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증오의 세기_1부 대(大) 열차 충돌_1 제국과 인종
그 시대 경제 발달에서 엄청난 사건이 1914년 8월에 끝나고 말았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1883~1946 영국 경제학자)
평온한 시대정신을 보여 준 19세기의 마지막 20년이 지나고, 갑작스레 우럽 전체는 열풍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열렬히 영웅을 숭배하고 일반 시민에 대한 사회 강령을 지지하고 나섰다. 어떤 이는 신앙에 기대 의심을 품었고, 어떤 이는 고대의 성(珹 옥 이름 성; 옥 이름, 구슬 이름)과 그늘진 길뿐 아니라 대평원과 거대한 지평선, 대장간과 공장을 꿈꾸었다. 전인미답의 새로운 세기에 몸을 맡기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마지막으로 현 세기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로베르트 무질(1880~1942 오스트리아, 소설가)
1901년 9월 11일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회고록>과 런던의 《타임스》지의 묘사에 의하면 상당히 처음 맞는 글로벌시대로 황금시대를 목가적으로 그린다. 이러한 낙관은 무정부주의자들의 테러나 보어전쟁 등은 불순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필자의 관점에서는 영국인이 물려받은 지배 능력이 식민지에서 시험받고 있었고 발칸 반도를 러시아는 인종과 공동의 역사적인 유물, 종교, 근접성에 따라 관여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관여하는 등의 불편한 상태로 근심거리가 있었다. 남아프리카에서의 잔인한 전쟁, 기독교 국가들의 중국 공격하는 등은 탐욕의 시대였으며 영국의 빈곤은 살기 위해 아닌 지리적 이동을 택한 사람들이 1891~1900년대까지 72만 6000명이 떠났다.
제국 / 잡혼
1901년, 세계는 제국들의 세상이었으나 청 왕조와 오스만 제국은 해외무역 관세수입이 중요해지는 때에 봉건제와 유사한 시스템을 기초로 유지되고 있었다.
중국과 터키 정부는 현대식 무기와 사회간접자본 비용을 대기 위해 관세수입을 담보로 차관을 빌렸다. 패전의 여파로 채무불이행이 발생하면서 수입이 외국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 시간이 지나며 중국과 터키는 쇠약해진 제국을 강력한 민족 국가로 변신을 시도하며 근대화를 추구하는 세대가 권력을 잡으며 달라졌다.
이미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제국은 18세기에 재원을 모아 전쟁 수행 능력을 현대화했다. 산업화된 전쟁의 기술적, 정치적 도전에 힘겨워하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는 영역은 열여덟 개의 민족으로 이루어졌다. 견고했지만 무력했다. 왕국은 헌법에 따라 자유주의를 표방하나 정부 조직은 성직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법 앞에 모든 시민이 평등하나 모든 사람이 시민은 아니다.
합스부르크 연방주의 체계는 결코 전진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주민을 ‘마자르화하려는’ 헝가리의 꾸준한 운동은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했다.
- 당시 문화계는 인종 간 이질적 교배의 장점을 훌륭하게 선전하고 있었으나 시대는 동질적인 민족 국가를 지향하고 있었다. ‘귀족 민주주의 관료제’라는 지칭은 다민족 사회의 점증하는 긴장을 표현하고 있다. 무질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현대 세계의 적나라한 거울이라고 설명했을 때 암시한 바로 그 내용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분권화)은 안정적이었으나 무력했다. 러시아(중앙집권화)는 강했지만 불안정했다.
서유럽의 해외 제국들은 서로 다른 특징을 갖고 있었다. 300년의 무역과 정복, 식민화의 결과물인 이 제국들은 놀라운 노동 분업의 수혜자였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상업적, 산업적 기능이 결합되어 있었다. 이것들은 서양 제국주의의 원동력이었다.
- 정기선은 세계 구석구석을 연결했으며 항구와 철도가 연결되면서 물류뿐 아니라 네트웍이 형성되었고 거리로 인한 장애를 없앴다.
