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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31일
타이타닉 마지막 생존자 97세 밀비나 딘 사망
비운의 호화여객선 타이타닉호의 마지막 생존자 밀비나 딘(Dean·97)이 2009년 5월 31일 세상을 떠났다. 고향인 영국 남부 사우샘프턴의 양로원에 살던 밀비나는 잠을 자다 사망했다.
1912년 2월 12일생인 밀비나는 살아남은 706명 중 최연소 생존자이기도 했다. 그녀는 부모, 오빠(당시 2세)와 함께 그해 4월 14일 타이타닉에 올랐다. 부친 버트람 딘(당시 27세)은 운영하던 선술집을 팔고 새 삶을 찾겠다며 가족을 데리고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밀비나의 가족은 원래 타이타닉 승객이 아니었다. 다른 배를 예약했으나 파업으로 예약이 갑자기 취소돼 타이타닉 표를 받았다. 네 사람은 3등칸에 함께 탔다.
딘은 2002년 인터뷰에서 “가족을 살린 것은 아버지였다고 모친에게 들었다”면서 “다른 사람들은 타이타닉이 가라앉을 리가 없다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신속하게 대피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부친은 가족을 구명보트에 태웠지만 자신은 타이타닉과 함께 차가운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밀비나는 8세 때 처음으로 모친에게 사고 소식을 들었다. 모친은 사고 당시 기억 때문에 날마다 두통을 앓았다. 모친은 1975년 95세로, 오빠는 1992년 81세로 각각 사망했다.
밀비나는 1997년 ‘타이타닉’ 시사회에도 초대받았으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상상으로만 남겨두고 싶다”면서 끝까지 보지 않았다.
▶2009년 · 타이타닉 마지막 생존자 97세 밀비나 딘 사망
▶2005년 · 마크 펠트 전 FBI 부국장,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의 결정적 제보자로 확인
▶2004년 · 가나무역 김선일씨 이라크 무장단체에 피랍
👉🏿 2004년 6월 22일 김선일씨가 “제발 나는 죽고 싶지 않다”고 절규하는 장면이 알자지라 방송에 나온 뒤 이틀도 지나지 않아 바그다드에서 팔루자 방향 35km 떨어진 지점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알자지라 방송이 김씨 피랍 테이프를 처음 방송한 시각은 한국 시간으로 21일 오전5시였다. 이 테이프에서 이라크 저항단체는 “24시간내에 한국군이 철군하지 않으면 인질을 참수하겠다”고 위협했다.
김선일씨는 17일(현지 시각) 바그다드에서 200여km 떨어진 미군 리브지 캠프에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던 중 이같은 봉변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정확한 시간이나 상황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에 우리 정부는 21일 오전8시 정부 국가안보회의를 개최해 “이라크에 파병하는 것은 평화와 재건을 위한 것”이라고 입장을 정리하고, 즉각 각종 루트를 총동원해 김씨 무사 석방을 위한 교섭을 벌였다. 그러나 22일 밤10시 20분(현지시각 오후 5시 20분), 동양인으로 추정되는 시신이 바그다드 부근에서 발견됐다는 미군 당국의 연락이 왔고, 이내 김씨 시신임을 확인됐다.
이라크 저항세력은 우리 측과 진행한 석방 교섭에서 우리 정부가 수용할 수 없는 파병 철회와 관련한 요구를 전달했다가 이것이 수용되지 않자 김씨를 처형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2년 · 2002 한일월드컵 개막
👉🏿 지구촌 최대의 축제, 21세기 첫 축구제전인 2002 한일월드컵 축구대회가 2002년 5월 31일 역사적인 막을 올렸다. 이는 월드컵 사상 첫 아시아 개최이고 2개의 나라에서 공동 개최한 유일한 대회였다. 17회를 맞은 이번 월드컵은 오후 8시 30분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지난 1998년 대회 우승팀 프랑스와 세네갈의 경기를 시작으로 킥오프, 31일간의 대장정에 돌입했다.
