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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눈의 향기
새해가 밝아 왔다.
한나절이 지나자 쓰지구치 집에는 연하장이 무더기로 날아들었다.
“편지요!”
하는 우체부의 말에 요코는 현관으로 달려갔다. 요코는 내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꼭 기타하라 구니오에게서 연하장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기타하라는,
“편지를 보내도 괜찮을까요?”
하고 요코에게 말했었다. 그리고 여행길에서 한 번 편지를 보내 왔으나 그 편지는 나쓰에의 손에 넘어간 채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요코는 답장을 쓰지 못했다. 삿포로에 돌아가면 기타하라가 다시 편지를 보내올 것이라고 생각하며 간절히 기다렸으나 끝내 편지는 오지 않았다. 요코는 자기가 답장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편지가 오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기타하라의 편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편지는 오지 않은 채 해가 바뀌고 말았다.
요코는 기타하라가 연하장쯤은 보내 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그리고 자기 쪽에서도 기타하라에게 연하장을 써 보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작년에 편지를 받고도 답장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그 편지의 지워 버린 곳에는 무엇이 씌어 있었을까요?’
너무 평범한 글이라고 생각되었지만 그러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요코는 눈 오는 거리를 터벅터벅 걸어서 우체국까지 연하장을 부치러 갔다.
지금쯤 기타하라가 자신이 보낸 연하장을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해도 즐거워 요코는 연하장 다발을 풀었다.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도오루가,
“어디, 나한테도 서너 장은 왔을걸.”
하고 연하장 다발의 절반을 집어 들더니 골라주었다. 거의 다 환자들이 게이조에게 보낸 연하장이었다.
나쓰에와 게이조는 오전부터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었다.
요코 앞으로 온 연하장도 적지 않았다. 동급생이 보낸 것도 있고, 그 중에는 요코가 모르는 상급생이 보낸 것도 있었다.
“헤헤, 요코도 명사 수준이군. 꽤 많은데.”
그 중 남학생에게서 온 연하장도 섞여 잇는 것을 보고 도오루가 놀려댔다.
요코는 남자 글씨가 보일 적마다 기타하라에게서 온 연하장이 아닌가 해서 가슴이 설레었다. 그러나 기타하라에게서 온 연하장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기타하라 씨는 벌써 나 같은 건 잊어버린 걸까?’
요코는 얼마 남지 않은 연하장을 한 장 한 장 눈여겨보았다.
‘오늘 연하장이 오지 않으면 인연이 없는 것인지도 몰라.’
이런 도박 비슷한 생각도 들었다.
“아니, 이 녀석은 규슈에 가 있었군 그래.”
“와, 이건 좋은 판화 그림인걸. 안 그러니 요코?”
하고 도오루는 한 장 한 장 천천히 들여다보았기 때문에 연하장을 고르는 손길은 더디기만 했다.
기타하라의 연하장은 끝내 없구나 하고 생각했을 때 뜻밖에도 기타하라 구니오라는 이름이 요코의 눈에 띄었다. 요코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어째서 그렇게 기쁜지 요코 자신도 이상했다. 부끄러울 정도로 기뻤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기뻐하기에는 좀 일렀다. 수신인은 나쓰에와 도오루였다. 그러나 요코는 낙심하지 않았다. 도오루의 손에는 아직 30장 가량의 연하장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쓰에와 도오루에게 연하장을 보냈으니 자기에게도 분명히 보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끝내 요코의 기대는 어긋나 버렸다. 그래도 요코는 단념하지 못하고 다시 2백 장 가량이나 되는 연하장을 모조리 살펴보았다. 역시 기타하라의 연하장은 한 장밖에 없었다.
‘나는 어째서 이렇게 기타하라 씨의 연하장을 기다리고 있을까?’
기타하라는 불과 일주일밖에 집에 머물지 않은 오빠의 친구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나는 기타하라 씨 친구의 여동생에 지나지 않아. 내 친구는 아니야. 나를 잊어도 할 수 없지만.......’
그러나 요코는 잊을 수 없었다. 기타하라의 어디에 마음이 끌리는지 요코 자신도 잘 알 수 없었다.
요코는 나쓰에와 도오루에게 보내 온 기타하라의 연하장을 손에 집어 들었다.
