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을사늑약 부당’ 독일황제에 보낸 고종 밀서 발견 주권수호 노력 보여주는 중요 자료
고종 황제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하며 1906년 5월 독일 빌헬름 2세에게 보낸 밀서가 처음으로 발견됐다.
이는 고종이 을사늑약의 원천무효로 주장하기 위해 수교국 원수들에게 보낸 친서 중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것으로는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것으로 보인다. 현재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서는 이보다 1년1개월 늦은 1907년 6월에 전달됐다.
정상수 명지대 교수는 독일 외교부 정치문서보관소가 소장하고 있던 한국 관련 외교문서를 연구하던 중 이 밀서를 확인했다고 20일 밝혔다.
1906년 1월에 쓴 것으로 적혀 있는 이 밀서는 당시 고종 황제의 자문관이던 프랑스인 트레믈러를 통해 1906년 5월 독일 외교부에 전달됐으며, 독일 정부는 밀서에 찍힌 고종의 어새(御璽)를 감정해 진짜임을 확인했다.
고종은 1905년 11월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을 강압적으로 체결하자 이듬해 1월 을사조약의 원천무효를 주장하는 국서를 작성해 영국 신문 '런던 트리뷴'의 기자를 통해 서구 열강에 보냈다. 이런 사실은 1년 가량 후 런던 트리뷴지의 보도를 통해 알려졌으나 국서가 각국 원수들에게 전달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번에 확인된 밀서는 이 국서와 더불어 개별 국가 원수들에게 별도로 보낸 친서로 추정되고 있다.
'대덕국(大德國.독일) 대황제 폐하'로 시작하는 이 밀서는 강대국 일본에 외교권을 박탈 당하고 독립을 위협받은 상황을 전하고 독일이 다른 강대국들과 함께 독립을 보장해줄 것을 당부하는 내용으로, 을사늑약 이후 고종의 절박함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고종황제의 이 밀서는 빌헬름 2세에게 전달되지는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밀서에 첨부된 당시 독일 정부의 문서에는 '황제에게 보고할 필요가 없다'는 자체 처리결과가 기록돼 있었으며 실제로 빌헬름 2세가 밀서를 확인했다는 서명도 확인할 수 없었다.
이는 밀서가 전달되기 한달 전인 1906년 4월 독일을 제외한 서구 열강 등이 프랑스의 모로코 지배를 인정하면서 독일이 외교적으로 고립된 상황이었고 이 일로 외교부 차관이 사임하는 등 내부적으로도 어수선한 상황이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고 정 교수는 설명했다.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을사조약 무효를 위해 고종이 수교국 원수를 향해 보낸 최초의 친서"라며 "당시 고종의 주권 수호 노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이 교수는 "독일 외에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탈리아, 벨기에 등 당시 수교국이었던 유럽 국가들에도 함께 친서를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한편 정 교수는 "박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1994-1995년 독일 외교부 문서보관소에 방문 연구할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한국 관련 문서를 많이 발견해 고종황제 밀서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며 "이후 2002년 국사편찬위원회 위탁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외교문서 사본을 입수했고 작년 학술진흥재단의 기초연구 과제에 선정돼 정밀하게 연구하던 중 최근 발견했다"고 경위를 소개했다.
정 교수는 "앞으로 당시 독일 외교부에서 밀서가 처리된 경위 등을 추가로 연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고미혜 기자 mihye@yna.co.kr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2008-02-20
[2007년] ‘키다리 미스터 김’ 가수 이금희씨 별세
← 이금희
‘한국 최초의 댄스 가수’로 일컬어지는 ‘키다리 미스터 김’의 가수 이금희(본명 이대금·68)씨가 20일 오전 1시15분 서울 은평구 연세노블병원에서 별세했다.
이씨의 딸 민윤정(38)씨는 “지난 2005년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신 뒤 병상에서 지내오다 최근 합병증으로 폐렴이 왔는데 호흡곤란이 심해져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59년 데뷔한 고인은 미8군 무대에서 가수로서 첫발을 내디뎠으며, 66년 발표한 ‘키다리 미스터 김’을 화려한 춤과 함께 선보이며 스타덤에 올랐다. 이씨는 중학교 재학 시절부터 바리톤 오현명씨에게 개인 레슨을 받으며 성악가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고교 시절 아버지가 위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자, 생계를 위해 대중가수의 길을 걸었다. ‘용꿈’, ‘그것 참 별꼴이야’, ‘작은 새’ 등의 히트곡을 남겼던 고인은 결혼 후 두 차례 유산의 아픔을 겪으면서 60년대 후반부터 활동을 줄여나갔다.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 복음성가 가수로 다시 활발한 모습을 보였으며 98년에는 옛 히트곡과 팝송 번안곡 ‘다이애나’ 등을 담은 음반 ‘웃기지 말아요’를 발표했다. 2000년대부터는 서울예대 실용음악과를 졸업한 딸 윤정씨와 함께 모녀 복음성가 가수로 무대에 섰다./조선
[2001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동메달을 딴 남승룡(南昇龍) 사망
←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옹(금메달)과 함께 출전해 동메달을 획득했던 남승룡씨.