1) 월드컵 유치까지의 힘든 여정
1981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서울이 일본의 나고야를 물리치고 1988년 올림픽 개최권을 땄을 때 대한민국은 환호했고 열광했다. 일본을 상대한 표 대결에서 압도적인 승리(서울 52-27 나고야)를 거뒀다. 한국이 서울 올림픽의 감동에 취해 있던 1988년 일본은 2002년 월드컵 유치 준비에 들어갔다. 1990년엔 월드컵 준비단을 발족시켜 올림픽 개최 실패의 아픔을 씻으려 했다.
당시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이었던 주앙 아벨란제(89·브라질) 역시 공개적으로 일본의 월드컵 개최를 지지하고 나서 일본이 아시아의 첫 월드컵을 개최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해 보였다.
한국은 월드컵 개최에 대해 이렇다 할 계획이나 마음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는데 1993년 정몽준씨가 대한축구협회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상황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정몽준 회장은 1993년 모두가 고개를 가로 저었지만 월드컵 유치 경쟁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한국은 6년이나 앞섰던 일본을 무서운 속도로 따라잡기 시작했다. 1994년 5월 FIFA 부회장으로 취임한 정몽준 회장의 외교력과 한국 유치 홍보단의 눈물겨운 홍보 활동의 결과였다. 여기에 FIFA 내 '반 아벨란제'의 성향을 띤 유럽축구연맹(UEFA)이 한국을 지지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상황이 이렇게 바뀌면서 일본 쪽으로 기울었던 월드컵 개최권은 치열한 경쟁 양상으로 바뀌었다. 1994년 말 일본의 고노 요헤이 외상이 도쿄를 방문한 한승주 당시 외교부 장관과의 만찬 자리에서 처음 공동 개최론을 꺼냈다. 과열되는 유치 경쟁으로 어느 한쪽이 피해를 입는 것을 막아보자는 의미였다. 하지만 일본은 곧 공동 개최 입장을 철회했다. 그 이면엔 아벨란제 회장과 블레터 사무총장(현 FIFA 회장)의 입김이 있었다. 일본의 승리를 장담했던 것이다.
1994년에 월드컵 조직위를 결성한 대한민국은 1995년에 일본과 함께 FIFA월드컵 개최 제안서를 제출한다. 펠레는 브라질의 우방인 일본의 개최를 강력히 희망했는데 마라도나는 단순히 펠레가 일본편을 들었기 때문에 대한민국편을 들었다. 마라도나는 2002년 월드컵 유치 홍보 계획의 일환으로 잠실주경기장에서 열린 '마라도나 공식 재기전'(1995년, 보카 후니오르스 초청)에 출전했다. 그 경기는 마라도나가 1994년 미국 월드컵, 약물 복용으로 출장정지 처분을 받은 후 첫번째 공식 경기였기 때문에 세계적인 관심을 모은 경기였다.
치열한 유치 경쟁이 계속되던 1996년 3월 아시아축구연맹(AFC) 회장인 술탄 아마드 샤가 정식으로 공동개최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아벨란제 회장이 자신의 이름으로 이를 거부했다. 이같은 아벨란제 회장의 노골적인 일본 밀어주기에 폭발한 UEFA는 '공동 개최'를 결의안으로 채택하고 이를 묵살할 경우 한국에 표를 몰아주겠다는 강경 노선을 택했다. 위기를 느낀 아벨란제 회장과 블레터 사무총장은 당시 취리히에 와있던 일본의 미야자와 전 총리에게 공동 개최 수락을 종용했다. 결국 1996년 5월 31일 한일 양국의 합의하에 역사적인 첫 '월드컵 공동 개최'가 성사됐다.
주앙 아벨란제 국제축구연맹회장은 1996년 5월 31일 밤 11시 스위스 취리히 돌더 그랜드호텔서 요한슨 유럽축구연맹회장 및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 등 부회장단, 제프 블래터 국제축구연맹 사무총장, 나가누마 겐 일본축구협회회장 등 FIFA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집행위원회는 한일공동개최안을 놓고 토론을 벌인 결과 표결없이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고 발표했다.
