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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과 평화의 나라
로마서 15:4~13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대림절 둘째 주일이다. 또 성서주일이다. 대림절은 시간 속에서 맞이하는 성경의 드라마이다. 하나님의 달력과 함께 살려는 우리 교회는 그런 점에서 성경을 사랑하는 교회이다.
또 12월 둘째 주일은 인권주일이다. 인권은 누구나 인정하듯 천부적 권리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깃들어 있다(창 1:26). 인간의 생명과 권리, 자유와 정의를 위해 애쓰는 것도 성경대로 사는 일이다. 대림절, 성서주일, 인권주일 모두 그 맥락이 같다. 바로 평화의 주님을 닮아가는 일이다.
지난 목요일 인권상 시상식에 참석하였다. NCC 인권센터 이사이면서도 별로 수고한 일이 없어 미안한 마음에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실은 자리를 지켜주고, 박수를 쳐주는 일도 참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녁까지 먹고 돌아왔다.
올해 33회 수상자는 노들장애인야학 교장 박경석 님이다. 그는 24살까지 해병대에서 군복무를 마칠 만큼 아주 건강한 청년이었는데, 토함산에서 행글라이딩을 하다가 척추부상을 당해 하반신마비 장애인이 되었다. 그리고 5년 간 집 안에만 있었다.
그래도 어머니의 배려로 일주일에 한번 유일한 외출을 할 수 있었는데 바로 교회 가는 일이었다고 한다. 주일이면 택시를 대절해 주어 형과 동행하였는데 기사가 왜 119를 타지 않느냐고 인상을 쓰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는 상을 받고 나서 그 공을 어머니에게 돌리고 싶다고 하였다. 토함산에서 행글라이딩을 하던 날도 주일이었다. 교회에 가라는 어머니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산에 갔다고 한다. 비록 사고로 운명은 바뀌었지만 그래도 어머니의 은혜로 장애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얻었고, 장애인들을 위한 삶을 살게 된 것이 감사하다고 하였다.
그에게 어머니는 ‘용서와 인내의 품’이었다. 모든 자녀에게 그렇듯 어머니는 ‘기쁨과 평화의 나라’였다. 자식이 어머니를 떠올릴 때 나는 어떤 기억으로 남고 싶은가? 집 밥? 김치찌개? 나를 사랑하시고 기도하시던 어머니? 바라기는 ‘기쁨과 평화의 나라’로 기억되기를 소망한다.
대림절은 평화의 절기이다. 예수의 오심은 평화의 강림이었다. 메시야의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 평화의 왕국, 기쁨과 평화의 나라를 꿈꾼다. 바로 샬롬샬롬의 세상이다.
1)
바울은 로마서를 마무리하면서 다시금 예수님을 기쁨과 평화의 모범으로 제시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한다. 그것은 이전 성경에서 이어진 새로운 성경의 메시지였다.
당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점차 고난과 박해가 다가왔다.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부에도 갈등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팽팽한 긴장감이 지속된 상황이었을 것이다. 당장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인내와 위로’였다.
성경은 고난 받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준다. 희망을 잃은 사람들에게 믿음과 언약을 준다. 가정이든 공동체든 위기가 닥칠 수 있다. 그럴 때일수록 위로와 인내가 중요하다. 교회도 흔들릴 수 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심력을 중심으로 조화를 이루라고 한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5).
오늘 사도 바울의 말씀은 평화로운 시기가 아니라 고난 중에 있는 로마 교회를 향해 가슴으로 뜨겁게 전하는 메시지였다. 바울은 초대 교회 교인들의 희망과 기대는 물론 그들이 겪는 두려움, 탄원, 차별 가운데 예수님의 말씀과 생각을 전하였다. 그들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장하고, 비감하게 들렸다.
예수님은 죄인 된 우리를 사랑하셔서 대신 십자가를 짊어지신 분이시다. 그런 화해자이신 예수님을 본 받으라. 형제자매의 연약함과 약점을 대신 하는 일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한다. 초대 교인들은 큰일이든, 소소한 일이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씨름하였다.
무엇보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든든한 무릎을 지닌 사람은 연약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 넘어지는 사람을 붙들어 주고, 다른 사람의 약점을 감당해야 한다.
2)
바울은 로마교회 공동체 안에서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질 것을 기다리라고 당부한다. 위기에 처한 때일수록 서로 용납하고, 한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찬양하며, 서로 받아들이라고 권면한다.
