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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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나탈리아(Natalia)
축일 12월 1일
소아시아 니코메디아의 궁중 관리였던
성 하드리아누스(Hadrianus, 3월 4일)는
일단의 신자 무리들의 인내심과 열렬한 믿음에
감동하여, 비록 자신이 세례를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적으로 선언하였다.
그는 즉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는데,
그의 아내 성녀 나탈리아는 옥중의 남편을
찾아다니며 신앙심을 일깨워 주었다.
그가 사형 언도를 받고 방문객의 면담이 금지되자,
아내는 소년 복장으로 위장하고 관리들을 매수하여
남편의 온갖 고통을 위로하고 신심을 굳게 해
주었다. 그가 죽는 현장에 아내도 참석하여 처절한
죽음을 목격하였다. 한편 성녀 나탈리아는
자신과 강제로 결혼하려는 니코메디아의 어느
궁중 관리의 손아귀를 벗어나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로 피신하여 여생을 지냈다.
성 하드리아누스는 군인들과 푸주한의 수호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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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나훔(Nahum)
축일 12월 1일
엘코시(Elkosh) 출신의 예언자 성 나훔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길은 그가 남긴 조그마한
예언서밖에 없다. 그나마 이 예언서까지 숱한
주석상의 문제점을 던져주고 있다. 그래서
주석가들이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추정은 그가
유대 출신의 예언자라는 사실 뿐이다.
왜냐하면 예언자가 유다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동시에 유다에 구원을 선포하고 외적의 공략이
없으리라는 보장(2,1)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2-8에 있는 시편으로 인해 나훔이
'성전(聖殿) 예언자'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나훔이 성전의 제 의식(儀式)과
활동에 정통한 예언자로서 성전 주변에 머무르며
자기 예언직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나훔서는 주님의 분노를 알리는 알파벳 순서의
'시편 - 예언자의 반성 - 역사적 사건의 회고'라는
도식으로 짜여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배 중,
이 찬미의 노래를 부름으로써 야훼의 지상
통치권을 찬양하였다. 비록 나훔서의 서두에 나오는
이 시편이 예언자 나훔의 생존 당시보다 훨씬
후대에 작시(作詩)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없지 않지만, 아직 확증할 방도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훔이 직접 이 시편을 작시했거나,
아니면 당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노래를
인용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찬양시를 봉독하며 우주를 지배하는 하느님의
권능을 찬미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역사를 주제하는
하느님의 정열과 그분의 선하심과 권능에 대한
신앙을 견고케 할 수가 있었다. 이에 이스라엘
살들은 하느님이 가지 나라만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라를 괴롭히는 이방민족까지 지배한다고
믿고 있었다.
신앙고백과 찬미로 시작하는 이 예언자의 반성은
그가 선포한 메시지를 역사적 현실을 들어
예시하고 있다. 그가 제시한 하느님은 원수를
응징하는 하느님이요 외로운 이들에게 구원을
베푸나 불경한 이들에게는 벌을 내리는 하느님이다.
물론 여기서 의인(義人)이란 이스라엘 백성이고
악인이란 천벌을 받아 마땅한 아시리아인이다.
예언자는 기도문으로 사용된 이 예언서에 풍부한
비유적 표현을 통해 죄악의 도성(都城) 니느웨가
멸망하리라 예고하였다. 아마 이스라엘 사람들도
전례 때 이 기도문을 읽으면서 니느웨의 함락을
목적의 현실처럼 절감하고, 오랜 시일 동안
신앙과 희망을 고취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나훔서의 저자는 의(義)와
불의(不義)에 대해서 정열적으로 작품을 썼다.
나훔서의 메시지는 한 마디로 역사 안에 자신을
계시하는 하느님을 찬양하자는 외침이다.
