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9일(화)
Herbert, 1593-1633)의 <사랑>(Love)이라는 시는 시몬느 베이유가 아예 외워서 두통이 심할 때마다 혼을 실어 암송하곤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셔서 베유를 사로잡았다는 영적 체험도 이 시를 외울 때 발생했다고 합니다.
사랑은 내게 오라 하나
죄로 더럽혀지고 추악한 내 영혼은
뒷걸음질 치네.
그러나 사랑은 기민한 눈으로
들어오자마자 주저하는 나를 보시고
다가와 다정히 물으시네.
행여 내게 부족한 것이 있는지
이 몸은 여기 어울리는 손님이 아니라 대꾸하니
사랑은 말씀하시길, 그대가 그 손님이라.
오, 사랑이시여, 배은망덕하고 인정머리 없는
이 자가 말입니까?
저는 당신을 바라볼 수조차 없나이다.
사랑이 내 손 잡고 미소 지으며 말씀하시길,
나 아니면 누가 그 눈을 지었겠느냐?
그렇습니다, 주여. 제가 그 눈을 더럽혔나이다.
제 수치에 어울리는 자리로 가게 하소서.
사랑이 말씀하시길, 누가 멍에를 졌는지
너는 모르느냐?
사랑이시여, 그럼 제가 시중을 들겠나이다.
사랑이 말씀하시길,
너는 앉아 내 살을 먹어야 한다.
하여, 나는 앉아서 먹었네.
그럼에도 사랑하기를 계속한다면”
어제 주교님과 한살님을 뵙고
돌무화과나무를 생각합니다.
선한 한살님은 죄를 가장하여 사기꾼이라 하시니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시인의 슬픔을 생각합니다.
고통으로 불꽃을 피운 성자, 시몬 베유-3
신비주의로 가는 길
1937년 여름 베유는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로마와 아시시, 피렌체 등을 방문했다. 밀라노에선 노동자 거리를 거닐었으며, 피렌체에선 메디치 가의 예배당에서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보았다. 가장 매혹적인 것은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의 아시시 마을이었다. 다정한 심성을 소유했다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고향은 소박하고 정숙했으며, 한 편의 시를 대하는 듯 했다. 프란치스코의 삶 자체가 시였다. 성인은 이 아름다움을 완성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gli Angeeli)에서 베유는 처음으로 무릎을 꿇었다.
1938년 봄에는 그레고리안 성가로 유명한 솔렘(Solesmes) 수도원에서 사순절을 지냈다. 이곳에서 그는 “순수하고 완전한 기쁨”을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체험은 어느 영국인 가톨릭신자를 만나고서 17세기 영국시인들을 알게 된 것이다. 그 가운데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1593-1633)의 <사랑>(Love)이라는 시는 아예 외워서 두통이 심할 때마다 혼을 실어 암송하곤 했다.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셔서 베유를 사로잡았다는 영적 체험도 이 시를 외울 때 발생했다고 한다.
“사랑은 내게 오라 하나
죄로 더럽혀지고 추악한 내 영혼은
뒷걸음질 치네.
그러나 사랑은 기민한 눈으로
들어오자마자 주저하는 나를 보시고
다가와 다정히 물으시네.
행여 내게 부족한 것이 있는지
이 몸은 여기 어울리는 손님이 아니라 대꾸하니
사랑은 말씀하시길, 그대가 그 손님이라.
오, 사랑이시여, 배은망덕하고 인정머리 없는
이 자가 말입니까?
저는 당신을 바라볼 수조차 없나이다.
사랑이 내 손 잡고 미소 지으며 말씀하시길,
나 아니면 누가 그 눈을 지었겠느냐?
그렇습니다, 주여. 제가 그 눈을 더럽혔나이다.
제 수치에 어울리는 자리로 가게 하소서.
사랑이 말씀하시길, 누가 멍에를 졌는지
너는 모르느냐?
사랑이시여, 그럼 제가 시중을 들겠나이다.
사랑이 말씀하시길,
너는 앉아 내 살을 먹어야 한다.
하여, 나는 앉아서 먹었네.