2) 명칭 문제
본래는 2002 FIFA World Cup Japan/Korea이었다. 이에 정몽준은 왜 일본이 대한민국 앞에 오냐며 항의했고 제프 블라터 당시 FIFA 사무총장은 J가 K보다 먼저 와서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기에 정몽준은 프랑스어로는 한국을 Corea라고 표기하며 FIFA(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는 프랑스어를 사용한 단체이기 때문에 프랑스어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Korea/Japan으로 정정되었다.
사실 결승전을 일본에 넘기는 대신 명칭을 Korea/Japan으로 표기하는 것을 사전에 일본과 협의했다. 그러나 대회를 앞두고 일본이 임의적으로 협약된 명칭을 어기고 Japan을 앞에 두기 시작하자 사전 협의를 이행할 것을 한국측이 촉구. 그 과정에서 정몽준이 협의사항을 언론에 공개했다. 당시 정몽준은 Japan을 앞에 두려면 결승전을 포기하라는 식으로 강하게 항의했고 결국 일본은 대회기간 동안은 가급적 공식적인 Korea/Japan의 표기를 사용했다.
3) 지역 예선
예선 조 추첨이 있었던 1999년부터 199개 팀이 2002년 FIFA 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해 예선에 참여하였다. 이 중 29장의 티켓이 그들에게 배분되었으며, 나머지 3장은 개최국이었던 대한민국과 일본이 각각 한 장씩, 그리고 전 대회 우승국 자동 진출권을 획득한 프랑스의 몫이 되었다. 전 대회 우승국의 자동 진출권은 이 대회가 마지막으로, 다음 대회부터는 폐지되었다. 따라서 브라질은 이 대회에서 우승했으나 다른 팀들과 마찬가지로 다음 대회의 지역 예선에 참가하게 되었다.
유럽 축구 연맹에는 14장의 티켓이(전 대회 우승국인 프랑스 포함), 아프리카 축구 연맹에는 5장의 티켓이, 남미 축구 연맹에는 4장의 티켓이, 아시아 축구 연맹에는 4장의 티켓이(개최국인 대한민국과 일본 포함), 북중미카리브 축구 연맹에는 3장의 티켓이 각각 배분되었으며, 남은 두 장의 티켓은 대륙간 플레이오프(아시아 와 유럽, 남미와 오세아니아)를 통해 배분되었다. 총 4개의 팀이 처음으로 본선에 진출하였는데, 중화인민공화국, 에콰도르, 세네갈, 슬로베니아가 그들이다.
4) 조 추첨
2001년 12월 1일 부산 벡스코에서 월드컵 조 추첨행사가 열렸다. 총 13명의 조 추첨자가 선정되었으며, 한국 측 인사로는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 월드컵 국가대표 홍명보 선수, 바둑기사 조훈현 9단, 산악인 박영석, 탤런트 송혜교, 국제심판 임은주 등 6명이 선정되었고, 일본에서는 오카노 순이치로 일본축구협회장과 프랑스월드컵때 일본 주장으로 활약했던 이하라 마사미 등 2명으로 결정되었다. 나머지 5명의 인원들은 대륙별 안배원칙에 따라 브라질 축구황제 펠레, 네덜란드의 요한 크루이프, 카메룬의 로저 밀라, 중국의 여자 축구스타 쑨웬, 프랑스 월드컵 공동위원장을 역임한 미셀 플라티니가 선정되었다.
A조 ~ D조는 대한민국에서 경기를 치르게 되었고 E조 ~ H조는 일본에서 경기를 치르게 됨에 따라 대한민국은 자동으로 D조 1번째에 배정되었고 일본은 H조 1번째에 배정되었다. 지난 월드컵 개최국이자 우승국인 프랑스는 우승국 자격에 따라 A조 1번째에 배정되었다.
