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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과 동물의 식습관과 그들의 노후
사람과 동물 그리고 식물의 늙어감은 비슷합니다. 진화과정으로 보면 식물에서 동물로 진행했다고 말하기도 하고, 아니면 식물이나 동물은 각자의 길이 있다고도 합니다. 이것은 알 수 없습니다. 원칙이 있다면, 동물도 식물의 진화 속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진화의 과정을 땅으로부터 독립시켜 보면 해답은 업습니다. 땅과의 관계에서 보면, 동물과 식물은 하나이고 서로의 선택이 다를 뿐입니다.
사람에게는 식물에서 진화한 길의 과정이 있습니다. 여기에 동물적 속성이 결합될 수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먹는 것이 능동이냐 수동이냐 하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땅에 둔 것은 자기 장치가 없습니다. 장치는 자기 외부에 두고 있고, 연결 고리만 자기 안에 두고 있습니다.
동물은 머물러 두는 장치를 자기 안에 두고 있습니다. 먹이를 먹었다면, 동물 안에 몇 초, 며칠이라도 자기 몸 안에 머무르게 하는 장치가 있습니다. 식물은 먹이 선택 기능이 없습니다. 피동적으로 먹이를 선택하고, 그 먹이를 흡입하는 방식입니다. 능동적이지 않습니다.
(중략)
사람도 동일
초기에는 어머니 젖(동물 젖)으로 유지합니다. 이후에 풀이나 고기 등을 소화합니다. 그러면서 늙어갑니다. 먼저 외형의 축소 없이 비틀어지듯 합니다. 체액의 전달이 부족하고, 전해질의 신경전달이 위축되면 노화되고, 고목 쓰러지듯 쓰러집니다. 따라서 노화는 식물과 동물 모두 최대한 먹이 활동하는 시기 이후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따라서 30대 이후는 노화가 시작되는 셈입니다.
식물과 동물에게 노화의 뚜렷한 기준이 있습니다. 아이의 재생산이 더 이상 안 되는 시기입니다. 이 기준에서 보면 늙음의 뚜렷한 기준이 있는 것이죠. 몸이 늙었지 마음은 안 늙었다는 (이상한) 말을 자주 합니다만. 늙을 준비는 아이의 재생산이 가능할 때부터 하는 것입니다. 이후 뚜렷한 성장이 없고 성장 속도에 변화가 오고 안정기에 들게 됩니다. 안정이 끝날 무렵 다음 세대 생산이 안 되게 되죠.
남녀 모두 다음 세대 생산을 하지 못할 때 노화가 진행됩니다. 갱년기는 노화의 시작입니다. 갱년(更年)은 ‘다시 하다’는 말인데, 실제 다시 할 수 없습니다. 불능 갱년입니다. 불능 갱년을 현실에서 수용하는 것이 노후의 안정입니다. 거슬리려면 대가가 필요합니다.
노후는 긍정적일 수 있습니다. 이제는 생산을 하지 않아도 되고, 자기만 돌보는 시기로 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을 위한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부정적으로 보며, 체력과 소화력을 자신하고 노화의 흐름에 저항하면 대가를 지불하게 되고, 병이 생기고 하는 것이죠.
어릴 때 먹을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늙을 때는 정성을 들여 돌보지 않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자신을 키우기에 그 나이 때 음식이 불명확합니다. 정립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반면 아이들이 먹을 음식에 정성을 다합니다. 따라서 섬세한 음식이 있고, 사회적으로 여기에 익숙합니다. 이렇게 아이들에게 제공되는 음식은 크게 6가지를 기준으로 먹을 것과 못 먹을 것을 나눌 수 있습니다.
술은 소화 시간이 길게 소요됩니다. 자극도 큽니다. 개성도 강합니다. 따라서 아이들에게 못 먹게 하는 것입니다. 커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극이 심하고, 소화 시간이 길고, 개성이 강하기에 아이들이 먹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아이들의 음식은 6가지 표준으로 검토를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사회적으로도 익숙합니다. 청년과 장년은 자기 것을 자기가 판단합니다. 보리밥이든 강력분 밀가루 음식이든 소화할 수 있는 나이이기 때문입니다.
