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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사랑
누가복음 7:36~50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식사 초대를 받아 그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는 중에 그 동네에 품행이 좋지 않기로 소문난 한 여인이 들어와서 예수님의 발 곁에 울면서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그녀의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은 일에 대하여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그 집 주인인 바리새인은 죄인인 여인을 내치지 않고 그 여인의 행동을 가만히 놔두는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속으로 예수님을 판단하고 정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집주인 바리새인의 마음을 아시고 가르쳐주기 위하여 빚진 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41절 이하에 보면 이르기를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보듯이 예수님은 죄를 빚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죄를 빚으로 비유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6장 12절 말씀을 보면, 우리 말 성경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라고 되어 있지만, 원문 그대로 보면,
“우리의 빚을 탕감하여 주소서. 마치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탕감해준 것처럼 하소서”
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18장 21절 이하에 보면 사도 베드로가 형제가 자기에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기를 원하시냐고 물었을 때에 주님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고 대답하시면서 임금에게 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임금이 그 만 달란트 빚진 종에게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빚을 갚으라고 했을 때 그 종이 불쌍히 여겨 전부 탕감해주었는데, 그 종이 왕궁 밖으로 나가는 길에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멱살을 붙잡고 빚을 갚으라고 추궁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참아달라고, 꼭 갚아주겠다고 대답하였는데, 그 사람은 조금도 기회를 주지 않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집어 넣는 악을 행하였습니다. 결국 그가 행한 일이 임금에게 알려져서 왕의 큰 진노를 사서 다 탕감받았던 그의 엄청난 본래 빚 만 달란트를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집어넣으라는 왕의 명령을 받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범한 죄를 탕감하여 용서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죄도 사함받지 못한다고 비유로써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도 사람의 죄를 빚으로 비유하여 말씀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의 죄는 경제적인 부채 빚과 매우 유사한 성격이 있습니다.
먼저 죄를 범하면 죄에게 완전히 잡혀 버립니다. 요한복음 8:34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르기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신분이 자유인이요 세상적으로는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는 재산과 권세와 환경을 가졌다 해도 그가 죄를 범하게 되면 이제부터 죄가 그 사람의 운명에 갑질하는 자가 됩니다. 죄가 그 사람의 마음을 유린하고 짓밟고 그 사람의 마음에 고통을 줍니다. 이것은 마치 빚을 지고 갚지 못하는 사람은 채권자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폭행을 당하고 가족들이 위협을 당하고 직장에까지 쫓아오고 집안의 물건들을 차압 조치를 당하는 등 온갖 악행을 당하는 처참한 상황과 같습니다. 빚은 그 사람의 삶 전체에 엄청난 파괴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죄도 그 범죄한 사람의 마음의 평화를 빼앗아갑니다. 행복과 기쁨은 사라지고 얼굴에 그늘이 지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당할 것 같은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자기의 죄가 언젠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그의 미래를 압도합니다. 그리하여 죄를 범한 사람의 영혼과 삶은 그 자신과 가족과 친척들, 이웃들에게까지 죄의 강력한 지배력에 영향을 받아 그와 그 가족과 동료와 이웃 공동체까지 황폐화시키고 맙니다.
또한 죄는 범죄한 자의 삶을 끝까지 추적하여 그 죄 값을 물게 합니다. 세상에서 빚을 지면 빚쟁이는 지독합니다. 빚진 자를 절대로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도망친다 해도 나라의 구석구석까지 추적합니다.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계속하여 연락을 해대며 조폭까지 동원하여 쫓아다닙니다.
민수기 32:23 말씀에 이르기를
“너희가 만일 그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니 너희 죄가 반드시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
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죄를 한번 범한 자는 죄가 그 사람을 끝까지 물고 늘어집니다. 죄 값을 다 치를 때까지 그 범죄한 자를 끝까지 찾아내어 죄 값을 다 물어줄 때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죄를 범한 다음에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고 방심할 수 없습니다.