1912. 11. 23 ~ 2001. 2. 20
1912년 전라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보통학교 6학년 때 전라남도 대표로 조선신궁대회에 출전하여 1만m에서 4위, 마라톤에서 2위를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양정고보를 거쳐 일본 아사부중학으로 전학하였고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재학 중이던 1936년 일본 선발전에서 양정고보 1년 후배 손기정(孫基禎)을 제치고 우승함으로써 손기정과 함께 베를린올림픽 대표로 뽑혔다.
이어 그해 열린 제11회 베를린올림픽에서 당시 대표 선수 3명 가운데 조선인 선수가 두 명이나 출전하는 것을 꺼려했던 일본 육상연맹의 출전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2시간 31분 42초의 기록으로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8·15광복 후인 1947년에는 서른 다섯의 나이에 태극 마크를 붙이고 제51회 보스턴마라톤대회에 출전해 우승한 서윤복(徐潤福)과 함께 10위를 차지, 마라톤 한국의 위상을 세웠다.
1947년부터 1963년까지 대한육상경기연맹 이사로 활동하고 전남대학교 교수를 지내는 등 육상 발전에 힘썼으며, 1964년 도쿄[東京]올림픽에 마라톤 코치로 참가한 것을 마지막으로 육상계를 떠났다.
비록 베를린올림픽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그늘에 가려 커다란 주목은 받지 못했으나, 손기정과 함께 나란히 1, 3위를 차지함으로써 나라를 빼앗겼던 당시 조선인들에게 무한한 민족적 자부심을 심어 주었다. /naver
[2001년] 현대사 연구가 송남헌 별세
← 송남헌씨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현대사 연구가 송남헌씨가 2001년 2월 20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87세였다. 송남헌씨는 해방 정국의 산증인이자 분단 극복운동에 몸을 던진 행동가였다. 8.15 직후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통일협상을 주도한 김규식 박사의 비서실장으로 역사의 현장을 지켜봤다.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참가한 우사 김규식 박사를 수행했다. 격동의 현대사를 헤쳐 나오면서 옥고도 여러 차례 치렀다. 해방 직전인 1943년, 경성방송국 라디오 단파방송사건으로 체포된 게 시작이었다. 상해 임시정부와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서 보내는 단파 라디오 뉴스를 수신, 독립운동가에게 전달해주는 다리역을 맡았었다. 1949년에는 통일추진협의기구를 만들자는 북측 특사를 만났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불고지죄) 위반으로 구속됐고, 5.16 직후에는 혁신계 인사로 몰려 옥고를 치렀다.
현실 정치에서 물러난 송씨는 현대사 연구로 방향을 선회한다. 해방정국의 체험을 바탕으로 `해방 3년사` 등을 잇달아 펴내면서 연구자로 변신했다. 우사 연구회장과 민족통일촉진회, 민족정기회 회장을 지냈다./조선
[1986년] 러시아 유인 우주정거장 미르호 발사
러시아의 유인 우주정거장 미르호(MIR)가 1986년 2월 20일 소련 연방 카자흐스탄 바이크노루 우주기지에서 성공적으로 발사됐다. 발사 당시 ‘우주도시 건설의 서막’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소련의 자긍심의 상징이었던 미르호는 예정했던 3년보다 5배나 긴 오랜동안의 우주공간에서의 임무를 완수하고 1999년 8월 우주비행사 3명이 지구에 귀환함으로 사실상의 용도폐기됐다.
