과 (아이공룡 둘리, 달려라 하니, 영심이, 날아라 슈퍼보드 등 유명만화 연재)
GI 유격대 수집에 푹 빠진 아이였다. 본조비가 급격하게 어린 취향을 바꿔놓는다
나이를 먹으니 용돈이 올랐다
국민학교때 일주일 천원이던 용돈이 중학교에 들어서며 한달 1~2만원을 받을 수가 있던 것이다.
그걸로 돈이 생기는대로 본조비 음반을 모조리 구입했다.
테이프 가격은 개당 3500원 4천원으로 500~600 페이지 분량의 대형 보물섬 책 가격과 동일하며
분식집 500원 짜리 떡볶기 즐기는 것을 7번이나 참아야 하는 결코 만만치 않은 가격 이었다.
그렇게 어렵게 구한 귀한 테이프들을 그야말로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들었다.
현재는 인터넷으로 쉽게 들을수 있는데다가 들어줄 시간 내기도 아까운 정보의 바다 이지만,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듣는 것 조차 적지않은 돈이 들던 시절에 꽂힌 본조비는
조용필에 흥을 못 느끼고 서태지가 나오기 이전부터 나에게 우상중에 우상이 되어 있었다.
고딩에 올라가니 메탈밴드가 참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도 짝궁들과 빠질 수 없는 음악 얘기는 결국 본조비 찬양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어떤 친구들은 메탈리카, 판테라, 메탈리카, X제팬 등등 각각의 기호식품들을 갖고 있는 친구가 여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본조비를 좋아하는 친구와 고교입학 후 가장 앞선 친구가 되었다.
인터넷 같은 정보의 바다가 아니기 때문에 현재의 인터넷 통신비의 상당한 반대급부는 서점이 모조리 특혜를 얻었다.
서점의 황금기.. (만화방, 헌책방, 도서관 등등의 파생상품)..
인터넷이 없는 정보지식의 배고픔은 책이 풀어준 세상에 살았지 않았는가.
인터넷이 없던 시절은 서점이 수백년을 대신 하는 큰 시장 이었다
그래, 서점에 가는거다. 서점에 가서 책을 뒤져본다.
요즘 인터넷 포털 실시간 검색어 처럼 책 커버에 본조비라는 커다란 글자가 눈에 띈다.
본조비 내용을 다 읽고 싶어 땀이나고 갈증이 난다. 읽고도 또 읽고 싶다.
본조비를 통하여 스키드로우가 데뷔하고 동시에 티켓토라는 팀도 추가적으로 결성 됐다고 한다.
읽고싶다 읽고싶어.. 결국엔 책도 사는거다.
고등학생 시절 직접 사 모은 본조비 관련책자
다시한번 떠올리는 거지만 본조비가 한국에서 공연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왜냐고? 한국에 올 리가 없으니까.
그들은 당시 세계에서 누구보다도 비싼 가수라는 인식이 있었다.
수많은 메탈밴드 중에서도 톱 중에 톱이었던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유수의 대형공연 무대와 뮤직비디오 리퀘스트를 보면 대중 락계에서 본조비는 톱 중에서도 슈퍼 톱 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95년 본조비가 오기 이전에 한국에서 딱히 그와같은 내한공연을 했다고 들어온 밴드가
이보다 한참 오래전인 1989년도의 CCM 메탈밴드 스트라이퍼 뿐 이었기 때문에 본조비 급은 커녕 이보다
저렴한 밴드조차 오지 않았기 때문에 본조비가 한국에 온 다는 것은 가설 조차도 만들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 3 봄.. 어느날,,
본조비 광팬 인 것을 아는 어느 친구가 나에게 먼저 그 소식을 알려주는 것이다.
'본조비가 한국에 온대..'
'.........'