금본위제를 채택하면서 재화(무역)와 사람(이주) 자본의 흐름(대출)에 신뢰를 주었고 경제적 관점에서 진정한 글로벌시대였으며 황금시대였다. 과거 어떤 시기보다 빠르게 성장했다. 제국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 벨기에,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러시아 등
- 제국들은 서로 협력하여 어떤 반대 세력도 용납지 않았다.
제국의 강력한 기반은 식민지 개척, 그리고 토착민과 협력을 통해 자신을 재현한 모형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었다.
각 지역에서는 유럽인과 지역 엘리트의 균형이 독특하게 이루어졌다. 사회 계층 구조 모델(외국인 계급 제도로 오인)이 등장했다. 영국인들은 이를 세속 신분과 왕에게 부여받은 지위라는, 불문율에 기반한 정교한 분류 체계로 이해했다.
19세기가 끝날 무렵, 대영제국은 먼 지역의 식민지를 지배하는 비용이 이익에 비해 크게 줄어들고 있었다. 탈식민화는 본국과 일부 식민지에서의 참전권을 확대가 원인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대국의 단결은 전시에나 기대할 수 있다. 제국을 강화하고 본국과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은 곤궁에 빠진 제국을 도와주게 만드는 고상한 충동을 확고한 결속으로 바꾸는 것이다.
19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영국을 떠난 72만 6000명 가운데 72%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제국의 세상은 여러 인종이 융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1901년 당시에는 전 세계적으로 잡혼을 혐오했다. 사이비 과학은 여러 방법으로 정교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잡혼의 결과 신체적, 정신적으로 퇴보한다고 주장했으며 자연의 괴물이라 주장했다. 결국 법률로서 금지하면서 인종 간의 결합을 용인하지 않았다.(1850년 필라델피아에서 출간된 『인종』에서 로버트 녹스)
유대인 ‘문제’/반유대주의 경제학
인종에 대한 독일인의 생각, 인종적 순수성, 혈통의 순수성, 순수한 혈통에 대한 맹목성과 혼혈이 아리아인의 피를 더럽힌다고 생각이 유대인을 호색가, 비유대인을 강간, 퇴행성 질환과 전염병 확산시킨다는 고정관념을 생산했다. 이는 현실(독일 인구의 1%미만)과 모순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반유대주의자들, 유대인에 대한 법적 차별을 요구했고 반유대주의 정당도 등장했다.
반유대주의자인 헤르만 알바르트는 유대인을 콜레라 박테리아라고 부르며 영국이 인도에서 종교 암살단원들을 몰살했던 것처럼 그들을 절멸할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와 히틀러의 죽음의 수용소를 직접적으로 연결할 수는 없지만 19세기와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나타났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1901년 당시 반유대주의는 잡혼 이상으로 경제적 불만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18~19세기 초 해방의 여파로 아시케나지 유대인(**반유대주의 표적, "아슈케나즈"는 그 당시 히브리어로 독일을 가리키는 말로, 따라서 아슈케나즈 유대인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독일 유대인(German Jews)이다./기독교 문화 속의 유럽에서 천대받던 금융과 무역에 관한 직종에 종사하였으며, 특히 폐쇄적인 집단을 이루고 살거나 죄악시되던 고리대금업을 운영하던 등의 구실로 반유대주의 정서의 표적이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 가운데 본래 신성 로마 제국 영토 내에 다수 거주하던 아슈케나즈 유대인 인구는 점차 동부로 쫓겨나 동유럽에 주로 거주하게 되었다. 특히 15세기부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지역에 유대인들이 받아들여진 이후 아슈케나즈 유대인들은 동유럽의 폴란드,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서부 등지에서 최대 규모의 디아스포라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이 놀라울 정도로 사회적, 지리적 이동을 달성했기 때
프랑스에서 유대인 은행가들을 이미지는
- 알퐁스 투스넬은 금융 봉건주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자는 사실상 유대인이라고 주장, 프랑스 사회주의자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은 유대인을 기생충으로 간주했다. 문학작품에서는 파렴치한 유대인 자본가, 시장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사람으로 묘사.