미소 우주경쟁사에 상징적인 획을 그었던 미르호는 발사 3주전 미국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공중폭발로 사망한 7명의 우주비행사의 용기를 기려 죽은 비행사들의 사진을 우주공간으로 운반, 화제를 모은 바 있다. 구소련 우주프로그램의 마지막 ‘창작물’이었던 미르호는 2001년 3월 23일 지구대기권에 진입하면서 대부분 불타 없어졌고 잔해는 태평양 심연속으로 빠져 수장됐다. /조선
[1979년] 북아일랜드, 얼스터 의용군에 906년 징역형 선고
1979년 2월 20일 북아일랜드의 급진적인 얼스터 의용군(UVF) 11명에게 906년의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1960년대말부터 북아일랜드는 로마 가톨릭교와 개신교 간 갈등으로 격렬한 충돌이 잦았다.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아일랜드 독립을 주장하는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에 대항하기 위해 과격한 개신교도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준군사집단 UVF는 암살과 테러를 자행하기 시작했다. 1966년 6월 북아일랜드 정부가 UVF를 불법단체로 규정했음에도 그들의 테러는 계속되었고, 급기야 UVF의 극렬 단원 11명은 IRA의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19명의 로마 가톨릭교도를 살해했다. UVF는 이 혐의로 906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68년] 재일교포 권희로(김희로) 사건 발생
← 김희로씨가 인질극을 벌인 일본 후지미야의 한 여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가네오카 야스히로로 불리던 재일한국인 권희로(김희로)씨가 1968년 2월 21일 일본 야쿠자 2명을 사살하고, 13명을 인질로 88시간 동안 300여명의 일본경찰과 대치하는 인질극이 벌어졌다,
사건은 일본 시즈오카(靜岡)현 시미즈(淸水)시의 한 유흥업소에 일어났다. 야쿠자 조직의 행동대장 소가 유키오로부터 빌리지도 않은 돈을 갚으라는 요구를 받던 그는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모욕을 당한다. 그를 더 격분시킨 것은 ‘조센징 까불지 마, 너는 왜 당해야 하는지 알겠지’라는 말 한마디였다. 그 말은 40년간 응축된 그의 한에 불을 질렀고, 결국 장총을 폭력배들에게 겨누게 한 도화선이 됐다.
1928년 1월1일 부두노동자 권명술씨와 식당 종업원 박득숙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새아버지의 성을 따라 김희로가 됐다. 그의 가족에게는 늘 가난이 따라다녔고, 삶은 밝지 못했다. 의붓아버지의 구박도 심했고,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도 폭력에 휘둘려야 했다. 나이가 들어 결혼했지만 그 역시 순탄치 않게 끝났다.
1968년 2월24일, “민족의 명예에 상처를 입히는 ‘조센징 바카야로(한국인 바보)’ 발언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일본과 한국은 우호와 신뢰로써 발전해야 합니다.”라는 일본 다카마쓰현 경찰서장의 사죄가 NHK방송을 통해 세 차례 흘러나왔다. 김희로씨의 분노는 그제야 걷혔다. 88시간의 인질극 소동 끝에 체포된 그는 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31년이 지난 1999년 9월7일 가석방돼 어머니의 고향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조선
[1962년] 프렌드십 7호, 지구궤도 최초 비행
← 글렌
1962년 2월 20일 미국에서 발사된 유인우주선이 최초로 지구궤도를 비행했다. 우주비행사 존 글렌이 탑승한 유인우주선 '프렌드십 7호'는 지구궤도를 3바퀴 돌고 대서양의 바하마 제도 부근에 착수(着水)했다. 미국의 우주선 지구궤도 비행은 소련의 Y. A. 가가린이 유인우주선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최초로 우주비행을 한 지 약 3주일 후에 시작된 머큐리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셰퍼드 2세의 프리덤 7호, 고든 쿠퍼 2세의 페이스 7호 등 여러 우주선이 발사되었다. 1998년 글렌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노화와 우주비행에 관한 실험에 참여하기 위해 또다시 우주선에 탑승했다./브리태니커
[1951년] 선교사 원한경(Underwood, Horace Horton, 元漢慶) 사망
1890. 9. 6 서울~1951. 2. 20 부산.
미국의 북장로회 선교사·저술가·교육가.
H. G. 언더우드의 아들로 한국 이름은 원한경(元漢慶)이다. 16세기 한국을 떠나 미국 뉴욕대학교에서 교육학 및 심리학을 전공했다. 1912년 9월 선교사로 내한하여 경신학교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1917년 연희전문학교에서 한국 최초로 사회학이란 과목을 개설하여 강의했다. 1919년 3·1운동을 맞아 제암리학살사건 등 일제의 만행을 전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1925년 뉴욕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34년 연희전문학교 제3대 교장으로 취임했으며, 영국 왕립 아시아 학회 조선지부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한국 관련 논문을 학회지에 다수 발표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에 의해 강제로 미국으로 추방되었다가 8·15해방이 되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미군정청 고문, 미소공동위원회 고문, 미군정청 문교장관 고문 등을 맡아 활동했다. 1949년 3월 공산당에게 살해당한 부인과 함께 양화진 외인묘지에 안장되었다. 한국 그리스도교와 교육계의 발전을 위해서 일생을 바쳤으며, 첫째 아들은 연세대학교 교수 및 이사를 지냈으며, 넷째 아들은 서울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저서에 〈영한사전 An English-Korean Dictionary〉·〈한국의 현대교육 Modern Education in Korea〉·〈한국인 Every-Day Korean〉·〈한국에 관한 서양문학의 서지 A Partial Bibliography of Occidental Literature on Korea〉 등이 있다./브리태니커
[191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의 예능보유자 박초월(朴初月) 출생
← 박초월
본명은 삼순(三順).
1917. 2. 20 전북 남원~1983. 11. 26 서울.