‘하정(賀正)‘이라고 쓰고 그 옆에 “작년에는 신세 많이 졌습니다”라고 씌어 있을 뿐이었다.
요코는 자기에게 온 50장 가량의 연하장을 들고 일어섰다.
“요코, 올해 들어서는 스키 한번도 안 탔지? 우리 스키 타러 갈까?”
연하장을 보고 있던 도오루가 얼굴을 들었다.
“글쎄.”
요코는 여느 때와는 달리 마음이 내키지 않는 듯이 대답했다.
회색 바지에 핑크색 스웨터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면서 도오루는 드러누운 채 요코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 기운이 없어 보이는구나. 설날에 이노자와에서 스키를 타지 않으면 아무래도 설날 기분이 나지 않아.”
둘은 초등학교 때부터 설날이면 강 건너편 스키장으로 스키를 타러 갔었다. 그런데 금년에는 요코가 스키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가 볼까?”
요코는 도오루의 제의를 거절하기가 미안했다.
둘은 스키를 신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운동 신경은 요코 쪽이 더 발달해 있었다. 그러나 도오루도 스키는 잘 탔다. 둘은 능숙하게 숲속을 빠져 나가 제방을 따라 달렸다. 싸락눈이 뿌리는 쌀쌀한 날씨였다. 강바람이 뺨을 때렸으나 스키를 타니 몸이 따뜻해져왔다.
“겨울의 강은 참 좋아.”
요코가 스틱을 눈 속에 깊숙이 찔러 놓고 멈춰 서 있었다.
얼음과 눈으로 덮인 강은 폭이 좁았다. 새하얀 눈 속을 흐르는 겨울 강물은 검은 빛으로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오빠.”
요코는 도오루를 돌아다보았다.
“왜, 요코?”
도오루는 요코의 얼굴이 몹시 쓸쓸해 보이는 데 놀랐다.
“눈은 참 깨끗하지?”
“응..........”
“하지만 향기가 없어.”
“이렇게 많이 쌓여 있는 눈에 향기가 있다면 큰일이야, 요코.”
도오루가 웃었다. 요코도 덩달아 웃었다.
사실 요코는 기타하라에게서 연하장이 오지 않은 것을 도오루에게 말하고 싶었다. 두 사람은 다시 스키를 탔다.
설날이 되면 스키장에는 사람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언제나 찾아볼 수 있는 빨강이나 노랑 또는 초록색 꽃을 뿌려 놓은 듯이 화려한 스키복 차림의 사람들로 들끓던 산과는 전혀 다른 산인 것처럼 조용했다.
산꼭대기까지 올라가 도오루와 요코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역시 이곳에 서지 않으면 설날 기분이 안 나지?”
“정말 그래. 해마다 몸에 밴 습관이란 무서운 건가봐. 오조니(정월에 먹는 일본식 떡국)를 먹지 않으면 설날 기분이 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야.”
사위는 조용했다. 싸락눈이 소록소록 내리고 있을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사히가와 거리도 내리는 눈으로 시야가 흐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기타하라에게선 연하장이 왔니?”
도오루가 시미치미를 떼고 물었다. 요코는 말없이 거리를 내려다보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째서 연하장도 보내 주지 않는 것일까?‘
요코는 스틱을 힘껏 짚으며 도오루 곁을 떠났다. 도오루는 능숙한 솜씨로 스키를 타는 요코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래, 기타하라와는 역시 편지 왕래도 하지 않는 건가?‘
하고 어느 정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숙사에서 같은 방에 기거하는 기타하라는 요코 얘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요코에게서 편지가 오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기타하라를 요코와 가까워지게 하려고 열을 올렸던 도오루였다. 그러나 소운쿄의 불꽃 축제를 보러간 날 밤에 도오루는 요코에게서 자신은 얻어온 아이라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 후로 도오루의 마음은 또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미 요코가 자기가 진짜 오빠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자기와 결혼 말을 꺼내도 부자연스럽지 않을 것 같았다.
요코의 출생에 얽힌 비밀이 새어나갈 것 같지는 않았다. 만일 어쩌다가 요코가 알았다고 하더라도 아무 증거도 없으므로,
“요코가 그런 범인의 딸이라면 내가 결혼할 까닭이 없잖아?”