5) 지구촌의 축제, 2002 한일월드컵
60억 지구촌 사람들의 친구로 500g이 채 되지 않는 작은 공 하나에 울고 웃었던 월드컵은 지난 70여 년의 시간을 발판 삼아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가운데 21세기와 2000년대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제17회 FIFA 월드컵은 2002년 5월 31일부터 6월 30일까지 열렸다. ‘새 천년, 새 만남, 새 출발’을 슬로건으로 하였으며,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각각 10곳, 총 20개의 도시에서 31일 간 64경기를 치렀다.
2년여 동안 치열한 지역예선을 거친 본선 진출 32개국은 8개조로 나뉘어 조별 리그전을 벌였다. 프랑스와 세네갈의 개막전은 이변의 전주곡이었다. FIFA 랭킹 42위 세네갈이 1위인 프랑스를 1대0으로 침몰시켰기 때문이다.
브라질이 우승하였고, 독일이 준우승하였다. 터키는 48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여 3위까지 올랐고, 세네갈 역시 월드컵에 처음 출전해 전 대회 우승국인 프랑스를 꺾는 파란을 일으킨 데 이어 16강전에서 스웨덴까지 누르고 8강에 올랐다. 개최국인 대한민국과 일본도 이 대회에서 각각 4강, 16강 진출의 성과를 달성하였다. 특히 한국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을 전부 꺾는 이변을 연출했다. 종합전적 3승2무2패로 4위에 올라 전국민을 흥분시켰고 세계를 놀라게 했다. 또한, 전 대회 우승국인 프랑스가 조별리그에서 1승은 커녕 무득점으로 탈락했다.
한국에서의 개막식은 ‘동방으로부터(From the East)’라는 주제로 전통과 현대를 조화시키고, 상생의 정신을 표현해 전세계 시청자들의 갈채를 받았다.
모두가 ‘이변은 단지 이변일 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31일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은 아프리카 ‘테랑가의 사자’ 세네갈에 2002월드컵축구 개막전 승리의 축복을 내렸다. 모국 프랑스를 이긴 브뤼노 메추 세네갈 감독은 경기 직후 양팔을 번쩍 치켜들고 그라운드로 걸어나가 전사들을 맞았고 본부석 오른쪽 스탠드를 가득 메운 세네갈 응원단은 흩뿌리는 빗물 속에 기쁨의 눈물을 보탰다.
6) 재미난 뒤 이야기들
① 6월 4일 폴란드전 70만 명, 10일 미국전 100만 명, 14일 포르투갈전 350만 명, 18일 이탈리아전 500만 명, 22일 스페인전 600만 명, 그리고 25일 독일전 650만 명. 월드컵이 진행되는 동안 2002년의 한국은 붉게 물들었다. 서울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 방방곡곡은 붉은 옷을 입은 '붉은악마'들로 가득했으며 4천7백만 국민의 30%에 이르는 1천 3백만여 명이 한번쯤은 거리 응원에 참가했다.
전 세계 외신과 축구팬들은 한국의 놀라운 승리와 더불어 더 놀라운 거리의 '붉은 물결'에 경외감을 나타냈고, 이는 가장 월드컵답고 가장 감동적인 장면으로 세계인들의 가슴에 각인됐다.
② 이때를 기점으로 서포터즈 클럽인 붉은 악마(Red Devils)가 유명해졌다. 2002년 당시에는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 특히 매 경기마다 펼친 카드섹션 퍼포먼스가 매우 화제가 되었다. 각 경기 별 카드 섹션 문구는 다음과 같다. 폴란드전 : WIN 3:0 , 미국전 : GO! KOR 16!, 포르투갈전 : 대한민국, 이탈리아전 : AGAIN 1966, 스페인전 : PRIDE OF ASIA, 독일전 : 꿈★은 이루어진다, 터키전 : CU@K-리그
③ 한국, 유럽강호 폴란드에 2대0 승. 월드컵 출전 48년만의 첫 승. 한국이 2002년 6월 4일 부산에서 벌어진 2002한일월드컵 축구대회 D조 첫 경기에서 유럽의 강호 폴란드를 시종 압도한 끝에 황선홍과 유상철의 골로 2대0 쾌승을 거뒀다. 지난 1954년 스위스 월드컵부터 여섯 차례 월드컵 본선 무대를 노크한 끝에 거둔 첫 승리였다. 한국은 역대 4무10패의 치욕적 월드컵 성적표에 드디어 1승을 보탰다.