1934년 김정문(金正文)에게 소리를 배웠고, 1935년부터 10년간 송만갑(宋萬甲)에게 〈춘향가〉·〈심청가〉·〈수궁가〉·〈적벽가〉 등을 배웠다. 1930년 전주대사습놀이에서 장원을 해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7세에오케·포리돌·빅타레코드사와 계약하고, 〈흥보가〉·〈춘향가〉·〈심청가〉등을 취입하여큰 성공을 거두었다. 창제는 동편제(東便制)이고, 조통달(趙通達)·남해성(南海星)·김수연(金壽蓮)·김정민(金貞民)에게 〈수궁가〉를 가르쳤다. 1955년 박귀희와 함께 한국민속예술학원을 창립해 후진을 양성했고, 1962년 초대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맡았다. 1966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해 활동했고, 1971년 국악협회 상임고문, 1974년 판소리보존회 이사장을 지냈다. 1976년 독일에서 열린 세계민속음악제에 참가했다. 〈춘향가〉·〈심청가〉에 특히 뛰어났다.
[1907년] 구한말의 정치가 이용익(李容翊) 사망
1854(철종 5) 함북 명천~1907(융희 1).
대한제국기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왕실재정을 확충하고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벌이는 등 왕실 위주의 근대화 정책을 추진한 중심인물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필(公弼), 호는 석현(石峴). 아버지는 고산현감을 지낸 병효(秉斅)이다. 선대는 무과출신으로 양반신분에 속했지만 중앙정계의 문신관료에 비하면 한미한 집안이었다. 5~14세에는 서당에서 공부했고 20세까지 주자학자인 초병덕(楚秉悳)에게 사사했다. 이후 고향을 떠나 보부상·물장수로 전전하다 금광에 투자하여 부자가 되었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그는 민비(閔妃)를 장호원으로 피신시키고 민영익(閔泳翊)과의 사이에 비밀연락을 담당하여 그 공로로 감역(監役)을 제수받았다. 1883년 단천부사, 1885년 북청부사, 1887년 영흥부사에 이어 함경남도병마절도사에 올랐다. 이때 단천 및 영흥에서 사금을 채굴해 이를 고종에게 바쳐 크게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1888년 불법적인 수탈로 인해 북청민란이 일어나자 함경남도병마절도사에서 파면되고 지도(智島)로 유배되었다. 곧 풀려나 함경남도병마사·강계부사로 임명되었으며, 1894년까지 다시 함경남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896년 평안북도관찰사 재임시 민란이 일어나 다시 유배되었다.
초기 관직생활은 순탄하지 않았으나 광산 경영에 대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1887년 광무국(鑛務局)이 설치된 이후 함경남도광무감리로 임명되어 그 지역 광산을 관리했다. 1890년 서북광무감리, 1896년 서북제부금광사무감독(西北諸府金鑛事務監督)을 거쳐 1897년 각부각군금은동철매탄각광사무(各府各郡金銀銅鐵媒炭各鑛事務)에 임명되어 전국 광산을 감독하기에 이르렀고, 1898년에는 궁내부 소속 광산감독사무가 되어 왕실 소속의 광산을 관장했다. 1897년 전환국장이 되어 백동화(白銅貨)를 대량 발주하여 그 이익을 국가재정에 충당했으나 그결과 물가앙등과 화폐가치의 하락을 가져와 유통경제를 혼란시키기도 했다. 또한 일본의 제일은행권의 통용을 저지하기 위해 1903년 〈중앙은행조례〉·〈태환금권조례 兌換金卷條例〉 등을 반포하여 독자적인 지폐발행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1899년 내장사장(內藏司長)을 거쳐 1904년까지 내장원경(內藏院卿)을 겸임하며 대한제국기 왕실재정 강화에 노력했다. 즉 각 도에 광산감리를 임명하여 광산을 관리하게 하고, 외국인의 잠채(潛採)를 금하고 광세(鑛稅)를 징수하는 등 광산경영에 힘썼으며, 전국에 흩어져 있는 역토(驛土)·둔토(屯土) 등 국가소유 토지를 내장원에 귀속시키고 봉세관(捧稅官)을 파견하여 도조(賭租)의 징수를 강화했다. 그밖에 홍삼을 제조하는 삼정과(蔘政課)를 증설하여 홍삼의 제조 및 판매를 관장하며 전매했으며, 수륜(水輪) 잡세 등도 관리하여 왕실재정을 증가시켰다. 1898년 철도사(鐵道司)를 설립하여 감독을 맡고 서울-목포, 원산-진남포, 경흥-의주 간 철도부설을 계획했으며, 궁내부에 서북철도국이 설치되자 서북철도감독을 맡아 경의선·경원선 부설을 추진했다. 1901년 지계아문총재관(地契衙門總裁官)이 되어 토지소유자에게 지계를 발행하여 토지의 소유권을 법인(法認)하는 지계사업과 양전사업을 담당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날 무렵 탁지부대신 겸 육군참장으로서 조선의 국외중립을 주장하며 독립을 유지하려는 외교활동을 벌였으며, 일본이 대한제국에 한일의정서의 체결을 강요하자 이를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자 일본은 그가 조선의 식민지화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여 일본으로 압송, 10개월간 감금했다. 1905년 귀국하면서 600여 권의 서적을 사들여 와 번역하게 했으며 신교육에 의한 인재양성을 위해 보성소학교(普成小學校)를 비롯하여 보성중학교 및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했다. 이후 경상북도관찰사·제실회계심사국장·군부대신 등에 임명되어 중앙정계에 복귀했으나 일본의 공작에 의해 다시 강원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부임하지 않고 비밀리에 출국하여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을사조약 체결의 부당성을 세계열강에 널리 알리려고 했다. 그렇지만 프랑스로 향하던 중 6월 중국 산둥 성[山東省]에서 일본관헌에게 발각되었고 조선정부는 그의 공직을 파면해 버렸다. 그뒤 프랑스와 러시아 등지를 유랑하면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확보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했으나 1907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출발하기 직전 갑자기 죽었다.
