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밖’ 어느 언저리에서
그러니까 지난주 토요일, 10월의 마지막 토요일 저녁이었습니다. 그날은 4회를 맞이한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두 번째 날이었어요. 막말로 ‘피크 치는’ 토요일 저녁, 많은 관객이 방문해주셨고 동 시간대에 극장 상영 두 편과 야외 상영까지 있었습니다. 게다가 모든 영화에 상영 후 토크가 마련되어 있었죠. (아, 저는 이날 〈퍼스트 카우〉의 씨네토크를 진행했답니다.) 말 그대로 우당탕탕 우영우가 아닌 우당탕탕 모기영의 날이었습니다. 사건 사고 없이 모든 상영이 잘 마무리된 것이 오히려 신기할 따름이었어요. 무사히 둘째 날이 지나간 것에 대해, 그리고 곧 있을 폐막을 맞게 해주심에 감사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문제는 거기서 벌어졌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하철역에 내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어디선가 날카로운 파생음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리는 자정을 바라보는 시각 온 동네에 울려 퍼졌고 소리의 근원지가 어디인지 모르는 저를 포함해서, 지나가던 분들도 주위를 두리번거릴 뿐이었습니다. 집으로 걸어오는 내내 왕왕 울리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아 급하게 긴급 번호로 연락을 취했습니다. “지금 동네에 소음이 너무 심해요. 오셔서 확인해주셔야 할 것 같아요.” 이날 담당자와 나눈 이 통화는 지금도 제 마음에 타오르는 큰 상흔으로 남았습니다. “지금 핼러윈 때문에 여기저기 난리예요. 바로 출동은 조금 힘들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입 밖으로 볼멘소리를 냈던 나 자신이 여전히 원망스럽습니다. 흥청망청하는 이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빨리 와달라고 휴대폰을 붙들고 있던 그날의 내가 처절할 정도로 밉습니다. 사실 소음의 주범은 제 가방 속에 들어있던 블루투스 마이크였습니다. 영화제 때 쓰기 위해 여분으로 준비한 마이크였는데 전원이 나가기 직전 경고음이 계속 울렸던 거죠. 집에 들어와 삑삑거리는 마이크를 꺼내 들고는 남편과 한참을 배꼽 잡고 웃었습니다. 이거 재미있는 에피소드네, 아까 전화받은 담당자분께 죄송해서 어쩌지, 내일 영화제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줘야지, 하면서요. 하지만 이내 저는 여전히 입가에 번진 웃음을 수습하지 못한 채 뉴스 속보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가느다란 실이 길게 이어진 아득한 느낌. 이윽고 전화 속 그분의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이해한 순간, 나의 어수룩한 해프닝과 맞닿아있던 수화기 너머 참사는 지금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밀려오는 아픔을 주체하기 힘들었습니다. 폐막을 준비하는 분주한 마음과 별개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어떤 세계의 이야기들이 실상 내 눈앞에 현현한 세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끝없는 죄책감 속으로 추락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습니다. 결국 한숨도 이루지 못하고 애통해하는 밤을 보냈습니다.
죽음은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합니다. 누구도 예외는 없지요. 그런데 이상한 건 예상치 못한 죽음, 혹은 참사라고 불리는 곳에 머무는 죽음은 왜 항상 약하고 보호받지 못한 이들을 향해 흘러가는 걸까요. 마치 옴폭 파인 도랑을 향해 서서히 물줄기가 고이듯 청년들의 안타까운 죽음은 노동 현장에, 실습 현장에, 심지어 수학여행 저변에 스며듭니다. 어떤 이유로 이 땅의 젊은이들이 안타까운 죽음 한복판에 있어야 하는지 저는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보호받고 격려받아야 하는 이들이 이 사회 외부로, 주변부로 끊임없이 밀쳐지며 흐릿해지고 지워지는 것 같아 오늘도 안타까운 맘으로 그들을 기억하려 애씁니다. 156명으로 불리고 있지만 소중한 한 명 한 명입니다. 고귀한 각각의 존재이자 개개인의 작은 우주 하나하나를 잊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존재와 당신의 소중했던 삶과 당신의 찬란했던 꿈과 당신이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그리고 그날 그곳에 있던 당신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편히 쉬세요.
