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을 읽다
김만년
노을은 ‘붉음’으로 상징되는 단색이다. 그러나 우리 삶의 행간에 수많은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아침노을은 시집가는 누이의 연분홍 차렵이불처럼 곱다. 비질을 해 놓은 것처럼 옅고 묽다. 옅고 묽은 빛은 해를 잉태한 서기이고 시작을 알리는 기쁨이다. 그러나 아침노을은 나의 뇌리에서 쉬이 잊혀진다. 뒤에 더 크고 눈부신 광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저녁노을은 해를 배웅하는 이별의 손짓이다. 해가 저물면 지상의 모든 사물들은 어둠 속으로 돌아간다. 새들도 둥지로 돌아가고 사람들도 번잡한 일상을 놓고 집으로 돌아간다. 또 누군가는 생의 해가 저물어 하늘로 돌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저녁노을은 서천으로 흐른다. 하루해를 끌고 오느라 발뒤꿈치가 온통 피멍으로 붉다.
저녁노을은 보는 장소에 따라 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서해 외포리 바닷가에서 바라본 노을은 황홀하다. 해가 포물선으로 활강할 때 바다는 순식간에 냄비 물처럼 펄펄 끓어오른다. 노을에 덴 고기들이 허공으로 불 방망이질을 친다. 마치 수평금반 위에서 은빛 무희들이 왈츠를 추는 듯 비상하는 선율이 역동적이다. 빛의 광합성을 일으키며 해를 뛰어넘고 해를 마구 희롱한다. 이때 아주 잠깐 동안이지만 해와 고기와 내가 일직선이 된다. 순간 내 망막도 노을빛으로 물든다. 짜릿한 우주율이 손톱만한 눈 안에서 출렁거린다. 나는 물아의 일체감에 흠뻑 빠진다. 해를 영접하는 바다의 심포니에 내 마음도 덩달아 뛴다. 도무지 발을 뗄 수가 없다.
비 갠 산사에서 바라본 노을은 동화적 상상을 불러온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노을빛이 찬연하고 기묘하다. 어느 화공이 저리 아름다운 물감을 채색할 수 있을까. 어느 시인이 저리 은유적인 고백으로 밑줄을 그을 수 있을까. 붉은 햇덩이를 끌고 몇 마장의 수레바퀴가 지나간 흔적 같다. 흰 코끼리 떼들이 수천 그루의 바오밥 나무를 밀고 간다. 달마가 불소를 타고 화엄을 오르는 형상 같기도 하다. 아니 조물주가 그려놓은 거대한 구름단청 같다. 주홍빛 휘장 너머로 파리보광 칠보사원이 층층구름으로 쌓여 있다. 신들이 거처한다던 수미산이 저기 어디쯤일까. 금세라도 운문을 열고 아미타가 현현할 것 같은 느낌이다. 마치 서천 구만리가 광배에 쌓인 듯이 경이롭다.
나는 일몰 직후의 연노을에도 마음이 이끌린다. 하루를 소진한 사물들이 곧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는 절박감도 있겠지만 황홀하고 경이로운 시간이 떠난 뒤에 찾아오는 안온함 때문이리라. 그맘때가 찔레꽃이 노을의 잔광을 이고 흰 별꽃들을 파다하게 피우는 빛과 어둠의 경계이다. 진주홍 노을이 차츰 옅어지다가 산등성이 너머로 가뭇없이 사위어간다. 나는 이 쇠잔해 가는 소멸의식에 무량한 연민을 느낀다. 하루를 돌아보고 삶의 행로를 조용히 묵상케 하기 때문이다. 아침노을이 산통의 서기라면 저녁노을은 삶의 완경을 이루는 색조이다. 하루 일을 마치고 저문 강에 삽을 씻는 농부의 순정한 얼굴이다. 산문에 걸린 노을을 등지고 저녁소찬을 준비하는 노스님의 온후한 뒷모습이다. 황홀하고 찬연한 시간이 떠난 자리에서 은은히 번지는 무욕의 마음이다.