그가 추진한 역둔토 조사와 지주경영은 농민들의 항조운동을 불러 일으켰으며 왕실재정의 일방적인 확대는 국가재정의 위기를 초래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독립협회의 탄핵을 받았으며 집권관료층 내부에서도 그의 탐학과 횡포에 대한 성토가 계속되었다. 비록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화 정책을 펴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있었으나 그는 왕권강화를 기초로 하여 일본을 배척하고 러시아 등 열강의 보장하에 조선의 독립을 유지하고자 하는 정치노선을 갖고 있던 지사(志士)였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브리태니커
[1894년] 독립운동가 허형(許炯) 출생
1894(고종 31). 2. 20 평남 안주~1963. 12. 1.
1919년 3·1운동 때 만세시위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한국태(韓國泰)·함병승(咸秉昇) 등과 함께 조선독립청년단을 조직하여 학생들을 상대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그뒤 원산에서 최자남(崔子男)을 만나 그의 집에 머물고 있는 강우규(姜宇奎)를 소개받고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 암살계획에 참여했다. 거사 직전 한흥근(韓興根)에게 폭탄을 하나 더 입수해줄 것을 부탁하러 간 사이 강우규가 단독으로 투탄의거를 감행했으나 실패했다. 9월 17일 최자남과 함께 공범으로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복역한 뒤 1921년 8월 출옥했으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포된 한흥근과 연관되었다 하여 6일 만에 재투옥되었다. 6개월 후 석방되어 안주로 돌아와 〈동아일보〉 안주지국 기자로 활동하는 한편, 안주청년회·안주야학 등을 조직하여 항일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1923년부터 〈동아일보〉 안주지국장과 〈조선일보〉·〈중앙일보〉의 평양지국 특파원을 역임하면서 민족언론운동에 몸담았다. 1926년 10월 일제가 날조한 강중건(姜重建) 사건으로, 체포되어 의주감옥에서 6개월간 복역했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안주지회 부회장·정치부장을 맡아 해소 때까지 활동했다. 1945년 8·15해방 후 소련군정하에서 안주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평안남도인민위원회 정치부장 등으로 활동했으나 사회주의자들과의 갈등으로 1947년 2월 월남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1894년] 폴란드의 시인·소설가·수필가·극작가 이바슈키에비치(Iwaszkiewicz, Jaroslaw) 출생
1894. 2. 20 러시아령 우크라이나 칼니크~1980. 3. 2 바르샤바 근처 스타비스코.
재능이 많은 다작(多作)의 작가이다. 1912년부터 키예프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면서 음악학교에도 다녔다. 1918년에는 바르샤바에 정착해 서정시인 그룹 스카만데르를 창립하는 데 참여했다. 1923~25년의 2년간 의회(Sejm) 의장 마치에이 라타이의 개인비서로 일한 뒤 외무부에서 근무했다. 1932~36년에 코펜하겐과 브뤼셀 주재 폴란드 공사관원으로 활동했으나 그후 다시 집필에 전념했다. 이무렵 그는 이미 몇 권의 시집을 출판해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부인 안나(결혼전 성은 릴포프)와 함께 스타비스코에 있는 시골집에서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종전 후 정치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으려 했으나 1953년 폴란드 평화수호위원회 위원장직을 수락하고 비당원으로 의회에 진출하기도 했다. 그는 2차례나(1943~49, 1959~72) 폴란드 작가동맹 의장직을 맡았고, 1955년부터는 문학월간지 〈트부르초시치 Twórczość〉('창조')의 편집장 일을 맡아보았다.