하고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도오루는 역시 요코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자기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기타하라에게서 연하장도 오지 않았다는 요코의 말을 듣고 보니 도오루는 갑자기 온 몸에서 힘이 솟는 것 같았다.
산기슭에 조그맣게 보이는 요코를 향해 도오루는 힘차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바람을 헤치고 산을 미끄러져 내려가는 동안 퍼붓는 눈이 얼굴을 때려 따끔거리는 것도 오히려 도오루에게는 일종의 쾌감을 주었다.
미끄러져 내려오는 도오루를 보고 요코는 급히 왼쪽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기타하라에게선 연하장이 왔니?”
하고 도오루가 물었을 때, 요코는 말할 수 없이 쓸쓸해져 산을 미끄러져 내려오면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요코는 눈물이 글썽해진 눈을 도오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도오루는 도망치듯 내려간 요코를 향해 또다시 미끄러져 내려왔다. 요코는 도망칠 곳을 잃고 눈 위에 엎드려 얼굴을 묻었다.
“어떻게 된 거야, 요코?”
검은 선글라스를 낀 도오루의 얼굴은 한결 늠름하게 보여싿.
“응, 아무것도 아니야.”
요코는 눈이 잔뜩 묻은 얼굴을 도오루에게 돌려씨다. 도오루는 요코 곁에 와서 앉았다.
“이렇게 눈 위에 드러누운 채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곤 했었지, 어렸을 때는 말이야.”
“참, 그랬지.”
포근히 쌓여 있는 눈 위에 드러누워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눈은 잿빛 하늘에서 내리는 것으로 보이지 않고 갑자기 공중에서 솟아나는 것 같았다.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눈은 입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바로 눈앞까지 와서는 살짝 도망쳐 버렸다.
“어렸을 때와 똑같구나. 이렇게 드러누워서 쳐다보니까 어쩐지 하늘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아.”
“그래.”
도오루도 벌렁 드러누운 채 요코와 나란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요코, 기억 나니? 네가 2학년쯤 되었을 때였나, 넌 그 때 ‘눈은 왜 하얀 거야? 내가 하느님이라면 일요일에 내리는 눈은 흰색, 월요일엔 노란색, 화요일엔 빨간색으로 정할 텐데’하고 말했는데.”
“내가 그런 말을 했었어?”
“그럼. 그리고 눈 아가씨 얘기를 해주었더니 ‘눈 아가씨는 눈 이불에서 자?’하고 묻기도 했어.”
“난 어렸을 적에 눈 아가씨가 아주 무서웠어. 처마 밑의 고드름이 달빛을 받아 파랗게 빛나면 어쩐지 금방이라도 눈 속에서 눈 아가씨가 태어날 것 같기도 하고......”
초등학교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면 도오루와 요코는 무척 즐거웠다. 남매롯어 사이 좋게 자란 두 사람에게는 공통의 추억이 몇 가지 있었다.
‘이런 두 사람이 부부가 된다는 것은 멋진 일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했을 때 요코가 일어나 눈을 털며 말했다.
“오빠, 오늘은 어두워질 때까지 스키 타자.”
“응, 그래.”
도오루도 일어나 눈을 털었다. 좀더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싸늘한 눈 위에는 더 이상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얼핏 보였다. 도오루는 캔터허를 조이고는 요코보다 앞서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정월 초이레도 지났다. 그 날은 공기마저 얼어붙을 듯한 추위로 이중창의 바깥창이 하얗게 얼어 있었다. 지난해에 망가진 페치카 옆에 석탄 난로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겨울방학이란 역시 꼭 필요해. 이렇게 불을 쬐고 있는데도 등이 추우니 말이야.”
도오루는 이렇게 말하면서 등을 난로 쪽으로 돌려댔다.
“그럼, 오늘 같은 날 초등학생들이 학교에 가야 한다면 큰일날 거야. 아사히가와의 겨울방학은 25일까지지만 2월 한 달은 아무래도 추워.”
나쓰에는 회색 털실로 게이조의 양말을 뜨고 있었다. 게이조는 겨울철엔 나쓰에가 손수 뜬, 무릎까지 오는 양말 이외에는 신지 않았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영하 20도가 되면 ‘펑’하고 불꽃을 터뜨리고 학교는 열 시에 시작했대. 지금은 여섯 시 뉴스로 알 수 있지만.”