제너럴 은행의 파산 때 사람들은 로스차일드 가에 책임을 물으려 했다. 많은 사람들 눈에 제3공화정은 유대인 자본에 장악된 상태였다.
독일의 경우, 자본가라서 공격받은 것은 아니다. 독일에서의 기업가나 사업가보다 지적 분야에서 두드러졌다. 독일인은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그리스 정교를 믿으며, 이디시어를 사용하는 소위 동구 유대인들에게 혐오감에 가까운 불안감을 느꼈다.
- 의사 아홉 명 중 한 명, 변호사 여섯 명 중 한명이 유대인이었다. 신문사 편집자, 저널리스트, 극장 감독, 학자 등의 직업에 유대인 수가 평균을 넘었다. 실제로 독일 엘리트 직업 중에서 군대 장교만 유대인이 적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유대인이 동유럽에서 독일로 대거 이동하면서 인식이 악화되었다.
유대인이 전문 직종에서 성공을 거둔 경우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빈의 지식인 계층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프라한 기업계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주해 온 동구 유대인의 수 또한 베를린 보다 빈이 훨씬 많았다. 따라서 범게르만주의자인 카를 루터 폰 쇠네러나 기독교 사회주의자인 카를 루에게 같은 반유대주의자들이 전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거둔 정치적 성공은 이러한 경제적인 불만에 기초했다.
경제적 반유대주의는 인종적 반유대주의와는 상당히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 독일사무직노동자회는 소위 ‘아리안 조항’을 규칙과 규정에 집어넣음으로써 유대인을 회원에서 제외한 최초의 조합이었다.
1879년 “유대인은 우리의 불행이다.”라고 구호를 지어낸 사람은 역사학자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
1912년 클라스는 익명으로 『내가 황제라면』이라는 권고문을 발표했다. 유대인들의 경제적 기회를 제한하기 위해, 권고사항은 무자비한 조치들이었으나 경제 발전으로 나타난 해결책으로 간주했다는 점은 중요하다. 독일 내 유대인들이 성장한 원인은 바로 1834년 체결된 독일관세동맹 덕분이었다. 돈과 상품 거래를 위해 태어난 유대인들이 독일인보다 확대된 자유 시장을 제대로 이용하느느 법을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라스의 사례는 편견이 경ㄱ제 위기만큼이나 경ㅇ제 성장에 의해서도 가화될수 있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독일인의 이주/반짝이는 세계
1901년 유대인 이주 집단은 중동부 유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뉴욕, 런던의 이스트엔드, 베를린, 부다페스트, 빈 등에 새로운 유대인 집단을 형성했다.
10세기 말부터 이주를 시작해 발트 해안을 따라 지배적 위치를 점하던 독일인들은 지금은 지배적이지는 않아도 특권을 누렸다. 19세기 후반 비독일계 주민의 출산율 상승과 독일계 지역으로 이주민들이 대거 이주해 오면서 ‘이구 압박’을 느끼기 작했다. 중요한 점은 독일계 소수 집단이 거주하던 동쪽 지역 여러 곳에 상대적으로 유대인 이주자들이 많이 거주했다. 이 경계 지역의 독일인들과 유대인들의 관계는 때로 공생 관계에 가까웠다. 그런데 소멸을 두려워하기 시작한 독일인들은 민족 간 결혼이 해결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거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 카를 파슈(독일의 화학자, 노벨 화학상(1930))도 단치히의 정기간행물 《반유대주의자의 거울》에 유대인 문제의 해결책으로 간단하게 몰살이나 추방을 제안했다.