〈8행시 Oktostychy〉(1919)·〈낮의 책과 밤의 책 Księga dnia i księga nocy〉(1922)·〈시선 Wiersze zebrane〉(1968)을 비롯, 여러 책에 발표된 그의 시들은 흔히 폴란드의 정경을 서정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또한 수필·희곡·전기·단편소설·장편소설과 번역문 등 다방면에 걸쳐 산문을 썼는데 단편집 〈이야기들 Opowiadania〉(1954)과 1914~45년의 격변기의 폴란드 사회를 고찰한 장편소설 〈영광과 칭찬 Sława i Chwała〉(3권, 1956~63)이 대표적이다./브리태니커
[1874년] 스코틀랜드/미국 오페라 가수 가든 (Garden, Mary) 출생
← 멜리장드로 분한 메리 가든
1874. 2. 20 스코틀랜드 애버딘~1967. 1. 3 애버딘.
생생한 오페라 연기로 유명한 소프라노 가수.
미국 오페라계의 대표적인 인물로 노래뿐만 아니라 연기력도 뛰어났다.
어렸을 때 시카고에서 성악을 공부한 후, 파리로 가서 유명한 교사인 마틸데 마르케지 밑에서 공부했다. 그녀는 1900년 귀스타브 샤르팡티에의 〈루이즈 Louise〉 파리공연에서 갑작스럽게 출연자가 바뀌는 바람에 막바지에 대신 무대에 서게 된 것을 계기로 유명해졌으며, 1907년 뉴욕에서 공연된 마스네의 〈타이스 Thaïs〉로 미국에서 데뷔하였다.
1910년부터 시카고 오페라단과의 오랜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그녀로 인해 시카고 오페라단은 프랑스 오페라의 레퍼토리를 계속 보존할 수 있었다. 시카고 오페라단의 형편이 좋지 않았던 1921~22년 감독을 지냈으며, 1930년 은퇴했으나 1950년대 종반까지 음악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02년 드뷔시의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Pelléas et Mélisande〉에서 멜리장드 역을 맡았으며, 이 우아한 역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되었다. 마스네는 원래 테너가 부르게 되어 있는 〈노트르담의 곡예사 Le Jongleur de Notre Dame〉의 주인공 역을 그녀가 부를 수 있도록 소프라노로 고쳐서 다시 썼는데, 이것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 Der Rosenkavalier〉의 옥타비안 역에 영향을 준 듯하다. 그녀는 슈트라우스의 〈살로메 Salome〉에서 살로메로 극찬을 받았으며, 특히 〈일곱 개 베일의 춤〉의 장면으로 시카고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자서전 〈메리 가든 Mary Garden's Story〉을 루이스 비안콜리와 함께 펴냈다(1951).
[1844년] 오스트리아 이론물리학자 볼츠만(Boltzmann, Ludwig Eduard) 출생
1844. 2. 20 ~ 1906. 9. 5
"대대적인 국가적 모험에서 수백만의 사람을 지휘하는 것이나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전투에 승리하는 것은 분명 멋진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조촐한 방에서 아주 조촐한 수단들을 가지고 근본적인 진리들을 발견하는 것이 한층 더 위대한 일로 여겨진다. 전투의 기억은 역사가의 고문서 속에 애써 간직될 뿐이지만, 근본적인 진리들은 인간 지식의 기초가 될 것이다." - 루트비히 에두아르트 볼츠만
볼츠만은 통계역학의 시조로 알려진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이다. 그는 1870년대에 일련의 논문들을 발표하며 열역학 제2법칙은 원자의 운동을 통계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발견을 정식화한 볼츠만 원리는 엔트로피 법칙의 가장 간단명료한 표현이 되었다. 또한 그는 기체분자 운동론에서도 큰 성과를 이룩해, 이른바 맥스웰-볼츠만 분포법칙으로 알려진 에너지 균등분배 정리를 완성했다. 원자론을 믿지 않는 일부 학자들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가 이룩한 학문적 성취는 20세기 물리학의 발전에 결정적 디딤돌이 되었다. /브리태니커
[1816년]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 로마에서 초연
← Gioacchino Antonio Rossini
이탈리아 작곡가 로시니(Rossini, Gioacchino, 1792~1868)의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 Il Barbiere di Seviglia'는 2막으로, 프랑스의 극작가 보마르셰(Beaumarchais, Pierre-Augustin Caron de, 1732~1799)의 동명 희극(1775)에 스테르비니(Sterbini, C.)가 대본을 썼으며 1816년 로마에서 초연되었다. 귀족 아가씨 로진을 사랑한 알마비바 백작은 이발사 피가로에게 도움을 청하여 그녀를 손에 넣으려고 한다. 후견인인 의사 바르트로는 로진의 재산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사랑을 방해한다. 백작은 여러 차례의 실패 끝에 그녀를 얻게 되고 바르트로는 재산을 얻게 되어 만족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기지와 풍자가 가득한 내용과, 경쾌하고 선율이 풍부한 음악 등으로 인해 로시니의 대표작으로 꼽힐 뿐만 아니라 당시의 이탈리아 오페라의 최고 걸작의 하나로 꼽힌다. /naver
1막
에스파냐의 세비야, 17세기
알마비바 백작은 변장한 채로 바르톨로 박사의 집을 찾아가, 로시나를 향해 세레나데를 부른다.("Ecco ridente") 바르톨로 박사는 로시나를 집안에 계속해서 감금한다. 알마비바는 음악가들에게 돈을 지불하고, 그녀를 볼 희망으로 낮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심한다. 이발사인 피가로는 세비야에 있는 집들에 접근할 수 있으며, 마을의 비밀과 스캔달을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의 바쁜 삶을 묘사한다.("Largo al factotum") 피가로는 바르톨로 박사는 그가 허락받아야할 로시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엉큼한 후견인일 뿐이라 말한다.