다툼 상황이 있었다. 이방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교회이니만큼 온갖 다양성이 존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심점보다 서로 다른 견해와 경험이 갈등하였다. 특히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차이를 극복할 힘이 부족하였다.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은 할례, 율법, 정결음식을 강요하였다. 예수님도 유대인 출신이었다.
갈등과 다툼은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기 어려운 다름으로 이해할 때 생긴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크게 선한 것도, 남달리 악한 것도 아닌 차이로 갈등하게 되는 상황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원칙을 정하였다. 이를 ‘아디아포라’라고 한다. 성경에서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지 않으나 신앙생활의 규칙으로 정하는 것을 ‘아디아포리즘’이라고 부른다.
보기를 들어 루터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경하게 부르는 일은 물론 안식일을 범하는 일, 댄스, 발레, 연극, 고리대, 어음거래, 환금업, 연회와 술 취하는 일, 주사위 놀음, 호화롭게 옷입는 일’ 을 금지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그러면서도 목사가 담배를 피우는 일과, 남자들이 가발을 쓰는 일 그리고 맥주를 마실 수 있는 음식점을 드나드는 일은 허락하기도 하였다.
경건주의 전통에 있는 루터교회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세속적 쾌락을 즐기는 일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까닭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관점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자유를, 모든 일에는 사랑을!”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교 신앙판단의 대원칙과 같다. 소소한 차이로 갈등하지 말고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려는 그리스도의 정신이다.
초대교회는 이러한 출신에 따른 차이들 즉 유대교의 할례, 율법, 정결음식 규정을 극복하고, 마침내 일치를 이루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약간의 차이에도 곧잘 넘어지고, 차별로 인해 상처를 주고 다른 생각을 폄하한다. 더 많은 인내와 위로가 필요하다.
박경석 님은 들불장애인야학의 교장이다. 그는 친구 따라 장애인운동을 하면서 차이를 넘어 차별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다투어야 했다고 한다. 또 자신들의 이기적인 생각과도 싸워야 하였다.
처음에는 야학에서 포항제철을 통해 봉고버스를 한 대 얻었다. 이제 두 대만 더 있으면 스쿨버스처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겠다고 싶어 두 대를 더 구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러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우리만 편하자고 하는가? 그래서 장애인도 자유롭게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게 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저상용 버스, 지하철 엘리베이터 설치, 휠체어 용 출입구 설치, 도로에서 인도와 인도를 연결하는 턱을 없애는 일들이다. 그 결과 가장 큰 수혜자는 누구인가? 결국 노인들, 무릎이 약한 이들까지 다 혜택을 본다. 모두가 수혜자가 되었다.
박경석 님은 자신이 하는 일에 얼마나 극성인지 모두 그의 전화를 피한다고 한다. 웃으면서 도망 다닌다고 한다. 그렇게 열심히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앞장선다. 이기적으로 살았을 그였는데, 장애인이 된 후 바뀐 인생이고, 세상이었다.
본문은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한다. 물론 차이가 있는 남을 내 몸처럼 받아들이는데 전제가 있다. 새 계명 ‘서로 사랑’은 말은 쉽지만, 얼마나 힘든 일인가? 우리는 소소한 일에도 남의 일에 끼어들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바울은 말한다.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5).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7).
예수님의 품은 얼마나 넓은가?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의 친구가 되기 위해 스스로 가난하게 사셨고, 스스로 병든 자, 스스로 고난당하는 자, 스스로 소외된 자, 스스로 이방인이 되셨다.하물며 하나님의 아들도 그렇게 하셨는데, 우리가 서로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성경에는 ‘서로’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그들이 서로 문안하고”(출 18:7), “서로 화목하라”(막 9:50),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골 3:13) 그리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요일 4:7).
그리스도교 정신에서 ‘서로’라는 두 글자를 빼면 그 핵심이 없어진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로’는 연대적 언어이다. 우정이니, 사랑이니 다 ‘서로’ 하는 것이다. 혼자 하는 섬김이나 봉사는 없다. 서로 서로 하는 것이다. 얼마나 다정한 말이며 흐뭇한 말인가? 천국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있다. 서로공화국은 ‘기쁨과 평화의 나라’이다.