1901년 당시 세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 경제적으로 통합된 상태였다. 경제의 상호 의존이 그 어느 때보다 경제 성장과 관련이 깊었던 당시. 부유하고 건강한 백인을 괴롭히는 것은, 경제의 미래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제국과 인종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에서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이 엄청나게 크다는 사실이다. 이 시대가 화려하긴 하지만, 결코 황금시대가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였다.
무질이 ‘발화열’로 상기시킨, 새 세기를 예고할 사상들이 상당히 많은 유대인 혹은 중동부 출신 유대인 자손의 성과라는 점이 전적으로 놀랍지만은 않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물리학,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후고 폰 호프만휴탈의 시,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카를 크라우스의 풍자문학, 구스타프 말러의 소설, 심지어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까지, 이 모든 것들이 신앙으로서의 유대교가 아니라 수리에 밝고 교양 있지만 빠르게 동화되어 가는 소수 민족 집단의 특수한 환경에 의한 성과물이다.
증오의 세기_1부 대(大) 열차 충돌_3 단층선
이제 전쟁이 터진다. 그리고 우리 인간이 역사의 야만적인 단계에서 네발로 기어 나오지 못했다는 점이 드러난다. 우리는 멜빵을 멜 줄도 알고, 훌륭한 사설을 쓸 줄도 알고, 초콜릿 우유를 만드는 법도 안다. 하지만 유럽이라는 풍요로운 반도에서 몇 개의 부족이 공존할지 진지하게 결정해야 할 때 대량학살이라는 방법 이외 다른 것은 찾지 못하는 무기력한 사람들이다_레온 트로츠키(**레프 뜨로쯔끼, 1879년 10월 26일(구력)/11월 7일(신력)~1940년 8월 21일)은 소비에트 연방의 전 해군 군사인민위원(1918-1925), 외교관, 정치가, 사상가이자 노동운동가이다.)
- 루리티니아에서의 죽음
20세기 초에는 정치적 암살은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런데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왕위 후계자 페르티난트 황태자 암살이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가 되어 모든 것을 바꾼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1914년 세계 경제는 번성하고 있었다. 상품과 자본, 노동의 이동은 오늘날의 수준에 필적할 정도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다양한 민족이 함께 섞여 살고 있었으며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바닷길과 전보는 그 어느 때보다 분주했다. 전쟁 때문에 계획경제와 자급자족 경제와 보호주의가 등장하며 인력과 자본의 흐름이 모두 말랐다.
- 1900년부터 1913년 사이에 살해된 국가원수나 정치인, 외교관은 마흔 명, 이들 중에 왕이 네 명, 총리가 여섯 명, 대통령이 세 명이었다. 발칸 지역에서만 성공한 암살이 여덟 건으로 왕 두 명, 왕비 한 명, 총리 두 명, 그리고 터키군 총사령관이 희생자가 되었다.
**1914~1918; 제1차 세계대전(1918~1939; 전간기/1939~1945; 제2차 세계대전), 기술 및 산업의 고도화와 전술적 교착 상태(참호전)로 매우 많은 사상자를 냈다.
당시 민족국가는 유럽사에서 상대적으로 새로운 개념이었으나 프랑스가 국가 건설의 모델을 제공했다. 반복된 혁명과 전쟁을 통해 다듬어진 프랑스 공화국은 1900년 무렵 모든 지역별 소수 민족을 포섭하여 표준화된 학교 교육과 군사 교육을 통해 프랑스라는 단일 국가개념(오베르뉴인, 브르타뉴인, 가스코뉴인은 자신을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을 탄생시켰다. 프랑스 정치 철학자 장자크 루소는 국민주권주의를 주장했다.
1860년대에 자기 보존과 발전에 대한 본능을 국가원칙과 결합하여 피에몬테 왕국은 이탈리아 왕국을 프로이센 왕국은 독일 제국을 민족 국가로 탄생시켰다. 프랑스와 같은 단일 국가개념은 형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다른 민족들도 이탈리아와 독일의 사례를 차용했다.