'무슨 소리야, 웃기지마'
'진짜야, 동인천 대한서림 가봐, 지금도 입장권 팔고 있대
동인천 대한서림에 가기 전 까지는 친구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무슨 공연 티켓을 서점에서 판단 말인가, 그것도 본조비 공연을.. 믿을수가 없었다,
그런데 공연 이라는 걸 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건가?
콘서트는 물론 당시 연예인들 실제로 본 적조차 한 번도 없어 공연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도 처음이고
어떻게 보는 것인지도 몰라 경황이 없었다
지금껏 주변 누구도 본조비 공연을 보러 간다고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동인천까지 직접 가지 않으면 지금처럼 클릭 한 번으로 쉽게 알 수가 없었다.
결국 가 보기로 했다.
공연 티켓 하나 사러 가는데 인천 끝에서 끝을 가야 했다.
인천광역시 이전에 인천 직할시 시절이라 대전보다도 작은 도시 규모였슴에도 1시간이 넘게 걸려서야 대한서림에 도착했다.
20년 전 인천 고교생들에게 최고의 상권, 서점의 메카 동인천
인현동 호프집 대형화재로 55명의 중고생이 사망한 세월호 이전의 가장 큰 학생 참사
동인천 상원이 급격히 죽는 결정타를 먹인다
'본조비 티켓이 여기에서 파나요?'
직원이 대답한다
'몇 장 드릴까요?' (← 하악~ 있다는 소리?!!!)
순간의 시간은 멈춰 있었다.
본조비 티켓이 파는구나.. @,.@
'한 장 주세요' 라고 부탁했다.
본조비 내한 공연은 티켓 가격은 최소 3만원에서 최대 7만원 이었다.
97년 IMF 이전의 7만원의 가치는 안성탕면 라면을 100원에 살 수 있던 시대의 7만원이다
1996년기준 롯데리아 시급이 시간당 1600원이던 시절이기 때문에
국내 공연이 1만원~1만 5천원에 책정되던 시절에 그때의 공연 한 번에
7만원은 현재 체감물가가 경우에 때라 20만원에서 최대 25만원대에 이르는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공연 1년 후인 1996년에 롯데리아 알바로 일하며 받았던 시급 명세서. 6시간 가까이 정신없이 일하니 총 8,800 원의 일당이 나온다
어린 당시 연예인 신비주의가 있어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보고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냉정을 찾고 최후방 중앙석인 4만원을 과감하게 질렀다.
고 3 이었지만 그래도 그것도 한 달 용돈을 훌쩍 뛰어넘는 큰 돈 이었다.
현재까지 유물처럼 보관하고 있는 나의 역대 최초의 공연 입장권. 그것도 Bon Jovi
드디어, 티켓이 손에 쥐어지다 ㄷㄷㄷ
본조비 티켓 뒷면
떨린다, 무언가가 순식간에 지나간 느낌이다.
기대없는 순수함이 얼마나 소중한 순간인가 싶었다. 본조비 티켓을 손에 쥔 후,
나는 인생길에 대한 고민아닌 고민을 하게 된다. 행복하지 않은 고민이다.
본조비 티켓을 구매한 시점이.. 중간고사에서 한 달도 채 안 남겨놓은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1995년 5월 10일은 본조비 내한공연 당시 설렘을 숨기지 못한 일기. 공교롭게도 중간고사 기간이다.
고3에게 중간고사의 의미는 말 할 필요가 없는 상황 아닌가?
대학문이 좁아지냐 마냐 초를 다투는 판국이다.
그러나, 하필이면 중간고사 기간에 본조비가 온다.
올래면 좀 빨리와서 공연 끝내고 중간고사 준비를 하던가 해야 하는데,
중간고사 기간 내내 정말 집중 안 되고 산만해지게 만드는 판국이다. 기로에 섰다.
결국은, 본조비를 보는 것으로 한다.
중간고사 마지막 날 준비는 시험준비가 아닌 공연을 보러 갈 교통, 음악 등 정보수집을 한다.
내가 이것 만큼이나 스스로가 미쳤다고 생각 한 것도 지금까지도 손을 꼽을 정도다.