부산 주경기장은 경기시작 6시간 전부터 관중들이 몰려들기 시작, 경기개시 휘슬이 울릴 때쯤엔 이미 열광의 도가니였다. 붉은 옷 차림으로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은 "대한민국"을 외치며 열렬한 성원을 보냈다. 전반 초반 폴란드의 거센 공세에 잠시 주춤했던 한국은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한국은 최종 수비 홍명보가 상대 진영 깊숙이 침투하는 등 총력 공세를 폈다.
전반 26분 드디어 기다리던 골이 터졌다. 이을용이 왼쪽에서 강하게 밀어준 볼에 황선홍이 가볍게 왼발을 갖다 댄 것. 월드컵 1승과 16강 진출의 염원을 담은 이 슈팅은 여지없이 폴란드 골대를 갈랐다. 한국은 후반 8분 유상철이 아크 정면에서 통렬한 오른발 중거리슛을 날려 다시 한번 골대를 흔들었다. 사실상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④ 우승을 목표로 내세우며 한국과 일본 땅을 밟았던 세계의 축구 강국들은 1라운드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당하며 쓸쓸히 고국 행 비행기에 올라야 했다. A조에 속한 전 대회 우승국 프랑스는 세네갈에 개막전 패배를 당하며 1무 2패 무득점의 초라한 성적을 기록하며 탈락했다. 죽음의 F조에 속했던 아르헨티나도 스웨덴과 잉글랜드에 가로막혀 16강행이 좌절됐다. 또 포르투갈은 한국에 덜미가 잡혀 1라운드 탈락의 아픔을 맛봐야 했다.
우승후보로 평가 받던 나라가 줄줄이 1라운드에서 탈락하자 월드컵의 '질'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드라마와 같은 연승 행진과 브라질의 5회 우승을 향한 쾌속 질주로 이 같은 우려는 곧 사라졌다.
⑤ 6월 29일 대구 월드컵경기장에서의 3, 4위전에서는 터키와 맞붙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인터넷을 통해 널리 퍼진 형제의 나라 이야기에 힘입어 관중석에서 대형 터키 국기를 내걸어 주기도 했다. 실제로 터키 현지에서는 한국 응원단의 이런 호의에 많은 터키인들이 감동했다고 한다.
또한 우리에겐 뼈 아픈 기록이 이 경기에서 수록되었다. 한국의 선공으로 시작된 전반 휘슬이 울리기가 무섭게 터키의 하칸 수쿠루가 한국 진영으로 돌진했고 홍명보는 자신에게 연결된 공을 제대로 트래핑하지 못하면서 하칸 수쿠르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하칸 수쿠르는 골키퍼 이운재 옆으로 침착하게 밀어 넣었다. 월드컵 역사상 최단 시간 골(10. 8초)이었다. 종전 기록은 15초로 1962년 칠레 대회에서 나왔다.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바끌레프 마세크가 기록했다.
⑥ 제3국 간의 경기에서 한국 관중들과 일본 관중들의 태도가 대조적이었는데, 한국 관중들은 주로 강팀보다는 약팀을 응원, 그것도 일방적이 아니라 서로 공정하게 응원하는 반면, 일본은 무조건 강팀과 인기팀 위주로 일방적인 응원을 했다. 특히 일본에서 열린 잉글랜드와 이탈리아, 브라질 경기를 보면 일본인지 유럽이나 남미인지 헷갈릴 정도인데 세네갈은 16강전을 일본에서 치렀는데, 한국에서 조예선을 할 당시 한국인들이 세네갈 국기를 흔들고 세네갈 극소수 관중들과 어울려 세네갈을 응원해줘서 일본도 그러겠지 여겼더니만 그런 거 없고 죄다 스웨덴만 응원해서 실망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한국 측에 부탁하여 응원도구와 몇몇 물품을 일본으로 공수해주기도 했다.