그럼에도 사랑하기를 계속한다면”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하고, 1939년 독일군이 프랑코 정권을 승인하고, 폴란드를 침공했다. 1940년 6월 14일 파리가 함락되고, 베유는 그해 10월에 마르세유(Marseille)로 갔다. 그곳에서 2년 동안 지내면서 고요한 침묵 속에서 놀라운 정신적 작업을 수행했다. <노트>, <신을 기다리며>, <전(前)그리스도교적 직관>, <그리스의 기원> 등을 썼다. 1941년에는 마침 마르세유에서 열린 가톨릭노동청년회(J.O.C)에 참석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 공장이라는 황량한 환경 속에서 깨어있는 정신을 발견했다. 노동계에 스미는 그리스도교의 정신이 진리를 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결정적으로 도미니코 수도원장 페렝(Perrin) 신부를 만났다. 페렝 신부는 동물적인 공격성을 지니지 않았다. 베유는 페렝 신부를 만나러 갈 때 “빵을 걸식하러 가는데 이곳에서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 걸인의 심정이었다”고 고백했다. 베유는 도미니코회의 기관지에 <노예가 아닌 노동의 첫째 조건>이란 글을 게재했다. 베유는 여기서 노동의 단조로움을 인내하려면 영원한 빛이 필요하고, 노동이 아름다움을 회복하려면 ‘시(詩)’와 같은 종교에 귀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베유는 페렝신부가 “젊은 유대인 교수로서, 정부명령으로 학교에서 쫓겨난 좌익투사인 한 여성이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편지를 써줘서 아르데슈(Ardèche)의 농민 철학자 구스타브 티봉(Gustave Thibon)을 만났다. 티봉은 “현미경의 한계를 초월하는 정신의 세계를 모르면 인간에게 맞는 지식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 철학자였다. 그는 밭이나 길에서 문득 떠오른 생각들을 노트에 정리하고 있었다. 베유는 단순히 ‘아는 것’과 ‘온 신경을 집중해서 아는 것’ 사이의 간격을 줄이기 위해 노동을 하고 싶어했다.
베유는 밭일이 끝난 저녁이면 티봉과 그리스어 공부를 하고, 복음서의 ‘주님의 기도’를 그리스어로 바꾸어 암송했다. 베유는 포도 따면서도 일과처럼 주님의 기도를 암송했다. 티봉에게 청해서 다른 집 포도를 따게 되면서, 포도원 주인은 “이만하면 농부 며느리도 되겠다”고 했지만, 허약했던 베유는 티봉에게 “지옥에서도 영원히 포도 따기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또한 시몬 베유는 앙리4세고등중학교와 고등사범학교를 다니면서 <행복론>의 저자이며 알랭(Alain)이란 필명으로 유명한 에밀 샤르티에(Emile Chartier, 1868-1951)를 만났다. 알랭은 베유에게 칸트나 스피노자 등의 책을 한 페이지씩 뜯어서 흰 종이에 붙이고, 그 여백에 독서노트를 써나가게 했다. 종이는 클수록 좋았고, 여백을 채워나가는 동안 치우침 없이 생각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알랭은 늘 환상 속에 사는 자를 부르주아라 하고, 실제적 노동을 감당하면서도 늘 이들에게 기만당하는 자들이 프롤레타리아라고 했다. 사제와 교사 등 설교만 하는 자들을 경멸했던 알랭은 경제적 변혁을 맹신하는 사회주의자도 비판했다. 알랭은 정치적 급진주의란 언제든 압제의 길로 추락할 수 있는 권력에 민중의 편에서 저항하는 것을 뜻했다. 1차 세계대전에 일어나자 사병으로 전쟁을 경험하고 “전쟁은 젊은이의 영웅심을 부추기는 올무”라고 비판했다.
알랭은 스탕달처럼 하루에 두 시간은 무엇인가 읽고 쓰도록 가르쳤다. 글쓰기를 할 때도 한 번 적은 글은 고치지 말라고 했다. 글쓰기를 통해 더 깊은 사색과 명료한 의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휘갈겨 쓰는 글씨도 경계했다. 정성껏 글씨를 쓰는 습관은 무모한 열정을 삭히고, 쓰고자 내용에 정신을 집중하도록 만든다. 호메로스의 시와 플라톤을 성경처럼 읽었던 알랭은 <정의집>에서, 정신은 “육체를 거부하는 것”이라 했다. 육체가 부들부들 떨 때 도망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고, 분노로 타오를 때 세차게 때리는 것을 거부하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거부하고, 욕망으로 타오를 때 소유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런 완전한 거부를 “거룩함”이라 했다. 베유에게 집단적인 것의 우상적 성격을 가르친 것도 알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