세르비아인들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하여 남슬라브(유고슬라비아)라는 이름으로 민족 통일을 이루려 했다. 방법은 피에몬테와 프로이센의 전례를 따라 전쟁을 택했다. 승리는 별개였다. 보스니아는 15세기부터 19세기 말까지, 오스만 제국에 속해 있었으나 제국이 쇠퇴하면서 분쟁 지역으로 변해갔다. 1908년에는 오스트라아•헝가리 제국에 합병됐다.
- 발칸 전쟁(1912~1913년, 발칸 동맹(그리스, 몬테네그로, 불가리아, 세르비아)과 오스만 제국과의 제1차 전쟁) 이후 민족주의자들은 해외 영토를 손에 넣을 뿐 아니라 사람들도 이동시켰다. 침입군 때문에 떠났다기도 했고 그리스는 *부쿠레슈티 조약에 따라 마케도니아 지역을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에 할양했다. 주민들을 고의로 추방 및 교환 했다.
1913년 그리스인이 서부 트라키아에서 추방되었다. 1914년년에는 동부 트라키아 일부 지역과 아나톨리아에서 추방되었다.
터키의 패배 이후 주민 교환(강제이주)이 합의되면서, 터키인 4만 8750명과 불가리아인 4만 6764명이 터키와 불가리아의 새 국경을 경계로 교환되었다.
이러한 교환은 인종적으로 뒤섞인 거주지를 민족주의적 감성에 호소하는 동질적인 사회로 변모시키기 위한 시도였다.
1913년~1915년에 (그리스)마케도니아의 그리스 인구는 3분의 1이 증가했고, 이슬람교도와 불가리아 주민은 각각 26%와 13% 감소했다.
서부 트라키아의 그리스 주민은 80%나 감소했고, 동부 트라키아의 이슬람계 주민은 3분의 1이 증가했다.
이러한 주민 교환은 유럽 내 다민족 집단들에게 불길함으로 작용했다.
보스니아가 합병되자 사라예보에(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보스니아를 해방시키겠다고 맹세한 조직들이 생겨났다. 1911년 비밀결사대 ‘흑수단’의 대표 ‘아스피(벌)’이라는 별명을 가진 드라군틴 디미트리예비치는 “나는 모든 유고슬라비아 사람들의 통일을 목표로 하는 유고슬라비아 민족주의자다. 나는 새로운 국가가 어떤 형태를 띠든 관심이 없지만, 반드시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테러 등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통일해야 한다.” 자신의 목표는 합병을 막고 해를 끼치는 사람들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1914년 황태자 암살 사건(161p 서술)이 1차 세계대전 발발을 쉽게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에 암살은 그렇게 두드러진 사건이 아니었다. 암살로 인해 전쟁이 결국에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대인이 보기에 전쟁이 발발 확률이 낮아 보였다는 점을 납득해야만 진정으로 그 전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전쟁의 충격, - 팍스 브리타니타의 종말
흔히 1차 세계대전 발발을 제국주의, 민족주의, 사회적 다원주의, 군국주의 등과 국내 정치 위기, 불안정한 국제 체제 등등으로 설명하면서도 모두 뿌리 깊은 원인으로 해당 지역의 긴장감과 위기감이 여러 해 동안 몇십 년에 걸쳐 축적되었었다고 데에 동의한다. 그러나 1914년에 일어난 사건보다는 이후 4년간의 확대되는 위기를 얼마나 적절하게 설명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1차 세계대전은 예상된 사건이 아니라 충격이었다는 것을 영국 런던 금융시장의 투자자들을 보면 알 수 있다.