⑦ 스페인 대표팀은 월드컵 기간 중에 한국 토종개를 길렀다. 시장에서 멍멍탕이 될 운명에 처한 강아지를 보고 가엾게 여긴 스페인 기자가 1만원을 주고 구해왔으며,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감독의 이름을 따서 '카마친(작은 카마초)'이라고 불렸다. 카마친은 스페인 선수들에게 몹시 사랑 받았지만, 비행기 검역에 걸려서 선수들이 스페인으로 돌아갈 때 못 데려갔다고 한다. 카마친에게 정이 들었던 카시야스는 공항에서 헤어질 때 눈물을 글썽였고, 라울은 잘 돌봐주라며 거금을 주고 갔다.
▶2000년 · 제3차 한나라당 전당대회서 이회창 총재 재선
▶1999년 · 한국-몽골 정상회담, 김대중대통령 첫 국빈 방문
▶1998년 · 북미 친선남자농구경기 평양서 개최
▶1996년 · 제1회 바다의날
👉🏿 5월 31일을 ‘바다의 날’로 정한 것은 장보고(張保皐)가 청해진을 설치한 날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바다의 날’은 21세기 해양시대를 맞아 해양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국제상황에 적극 대처하고, 국내적으로는 국민의 해양에 대한 인식을 제고해야 할 필요성에서 제정되었다.
1994년 11월 UN 해양법협약이 발효됨으로써 세계 각국은 해양자원의 개발·확보를 위한 치열한 경쟁체제로 전환하였다. 일본의 경우, 1995년 매년 7월 20일을 바다의 날로 지정하였고, 미국은 1994년 매년 5월 22일을 바다의 날로 지정하였는데, 이러한 국제적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했다.
3면이 바다로서 해양국가로 성장할 무한한 잠재성을 기반으로 우리 나라 해양산업의 미래를 전망하고 이를 종합적으로 적극 홍보하여 국민의 해양에 대한 인식을 제고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1996년부터 해양수산부 주관으로 기념식을 추진해 오고 있는데, 바다의 날 선포, 유공자 포상, 바다헌장선포 등의 내용으로 진행된다.
또한 ‘바다의 날’을 전후로 해양수산부 및 해군본부, 국립수산진흥원, 지방해양수산청, 시·도 수협, 전국어업인후계자협의회, 한국해양동물연구소 등 해양 관련 단체 주관으로, 선박 및 항만 공개, 해양수산가족 체육대회, 수산종묘 방류행사, 모형함선 경영대회, 바다 사진 공모전, 함상토론회, 전국 푸른바다가꾸기 행사, 우리수산물 대축제, 해양동물박람회, 독도연구 전시 및 발표회, 청소년 한강축제, 각종 국제회의 및 선상세미나 등의 기념행사를 진행한다.
참고문헌「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15843호, 1998.7.25.)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6년 북한 과학자 정갑렬-작가 장해성씨 한국으로 망명
👉🏿1996년 5월 31일 오후 김포공항에 도착한 과학자 정갑렬씨(왼쪽)와 방송작가 장해성씨가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1996년 5월 7일 중국 북경 주재 일본대사관을 거쳐 한국에 망명을 신청한 북한 과학원 산하 음향기기연구소장 정갑렬씨(45)와 별도의 망명 절차를 밟은 북한 중앙방송 소속 방송작가 장해성씨(52)가 1996년 5월 31일 낮 홍콩을 출발 서울에 도착했다.