중간고사 마지막 날이 본조비 공연 날이다.
마지막날 시험은 얼큰하게 말아먹고 본조비 공연을 보러 가려고 한다.
공연장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당시 인천 지하철도 없고, 버스노선 안 좋고, 용산직통도 없었고, 시외 직통버스 시스템도 없었고,
올림픽공원 가는 5호선도 생기기 직전이라 고등학교가 있는 만수동에서 올림픽공원까지 가는 여정은 꽤 길었다.
50분 (학교→주안역) + 1시간 30분 (주안역→잠실역) + 40분 + (잠실역→올림픽 공원)
인천에서 서울을 거의 3시간을 걸려 공연장을 갔다.
공연장 도착직후 펼쳐진 기다란 줄행렬에 압도 되었다.
나이대는 나보다는 모두들 나이가 많아 보였다. 19살이던 나와 동일한 연배는 거의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여자와 남자의 비율이 거의 같아 보였다.
그 당시는 유독 남자의 전유물이던 메탈 임에도 여자 관중의 숫자가 많은 것이 이색적이었다.
본조비의 첫 스타트 Wild in the Street
We Will Rock You 전주 이후 바로 시작한 내한공연 첫 곡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예매 시스템이 있었으나 입장이 늦어 줄이 길어졌으며, 이로인해 관객들이 다 입장도 하기전에 공연이 시작 된 것이었다.
본조비의 첫 곡이 하필이면 Wild in the Street 이다. 중학교 1학년때 처음 본조비에 빠져들게된 그 테이프 앨범의 수록곡이다.
웅장한 울림과 관중들의 넘치는 엔돌핀이 문밖으로 흘러나온다.
이 노래를 밖에서 줄 서며 듣는데 호흡이 가빠지고 분통이 터지더라.
나뿐이 아닌 밖에 줄선 사람들만 수천명은 되는 것 같았다. 그들도 역시 분위기가 잔뜩 심각해졌다.
사람들이 관중 입장전에 어떻게 공연을 시작할 수 있냐며 험악한 목소리로 항의하였다.
나는 어린 나이에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 처럼 마구 비집고 새치기 해서 들어갔다.
나 조차도 빨리 들어간 편인데 첫 곡을 통째로 놓쳤다.
뒤에 줄 서며 항의하던 관중들 심정은 더욱 어땠을까. 먼저 들어간 것이 미안 스러웠다.
↑내한공연 자료. 내한공연 때 불렀던 Dry County
Crossroad 앨범 위주의 셋 리스트였슴에도 예외적으로 공연에서 불러준 곡이라 인상적 이었다.
Dry County 의 후렴구 떼창도 상당히 인상적 이었다.
6분 30초경의 관객을 흥분의 도가니로 모는 봉산 탈춤도 인상적 이었다.
런던 웸블리 라이브에서는 이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내한공연에서만 들을 수 있던거라 큰 것을 건진 기분이었다.
예상한 대로 공연장 내부는 뜨거운 용광로였다.
현재처럼 정보의 바다가 아닌 당시 대중 음악계에 가장 집중도 높은 가수였던지라
한 곡 한 곡을 영어가 안되는 고3인 나도 공연 전 곡을 모두 따라 부를 수 있었을 정도로
메탈리카 내한공연 급으로 모든 사람이 공연 전 곡을 따라부르는 딴 청 부릴 틈이없는 공연 이었다.
3층까지 전 좌석이 꽉 차 있었다. 매진인 것이 확실하다.
공연 첫 곡부터 3층까지 관객들도 공연 끝날 때까지 앉아서 보는 사람이 거의 안 보였다.
거의 대부분이 크로스로드 앨범 곡 이었으며
크로스로드 외에 부른 곡 중 기억에 남는 곡은
첫곡 Wild in the Street
Dry County
I Die For You
당시 미발표곡 Diamond Ring (추후 Thesedays 앨범에 실림)
정도로 기억한다. Born to Be My Baby를 특히나 기대했는데 그건 부르지 않았다.