1914년 N. M. 로스차일드 선즈는 거의 100년 동안 채권 시장을 지배해 왔다. 발행되는 채권의 주요 인수자였기 때문에 유럽에서 전쟁이 날 경우, 매우 큰 손해를 볼 게 뻔했다. - 프랑스,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가 발행한 채권은 전세 지상의 39%를 차지했고 모든 해외 국가 채무의 49%를 차지했다.- #당시는 생산량이나 소득에 대한 정확한 수치를 얻을 수 없던 시대이므로 투자자들은 개인적인 서신교환, 신문과 통신사를 통해 정기적으로 접하는 정치적 사건에서 앞으로 나타날 재정과 통화 정책상의 변화를 추론했다. 따라서 전쟁 같은 사안은 (166p 서술)이 매우 높은 관심사이며 매우 중요했다.
투자자들의 추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세 가지 가정을 보자.
전쟁은 무역에 혼란을 주기 때문에 모든 정부의 세입이 줄어든다.
전쟁에 직접 개입할 경우 세입이 줄어들 뿐 아니라 국가의 지출도 늘어나고, 상당히 많은 돈을 새로이 빌릴 것이다.
전쟁이 민간 부문에 미치는 영향으로 교전국의 통화 당국은 지폐를 금으로 교환할 수 있는 능력을 유지하기 힘들어지며, 그 결과 인플레이션 위험이 커진다.
- 표3-1. 1914년 7월부터 12월까지 유럽 열강들의 채권 가격
전쟁은 새로운 채권을 발행(비용조달)하게 되므로 공급증가로 기존 채권의 가격이 낮아진다. 지폐 공급 또한 증가하므로 채권에 표시된 통화의 구매력이 떨어진다. 이러한 결과를 예상한다면 채권을 팔 것이다. 그러나 1914년 7월까지 큰 변동이 없었다. 채권 가격 급락사태는 7월 마지막 주에나 발생했다. 오스트리아가 사라예보 암살 사건에 대한 오스트리아 측의 조건에 협력할 것을 요구하며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발표한 7월 23일 이후였다.
전쟁 발발 가능성이 갑자기 커지자
일주일 넘게 하락세, 빈 시장과 부다페스트 시장은 7월 27일 월요일에 문을 닫았고 상태페테르부르크는 이틀 뒤에 같은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목요일 《이코노미스트》는 베를린과 파리 증권거래소도 사실상 문을 닫은 것으로 간주했다.
대륙 내 증권시장 폐쇄는 런던에 두 배의 위기를 몰록 왔다.
상업어음을 발행하던 외국인은 송금이 아됨.
어음을 받아주던 은행들이 디폴트
은행 예금이 대대적으로 회수되었고(뱅크런)
외국인 보유하던 유가증권 팔자에 나섰고(가치폭락)
은행들이 돈에 쪼들리는 증권거래소 고객들의 어음 교환 요구를 거절하자 거래가 사실상 중단되었고
주요 상사들은 파산하기 시작했다.
영국은행이 할인율을 3%에서 5%로 인상했다는 소식에 상황은 더욱 암울함이 더해갔다.
7월 31일에 증권거래소 폐쇄 조치가 이루어졌고
영국은행이 다시 할인율을 8%로 내렸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7월 31일 런던 증권시장이 문을 닫았고 1915년 1월 4일까지 문을 열지 못했다는 점이다.
시장이 문 닫은 기간의 채권 가격(장외거래)을 살펴보면
12월 19일 오스트리아 채권 가격은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 이전인 7월 22일 수준보다 23%나 떨어졌다. 프랑스 장기 공채의 하락폭은 13%였고 영국의 영구채권과 러시아 채권의 하락폭은 9%였다. 이는 재앙의 첫 번째 조짐일 뿐,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재무부 채권 할인을 통한 통화 창출과 새로운 채권의 대량 발행으로 모든 교전국의 채권 이율은 상승했다.
교전국들이 자본 시장을 다양하게 통제했었어도 변동 폭은 매우 컸다. 승전국임에도 불구하고 1914~1920년에 영국의 영구채권은 최고가 대비 44% 빠졌다. 프랑스 장기공채는 최고가 대비 40% 떨어졌다.