어떤 선배가 이런 말을 하였다. 이전에 그에게는 특별한 말버릇이 있었다. 평소 자존심이 강해 남의 말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별명이 ‘그게 아니라’였다. 그런 말버릇 때문에 남과 대화하기가 힘들었다. 남의 말을 인정하지 못하는 버릇 때문이었다. 그 결과 모두 그와 대화하기를 꺼렸고, 기피인물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오랜 습관에 대해 반성하면서 자신의 말버릇 ‘그게 아니라’가 돌아보니 상대를 부인하고 멀리 밀어 놓는 잘못된 버릇이라고 실토하였다.
그에게 어느 날 가슴에 콕 박히는 한 말씀이 있었다고 하였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요 13:34).
늘 보고 듣던 말씀인데 새롭게 다가 왔다. 문득 ‘서로’에 필이 꽂혔다고 하였다. 아, 서로사랑, ‘서로’구나!
서로 눈 맞춰 함께 보고, 서로 입 맞춰 함께 말 하고, 서로 손발 맞춰 함께 일 하고, 서로서로 함께 놀고, 함께 춤추며, 함께 살고, 함께 살리는 그것이 새로운 계명이고, 새로운 삶이구나. 그래서 자신의 나쁜 말버릇을 고치게 되었다고 한다.
3)
대림절의 상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무엇보다 구유는 가장 유명한 상징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를 의미한다. 짐승의 먹이 통인 구유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가장 낮은 자리, 비천한 자리에 오신 생생한 현장이다. 나님의 구원은 구유까지 그렇게 낮아짐으로써 가능하였다.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가장 닮은 인물을 손꼽으라면 성 프란체스코이다. 그의 어머니가 아이를 날 때가 되어 큰 산고를 겪었다. 마침 지나가던 한 순례자가 이 소식을 듣고 기상천외의 방법을 일러주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아기를 낳으라는 것이다.
어디가 가장 낮은 곳인가? 바로 구유였다. 부자의 아들 프란체스코가 편안한 침실이 아닌 외양간의 구유에서 태어난 배경이다.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 가장 낮은 자리로 찾아오셨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우리더러 더 높이 올라오라고, 더 깊은 진리를 깨우치라고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도는 높이 깨닫고, 널리 진리를 아는 것 보다 낮아질 대로 낮아지고, 겸손히 무릎 꿇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더 낮은 자리에서 만나자고 하신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진리다.
바울은 본문에서 네 번에 걸쳐 구약성경을 인용한다. 바울이 말하려는 “전에 기록된 바”(4)는 구약성경이다. 이미 메시야에 대한 희망은 열방을 향하고 있다. 유대인만이 아닌 이방인에게도 해당된다.
이것이 이새의 뿌리에서 나신 메시야를 향한 모든 민족과 백성의 희망이다.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9),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10),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11),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12).
하나님은 다윗 왕조를 베인 나무와 같게 하실 것이다. 베어진 나무의 밑동을 그루터기라고 한다. 그루터기는 이미 생명력을 다한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의 눈에 소망이 보였다. 하나님께서는 그 그루터기에서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실 것이라는 비전이다.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루터기에서 한 싹과 가지가 나서 다시 결실할 것이다. 이제 열방은 기쁨과 평화의 나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희망의 전도사 노릇을 한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3).
예수 구원의 참뜻은 믿음이 약한 자와 믿음이 강한 자가 서로 받아들여 하나가 되듯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교회의 가족으로서 친교 해야 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한 사람의 평화는 이웃에게, 한 나라의 평화는 열방, 즉 모든 나라를 향해야 한다.
주님이 오실 그날을 기다리는 대림절기는 내가 가진 신앙의 모습에 일대 전환을 촉구한다. 세상에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실현된다. 말로만이 아니라 이젠 삶을 통해 드러나라. 그리스도인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라.
대림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안아주셨듯이, 우리도 서로 받아들이는 절기이다. 어려운 말로 인권과 평화를 말하지 않아도, 내가 단 한 사람이라도 안아주려고 하면 그것이 출발점이 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받아주셔서 언제나 평화와 기쁨의 나라에서 살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첫댓글 믿음이 약한 자와 믿음이 강한 자가 서로 받아들여 하나가 되듯이, ... 한 사람의 평화는 이웃에게, 한 나라의 평화는 모든 나라를 향해야 한다... 주님께 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