요코는 여름철에 책갈피에 끼워 말려놓은 꽃잎을 그림처럼 헝겊이나 종이에 붙여 액자에 넣었다. 요코가 여름 내내 눌려서 말려놓은 꽃잎은 거의가 색깔이 바래지 않아 선명하여 액자 속에 꽃이 피어난 것처럼 싱싱하게 보였다. 추위가 심한 북극에서는 꽃꽂이의 물도 얼어 버릴 정도여서 요코가 누러 말린 꽃은 누구나 좋아했다.
“나 잠깐 다쓰코 아줌마 댁에 세배하러 갔다 올 거야.”
요코는 다 된 액자를 조금 멀찍이 바라보면서 말했다.
요코는 다쓰코의 집에 오랫동안 가지 않았기 때문에 정초도 되고 하여 한번 가고 싶었다. 다쓰코의 집에 간다는 말을 듣고 나쓰에는 잠자코 있었다.
“이렇게 추운데?”
도오루가 창 밖을 내다보았다.
“응. 이렇게 추운 날에는 아줌마 댁에도 손님이 없을 거야.”
요코는 다쓰코 집의 조용한 응접실이 생각나 몹시 가고 싶었다.
“아줌마 댁이라면 가도 괜찮겠지.”
도오루는 말없이 뜨개질을 하고 있는 나쓰에를 보고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밖에 나서자마자 속눈썹이 뻣뻣해지고 눈썹, 앞머리, 내쉬는 입김 할 것 없이 모두가 얼어 금세 하얗게 보였다.
요코는 정류장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버스를 기다렸다. 추워서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차의 클랙슨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그러나 요코는 전혀 개의치 않고 버스가 오는 쪽을 바라보면서 여전히 발을 구르고 있었다. 다시 클랜슨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돌아본 요코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차를 세우고 요코를 보고 있는 사람은 기타하라였다.
“어머, 기타하라 씨!”
가죽 잠바를 입은 기타하라는 말없이 뒤쪽 문을 열었다. 요코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저희 집에 오시는 길이었어요?”
요코의 목소리에 그리움이 넘쳐 있었다. 기타하라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저희 집 쪽으로 가는 거 아니었어요?”
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요코는 깜짝 놀랐다. 기타하라의 눈이 흘끔 백미러 속의 요코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만난 기쁨으로 기타하라가 아직 한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은 것을 요코는 미처 몰랐다.
“어디로 가시는 거죠? 기타하라 씨?”
요코는 기타하라의 침묵을 비로소 알아차렸다. 요코는 약간 불안했다.
“저, 저희 집으로 가세요.”
“싫습니다.”
기타하라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단호한 어조였다.
“........?”
백미러에 비친 기타하라의 눈이 요코를 바라보았다.
“전 요코 씨만 만나러 왔어요.”
화가 난 듯한 말투였다. 요코는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기타하라는 4조 거리에 있는 호텔 앞에 차를 세웠다. 그는 여름에 왔을 때 이곳 그릴에서 도오루와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아사히가와에서는 이곳 밖에 식사할 곳을 알지 못했다. 요코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열두 시 조금 전이었다.
난방이 잘 되어 있는지 내부는 훈훈했다. 두 사람은 이층의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숙박 손님들이 식사를 하고 있을뿐 실내는 한산했다. 요코는 창가로 다가갔다.
“전 요코 씨만 만나러 왔어요.”
하던 기타하라의 말을 속으로 중얼거려 보았다. 길 모퉁이의 약국 앞에 서 있는 노란 깃발이 축 늘어져 있었다. 지나친 추위 탓인지 행인도 차도 얼마 없고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느릿느릿 차도를 건너가는 것이 보였다.
“요코 씨.”
요코가 돌아다보자 기타하라는,
“무엇을 드시겠어요?”
하고 물었다. 요코는 가슴이 기쁨으로 꽉 차서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도 나지 않았다.
“전 배고프지 않아요.”
요코는 의자에 앉았다.
“열두 시가 다 되어가는데요.”
기타하라는 카레라이스를 둘 주문했다. 그런 그의 태도가 마치 초등학생 같아 요코는 생긋 웃었다.
“카레라이스가 왜 우스워요?”
