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나는 위도의 밥섬 식도에서 6개월간 근무한 적이 있다
임시 강사의 눈물나는 보수월액은 37,800원
식도에서의 내 청춘은 격렬했으나 청춘의 삶은 비열하였다
이젠 격렬함도 비열함도 모두 내려놓은 무덤덤한 나이가 되었다
혼자서 식도에 들어가 44년 전의 추억이 서려 있는 곳들을 돌아다녔다
하숙집 딸 숙경이가 목포에 산다는 소식을 그녀의 동생으로부터 들었다
혜은이의 노래 ‘감수광’을 불러주던 미정이는 군산에 산다고 하였다.
갑자기 격렬비열도(格列飛列島)에 가고 싶어졌다.
아침 9시 45분에 출항하는 대원카훼리호에 몸을 실었다
섬 여행의 비수기라서 승객은 예닐곱명뿐이었다
전라북도에서 관광 진흥 차원에서 뱃삯을 절반 보조해 주니 운임이 저렴해졌다.
아직도 봄꿈에 젖어있는 격포항은 고즈녁하였다
갈매기들도 먹을 것이 없음을 알고 뱃전에 얼씬거리지 않았다.
여객선은 약 50여분 만에 위도 파장금항에 도착하였다
손님을 한명도 싣지 못하고 빈차로 돌아가는 백은기 기사님의 쓸쓸한 표정이 보였다
항구 앞에는 대단히 규모가 큰 건물을 신축중이었는데....용도가 무엇일까?
파장금항에서 뱃머리를 돌려 약 5분만에 식도항에 도착하였다
44년 만에 식도에 발을 디디는 순간 온갖 상념이 스쳐 지나갔다
식도는 동 · 서 2개의 섬이 모래톱으로 연결된 형상을 하고 있는 작은 섬이다
내 기억 속에는 식도가 생생한데...그뿐이었다
요란하게 끼룩거리는 괭이갈매기만이 나를 반겨주었다
울음 소리가 고양이의 울음과 닮았다 해서 괭이갈매기라는 이름을 얻었다
방파제 앞에는 여객선터미널 공사가 한창이었다
본섬인 위도에서 전기까지 공급받고 있어서 40여년 전에 비하면 도시가 되었다
마을을 돌아가며 포장도로가 생기고, 집집마다 승용차를 가지고 있었다.
식도여객선터미널에 들어가서 나가는 뱃시간을 확인하였다
터미널 직원은 배가 들어오고 나갈 때만 사무실을 지키는듯 하다
직원의 명함을 보니 위도 주재 기자, 우체국 직원, 매표소 직원 등이 적혀 있었다
식도교회가 근사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동네 가운데에 초라하게 서 있었는데 터미널 옆으로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섬 교회는 당집이라는 토속신앙을 중시하는 주민들과 갈등을 겪을 수 밖에 없다
식도항 여객터미널과 교회 사이에 가마귀산 등산로가 있다
등산로는 널찍하고 말끔하게 정비되어 있어서 찾아가기가 쉬웠다
가마귀산에 안골저수지가가 만들어져서 고질적인 물 걱정도 전혀 없어졌다.
산에서 내려다 보는 중선넘마을의 정경이 평화로웠다
마을 앞에서는 선원들이 출어를 앞두고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식도는 번화가인 식도마을과 반대쪽에 있는 중선넘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옛날의 전신전화국 건물이 폐허로 변했다
당시엔 이곳 전신전화국의 전화기가 섬 안의 유일한 전화기였다
그래서 전화가 왔다고 확성기로 방송하면 이곳까지 뛰어와서 전화를 받았다. ㅠㅠ
약 30여분 산길을 오른 끝에 식도의 최고봉 가마귀산 정상에 다달았다
해발 117m인 이곳에서 식도는 물론이고 인근 바다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정상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었지만 오래 되어서 글씨가 보이지 않았다.
정상에는 나무 벤치가 두개 설치되어 있었다
미세먼지가 자욱하여서 조망은 좋지 않았지만 보일 것은 보였다
식도마을 쪽으로 하산하면서 오른쪽 바다에서 수리바위를 만났다
흙이 없을 것 같은 바위 위에 소나무 숲이 있는 모습이 경이로웠다
비상을 꿈꾸며 웅크리고 앉아 있는 독수리 형상인가(?)
마을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당집을 만났다
요즘 다닌 다른 섬들과 달리 당집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흐뭇하였다
당집 앞에는 세월이 느껴지는 두 그루의 나무가 수문장처럼 서 있어서 신령스런 느낌이 들었다.