볼셰비키 정부는 채무불이행, 독일과 오스트리아 정부는 초인플레이션 상황에 놓였다. 이러한 상황은 전쟁 발발 전의 가장 비관적인 예측보다 더 심각한 결과다. 로스차일드 가는 역사상 최대의 손실이었다. 1913~1918년 사이에 런던 금융시장에서의 자본이 절반으로 줄었다.
#이는 1차 세계대전의 기원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시사한다. 즉 예상 못 했다는 것이다. 금융 부문을 빠삭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1차 세계대전은 정말로 뜻밖이었다. 즉 전쟁이 강대국 간의 뿌리 깊은 전쟁 의식으로 인한 불가피한 결과, 다시 말해 운명적인 대변동이 아니었다. 지나친 원인 규정에 불과하다. 전쟁 발발이 피할 수 있었던 정치적 실수였다는 견해와 일치한다.
그리고 동시대인들은 빅토리아 시대 이후 팍스 브리타니카를 전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세계 최대의 제국이 대륙 위기의 전면 확산을 억제할 거라고 믿었다. 평화는 영국의 군사력과 재력뿐만 아니라 강대국 외교의 성공 여부에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1914년 7월에는 실패했지만 1914년 이전 100년 동안 강대국 간의 대규모 전쟁을 피하는데 기여 했었다.
- 1814~1907년 일곱 차례의 국왕이나 수상의 회의 개최, 열아홉 번의 외무장관 회의 등에서 외교 문제들이 논의되었고 대체로 해결되었다. 지금의 유엔안보리 영구 회원국들이 수행하는 역할과 비슷했다. 되돌아보면 1792~1815년 사이에 유럽을 뒤집어 놓은 전쟁은 없었다.
-- 작센코부르크 가
1914년 여름, 사람들이 그렇게 안심했던 또 다른 이유는 명목상의 유럽 지배층이 특이하게 통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몇몇 도시 국가를 제외하고 1815~1917년 사이에 존속한 유럽 국가는 대개 제국이나 왕국, 공국, 대공국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들의 수장(당시에 빅토리아 여왕을 코부르크 일가의 절대적인 우두머리로 간주)은 세습되었다. 산업화나 근대화가 지전 되었음에도 왕실 정치는 여전히 큰 영향력이 있었다.
- 작센코부프크 가문의 아우구스테스의 자녀들은 딸 하나만 빼고 모두 왕족과 결혼해서 본인이 왕족의 지위를 얻거나 아이들에게 그런 지위를 안겨주었다. 딸 중에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와 결혼, 다른 딸은 뷔르템베르크 왕과 결혼, 셋째 딸은 여욱 국와 조지 4세 형제인 켄트 공작과 결혼했다, 결정적으로 막내아들 레오폴트는 1831년 벨기에 왕이 되었다.
- 빅토리아와 앨버트 부부의 자식들도 아홉 명 중 한 명만 빼고 모두 왕실과 결혼했다.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와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제2세 결혼 등. 해외에 있는 모든 왕자가 서로 친인척인 점, 가족의 일원들과 맺은 해외 동맹국이었다.
근친교배의 불이익보다 왕실의 친족관계로 얻는 이익이 명백하다. 민족주의 저지 효과, 부분적인 세계주의다. 다국적 엘리트층이다. 따라서 유럽 왕실을 이해하는 열쇠는 이 왕실이 진정으로 유럽적이라는 사실이다.
ex: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의 가족을 ‘소중한 코부르크 가문’이라고 생각했고 작센코부르크를 왕실의 성(姓; 성, 겨레, 아들 【명사】 한 혈통을 잇는 겨레붙이의 칭호《김(金)·이(李) 등》)으로 간주했다. 감정과 마음 모두 독일적이었다.