기타하라는 약간 멋쩍어하더니,
“전 어머니가 안 계시잖아요. 그래서 생일날이나 제삿날에도 아버지가 손수 만든 카레라이스를 먹고 자랐어요. 그래서인지 저한테는 역시 카레라이스가 최고예요.”
하고 씩 웃었다. 그러나 그는 금세 표정을 바꾸어 요코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요코 씨, 당신의 연하장을 받고 나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었어요.”
“알 수 없었다니요, 무엇을요?”
“요코라는 사람을 말이에요.”
“저를요? 왜 그랬을까요?”
“아니, 연하장을 보낼 정도였다면 어째서 제가 샤리에서 보냈던 편지를 되돌려 보냈지요?”
“제가 당신의 편지를요?”
요코의 얼굴에는 분명히 놀라운 빛이 가득 떠올랐다. 커다란 눈을 크게 뜨고 정말 놀랐다는 천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편지는 엄마에게 주었는데.’
요코의 천진스럽게 놀랐던 표정이 약간 흐려졌다.
“그럼 당신은 모르는 일인가요?”
요코가 놀라는 것을 보고 기타하라가 물었다.
“...........”
‘난 모르는 일이라고 말하려면 엄마 얘기를 해야 한다.’
요코는 난처했다. 그러자 기타하라가 말했따.
“어째서 당신의 어머니는 거짓말을 했을까요?”
기타하라는 작년 여름방학의 마지막날을 떠올렸다. 그 날 있었던 일을 기타하라는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나쓰에가 삿포로에 왔다면서 도오루가 기숙사에 있는 기타하라를 데리러 왔다. ‘코크돌’이라는 레스토랑에서 나쓰에는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타하라는 무슨 옷감인지 알 수 없었으나 흰 바탕에 엷은 녹색 무늬의 옷을 입은 나쓰에는 젊고 요염해 보였다.
한 아름이나 되는 선물을 받고 놀라는 기타하라에게 나쓰에는 핸드백에서 흰 봉투를 꺼내 건네 주었다.
“이거 요코가 당신에게 드리라더군요.”
기타하라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면서 받아들자, 나쓰에는 요염하게 웃으면서 그를 쳐다보았다.
“요코를 좋아하세요?”
“네, 좋아합니다.”
그러자 나쓰에는 느닷없이 큰소리로 깔깔거리고 나서 말했다.
“솔직하시군요.”
그때 도오루는 담배를 사러 가 자리에 없었다. 만일 그자리에 도오루가 있었더라면 무척 창비했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을 기타하라는 기억하고 있었다. 흰 봉투를 소중히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먹던 때의 비프스테이크의 맛은 잊을 수 없을 만큼 달았다.
기타하라는 샤리에서 요코에게 보낸 편지의 대한 답장을 몹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그 답장인 줄 알고 받은 봉투 속에서 자기가 보낸 편지를 발견했을 때, 그는 너무나 뜻밖이어서 어안이 벙벙했다. 말할 수 없는 굴욕감 때문에 한동안 도오루의 얼굴을 보기도 괴로웠다.
그런데도 기타하라는 언제나 숲속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요코의 모습을 잊지 못했다.
무엇에 홀린 듯이 열심히 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요코의 얼굴은 첫눈에 기타하라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요코의 얼굴에는 힘이 넘치고 있었다. 무언가에 온 정력을 쏟아 가며 맞서고 있는 긴장된 아름다움이 있었다. 연약한 느낌은 없었다. 아양도 떨지 않았다. 생명 그 자체가 숨쉬고 있는 듯한 아름다움이었다. 책에서 얼굴을 떼고 잠시 생각에 잠기며 무엇엔가 집착하고 있는 듯한 불타는 눈으로 무심코 기타하라를 보았을 때의 눈빛을 기타하라는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래요? 당신이 그 편지를 돌려보낸 게 아니었군요. 아, 이젠 마음이 놓이는군. 나는 틀림없이 요코 씨가 편지를 되돌려 보낸 줄 알고 있었지요. 마음이 놓이니 금세 배가 고파지는군요.”
기타하라는 유쾌하게 웃었다. 카레라이스는 완전히 식어 있었다.
“저도 배가 고파요.”
요코도 웃엇다. 기타하라는 숟가락으로 카레라이스를 가득 떠서 입에 넣었으나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요코 씨가 답장을 주셨더라면 이렇게 오랫동안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정말 그러네요. 미안해요.”