갱년기에는 못 먹는 음식이 있습니다.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도 있습니다. 먹으면 장애가 초래되기 때문입니다.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외형적 늙음을 늦출 수가 있습니다. 단, 먹이 활동의 부작용이 겹쳐 의학 효과의 절반도 못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의학의 수준이 아닌, 의학이 생활화 된 것이 의학의 의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페니실린을 제외하면 의학 수준의 발전은 별무합니다.
실제 의학은 생명에 기술상의 진화는 별로입니다. 대다수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의학이 되어서 발전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각자 생명 유지가 연장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로 막는 것이 밥을 먹는 것에서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먹는 것의 긍정성이 이제는 지난 셈입니다. 물론 아직 우리 사회 절반 정도의 인구는 그렇지 않습니다. 1인 가구가 전체 인구의 1/4 정도이고, 이 1/4의 절반이 쪽방에 산다면 식사를 제대로 못하는 가구가 대다수인 셈입니다.
어쨌든 먹이 활동의 소재가 부족한 사회는 아닙니다. 소재는 있는데, 먹을 것 이상의 무엇이 요구되는 그런 복지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먹는 것이 발목을 잡아 의학효과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밥의 부작용일 수 있습니다. 밥의 부작용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잘못 먹어 아프다는 것입니다.
괴로워서 죽을 마음은 없고 잘 살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아파도 살아야 되는 것이죠. 이것은 고통입니다. 그래도 살아야 되는 것, 이것이 현실입니다.
아파도 살아야 하는 고통은 대부분 먹는 활동의 잘못에서 비롯합니다. 먹는 활동과 노령화가 별도로 이뤄진 것입니다.
지금의 문제는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을 너무 잘 먹고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따라서 7, 8년 주기로 음식을 줄여
나가야 되는 것인데요. 그렇게 못해 가는 것입니다.
낯선 것, 개성이 있는 것, 자극적인 것, 소화기간이 긴 것(소화하기 힘든 것), 단단한 것 등을 많이 먹기에 제대로 수명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건강과 관련해 자주 상담을 하게 되는데요. 60세 이상이신 분이 드셔서 안 되는 음식을 드신 후 생긴 고통으로 상담을 합니다. 이럴 때 제일 답답합니다.
우리 사회는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에 아이들이 먹는 음식들은 정밀합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늙음의 과정을 역으로 밟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스스로 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늙음을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식물을 키울 때 음악을 틀어주고 키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맛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 맛은 이상한 것입니다. 습관과 기호 등을 부지불식 간에 버리지 못하는 것이죠.
6가지 기준에서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 아는데 불안정한 것이죠. 청, 장년 이후 식품영양학은 나이에 무관하게 적용합니다. 성인 이후 음식이 나이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제출됩니다. 이제는 노년이 여기에 반기를 들어야 할 때입니다.
예를 들어 보리밥이 있습니다. 이것은 40대에게는 소화가 잘 됩니다. 갱년기에 보리는 독약입니다. 먹고 나면 손발이 저리고 그렇습니다.
술을 예로 들어도 그렇습니다. 어르신에게 어떤 술이 부담이 없는 술일까요? 전통소주, 와인, 막걸리, 맥주, 백주 가운데 말이죠. 사실 모두 부담입니다. 따라서 적게 마셔야 합니다. 대다수 모르고 먹는 경우가 많습니다. 병을 자초하는 것이죠.
식품이 풍부해지고 복지가 도래하여 온 것이 식품영양학입니다. 슈퍼푸드가 그런 경우입니다. 이것은 나이 든 이에게 독약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음식이 성인이 된 이후에 너무 평등화되었습니다. 노인이 장년의 음식을 먹으면 아프기 마련입니다. 먹지 말라고 하면 화를 내시죠. 드시지 말라면 나쁜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음식이 풍부해지며 그 음식을 누리는 단계가 지금입니다. 다만 누림의 결과가 잘못 되었다는 것이 시간적으로 아직 확인이 안 된 것입니다. 실제 건강을 위해 음식과 노인의 관계는 절대 필요합니다.
아동에게는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구분이 잘 되어 있습니다. 아동이 성인이 되고 성인이 노인이 되어가는데, 여기에 6가지 기초에 의해 음식에 대한 구별이 있어야 합니다.