예언자가 전례나 설교에서 역사의 하느님을 상기시키는
의도는 현재 생황의 의미를 깨닫고 지향해야 할 미래의
목표가 어디 있는지 밝히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정자의 전갈에서 중추를 이루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나 모든 인류의 '절대 미래'는
바로 하느님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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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디오도로(Diodorus)
성 마리아누스(Marianus)
성 디오도루스(또는 디오도로) 신부와
성 마리아누스(Marianus) 부제는 누메리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많은 로마(Rome)의 신자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그들은 카타콤바에서 미사를 드리던 중
갑자기 들이닥친 박해자들이 지하 성당의 입구를
막아버려 순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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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랄프 셔윈(Ralph Sherwin)
축일 12월 1일
영국 잉글랜드(England) 더비셔(Derbyshire)의
로드슬레이 출신인 성 랄프 셔윈은 옥스퍼드에서
수학하여 석사 학위를 받았고, 1575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프랑스 두에(Douai)로 가서 사제 수업을
받았다. 그는 1577년에 사제가 된 후에도
로마(Rome)에서 연구를 계속하다가 1580년에
잉글랜드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1580년 8월 1일에 런던에 당도하였으나,
그해 11월에 체포되어 런던탑에 투옥되었다.
1581년 12월 1일, 에드문두스 캠피온
(Edmundus Campion)과 알렉산데르 브리안트와 함께
성 랄프는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Wales)의 40명의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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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루키우스(Lucius),
성 로가투스(Rogatus)
성 카시아누스(Cassianus)
성녀 칸디다(Candida)
이탈리아 로마(Rome)의 순교자인
성 루키우스(Lucius), 성 로가투스(또는 로가토),
성 카시아누스(Cassianus) 그리고
성녀 칸디다(Candida)에 대해 알려진 다른 내용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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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리카르도 랭리(Richard Langley)
축일 12월 1일
리카르두스(Richardus, 또는 리카르도) 랭리는
우즈토르프의 신사로 알려진 분인데, 그의 저택에서
사제들을 보호했다는 죄목으로 요크(York)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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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나니야(Ananias)
축일 12월 1일
성 아나니야(또는 아나니아)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페르시아의 아르벨라 또는
아시리아(Assyria)의 에르벨(Erbel)에서
순교한 평신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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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제리코(Agericus)
축일 12월 1일
성 아제리쿠스(또는 아제리코)는 프랑스 베르됭의
하르빌 태생으로 그곳의 성 베드로(Petrus)와
바오로(Paulus) 성당의 성직자로 활약하던 중,
33세 때에 성 데시데리우스(Desiderius)를 계승하여
주교가 되었다. 그는 이곳을 둘러본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1월 17일)와
성 베난티우스 포르투나투스
(Venantius Fortunatus, 12월 14일)로부터
탁월한 주교라는 격찬을 받았다. 그는 또 국왕
시제베르트 1세와 그의 아들 칠데베르트를 개종시켰고,
그들의 도움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세운 성 안드레아(Andreas)와
성 마르티누스(Martinus) 성당에 안장되어 있다.
그는 에어리(Airy)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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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사노(Ansanus)
축일 12월 1일
로마(Rome) 태생인 성 안사누스(또는 안사노)는
시에나의 사도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12세 때에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나 아버지로부터
신앙을 포기하라는 강요와 심지어 당국에 고발까지
하는 박해를 피해 로마를 벗어나 토스카나(Toscana)로
가는 길에 타오르는 열정을 이기지 못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특히 그는 시에나에서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기 때문에 ‘세례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다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체포되어 투옥된 성 안사누스는 모진 고문을
받은 후 참수되어 머리는 성곽 밖으로 내버려졌다고
전해 온다. 1170년에 그의 유해가 대성당에 모셔졌고
때때로 기적이 일어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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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토니오 본파디니(Anthony Bonfadini)
축일 12월 1일
이탈리아 페라라(Ferrara)의 좋은 가문 출신인
안토니우스 본파디니(Antonius Bonfadini, 또는
안토니오)는 31세 때에 고향 마을에 있던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즉시
뛰어난 설교자이자 교사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그는 성지로 가는 프란치스코회 선교단의 일원으로
활약하다가 연만한 나이에 선종하여
로마냐(Romagna)의 코티뇰라(Cotignola)에 묻혔다.