“그래서 오늘 아침에 연하장을 받아 보고 곧장 달려온 것이랍니다.”
“어머, 그렇게 늦게 도착했어요?”
“우편 사정이 좋지 않거든요. 됐어요. 까짓것 이번엔 주저하지 말고 마구 써 보낼게요. 생각해 보니 나도 나빴어요. 무엇 때문에 편지를 되돌려 보냈느냐고 한 마디즘 당신에게 물었어야 했는데. 하지만 편지를 되돌려 받은 충격이 너무 컸던 만큼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으니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어쨌든 제가 나빴어요. 편지를 받고 답장을 보내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전 편지를 쓸 수가 없었어요.”
“할 수 없죠 뭐. 이젠 용서해 드리겠어요.”
기타하라는 밝게 웃었다. 그는 접시를 금세 비웠다.
“아직 양이 안 차죠? 제가 뭘 좀더 사드릴까요?”
“손아랫사람한테서 대접을 받는 건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요.”
“그 말은 참 마음에 드네요. 여자한테서라고 안 하셔서.”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고 빙그레 웃었다. 아무렇지 않은 대화도 그들에겐 즐겁기만 했다.
“뭘 드실래요? 비프스테이크?”
“비프스테이크는 진저리가 나요.”
기타하라는 나쓰에와 같이 맛있게 먹었던 비프스테이크가 생각나서 속이 울렁거렸다.
“어머, 비프스테이크 싫어하세요?”
아무것도 모르는 요코가 놀란 얼굴로 물엇다. 둘은 핫케이크를 시켜놓고 가만히 얼굴을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기타하라 씨.”
“네.”
“샤리에서 보내 주신 편지에 대해 여쭈어 보고 싶은데요. 종이가 찢어지도록 지워 버린 곳이 있었지요?”
요코는 묻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아, 그거요?”
기타하라가 멋쩍은 듯이 웃었다.
“뭐라고 쓰셨던 건지 알고 싶어요.”
“하지만.......요코 씨한테 욕을 먹을 것 같은데.”
“어머, 제가 화낼 말이에요? 무슨 내용인지 더 궁금하네요.”
“이거 곤란한데요. 실은 그 편지에 내가 ‘커다란 존재의 뜻’이라는 말을 썼었지요? 기억하고 있어요?”
“네, 잊지 않고 있어요.”
“그건 말이죠, 내가 쓰지구치와 기숙사의 한 방에 있게 되어 당신을 알게 된 거잖아요? 그걸 내 나름대로 생각해 본 거지요. 그래서 ‘요코 씨를 만난 것을 커다란 존재의 뜻이라고 생각해도 좋을까요?’ 하고 썼던 거지요.”
기타하라의 눈빛은 엄숙하게 느껴질 만큼 진지했다. 요코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그의 시선을 똑바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어째서 .....지워 버렸지요?”
요코는 서슴치 않고 물었다.
“그런 중대한 말을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불쑥 한다는 건 경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분명히 기타하라는 쓰지구치 집에 일주일밖에 묵지 않았다. 그러나 일주일 동안 같은 지붕 밑에 있었다는 것은 청년인 기타하라와 처녀인 요코에게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엇다.
“그 편지는 어떻게 하셨어요? 갖고 계세요?”
“태워 버렸어요. 당신이 되돌려 보낸 줄만 알고......”
“어머, 태워 버리시다니 너무 아까워요.”
요코는 무엇 때문에 나쓰에가 기타하라의 편지를 되돌려 보냈을까 하고 생각하니 두고두고 유감스러웠다. 기타하라 또한 나쓰에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레스토랑에서 비프스테이크를 먹은 후에 쓰지구치는 볼일이 있다면서 어디론가 혼자 가 버렸지.’
그 이후 백화점의 사물함에 잠시 짐을 맡겨 놓고 기타하라와 나쓰에는 삿포로의 거리를 거닐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쓰에를 돌아보곤 했다.
“우리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요?”
나쓰에가 기타하라를 쳐다보면서 속삭이듯 물었다.
“아주머니는 젊으시니까 모자지간으로는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기타하라의 말에 나쓰에는 불만인 것 같았다.
“기타하라 씨, 아주머니가 뭐예요?”
“설마.”