한 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 왕을 공식 방문하는 것은 19세기 외교의 필수적인 부분이었지만, 진정한 가족 모임이었다. 이러한 체계는 계속 왕실 식구들끼리 계속 결혼해야만 유지될 수 있었다. 유명하더라도 왕가에 속하지 않은 귀족과 결혼하는 것은 마법의 왕실 집단을 깨는 행위였다. 귀천상혼, 실제로 요제프 황제는 이 부부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한 것은 이러한 실수에 대한 신의 응보로 간주했다. 프란츠 체르디나트 대공은 황제의 삼촌인 황제의 뜻을 어기고 코텍 백작 부인인 소피와 결혼함으로써 왕실의 용서를 받지 못했다.
정치적 성향 차이로 부분적으로 불화가 있더라도 이것이 1차 세계대전의 전조는 아니다.
빌헬름 황제는 혹시나 친척들이 그를 황제가 아니라 조카로 대하지 않을까, 자신의 위엄 손상을 우려했을 뿐인데, 시간이 지나며 이러한 승강이가 전쟁이 전조로 보였을 뿐이다.
‘입헌군주제’의 현실은 왕실들이 서로 결속한다 해도 무장 중인 민족들 간의 불가피한 전쟁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구주들이 압도될 때까지는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전적으로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왕실 간의 타협 가능성은 남아 있었다.
왕실 가족들은 마치 자신들이 전쟁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독일 황제는 국지전으로 멈추길 바라며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베오그라드에서 멈출 것을 요구 했다. 러시아 황제는 총동원령을 미뤘다.
차르의 요청을 받은 독일 황제가 빈에서 애썼다.
7월 31일 조지 5세는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전쟁을 막기 위해 했지만 안타깝게도 실패했다”고 했는데, “우리”는 표현은 모든 군주가 속해 있는 유럽 전체의 친족 집단을 말하며 이 친 족집단의 세계주의의 시대는 끝났음을 의미한다. 유럽의 지진(전쟁)은 왕실 엘리트층을 가장 크게 흔들어 놓았다. 왕실 지배층은 전쟁을 유발한 게 아니었다. 그저 무능해서 전쟁을 막을 수 없었을 뿐이다.
-- 장군들의 전쟁
- 러시아가 세르비아편을 들어 사태에 개입해야 할 이유는 순전히 위신 때문에 나선 것이다. 놔두면 쓰시마의 불운을 겪은 뒤 10년도 안 돼서 또 다른 패배를 당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러시아 외무장관 사조노프와 참모총장 니콜라이 야누쉬케비치 장군이 망설이는 차르를 설득했다.
- 독일측의 불안은 동쪽의 이웃 국가가 무적의 군사 강국으로 변신하는 재무장 속도였다.
- 영국은 대륙 전전에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 관심사는 발칸 지역보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중국과 일본의 다툼이었다. 서유럽에 개입하여 독일군에 대항하려면 전 해군력을 동원해야 하고 금융, 인력자원이 필요했다.
그러나 독일이 프랑스로 가는 길에 벨기에를 가로질러 행진하려 한다는 사실이 영국 정부를 딜레마에 빠뜨렸다. 벨기에는 중립국의 지위에 있었다. 1세기 동안 유럽의 평화를 지키며 맺은 얽히고 설킨 조약들의 필요불가결한 부분이이었다. 국제법이 모욕당하는 사태에 자유당 내각이 아닌 영국 정부가 수수방관하고 있겠는가? 영국은 독일 프랑스에 승리를 거둘 경우, 독일 해군기지가 영국해협 연안에 들어설 가능성이 커질 수도 있는 대비했는가?
결론을 예측할 수 없는 세계 전쟁, 외교관들에게는 일상적인 서신 교환이나 담소, 회의가 실패했을 때 마지막으로 의지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장성들에게 전쟁은 꾸물거리다간 상대에게 이익만 안겨 wnf tn 있는 초미의 문제로 보였다. 1905년의 러시아 포그롬 사태와 1912~1913년의 발칸전쟁에서 뚜렷해진 인종 갈등은 새로운 모습을 띠고 강대국들에 의해 전투행위의 정당한 수단으로 채택되었다. 이러한 충돌은 서양의 지배구조에 엄청난 타격을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