여름 날 방죽에 앉아서 보는 강 노을은 또 어떤가. 쭉 짜면 금세 이마 위로 진홍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능금빛 노을이다. 까치 노을처럼 들뜨지도 않고 산사의 노을처럼 오묘하지도 않다. 아라리 가락처럼 진양조로 흐르는 노을이다. 어머니의 휘늘어진 치맛자락처럼 애잔한 곡조를 띤 노을이다. 고달픈 인생길 굽이굽이 넘어가다가 그만 각혈하고 누운 자리처럼 비감마저 든다. 이 세상 소풍 끝내고 하늘로 돌아간다던 어느 시인의 귀천이 저 노을 속 어디쯤일까? 한 허벅의 노을이 엎질러진 자리가 너무 붉어서 섧다. 이때쯤이면 나는 시간여행을 떠나는 철부지 방랑자가 된다. 휘리릭, 그리움이란 지팡이로 마법을 걸면 오래전에 지상을 떠난 옛집 한 채가 노을 속에 나타난다. 동화를 펼치듯이 아슴아슴 노을의 행간을 읽어보는 것이다.
첫 장을 넘기면 산막 같은 초가가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른다. 노을 저편으로 아흔아홉 마리의 양떼들이 줄지어 흘러간다. 흰 싸리울 너머로 목화이불이 너풀댄다. 앵두꽃 분분한 마당엔 묵은 닭들이 맨드라미 붉은 볏을 쪼고 있다. 어린 솜털구름들이 엄마구름 섶으로 모였다가 흩어지곤 한다. 엄마는 노을 강에 앉아서 열두 폭 푸른 옥양목을 서천으로 푼다. 보리타작을 하던 아버지는 그새 불콰해져 황소구름을 베고 초저녁잠을 주무신다. 떡 광주리를 이고 파장 길을 걸어가는 엄마의 구름버선도 보인다. 새털 모자를 쓴 아이들이 구름능선을 달리고 커다란 산뽕나무들이 무럭무럭 자라나던, 달그락거리던 엄마의 관절이 구만리 노을 산을 넘을 때까지 세월 모르게 철없던… 어쩌면 내 어린 날의 생가 같기도 한 노을동화 한 편, 이제는 뜨거운 밑줄 하나 그을 수 없지만 두고두고 읽어도 지루하지 않는 나만의 명작이다.
그리움도 지극하면 착시를 일으키는 걸까? 누군가의 부재를 간절히 호명하면 노을은 나에게 ‘있음’의 빛깔로 화답한다. 호그와트행 기차처럼, ‘돌아가고 싶다.’라고 주문을 걸면 노을은 나를 돌아가고 싶은 곳으로 안내한다. 프로이트의 꿈이 무의식속에 나타난 소망의 고리들이라면 옛집은 나의 그리움으로 현시되는 상상력일지도 모른다. 노을은 어둠과 소멸의 전조를 깔고 있다. 그래서 노을의 시간은 종종 과거로 흐른다. 기억의 회로 역시 그리움 쪽이다. 이 그리움의 진폭이 클수록 노을과 나와의 심미적 거리는 좁아진다. 이때 노을이 읽혀지기도 한다. 몇 타래의 저녁연기로 사라져가던 당신, 흰 새 날아가던 서천은 만장처럼 붉었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노을에 옛집 하나 덧그리다 보면 당신에 대한 기억도 붉게 물들었다. 방죽에 앉아서 한 사람의 전생을 읽는 동안 어머니는 그렇게 노을, 그 먼데까지 나를 데려다 주곤 했다.
노을이 진다. 하루의 결이 삭아 점점이 소실점으로 가는 노을, 어쩌면 내 인생행로도 저와 같을까. 빠듯한 삶에 부대끼며 빛을 좇던 집착의 한낮도 이젠 한 뼘쯤 물러선 것 같다. 중천에 이글거리던 욕망의 스펙트럼이 점점 노을빛으로 응집되는 시간이다. 외포리의 황홀함도 산사의 오묘함도 이젠 삶의 배경이 되었다. 용서하고 덮고 가라는 노을의 마음이 지난한 시간을 돌아와서야 읽힌다. 그리움도 때론 삶의 자양분이 되는 걸까? 노을을 읽는 날이면 생그레 미소가 번진다. 사는 동안 노을을 볼 것이고 노을을 보는 동안은 내 마음도 노을처럼 순연해지리라. 수많은 은유를 간직하고도 하나의 빛깔로 사위어 가는 노을, 내 삶도 그랬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마음에 은은히 번질 수 있는 노을빛 삶이었으면 좋겠다. 읽던 책을 다시 노을 속에 갈무리해 둔다. 내일이나 어느 먼 날에 다시 읽을 그리움이다.
첫댓글 일요일 오전부터 눈물이..
잉~흔한 내 눈물...ㅋ
글 속 분위기에 휩싸였나봅니다...
@터기 그보다는 제 추억에 젖어서..^^
@연보라 그렇군요....뭐시 그리 그리운가요....
@터기 아부지...ㅜ
@연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