“그럼 사모님이라고 할까요?”
“싫어요. 사모님이라니......저, 나쓰에라고 해요. 이름을 불러 주지 않을래요?”
나쓰에는 분명 자신의 나이와 처지를 잊어버린 듯했다. 그녀는 기타하라의 호의를 완전히 착각했다. 자신의 미모가 아직도 20대 남성의 마음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쓰에 씨라고 부르라구요?”
기타하라는 이상한 얼굴을 했다.
“네, 나도 구니오 씨라고 부르겠어요.”
기타하라는 실쭉해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는 나쓰에에게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을 찾아내고 싶었던 것이다. 말이 없는 기타하라에게 나쓰에가 물었다.
“구니오 씨는 내가 싫으세요?”
“아니요?”
“그럼 좋아하세요?”
나쓰에는 대답하게 물었다.
“좋아하지만 지금 약간 싫어졌어요.”
기타하라는 멈춰 서서 나쓰에를 내려다보았다.
“어머, 왜요?”
나쓰에의 눈동자 속에 이상한 빛이 감돌았다. 그것은 결코 모성적인 빛이 아니었다. 기타하라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여기 들어갈까요?”
나쓰에가 앞장서서 다방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보는 나쓰에의 얼굴은 더욱 요염하고 젊어 보였다. 그러나 나쓰에가 젊게 보이는 것도 기타하라에게는 무의미한 일이었다. 기타하라는 지금 어두운 다방 안에서 보는 나쓰에에게는 어머니다운 면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쓰에가 자기 어머니와 같은 연배였으면 했다. 물빛 옷을 입은 웨이트리스가 물컵을 가지고 왔다. 웨이트리스는 노골적으로 호기심을 나타내며 기타하라와 나쓰에를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주문을 받고 돌아갈 때에도 뒤를 돌아보며 수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요?”
다시 나쓰에가 물었다. 나쓰에의 말에 기타하라는 준엄한 어조로 대꾸했다.
“아주머니는 어떻게 보이면 만족하시겠어요?”
기타하라의 말에 놀란 나쓰에가 얼굴을 들었다.
“전 어머니와 아들 사이로 보였으면 해요. 제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머니예요. 어렸을 때부터 전 어머니가 너무도 그리웠지요.”
나쓰에는 고개를 떨군 채 컵에 입술을 대고 있었다.
“우리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요?”
하고 두 번이나 되풀이해서 물었던 나쓰에를 기타하라는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했다.
‘애인 사이로 보일 거라고 말하면 기뻐할 여자로구나.’
아닌게아니라 나쓰에가 마흔을 넘었다고는 아무도 보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서른 안팎으로 보였다. 그에 비해 스물세 살인 기타하라는 스물일곱이나 스물여덟 살쯤으로 보였으므로 남의 눈에는 애인처럼 비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기타하라는 유부녀가 딴 남자에게 마음을 주는 이야기는 영화나 소설의 경우라도 싫어했다. 그것은 바로 기타하라 자신의 돌아가신 어머니의 신성한 이미지가 침해되는 일 같았기 때문이다.
“아주머니 실례하겠어요. 요코 씨에게는 편지를 주어 고맙다고 전해 주세요.”
갑자기 기타하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라는 나쓰에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아름답게 보였다.
“무슨 생각하세요?”
요코가 말했다. 어느새 핫케이크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기타하라는 핫케이크에 버터를 바르면서 요코에게 빙그레 웃어 보였다.
요코가 현관문을 열자 도오루가 뛰어나왔다.
“요코, 다쓰코 아줌마한테 간다고 나가더니 안 갔다지?”
도오루는 꾸짖는 듯이 엄하게 말했다.
“어머, 어떻게 알았어, 오빠?”
요코가 명랑하게 물었다.
“아까 다쓰코 아줌마에게 전화를 걸었지. 오늘은 몹시 추우니까 재워 주라고 말이야. 그랬더니 오지 않았다고 하지 않겠어. 거짓말을 하다니 요코답지 않아.”
“미안해. 거짓말을 한 게 아냐.”
요코는 빛나는 듯한 밝은 눈으로 집안으로 들어섰다.
“다녀왔어요. 늦어서 미안해요.”