이하 사진 :〈퍼스트 카우〉 스틸컷
흐려진 변두리 역사 속으로
사실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것들, 혹은 ‘주변’으로 불리는 것들은 자연스럽게 ‘중심’과는 반대된 곳에 있는 듯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역사는 주변이 아닌 중심에 존재하는 이들의 서사로 가득함을 알 수 있지요. 영웅 서사가 그러하고 영화의 서사가 그러하니 말입니다. 중심에 의해 밀려나고 소외되는 주변부는 희미해지고 가끔은 왜곡되기도 합니다. 사실 거의 지워진 것이나 다를 바 없죠. 지워지다 못해 아예 인식 자체에 없는 존재, 때론 존재가 아닌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 주변이야말로 오히려 무수히 많고 많은 이 땅의 작은 역사일 겁니다. 중심에 의해 지워져서 우리가 인지하지 못할 뿐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영화 〈퍼스트 카우〉는 조금은 생경하지만 주변으로 불리는 것들, 흐려진 개별의 역사를 다시금 바라보고 기억하고자 하는 감독의 진심을 담은 영화입니다.
〈퍼스트 카우〉는 반려견과 함께 한가롭게 강가를 산책하던 한 여성이 흙더미 속에서 두 구의 백골을 발견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영화는 이 이름 모를 백골이 누구인지, 왜 이곳에 묻혀있고 이제야 발견되는지 명확히 밝히지는 않습니다. 작은 묘비 하나 없이 습기 머금은 이 땅에서 이들은 어떤 사연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걸까요?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이라면, 이 오프닝 장면 이후 영화가 백 년이 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들려주는 두 남자 이야기가 어쩌면 이들의 사연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적어도 영화 안에서) 생각 정도입니다. 〈퍼스트 카우〉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미국 서부 개척 초기. 음식을 만들어주며 밀렵꾼 무리와 함께 지내는 쿠키(존 마가로)는 숲속에서 버섯을 채취하던 중 러시아인들에게 쫓기는 킹 루(오리온 리)를 발견합니다. 벌거벗은 채 배고픔과 싸우는 그가 안쓰러웠던 쿠키는 밀렵꾼들 몰래 킹 루를 자신의 텐트에 재우고 음식을 먹이는 등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풉니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정처 없이 떠돌던 쿠키는 우연히 킹 루와 재회하게 되고 둘은 모든 것이 시작되는 이곳에서 밝은 미래를 꿈꿉니다. 우여곡절 끝에 이들은 팩터 대장의 암소 젖을 훔쳐 빵을 만들어 파는데, 여기서 예상치 못한 큰 수익을 내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듯,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팩터 대장은 젖소 옆에 놓인 양동이를 보고 쿠키의 짓임을 직감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쫓기 시작하죠. 영화를 보는 내내 쿠키와 킹 루의 행복한 엔딩을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영화는 쫓기던 두 친구가 나란히 나무 밑에 누워있는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이들은 죽은 걸까요? 이들은 영화 초반에 등장한 백골의 주인이었을까요?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이들의 죽음이 ‘누구의 기억에도 존재하지 않는 죽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주변인’으로 불렸으니까요.