백작은 로시나를 향해 다른 세레나데를 부르고, 자신을 가난한 학생인 린도로라 일컫는다. 그동안 거의 같혀 답답하게 살았던 로시나는, 그 젊은 청년이 누군지 궁금해한다. 피가로는 계략을 생각해낸다: 백작이 술에 취한 병사로 변장하여, 바르톨로 박사네 집에 쳐들어가, 바르톨로 박사가 결혼하고자 하는 로시나에게 접근하는 것이다. 백작은 그 계획에 흥분해하지만, 피가로는 감사해하는 백작에게서 멋진 보답을 기대한다.("All’idea di quel metallo")
로시나는 자신의 마음을 매료시킨 그 목소리를 떠올리고, 린도로를 만나기 위해서 농간을 부린다. ("Una voce poco fa") 바르톨로 박사는 로시나의 음악 선생인 돈 바르실리오와 함께 등장하며, 그는 바르톨로 박사에게 로시나의 숭배자인 알마비바 백작이 세비야 안에 있다고 경고한다. 바르톨로는 로시나와 즉시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바르실리오는 중상 모략이 알마비바 백작을 제거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말한다. ("La calunnia") 피가로는 그 계략을 엿듣고, 로시나에게 경고하며, 그녀로 부터 린도로에게 편지를 건내주기로 약속한다.("Dunque io son") 로시나를 의심하는 바르톨로 박사는 그녀가 편지를 썼는지 입증하려 하지만, 그녀는 재치로 요리조리 빠져나간다. 바르톨로 박사는 그녀의 도전에 화가 나서, 자신을 가지고 놀지 말라고 경고한다.("A un dottor della mia sorte")
알마비바는 술취한 병사로 변장하여 등장하고, 로시나에게 쪽지를 전해준다. 그녀는 그걸 바르톨로 박사로 부터 숨기려 한다. 알마비바는 자신은 바르톨로 박사의 집에 머무르겠다고 말하자, 박사는 병사들이 집에 묶는 것에 면제받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집안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궁금한 거리에 모인 군중들에게, 피가로는 소식을 알리다. 시민 경찰단이 그 술취한 병사를 체포하려 들어온다. 백작은 그의 정체를 대장에게 밝히고, 그 즉시 풀려난다. 피가로를 제외하고 모두들 이 사건의 반전에 놀라워하며, 모두들 아침의 미친 것 같은 소동에 대해 말을 한다.
2막
바르톨로 박사는 그 술취한 병사가 알마비바가 보낸 스파이라 의심한다. 백작이 이번에는 돈 알폰소로, 돈 바르실리오의 학생이며 음악 교사로 변장한다.("Pace e gioia sia con voi") 그는 아파서 집에 있는 바르실리오를 대신하여, 로시나에게 음악 교습을 주러 왔다고 말한다. 돈 알폰소는 역시 바르톨로 박사에게 그는 알마비바 백작과 같은 숙소에 머물고 있고, 로시나가 쓴 편지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돈 알폰소는 다른 여인이 그에게 그 쪽지를 주었고, 이는 린도로가 알마비바를 대신하여 로시나를 장난감 취급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 그 사실을 로시나에게 전달할 것을 제시한다. 이에 박사가 돈 알폰소가 돈 바르실리오의 진짜 학생이라고 믿게 되어, 로시나에게 음악 교습할 것을 허락한다. ("Contro un cor")
파가로는 바르톨로 박사에게 이발하러 도착하고, 발코니 창문을 열수있는 열쇠를 낚아챈다. 이발을 막 시작하려는 참에 바르실리오가 온전히 건강한 상태로 나타난다. 백작과 로시나와 피가로는 반복되는 언질과 재빠른 뇌물로, 그가 성홍열로 아프다고 바르실리오를 확신시킨다. ("Buona sera, mio signore") 바르실리오는 혼란스럽지만 돈을 얻고 집으로 떠난다. 바르톨로의 이발이 시작되고, 이에 바르톨로가 알마비바가 로시나와 밤에 도망칠 계획을 짜는 것을 듣는 것에서 관심이 멀어지기 충분하다. 마르톨로 박사는 "변장"이라는 문구를 듣게 되고, 그가 또다시 속았음을 성내며 깨닫는다. 모두가 그자리를 떠난다. 하녀인 베르타는 엉망진창인 집안에 대해 한마디 한다.("Il vecchiotto cerca moglie").