그에 대한 공경은 1901년에 승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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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알렉산데르 브라이언트(Alexander Bryant)
축일 12월 1일
영국 잉글랜드(England) 서머싯(Somerset)에서
태어난 성 알렉산데르 브라이언트는 옥스퍼드에서
공부하다가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그는 자유롭게 공부하기 위하여 프랑스의
두에(Douai)로 갔으며, 1578년에 사제로 서품되고
그 다음 해에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그는 서머싯에서
맹활약을 하다가 1581년에 런던으로 갔으며,
그곳의 로버트 펄슨 신부 집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여기서 영국 국교도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았으며,
로마 교회에 반대하는 선언을 하라는 위협에도
끝까지 견디었다.
마침내 그는 유죄 판결을 받고, 성 에드문두스 캠피언
(Edmundus Campion)과 랄프 셔윈(Ralph Sherwin)과 함께
타이번(Tyburn)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Wales)의 40명의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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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에드문도 캠피언(Edmund Campion)
축일 12월 1일
런던의 한 서적상의 아들로 태어난 성 에드문두스
캠피언(Edmundus Campion, 또는 에드문도)는
가톨릭 신자로 성장하여, 불과 15세의 나이에
장학금을 받고 옥스퍼드 세인트 존스 대학을 다녔다.
그의 명석한 두뇌는 그 당시의 석학이던 레스터
(Leicester)의 얼(Earl), 로버트 세실(Robert Cecil),
심지어는 엘리자베스(Elizabeth) 여왕까지 놀라게
할 정도였다.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영국 교회의
으뜸으로 인정하는 수장령에 맹세하고, 1564년에
영국 교회의 부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증대되는 사실에 의혹을 품고,
1569년에 아일랜드로 건너가서 공부한 후에
자신의 오류를 깨닫고 가톨릭으로 되돌아 왔다.
교황 비오 5세(Pius V)가 엘리자베스 여왕을
단죄함으로써 영국 내의 가톨릭에 대한 박해가
시작될 때, 그는 프랑스의 두에(Douai)로 가서
신학을 공부하였고, 예수회원이 되어
보헤미아(Bohemia)의 브르노(Brno)로 갔다.
그는 프라하(Praha)에서 대학 강단에 섰으며,
1578년에는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와 로버트 퍼슨(Robert Persons) 신부가
영국 선교사로 가는 첫 번째 예수회원이 되어
1580년 영국으로 떠났다.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그의 활동, 옥스퍼드의 대학 성당에서 행한 그의 연설
‘데쳄 라시오네스’(Decem Rationes), 그리고
유명한 브라그(Brag)의 간행은 그로 하여금
영국사에 한 획을 긋게 하였다. 그는 옥스퍼드 근교
리포드(Lyford)에서 체포되어 런던탑에 투옥되었고,
자신의 변호를 거부한 채 심한 고문을 받다가
타이번(Tyburn)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그는 진정한 사제였으며, 1970년 10월 25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England)와 웨일스(Wales)의 40명의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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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에바시오(Evasius)
축일 12월 1일
성 에바시우스(또는 에바시오)는
이탈리아 피에몬테(Piemonte) 지방 아스티의
초대주교이다. 그는 아리우스파(Arianism)에 의해
주교좌에서 쫓겨나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
치하의 카살레몬페라토(Casale Monferrato)에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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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엘리지오(Eligius)
축일 12월 1일
엘로이(Eloi)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성 엘리기우스
(또는 엘리지오)는 프랑스계 로마인의 아들로서
프랑스의 리모주(Limoges) 근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에우케리우스(Eucherius)는
금속 세공인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 유명한
금 세공인인 압보(Abbo)에게 아들을 보내어
공부하도록 안배하였다. 압보는 리모주의 조폐국
책임자였다. 그가 도제 수업을 마친 뒤에는
궁중 재무관 봅보(Bobbo) 수하에서 일을 하다가
국왕 클로테르 1세의 조폐국 책임자가 되었다.
성 엘리기우스는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서
명성을 떨치는 한편 국왕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성 엘리기우스의 신심과 끊임없는 설득에 의하여
국왕은 가난한 이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며,
수많은 노예들의 보석금을 대납하였고 또
여러 교회를 세웠다. 또 632년에 그는 솔리냑
(Solignac)에 수도원을 세웠고, 클로테르의 아들
다고베르트 1세(Dagobert I)의 도움으로
파리(Paris)에 수도원까지 세우는 등 참으로
놀라운 일을 성취하였다. 그래서 국왕은 그를
자신의 주요 고문으로 삼았다.