작가인 장씨는 지난 1월 한-중 국경을 넘어 북한을 탈출 중국 내에서 머물다가 5월 14일 홍콩에 도착, 한국 공관에 망명을 신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정씨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발명전시회에 참가한 뒤 귀로에 북경에 머무는 동안 5월 7일 북경 주재 일본대사관을 거쳐 한국 측과 연결된 후 홍콩으로 옮겨가 한국으로의 망명을 신청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번에 망명한 두 사람 모두 북한 최고 대학인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계층이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발명 및 신기술 전람회에 참석했다가 귀국 도중 망명한 정갑렬씨는 북한 과학원 산하 메아리사 음향연구소 소장이며 장해성씨는 방송작가로 북한 중앙방송 문예총국 라디오 담당이다. 정씨는 8살 때 아버지가 가족을 데리고 일본에서 북한으로 이주했으며 망명 동기는 북한에서 과학자로서 재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작가 장씨는 김정일 우상화 작업과정에서 김정일의 출생지가 북한이 아니고 소련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친구에게 말한 것이 문제가 돼 처벌을 받게 돼 북한을 탈출했다고 말한 것으로 밝혀졌다.
▶1996년 · 월드컵 축구대회, 한일 공동개최 결정
▶1989년 · 한국ABC협회 창립
▶1985년 · 제1회 동경국제영화제 개막
▶1980년 · 정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신설
▶1976년 · 전국에서 첫 반상회
https://theme.archives.go.kr/next/koreaOfRecord/Neighborhood.do
▶1971년 · 동성호 캄차카반도 근해서 소련 경비정에 피납
▶1970년 · 제9회 월드컵 멕시코서 개막
▶1970년 · 북아메리카 프로 아이스 하키 골키퍼 테리 소척 사망
▶1970년 · 페루 강진으로 6만6천명 사망
▶1962년 · 유태인 학살범 아이히만 교수형
👉🏿 전직 나치스 친위대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이 1962년 5월 31일 이스라엘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아이히만은 1961년 12월 15일 이스라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었다. 1906년생인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중에 독일과 독일 점령하의 유럽 각지에 살고 있던 유태인의 체포-강제이주-살해를 계획하고 지휘했다.
독일이 패전한 뒤 가족을 데리고 대서양을 건너 아르헨티나로 도망가 그곳에서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으로 아르헨티나 시민권을 얻은 뒤 부에노스 아이레스 근처의 자동차 공장에서 기계공으로 은신해 있던 아이히만은 이스라엘 비밀정보부 모사드의 끈질긴 추적끝에 1960년 5월에 아르헨티나에서 납치돼 이스라엘로 비밀리에 압송되어 재판을 받게 된 것이었다.
모사드의 아이히만 납치가 국제법을 위반했고, 나치 전범을 처벌하기 위한 1950년 법률이 형벌 불소급의 원칙을 위반하고 있다는 점 등을 둘러싼 이스라엘 검사와 독일 변호사간의 법정공방이 뜨거웠으나 이스라엘 법정은 검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62년 · 증권파동 발생
▶1961년 · 남아프리카연방, 영국 자치령에서 독립해 남아프리카공화국 수립
▶1961년 · 영화배우 게리 쿠퍼 사망
▶1955년 · 박인수 검거(70여인 간음혐의)
👉🏿 박인수는 중학을 중퇴하고 해병대에서 헌병 부사관으로 복무하던 중 애인에게 배반을 당하자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박인수는 군에서 전역한 1954년 4월부터 주로 해군장교 구락부, 국일관,낙원장 등을 무대로 해군 헌병대위를 사칭하며 소위 '처녀 사냥'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불과 1년 남짓한 사이에 70여명의 여성과 관계했습니다.
훤칠한 키의 미남자였던 박인수는 헌병으로 복무시절 익힌 사교춤 실력으로 여성들을 유혹했는데 피해여성들의 상당수가 여대생들이였으며 국회의원과 고위관료의 딸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법정에서 검사가 '혼인을 빙자한 간음'이라고 주장했으나, 박인수는 이를 부인하였습니다.
박인수는 '자신은 결혼을 약속한 적이 없고, 여성들이 스스로 몸을 제공했다.'하면서 그 많은 여대생은 대부분 처녀가 아니었으며 단지 미용사였던 한여성만이 처녀였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런 박인수의 주장은 '순결의 확률이 70분의 1이다'라는 유행어를 낳으며 세상의 큰 관심을 모았었습니다.