동일한 조건이나 구체적 음식은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유는 아이에게 소화가 가능합니다. 노인에게 우유는 돌덩이와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외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막 심은 나무와 고목은 형태가 다릅니다. 고사목과 싹이 먹어야 할 먹이가 다릅니다. 원칙은 같으나 구체성은 다릅니다. 그래서 제3의 음식이 별도로 있다는 것입니다. 완전 순환이 아니고 일정한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더 많은 먹이가 음식 대상으로서 폭이 확대 되어야 합니다.
과거 나라와 사회 문화의 발전에는 표준이 있었습니다. 그 표준 가운데 하나가 노인음식의 체계와 발전 정도였습니다. 그 척도를 연구하는 사람은 지금 없습니다. 노인음식이 준비가 안 된 문화권은 수준이 저조합니다. 환경도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한국의 노인음식 발전 수준은 몸에 좋은 것 위주로 되어 있습니다. 중국은 귀족층이 독특하게 발달한 나라입니다. 그러면서 노인 음식이 발달했습니다. 문제는 그 상황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노인음식이 발전된 이유는 노인에게 좋고 병이 안 되는 것이기에 발전한 것입니다. 보통 노인음식은 젊은이 음식보다 더 맛있는 기법으로 요리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 이싱의 겨울 음식 가운데 노인음식의 흔적이 있습니다. 쌀을 소화하기 위해 약재로 염색한 것입니다. 이 쌀은 죽보다 더 소화를 잘합니다. 아이들의 죽과도 차이가 있습니다. 흑미라고 합니다.
백합 우린 물에 조린 무우 음식도 노인음식에 속합니다. 무우는 독성을 해소하고 신경을 풀어줍니다. 그냥 무우를 먹으면 몸이 붓습니다. 마치 똥독이 온 몸에 퍼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청년에게는 생무우를 주어도 소화를 시킬 수 있고 효과도 보게 됩니다.
노인에게 생무우는 발가락 위부터 똥독에 변비까지 생기게 합니다. 노인에게는 무우 물이 잘 베이게 백합과 같이 삶고, 민물고기로 같이 삶으면 흡수가 잘 되게 되어 있습니다.
노인에게 변비는 무서운 것입니다. 생명을 거는 일이기도 하지요. 그런 음식들로 해결했던 것입니다.
이런 노인음식이 체계화되어야 합니다. 단, 사회화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입니다. 그래서 중간에 그 매개자로 차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노령화 사회에서 차의 역할
찻잎은 그 성질이 미미하게 찹니다. 조금 찬 것을 성격상 조금 따뜻한 것으로 변화를 시키는 것이 제차공정입니다. 그러면 차는 나무에서 왔고, 엄청난 다년생입니다. 차나무 자체는 성인이 되었을 때 채엽을 합니다.
유년이나 노년이었을 때 채엽을 하진 않습니다. 유년이나 노년의 차나무를 채엽하면, 차의 기호품의 정도는 알 수 있어도, 왜 차를 마셔야 하는 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또한 유년의 차나무 찻잎은 좋은 차가 안 됩니다. 이 시기의 차나무는 표준이 안 됩니다.
성인기 찻잎으로 여러 공정을 거치는 것이 제차의 기본입니다. 제차 공정은 아이와 성인과 노인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심은 아이나 성인이 아닙니다. 차는 노인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비록 현대 성인들이 정신적 압박과 휴식 시간 부족, 센 노동강도, 힘든 취미활동 등으로 스스로 부담이 큰 생활을 하고 있지만 말이죠.
차는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갱년기 변화가 오는데 이것은 자기 책임이고 나머지와 무관합니다. 이들에게도 차는 집중적으로 필요합니다.
차는 노인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노인에게 차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차는 냉한 것을 따뜻하게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차나무는 토양을 먹어서 낸 결과물로 잎을 드러냅니다.
잎의 성질을 이용해 어떤 것도 소화에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이 법제(제차)입니다. 소화에 도움이 안 되면 기호화되고 생활 영역이 되지 않습니다. 생활 영역에 들어오면 소화에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녹차는 아직 법제가 제대로 안 된 것입니다. 미미하게 차가운 것이 그대로 있으면 차가 아닌 것입니다. 발효도가 30%는 되어야 합니다. 녹차를 마시면 위가 아프다는 것! 이것은 과도하게 마셔서 그렇다면 과도함의 기준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루 물을 마시는 정도의 1/3 정도를 마시면 얼굴이 푸석푸석해지게 됩니다. 현실에서 녹차문화가 그렇습니다. 조금 찬 것을 조금 따뜻한 것으로의 변화! 이 과정을 거친 것을 차라고 한다면 소화의 문제 해결의 답을 제공해야 합니다.