↑내한공연 자료. Keep the Faith
본조비 과거 앨범을 거의 외다시피 한 이후 당시 처음으로 접해본
본조비의 신보 Keep the Faith.. 도데체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
그런 노래를 한국에서 듣는 순간의 감동은 정말이지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더라.
본조비가 도데체 한국에 올 줄 기대라도 했었나.. 하는 생각이 겹친 상태로 멍해서 봤던 기억이다.
내한공연 떼창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로 꼽혔던 Livin on A Prayer
본조비 내한공연 때 죄다 히트곡 판인 가운데에서도 개인적으로 하이라이트 부분이라고 기억되는 곡은
↑바로 Living on A Prayer,,
최근 폴매카트니 내한공연 때 함께부른 Let It Be 와 Hey Jude 의 감동과 다를바가 없었다.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 공연에서의 You Give Love A Bad Name 내한공연도 딱 이거랑 똑같았다니깐
공연이 마친 시각은 대략 밤 11시..
올 때도 3시간이 걸린 이곳에서 인천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했다.
당시 핸드폰도 없었고 삐삐도 없었고, 남은 돈은 더더욱 없었고 뒤도 생각 안하고 무작정 왔다는 생각에 패닉이 되었다.
밖에서 자야하고 집에 돌아갈 수 없고 12년 개근 기록이 깨지는 다음날 무단결석 상황이다.
그러나 기적같은 일이랄까..
아버지가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찾으셨다.
콘서트을 보러 아들이 잠실까지 간 사실을 알고는 인천 관교동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공연이 끝난 나를
찾느라 나오는 사람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나를 찾았던 것이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아버지 뒷자리를 잡고 인천까지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
실황공연 뿐만이 아니라 본조비를 보기위한 그 당시의 투쟁도 드라마 같았다.
그러나, 본조비를 보기 위해 버린 것들이 얼마나 컸던지.. 나는 중간고사에서 역대 최저 성적을 찍을 수 있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본조비 내한공연 관람기가 후회가 없는 드라마인 것은 왜일까..?
한국에서도 본조비와 위와 똑같이 Oh~Yeah~ 피드백을 주고받던 잊혀진 흥겨움이 20년만에 다시 떠오른다
본조비 내한공연은 불혹을 바라보는 나를 지탱하는 죽지않는 자양분이다
첫댓글 와우.....
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항상 닉넴 볼때마다 동인천에 있던 음악감상실 심지 인지 궁금했는데 인천분이신거 보니 맞았네요~ㅎㅎ
96~97년에 일하고 군제대 후 99년까지 심지 4층 팝송실에서 만으로 2년정도 신청곡 받으며 음악 틀었드랬습니다
심지에서 일하게 된 것도 나름의 스토리가 있죠^^
ㅎㅎ 제 인생의 첫공연이엇던 마이클잭슨 내한공연도 1996년잇으니... 이공연도 내년이면 딱 20년이군요...ㅡㅜ 메탈리카의 첫내한공연도 98년이엇으니, 이것도 얼추 20년.. 폴맥경이 다녀가신 이시점에 내한공연이란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되는데... 보고싶은 아뤼스트에 대한 열망은 세월이 지나도 그닥 줄지않네요... 약간의 시들어짐이 전혀 없진않지만..ㅡㅡ 아.. 세월이여...ㅡㅜ
캬 . 지금까지 읽었던 공연후기중에서 가장 생생하고 감동적으로 느껴지네요 ,,, 허허
저도 본조비로 락음악에 입문한 사람이라 그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데 ,
도대체 한국에는 또 언제 올까요 ,,,,, ㅠㅜㅠㅜ
우..우왕....