섬 사람들이 당집에 의지하는 것은 눈물겨운 생존 본능의 발로다
당집 앞의 숲에는 주민들이 속죄 제물로 바친 소의 머리뼈가 나뒹굴고 있었다
구약시대부터 소나 양들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숱하게 죽어갔다
두 개의 섬이 연결되는 고라목이라는 작은 해안을 거닐었다
소풍날이면 마을 사람들과 아이들이 모두 이곳으로 걸어왔었다
점심을 먹고 아이들은 집으로 돌려보내고, 어른들과 교사들만 남아서 마시고 놀았다 ㅋㅋ
마을로 들어가는 포장도로 옆에 근사한 정자가 세워져 있었다
트레킹족들과 마을 사람들의 쉼터로 안성마춤이었다
바닥에 먼지가 쌓여있었지만 대충 치우고 앉아서 샌드위치와 커피로 점심을 해결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아
그리운 사람아
먼 곳에 있는 사람아
아주 먼 곳에 있는 사람아
바다가 우는 걸 본 일이 있는가
바다가 흐느끼는 걸 본 일이 있는가
바다가 혼자서 혼자서
스스로의 가슴을 깎아내리는
그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들은 일이 있는가..................................................조병화 <바다> 부분
섬에 살던 사람은 죽어서도 섬을 떠나지 못했다
내 기억에 식도의 장례 풍습은 독특하였다
상여꾼들이 시신을 넣은 상여를 메고 하루종일 해변을 왔다갔다 했다
그리고 해질 무렵이 되면 땅에 묻었다
생각해 보니,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담겨있는듯 하다
이제 식도마을 안길로 들어섰다
어느 펜션의 담벼락에 식도가 밥섬임을 알리는 글귀가 씌여 있었다
고슴도치의 모양의 위도에 곁에 있는 식도는 고슴도치의 입 앞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밥섬이라 불리웠다
그러다가 일제 강점기 때 식도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1978년도에 하숙했던 풍년식당이 그대로 있었지만 주인은 바뀌었다
마을회관 앞에서 주민 두분을 만나 내 소개를 하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숙집 딸 숙경이는 목포로 시집가서 살고 있다고 하였다
지나가는 중년 여인이 숙경이 동생이라고 알려주길래 소식을 물어보았다
폐교로 변해버린 위도초등학교 식도분교 교문 앞에 섰다
시퍼런 청춘 시절에 왔다가 초로의 늙은이가 되어 다시 나타났다
동네 사람들의 주차장이 되어버린 교정은 참으로 쓸쓸하였다.
운동장가에 심은 동백이 핏빛 꽃을 토해내고 있었다
치열한 삶을 견디고 피워낸 동백꽃은 왠지 처연한 느낌이 든다
동백꽃은 내 젊은 날의 상채기를 보는 것 같아 애잔하였다
문이 굳게 닫힌 교실의 빛바랜 계단 앞에 앉았다
수업이 끝나면 남아서 당시 유행하던 혜은이의 '감수광'을 불러주었던 미정이가 떠올랐다
당시 기능직공무원이었던 백종선씨는 '인간극장'에 나올 정도로 유명인이 되었다
복탕을 먹고 중독된 선원을 마을 사람들이 밤새 끌고 다녔지만 결국은 이 운동장에 죽었다
밤마다 소녀들이 놀러와서 북적대던 숙직실은 없어졌다
당시의 소녀들은 육지로 시집가는 것이 꿈이어서 총각 두명이 근무하는 학교로 놀러왔다
섬에서 친구로 사귄 이종이는 자기 여동생과 연애하라고 부추겼지만 나는 잘 참아냈다
이제는 소녀들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는 섬이 되었다
소녀들과 함께 저녁마다 올라갔던 뒷산으로 가는 길을 찾아보았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탓으로 길이 없어져서 이곳에서 멈추었다
해안초소에서 서치라이트를 비추며 빨리 내려가라는 경고 방송을 여러번 들었었다 ㅋㅋ
벌써 20여 년이 지난 일이라 서해훼리호 침몰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당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서해의 섬은 바로 식도이다.
총 37명이나 되는 주민들이 한꺼번에 죽음을 당하여 섬 전체는 울음바다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학교터에서 바라보는 식도마을은 옛날에 비해 많이 부유해 보였다
펜션과 민박집도 보이고, 마을 중앙에는 식품가공공장도 들어와 있었다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하는데 봄에는 새우잡이, 여름과 가을에는 멸치잡이로 살아가고 있다.
오후가 되자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괭이갈매기들도 추위를 타는지 방파제에 앉아 쉬고 있었다
봄이 되어 본격적으로 멸치와 새우잡이가 시작되면 이들도 바삐 움직이리라.
신속한 어·패류 유통과 위도 본섬과의 접근성 제고를 위해 위도∼식도간 연도교가 건설된다고 한다
이에 따라 연도교 3㎞ 구간에 총사업비 778억 원의 국·도비를 투입할 계획이라고 한다.
식도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오후 2시 30분에 나가는 배를 타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