차는 식생활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합니다. 소화와 안정을 하는데 이것은 따뜻함이라는 성질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많은 문헌 근거들이 있습니다.
한국 차문화를 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차를 문학과 문화로 치환시킨 사람들입니다. 선문답으로 쓰이는 것이 차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사람에게 힘이 되는 지팡이, 노인에게 힘 없고 가진 것 없는 이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차입니다. 종교나 권력자의 향유로서 차문화가 아닙니다. 인류 최초 최고의 복지가 차입니다. 이를 저버리면 차는 멀리 가는 것입니다.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끌어올려 함께 가는 것이 차입니다.
운남의 흑차는 없는 사람을 위해 없는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있는 사람이 상인이 되면서 돈을 벌기도 했지만, 그 상인들도 정신을 계승했던 것입니다. 희주의 엄가대부처럼 말이죠.
품질은 떨어질 지 모르나 운남 흑차의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차가 (티벳 등에 보급된) 변경차였습니다. 가장 나쁜차는 (중국 국내용)내수차였죠. 현재 수출차는 과거 변경차 수준입니다. 해외 시장은 달랐던 것입니다. 해외 시장은 합리적이어야 가능했었습니다. 반면, 중국시장은 고급화해도 사가는 것입니다. 내수차에 온갖 재주를 부리게 됩니다.
한국사회 산업화가 식당문화에 남긴 비극
현대 생활은 모두 알듯이, 집에 아이와 어른, 유년과 성인이 함께 식사를 합니다. 그러나 각자 맞추는 게 아닙니다. 그저 평범하게 한 끼 먹는 것도 안 되는 상황입니다.
유튜브라는 매체는 이젠 긍정적인 역할을 다했다고 봅니다. 특히 밥 문제로 싸움 만이 많습니다. 밥 한 끼 먹기도 수월치 않은 상황인데 말이죠. 반면, 밖에 나가면 사먹을 것은 많습니다.
우리 음식은 산업화와 맞지 않습니다. 한국은 근대시기에 어느 나라보다 어렵게 살아왔습니다. 한국은 사계절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먹을 게 다양하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음식문화에 이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집에서는 소멸되었지만 식당에는 남아 있습니다.
마트에 가면, 계란이 품질과 가격이 모두 차이가 납니다. 제일 싼 것이 제일 좋다고 여깁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착한 식당의 조건이 있습니다.
값이 합리적이고 좋은 재료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 식당 가격이 저렴해야 한다는 인식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어렵게 지냈던 흔적입니다. 좋은 재료로 잘 만들어 제 값을 받고 판다는 것! 이런 인식이 미흡한 것입니다. 산업화의 전개에 비추어 식당문화는 더딘 편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식당에 대한 인식은 어렵게 살아온 시대의 반영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런 문화가 있다는 것은 어쩌면 비극입니다. 바깥에 식당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집밥은 먹으면 살이 되고, 식당밥은 먹으면 헛배만 부른다”는 말입니다. 전문적인 식당이 좋고 대충 먹는 집밥이 빈 것이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전문식당은 보양이 되어야 하는데 왜 잘 안 될까? 이것은 한국 사회 발전 정도에 비추어 보면 비극입니다. 따라서 식당문화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집밥이 식당밥보다 못한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식당과 집밥의 어색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비극입니다.
평균적으로 식당밥이 최고여야 정상입니다. 이것이 해결되어야 노후 식생활이 해결됩니다.
현실적으로 집에서 연령별 식사를 제공하기에는 불가능합니다. 집밥이 보약이었던 것은 가격이 저렴하고, 온도 유지가 잘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위생적이었던 것도 있습니다.
(코로나19 상황이 다시 엄해지고 해서 생활을 문화로 돌아보는 박현 선생님 차예사 이야기마당 일부를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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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살아가면서 아니 늙어가면서 알아두어야 할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