제작년에 kamelot을 처음보던 그때의 심정을 적어주신거 같아 공감이 많이 갑니다ㅎㅎ
근데 이때 이후로 본조비는 왜 내한을 오지 않는건가요? 옛날에 악숭에서 물어봤을 땐 자세하게는 모르겠지만 본조비 맴버들이 당시에 여러모로 불만이 쌓였다고 들었는데요...;;
저도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현장에서 느낀 분위기로는 국내에서는 당시
그만한 레벨의 공연도 사례가 없어서 음향이 좋다 나쁘다를 따질 경황이 없었어요.
TV 실황녹화의 거지 음향과 달리 현장음은 매우 좋았습니다.
전문가 입장에서는 당시 많이 안 좋았다고 하나봐요.
밀레니엄때 까지도 한동안 오래 지적 되었던 조용필 공연 목욕탕 사운드 급은 아니었던 걸로 생각되는데..
지금가지 내한을 오지 않는것은 개런티나 투어 일정, 코스의 문제겠죠.
그 문제를 지금도 무려 20년간 품고 있어서 한국을 스킵 하는 거라면 본조비 멤버들은 핵쪼잔 입니다 ㅎㅎㅎ
@심지 1996 한국이 싫어서 안오는 뮤지션은 본적이 없네요.
@초코지오 Slayer는 완전히 한국 싫어하는거 아닐까요...
@안토니오지나크 Slayer 내한 때 너무 휑 했어요. 보컬 아라야는 새벽 1시 반 공연 끝까지 환한 미소로 공연 했다만
드넓은 동대문 경기장에서 새벽중에 고작 500명 살짝 넘어 보이는 되는 사람들이랑 논다는게
바로 전까지 일본에서 수만명과 공연하고 왔다는 자신도 믿기지가 않았을 듯.. 다시 올 마음이 생길까요.
본조비 봉산탈춤을 실제로 보셨겠군요!!!
런던 웸블리 라이브 보세요. 내한공연을 그대로 따라한 줄 알았다니깐요.
동일한 투어 콘서트인데 내한공연 한 달 사이에 안무가 뭐 바뀌었겠어요? ㅎㅎㅎ
한편의 드라마를 본거같아요~~~ 마지막 아빠등장 울컥하네요 ㅋㅋ 어떻게 그 인파에서 찾으셨으까...
헐 ㅜㅜ 진짜 재밌게 읽었어요... 저도 이만한 열정이 있으면 좋겠네요
캬 멋지네요 추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당시 내한공연때 공연장 개구멍(?)으로도 공연 본 사람들이 있었다고.. ㅎㅎ
정말 멋지네요ㅋㅋㅋ 감동적입니다. 추천!! 살면서 저런 미친짓 한번쯤은 해봐야죠 ㅎㅎㅎ
와... 진짜 공연한편 보고온기분이네요 ㅋㅋ
와~ 벌써 20년이라니...전 이때 왜 안갔나하고 천추의 한으로 남아 있네요
재밌게 정독했습니다 ㅎㅎㄹ
드라마같은 글 잘봤습니다
재밌게 읽어너여...고맙
리얼생생후기 넘 멋지네요^^
1995년 본조비내한공연 놓치고 평생후회하는 1인입니다
리치재합류해서 꼭 내한공연 했으면하는 바램 이젠 꿈일테죠,,,
꽃돌이 시절 그들모습 가끔그립지만 자선사업가로서 열심인 은발머리 중후한 존의 요즘모습또한 멋지더군요
완전체 본조비 공연이 불가하다면 존본조비 기타솔로 어쿠스틱공연이라도,,,,,,,,
거의 동년배이신것 같네요...간만에 그 때 생각이 나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한국 관객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았다면...앵콜을 3번이나 하지 않았겠죠...현장 분위기는 최고였어요...공연이 시작되자 마자 모든 관객이 의자위로 올 스탠딩에다...거의 모든 곡에 대한 떼창...Cross Road Tour 다음 Tour인 These days Tour때도 내한 일정이 조율 되었는데...최종단계에서 엎어지고 말았다는...이번에 오면...무슨 일이 있더라도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