요코의 목소리를 듣고도 나쓰에는 말없이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얼굴을 들어 돌아보지도 않았다. 요코는 잠시 그런 나쓰에를 보고 있었으나, 밝은 표정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도오루는 요코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다쓰코한테 간다고 속이고 나간 듯한 흔적은 요코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못할 짓을 한 듯한 표정도 아니었다. 오히려 평소의 요코보다 훨씬 명랑해 보였다. 몸 속에 등불이 켜진 것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직 안 오셨어?”
“의사회의 새해 연하모임에 가신댔어.”
도오루는 요코가 밖에서 누구를 만났는지 알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었군.’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요코, 어디 갔었지?”
“알아맞혀 봐.”
“모르니까 묻는 거 아냐?”
“농협 버스 정류장에서 친구를 만나 호텔에서 카레라이스를 얻어먹고.....”
그때의 일이 생각나서 요코는 웃었다.
“그러고는 시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이 추위에?”
“하지만 차에는 난방이 되어 있는 걸.”
도오루는 요코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요코가 만났다는 친구가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코에게 차를 운전하는 남자 친구가 있었을까?’
문득 기타하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기타하라의 아버지는 다키카와에서 비료 회사를 경영하고 있으며 차를 두 대나 갖고 있었다.
‘설마 기타하라가 이 추위에 일부러 아사히가와까지 차를 몰고 왔을 리는 없다. 요코는 기타하라와 편지 왕래도 하지 않는 모양인데.’
요코가 옷을 갈아입으로 가자 나쓰에가 말했다.
“도오루, 너 요코의 일에 너무 참견하지 마라.”
“왜요? ‘다녀왔어요’하고 말해도 ‘이제 오니?’하고 대꾸 한 마디 하지 않은 어머니의 흉내라도 내라는 거예요?”
도오루는 자신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어머, 너 몹시 기분이 언짢구나. 하지만 요코가 숨기는 일을 꼬치꼬치 캐묻기보다는 그냥 모르는 체 하는 게 친절한 거야.”
나쓰에는 도오루에게는 상냥했다. 도오루는 말없이 읽고 있던 <차라투스트라> 책장을 팔락팔락 넘겼다.
“엄마는 요코가 누구를 만났는지 알고 있지.”
도오루는 못 들은 체했다.
“요코도 이제 곧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잖아. 옛날 같으면 시집 갈 나이야.”
나쓰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도오루는 알것 같았다. 그러나 나쓰에의 마음속까지 알 수 없었다. 나쓰에는 민감하게 기타하라와 요코 사이를 간파하고 있었다. 나쓰에는 삿포로에서 기타하라를 만났을 때 기타하라의 가슴속에 요코가 살아 있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요코를 좋아하세요?”
하고 물었을 때,
“네, 좋아합니다.”
하고 솔직히 대답하던 기타하라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다방에서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났다고 하면서 자신을 멸시하는 듯한 표정으로 가버린 기타하라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우리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요?”
하고 말한 나쓰에에게,
“아주머니는 어떻게 보이면 만족하시겠어요?”
하고 말하던 기타하라의 준엄한 어조도 잊을 수 없었다.
나쓰에에게 기타하라는 도오루의 친구가 아니라 이성이었다. 모든 이성이 나쓰에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나쓰에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까닭에 나쓰에는 기타하라에게서 받은 굴욕감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요코와 기타하라가 맺어지는 것은 나쓰에에게는 더욱 큰 굴욕이었다.
“도오루, 요코에게는 엄마가 주의를 줄 거야. 그러니 제발 너는 잠자코 있어.”
“요코의 일에 대해선 아예 입을 열지 말라는 거예요?”
도오루는 문득 요코를 누구의 눈에도 띄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오늘 요코가 만난 사람에 대해 질투를 느끼고 있었다.
기모노로 갈아입은 요코가 거실로 들어왔다.
다쓰코의 집에 간다고 나가서 다른 누군가와 거리를 쏘다닌 요코가 조금도 나쁜 짓을 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 데 나쓰에는 화가 났다.
“요코, 오늘 누구하고 같이 있었니?”
“엄마,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斜陽)> 읽어보셨어요?”
“누구와 같이 지냈느냐고 묻잖아?”
“<사양>에서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른이 된 증거라고 씌어 있었어요. 저도 어른이 된 거예요. 노코멘트예요. 엄마.”
도오루는 요코의 말에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