또 엘리기우스는 브르타뉴(Bretagne)로 가는
외교사절이 되어 활약한 결과 브르타뉴 국왕을
설득하여 프랑크 왕의 권위를 인정하게끔 하는
큰 공을 세웠다. 또 그는 640년에 서품되어
누아용의 주교가 되었다가 투르네(Tournai)의
주교로도 활약하였다. 그는 벨기에 플랑드르(Flandre)
지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중에 안트베르펜
(Antwerpen) 지역에서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그는 금속 세공인, 금 세공인의 수호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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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올림피아데(Olympiades)
축일 12월 1일
성 올림피아데는 로마의 집정관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에 신앙을 지키다가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 지방의
아멜리아(Amelia)에서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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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John) 베르첼리
축일 12월 1일
요한(Joannes)은 40세 때까지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탈리아 베르첼리에서 도미니코회의 원장으로
재직하면서부터 그의 탁월한 능력이 돋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여러 직책을 거쳐 1264년에 선교회의 총장으로
선출되어 19년 동안 눈부신 활동을 하였다.
그는 자신의 편지나 공문서에서 ‘가난한 작은 사람’으로
자신을 묘사하고 수도자들을 항상 동료로 부를 만큼
겸손하였다. 리옹 공의회(Council of Lyon)에서
그는 히에로니무스 디 아스콜리(Hieronymus di Ascoli)를
만났는데, 그는 프란치스코회의 총장을 역임했던
그 당시의 고위 성직자였다.
또한 그는 예수 성명에 대한 뛰어난 신심을 전파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
(Gregorius X)는 그를 지원하여 이 신심의 보급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그는 모든 도미니코회 성당에는
예수 성명 제대를 꾸미도록 하였고, 성 토마스 데 아퀴노
(Thomas de Aquino)의 학식을 반박하는 사람들을
무마시키기 위하여 자기 회원들을 영국으로 파견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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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베체(John Beche)
축일 12월 1일
요한 베체(Joannes Beche)는 토마스 마샬로 알려진
인물과 같은 사람이다. 그의 출생지와 부모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1515년에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몇 년 뒤에 체스터(Chester)의
웨르부르그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성 토마스 모어(Thomas More)와
성 요한 피셔(John Fisher)의 친구로서 헨리 8세의
정책에 반대하였다. 그는 1539년 12월 1일에
콜체스터(Colchester)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1895년 교황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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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우르시치노(Ursicinus)
축일 12월 1일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 브레시아의
주교인 성 우르시키누스(또는 우르시치노)는
347년 사르디카(Sardica)공의회에 참석하였으며
아리우스파(Arianism) 이단의 반대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유해는 지금도 브레시아에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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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카스트리시아노(Castritian)
축일 12월 1일
성 카스트리티아누스(Castritianus, 또는 카스트리시아노)는
성 칼리메리우스(Calimerius, 7월 31일) 주교의 전임자로서
42년간 이탈리아의 밀라노 교구를 돌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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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투드발(Tudwal)
축일 12월 1일
성 투드발은 웨일스(Wales) 지방에서 온 브리턴인
(Britons)으로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Bretagne) 지방으로 건너갔다.
그곳의 둠노니아(Dumnonia) 왕인 데록이 그의
사촌이었던 때문이다. 그는 레옹(Leon)의 파뷔에
정착하여 수도원을 세웠고, 그 후 파리(Paris)로 가서
트레귀에의 초대주교가 된 후 트레귀에 수도원에서
여생을 지냈다. 그리고 그가 레오(Leo)라는 이름의
교황이었다는 말은 전설이지 사실은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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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로쿨로(Proculus)
축일 12월 1일
이탈리아의 나르니 또는 테르니(Terni)의 주교인
성 프로쿨루스(또는 프로쿨로)는 동고트의
왕 토틸라(Totila)의 명령에 의해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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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후고 파링돈(Hugh Faringdon)
축일 : 12월 1일
잉글랜드의 베르크셔 출신인 그의 본명은 쿡이며,
리딩의 수도자가 되었다가, 1520년에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수도원의 규칙을 일신하고,
교리를 잘 가르쳤으므로 매우 유명해졌는데,
헨리 8세도 그를 방문하고는 "나의 원장님"으로 불렀다.
