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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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단원 근·현대사, Ⅲ. 현대 사회의 발전, Ⅲ-1 대한 민국의 수립
1.교과서 속 주개념
1)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1945. 12)
한국에 임시 민주 정부를 수립하고 미·영·중·소에 의한 최고 5년간의 한반도 신탁 통치 등을 결정하였다.
2) 반탁과 찬탁의 대립
전국적인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고 우익의 주도 아래 진행되었으며 다수 국민들이 지지를 하였다. 하지만 좌익은 찬탁 운동을 전개하면서 좌·우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런 와중에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개최되었고 반탁 운동을 펼치는 우익을 협의 대상에 포함시키자는 미국의 주장과 신탁 통치에 반대하는 정당·단체와는 협의할 수 없다는 소련의 주장이 맞서면서 결렬되었다. 그리고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리기는 했으나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세우려는 미·소의 정책으로 결렬되었다.
2.확장 개념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1945년 12월 16~25일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이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戰後)문제 처리를 위해 소집한 외상 회의이다.
한국 문제에 대해서는 4개국 대표에 의한 신탁통치를 기본 취지로 하는 미국측의 제안과 민주주의적 임시정부 수립을 기본 취지로 하는 소련측의 수정안이 토론되었다. 회의 결과 12월 28일 영국의 동의로 협정이 체결되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발표되었다.
첫째, 한국을 독립 국가로 재건설하며, 민주주의적 원칙하에 발전시키고, 일본 통치의 잔해를 빨리 청산할 조건들을 조성할 목적으로 민주주의 임시 정부(aprovisional democratic government)를 수립한다. 둘째, 연합국이 한국 임시 정부의 수립을 원조·협력할 방안의 작성은 민주주의적 정당·사회단체들과의 협의를 통해 미소 공동위원회가 수행한다. 셋째, 5년 이내를 기한으로 하는 4대 강국에 의한 신탁통치의 협정은 한국 임시 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4개국이 심의한 후 제출한다.
이 협정 내용에 대해 충칭[重慶] 임시 정부의 추대를 주장하던 한국 독립당·한국 민주당 등의 우익 세력은 임시 정부수립을 위한 국제적 원조 방안으로 선전하면서 신탁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반면에 여운형의 조선 인민당, 박헌영의 조선 공산당 등은 3상 회의의 결의를 한국의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한 국제적 합의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좌우익의 대립에 미국·소련의 대립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미소 공동 위원회를 통한 통일 임시 정부의 수립이라는 3상 회의의 결정 사항은 실현되지 못했다.
3.관련 지식
1) 반탁운동
카이로, 포츠담 선언과 국제 헌장으로 세계에 공약한 한국의 독립 부여는 금번 모스크바에서 개최한 3국 외상 회의의 신탁 관리 결의로 수포로 돌아갔으니 다시 우리 3천만은 영예로운 피로써 자주 독립을 획득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단계에 들어섰다. 동포여! 8·15 이전과 이후, 피차의 과오와 마찰을 청산하고서 우리 정부 밑에 뭉치자. 그리하여 그 지도하에 3천만의 총역량을 발휘하여서 신탁 관리제를 배격하는 국민 운동을 전개하여 자주 독립을 완전히 획득하기까지 3천만 전 민족의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라도 흘려서 싸우는 항쟁 개시를 선언한다.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 반탁 시위 선언문]
2) 찬탁운동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을 신중히 검토한 결과 이번 회담은 세계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서 또 한 걸음 진보이다.··· 문제의 5년 기한은 그 책임이 3국 외상 회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자체의 결정, 장구한 일본 지배의 해독과 민족적 분열에 있다고 우리는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적 국제 협조의 정신 하에서만 조선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5년 이내에 통일되고 우리의 발전이 상당한 때에는 단축될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오직 우리의 역량 발전 여하에 달린 것이다.··· 우리의 할 일은 무엇보다도 먼저 통일의 실현에 있다.
[조선 공산당 중앙 위원회의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지지 담화]
3) 신탁통치
국제 연합(UN)의 신탁을 받은 국가가 일정한 지역을 통치하는 특수한 통치 형태이다.
신탁 통치를 수행하는 국가를 보통 신탁 통치국 또는 시정국(施政國)이라고 한다. 신탁 통치의 기원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종결 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안한 '위임통치'이며, UN이 이를 계승·수정하여 신탁통치이사회를 설치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의 종결 후 총 11개 지역에서 실시되었다. 신탁통치의 목적은 국제 평화와 안전 촉진, 신탁 통치 지역의 자치와 독립 도모, 인권과 UN 회원국의 평등 보장 등이다.
신탁 통치 지역의 범위는 ① 종래의 위임 통치지역, ②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 후 패전국에서 분리된 지역, ③ 자발적으로 신탁 통치를 원하는 지역 등 3종류로 구분되는데, 1986년 11월 북마리아나 연방 등 4개 지역이 독립함으로써 현재 남아 있는 신탁통치 지역은 없다. 한국의 경우 8·15해방 직후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3상회의의 결의로 5년 동안 4개국(미국·영국·중국·소련)에 의한 신탁통치가 결정되었지만 한국인의 반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4) 위임통치
20세기 국제 관계에서 국제 연맹이 회원국에게 한때 독일이나 터키의 식민지 또는 점령지였던 지역을 다스릴 수 있도록 부여한 권한.
이런 영토를 위임통치령이라고 불렀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과 오스만 투르크가 패배한 뒤, 그 나라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갖고 있던 식민지들 가운데 아직 자치 능력이 없다고 판단된 영토는 연합국이 창설한 국제 연맹의 권한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에게 분배되었다. 이전에 터키의 지배를 받았던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은 영국에, 그리고 역시 터키의 지배를 받았던 시리아는 프랑스에 할당되었다.
독일 식민지였던 중앙 아프리카의 탕가니카(지금의 탄자니아의 일부)는 영국으로 넘어갔고, 역시 독일의 지배를 받았던 카메룬과 토골란드의 대부분은 프랑스에 할당되었으며, 루안다 - 우룬디(지금의 르완다와 부룬디)는 벨기에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독일 영토였던 남서 아프리카(지금의 나미비아)와 뉴기니 및 사모아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에 각각 할당되었다. 원칙적으로 위임 통치는 국제 연맹의 위임 통치 상임 위원회의 감독을 받도록 되어 있었지만 이 위원회는 위임 통치를 하고 있는 강대국을 제재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위임 통치 체제는 국제 연합(UN)이 창설된 뒤인 1946년 신탁통치 체제로 바뀌었다.
ㅡ네이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