이에 1심 법정은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 보호할 수 있다."고 하면서 혼인빙자간음죄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하고, 단지 공무원 사칭에 대해서만 유죄를 선고하여 2만환의 벌금형에 처하였습니다.
그러나 2심, 3심에서는 유죄가 선고, 1년의 징역형이 확정됐습니다.
▶1955년 · 한국-미국 잉여농산물 협정조인
▶1952년 · 전시연합대학 해체
▶1948년 · 제헌국회 개원
▶1948년 · 이승만 초대 국회의장 피선
▶1946년 · 독일의 영화감독 파스빈더 출생
▶1936년 · 작곡가, 가야금 연주자 황병기 출생
▶1935년 · 파키스탄 퀘스타 대지진으로 6만명 사망
▶1933년 · 일본 관동군 대표와 중국군 대표 사이에 당고정전협정 성립
▶1931년 · 미국의 물리학자 슈리퍼 출생 - BCS 이론으로 노벨물리학상 수상
▶1916년 · 유틀란드해전 영국 제해권 확립
▶1912년 · 전관리에게 무관복장 착용지시
▶1911년 · 198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한 프랑스의 경제학자 알레 출생
▶1910년 · 남아프리카공화국, 영국으로부터 독립
▶1908년 · 이화학당 메이퀸 대관식 시작
▶1902년 · 보어전쟁 종결로 트랜스발-오렌지 양공국 영국의 식민지화
▶1895년 · 공문에 국문 또는 국한문혼용령 공포 (고종 32년)
▶1887년 · 프랑스의 외교관 겸 시인 생 종 페르스 출생
▶1886년 · 이화학당(梨花學堂) 설립
👉🏿 1886년 5월 어느날, 가마를 탄 한 여성이 하인을 거느리고 벽안(碧眼)의 스크랜턴 부인을 찾았다. 스크랜턴은 미국 세계여성해외선교부(WFMS)가 조선에 파견한 선교사. 1885년 6월에 조선 땅을 처음 밟은 스크랜턴은 조선 여성을 교육하는 것이 시급함을 깨닫고, 서울 정동(貞洞)에 학교 부지 6100여평을 매입한 뒤 이듬해 2월부터 건물공사를 시작했다. 곧 학생모집에 나섰으나 교육을 받을 여성들은 여전히 집안 깊숙한 곳에서 나오질 않았다.
이런 때 상류계층의 여성이 제발로 찾아왔으니 반가움과 놀라움이 교차했다. 고관의 소실로 결혼까지 한, 이름을 알 수 없어 김부인으로 불린 여성은 영어를 배워 왕비의 통역이 되고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1886년 5월31일, 김부인 한 명 만을 상대로 한 역사적인 첫 수업이 시작됐다.
근대적인 여성교육이 첫 발걸음을 떼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김부인은 불행히도 병이 들어 석 달만에 중도하차해야했다. 6월 말, 10살 난 꽃님이가 가난으로 딸을 부양할 수 없었던 엄마를 따라 이곳을 찾았고, 곧 4살 난 별단이도 이곳에 보내졌다. 한국인 최초의 양의사가 된 김정동(박에스더)이 문을 두드린 것도 이 무렵이었다.
11월, 학수고대하던 200평 규모의 한식 기와집 교사(校舍)가 완성된 데 이어 이듬해 2월, 또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고종황제가 `이화학당(梨花學堂)`이란 교명(校名)을 하사한 것이다. 정동에 배밭이 많아 `이화(梨花)`로 지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화여대는 1935년에 화빈궁(정조의 후궁)의 묘가 있던 현재의 자리로 이전해 `신촌시대`를 열었다.
▶1832년 · 프랑스의 수학자 에바리스트 갈루아 사망
▶1819년 · 미국의 저널리스트, 시인 휘트먼 출생
▶1809년 · 오스트리아 작곡가 프란츠 요셉 하이든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