바르톨로는 바르실리오에게 공증인을 데려오라고 말하고, 로시나와 그날 저녁에 결혼하려한다. 바르톨로는 로시나에게 린도르에게 주었던 그녀의 편지를 내보인다. 이에 그녀는 상처를 입고, 자신이 속았다고 확신한다. 그녀는 바르톨로와 결혼하기로 동의하며, 린도로와 도망가려던 계획을 그에게 말한다. 갑작스런 폭풍우가 지나가고, 피가로와 백작는 벽을 기어올라간다. 기다리던 로시나는 알마비바가 자신의 실제 정체를 드러낼 때까지 분노를 퍼붓는다. 바르질리오는 공증인과 도착한다. 바르질리오는 알마비바에게서 비싼 반지로 뇌물을 받을 것인지, 아님 그의 머리에 총알 몇발이 박힐 것인지 위협받자, 바질링는 로시나와 알마비바의 결혼식의 증인이 될 것에 동의한다. 바르톨로 박사는 병사들과 도착하지만, 이는 너무 늦었다. 알마비바 백작은 바르톨로에게 저항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설명하자, 바르톨로 박사는 그가 졌음을 시인한다.("Cessa di più resistere") 피가로, 로시나, 그리고 백작은 그들의 행운에 환호한다.
유명한 아리아와 이중창
Ecco ridente in cielo (알마비바)
Largo al factotum (피가로)
All'idea di quel metallo (이중창, 알마비바와 피가로)
Una voce poco fa (로시나)
La calunnia è un venticello (바르실리오)
A un dottor della mia sorte (바르톨로 박사)
Dunque io son (이중창, 피가로와 로시나)
그밖에
2009년 김용래 전 총무처장관 별세
2009년 사브 자동차, 법정관리 신청
2009년 이종욱 수원대총장 별세
2007년 윌리엄 페리 전 미 국방장관, 정동영 대선후보 면담
2007년 이란 우라늄농축 강행 미, 두번째 항모 배치
2007년 제이유 주수도 회장 징역12년 선고
2007년 정영진 부장판사, 대법원장에 직격탄 공개 비판
2007년 1600년만에 깨어난 백제 금동관
2007년 석유화학업계 11년 담합 소비자피해 1조5600억원
2007년 철인3총사, 111일만에 사하라 횡단
2007년 국회 FTA문건 유출소위 최재천·이혜훈 의원 보좌관 조사
2007년 페리 등 미 민주당 성향 인사들 대선후보 연쇄 면담
2006년 마닐라 대통령 궁내 폭발사건 발생
2003년 美 나이트클럽 화재 210여명 사상
1992년 이스라엘 남부 레바논 침공, 국경서 5km점령 지중해쪽 진격
1987년 브라질 외채 1080억달러에 대한 지불정지 선언
1986년 한국-레소토 국교 수립
1979년 북한, 평양세계탁구대회에 남북한단일팀 구성제의
1977년 ‘외교관 등 국제적 보호인물에 대한 범죄 및 처벌에 관한 협약’ 국제적으로 발효
1973년 라오스 휴전 조인
1973년 비상각의, 소액심판법, 특가법 개정 등 의결
1969년 일본 교포북송재개 결정
1968년 국무회의, 향토방위군 설치법 시행령 의결
1965년 미국 달 로케트 레인저 8호 고요의 바다에 명중, 달촬영 성공
1965년 한일기본조약 가조인
1963년 소련 군축회의서 나토, 바르샤바간 불가침조약 제의
1963년 ROTC 1기생 2,642명 임관
1962년 미국 최초의 유인우주비행 성공
1961년 신민회 결당(위원장 김도연)
1958년 육군 특무부대, 양이섭(양명산) 사건 발표
1955년 동화백화점 개점(현 신세계백화점)
1952년 나토이사회, 구주군 창설과 서독 참가 승인
1947년 영국, 인도독립 승인
1946년 소련, 사할린과 알류산의 정식 영유 선언
1946년 군정청, 정당등록제 공포
1928년 일본, 중의원선거 첫 실시
1920년 북극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 사망
1916년 스웨덴의 정치가 아놀드손 사망. 1908년 노벨평화상 수상
1910년 브트로스 가리 이집트 수상 피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