그러나 크롬웰의 간계에 의하여 그가 법정에
소환되었다가 풀려난 적이 있다. 그러나 1539년에
그의 수도원이 포위되었고, 그는 런던 탑에 갇혔다.
이 모든 일은 헨리 8세의 수장령에 관한 죄인으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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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샤를르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
축일 : 12월 1일
'사막의 성자'라 불리는
예수의 샤를 드 푸코(1858~1916)가 2005년11월13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복자품에 올랐다.
프랑스 출생의 푸코는 27살에 회심한 뒤 가난하고
겸손된 예수의 나자렛 생활을 실천하기 위해
봉쇄수도원에 입회하고, 그것도 부족해 나자렛과
사하라 사막에 들어가 은수자적 삶을 산 영성가다.
그의 영성을 따르는 한국 푸코 영성가족으로는
예수의 작은자매들의 우애회ㆍ예수의 작은형제회ㆍ
푸코 재속우애회ㆍ까리따스 사제회ㆍ
까리따스 우애회가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이날 시복식 직후 연설에서
"푸코는 나자렛 은둔생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겸손을 발견했다"며 "
특히 (이슬람 교도들이 있는) 사하라 사막에서의
삶은 우리를 보편적 형제애에 대한 묵상으로
이끈다"고 말했다.
부모를 일찍 여읜 푸코는 젊은 시절을 쾌락과
무질서 속에서 보냈다.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 신분으로 북아프리카
반란군 진압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모로코 탐험 중 이슬람 신자들의 깊은 신앙에서
하느님 현존을 본 후 그리스도교 신앙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은 사건은 나자렛
성지순례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자렛이란 작은 마을에서 가난하고
비천한 목수로 숨어 사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자
그의 마음에서 특별한 성소의 싹이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푸코는 그때 "비천과 무명 속에서 가난한 장인으로
사셨던 우리 주님이 다녔던 나자렛 거리를 걸으며
나 자신이 예감하고 상상했던 삶을 살고 싶은
갈증에 불타고 있다"(1896.6.24)고 고백했다.
그는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입회했으나 더 고독하고
가난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나자렛 열정에 몸살을 앓았다.
수도원을 떠나 클라라수도원에서 3년간 허드렛일을 한
그는 1901년 사제품을 받은 뒤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결국 사하라 타만라셋에 정착해 유목민들의 친구이자
형제가 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1916년 한 원주민이 쏜 총에 맞아 눈을 감았다.
그가 남긴 '영적 수기'는 현대인의 심금을 울리고 있으며
"금세기에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하느님 사람"이란 칭송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는 예수처럼 세상 한가운데서 가난한 사람들과
단순하게 살고 싶어했다.
그래서 수도복도 벗어 던졌다.
또 초대교회처럼 작고 단순한 공동체를 원했다.
세속에서 살되 세속에 물들지 말고, 활동을 하되
관상적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하느님 뜻에
단순하게 자신을 내맡기라는 가르침을 삶을 통해 전해줬다.
예수의 작은자매들의 우애회와 예수의 작은형제회
회원들은 이같은 영성을 따라 평복 차림으로
가난한 이들과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한편 한국 푸코 영성가족은 13일 성골롬반선교센터에서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 주례로 시복기념미사를
봉헌하고 조촐한 축하잔치를 열었다. (평화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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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벤띠보글리아(bentivoglia)
축일 : 12월 1일
마르카의 산 세베리오 태생인 성 벤띠보글리아는
창설자 당시에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하였다.
그의 생애를 알려주는 자료는 희박하지만,
그의 표양에 감탄한 온가족과 친척들이 그를 훌륭한
수도자로 인정하였다고 한다. 그는 초기 프란치스칸들
중에서도 청빈과 단순덕에서 뛰어난 인물이다.
그당시 산 세베리노 본당신부도 숲속에서 기도하는
성 벤띠보글리아가 탈혼에 빠졌다가 오랜 시간동안
공중에 떠있음을 목격했다고 증언하였다.
이외에도 "성 프란치스꼬의 잔꽃송이"에는 이 성인에
대한 일화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고향 마을에서
성탄절을 기하여 운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