아니나 다를까, 영화를 보는 내내 갸우뚱하게 되는 지점이 있었어요. 바로 〈퍼스트 카우〉의 두 주인공인 쿠키와 킹 루가 서부극에는 조금 어색한 주인공들이라는 점입니다. 서부영화라고 했을 때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뿌연 황야의 모래 먼지를 헤치고 등장하는 고독한 총잡이나 최후의 결투, 원주민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서부 사나이들 모습은 매우 익숙한 이미지입니다. 〈퍼스트 카우〉 배경인 1820년대 미국 오리건주는 미국령이 되기 전, 미국과 영국이 공동으로 소유하며 혼란의 시기를 겪었습니다. 땅과 자본을 찾아 몰려든 사람들이 법과 제도가 완전하지 않았던 이 새로운 개척지에서 약탈을 일삼기도 했죠. 이른바 그들의 무법지대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볼 때 서부영화는 야만을 처단한 문명, 혹은 야만인을 무찌르는 영웅들이 주인공이 되어 이 세계의 중심부를 차지하는 서사입니다. 즉, 중심의 역사이자 중심을 위한 장르이죠. 생각해보면 영웅 이야기는 지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주목되지 않지만, 영웅과 함께 그 시기에 존재한 다른 이들이 있습니다. 미국 개척 시대 은유를 적극적으로 품은 서부극의 시작이, 만약 영웅 이야기가 아닌 ‘영웅이 아니었던 자들’의 이야기라면 과연 어떨까요?
우리가 바라는 간절한 풍경
〈퍼스트 카우〉는 살육과 총성의 세계를 보살핌과 연대로 대체한 새로운 서부극의 기원을 보여줍니다. 생명을 하대하고 자본이 권력을 움켜쥔 이 거친 서부의 한가운데에서 쿠키와 킹 루는 더없이 상냥한 사람들입니다. 배를 내밀고 뒤집어진 도마뱀을 원래 자세로 돌려놓아주고, 우는 아기를 돌보고,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살뜰하게 빗자루질하며 보기 좋게 꽃을 꽂아놓습니다. 심지어 소의 젖을 몰래 훔치면서도 소에게 일어난 일을 안타까워하며 위로를 건네는 서부의 사나이라니요.(소는 이곳으로 이동하던 중 가족들을 잃었습니다. 말 그대로 이곳에 도착한 ‘퍼스트 카우’이자 자본주의의 시초를 알리는 ‘퍼스트’일까요.) 착취하지 않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소와 관계를 형성하는 쿠키의 모습은 깊은 감동을 낳습니다.
어쩌면 쿠키는 소의 젖을 훔치는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남다른 위로를 얻어 기꺼이 젖을 내어주는 쪽은 소일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그 이유로 결국 쿠키는 팩터 대장에게 쫓겨 죽음으로 예상되는 엔딩을 맞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요? 땅을 차지하기 위해 터전을 지키던 이들을 살육으로 몰아낸 자들이 막상 자신이 한 일은 생각하지 않고 우유를 약탈당했다고, 타인이 내 소유를 건드렸다고 또다시 무자비한 살생을 저지르고 있다는 점이요. 모든 것이 다 이 서부의 끝자락에서 벌어진 일 같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입니다. 자본과 소유의 시작을 알리는 퍼스트 카우는 놀라울 정도로 복잡해지고 교묘해진 지금의 시장경제의 기원과도 같습니다. 그 안에 스며있는 이기심과 탐욕은 영원한 비극으로 순환되겠지요.
“새에게는 둥지, 거미에게는 거미줄, 인간에게는 우정.”
〈퍼스트 카우〉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지옥의 격언〉 일부로 시작합니다. 주변인들로 불리는 이들이 보여준 우정과 신뢰로 다시 써 내려간 서부 역사에 대한 상상이지요. 선의와 친절, 베풂, 교감, 우정을 토대로 하는 어떤 기원에 대한 다정하고 섬세한 상상입니다. 개척과 정복으로 물든 강자들의 역사 속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단조로운 것들을 주목하고, 또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품는 일이고요. 그래서 잊히는 개별 존재들을 다시금 기억하게 하는 따사로운 풍경을 담은 영화입니다. 자본과 권력의 주변부에서 스러져가는 생명들을 속절없이 바라보고 있는 오늘날 우리가 바라는 간절한 풍경의 한편입니다. 적어도 요즈음 저에게는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