다윗이 그 말년에 온 나라에 삼년 기근이 생겼을 때에 하나님께 그 기근의 이유를 물었더니 그의 전임자 사울 왕이 기브아 백성들을 까닭없이 학대하며 죽인 일 때문에 생겼다고 하나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다윗 왕이 기브아 사람들을 불러 어떻게 속죄하여야 기브아 사람들이 과거 당한 사울의 학대의 상처를 인한 분노와 미움을 버리고 용서하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복을 빌어주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사울 왕 후손들 중에서 일곱 명을 자기에게 붙여주시면 그들을 여호와 앞에서 목 메어 달겠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다윗은 그 일을 허락하였으니 그 결과로 사울의 첩 리스바의 두 아들과 큰 딸 메랍의 다섯 아들 곧 사울 왕의 아들 둘과 외손자 다섯 명이 기브아에서 목매달려 죽고 말았습니다. 사울 왕이 과거 여호수아 장군 때의 맹세를 무시하고 기브아 사람들을 함부로 학대하고 죽인 죄악은 적어도 삼십년 길게는 오십 년 뒤에 그의 자손들의 피로써 죄값이 지불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반드시 그 죄를 범한 사람을 찾아내며 시간이 아무리 오래 되었다 해도 이 땅에서도 반드시 지불하게 되고 내세에서도 반드시 값을 지불하게 만드는 끈질긴 악입니다.
그러면 죄의 값은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가요?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빚을 지면 그 빚을 갚기 위하여 논과 밭과 기업을 팔아야 했습니다. 심지어 자녀들을 종으로 팔아야 했습니다. 본인 자신이 종으로 팔려서라도 빚을 갚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영원히 빚에 시달리지 아니하도록 하나님 백성들에게는 은혜의 방편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안식년 제도와 희년 제도를 두셨으니, 빚 때문에 종으로 자신을 팔아넘겼다가도 안식년이 되면 그 종 되었던 집에서 풀려나와 자유인의 신분을 회복할 수 있게 보장하셨습니다. 또한 팔아넘겼던 아들 딸도 되찾게 해주셨습니다. 또한 논과 밭과 집을 다시 되찾을 수 있도록 보장해주셨습니다. 또한 50년마다 희년이라는 해가 도래하면 해방의 나팔이 울려 퍼지게 되고 이처럼 종이 되었던 자들이 다 해방되고 돌아오고 자기 기업의 논과 밭의 소유권을 되찾을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해주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에도 세상 법질서에서도 이러한 은혜의 제도가 시행됩니다. 세상 빚이 너무 무겁고 갚을 길이 없을 때에는 파산 절차를 밟거나 개인 회생 절차라는 것이 있어서 빚의 무거운 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도록 나라가 보장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빚 청산 절차와 같은 과정에서 회생되지 못하고 빚을 지는 과정에서 불량한 횡령의 죄를 범한 자들은 결국 신용 불량자가 되고 더 이상 자유로운 경제 주체가 되지 못하고 감옥에 가고 소송을 당하여 모든 경제 활동에서 제한을 당하고 강제적인 채무이행 조치를 당하게 되곤 합니다.
그러나 죄의 값은 한없이 크고 무거워서 인간의 어떤 수단으로도 갚을 길이 없습니다. 많은 재물로도 갚을 수 없고, 선행으로도 갚을 수 없습니다. 금식으로도 갚을 수 없고 종교적인 덕을 많이 쌓는다고 해도 불가능합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죄를 청산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죄는 사람으로서는 갚을 길이 없는 크고 무거운 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의 죄의 빚을 대신 청산해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예외없이 다 각기 자기 죄 값도 청산할 수 없는 중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4편 2절 이하에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고 하신 대로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한 사람도 인간 자신이 죄가 없는 자가 없고 스스로 죄를 씻을 자도 없습니다. 인간은 죄가 그 내면 깊은 곳까지 다 침투하여 전 존재가 죄 덩어리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레미야 17:9,10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시기를,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이를 능히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인간 자신의 자체적인 변화 가능성, 곧 인간 스스로 선하게 변화될 가능성에 대하여 단정적으로 부정적인 선언을 내리셨습니다. 예레미야 13:23 말씀에 이르기를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은 죄를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죄 값을 스스로 지불할 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죄와 죄가 몰고 오는 온갖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와 영원한 형벌을 피할 아무런 힘이 없는 불쌍힌 존재입니다. 아무도 죄 앞에서 감히 나는 죄를 스스로 이겨내고 그 죄의 무서운 저주와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자랑할 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의롭고 바르고 선하다고 자부하는 착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신의 모든 삶은 양심상 떳떳하며 자기가 죽어서도 천국에 들어갈 자신이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도토리 키재기를 하듯이 죄와 허물로 죽은 주변의 죄인들을 비교해서 더 나쁘지 않다 할 뿐입니다. 이는 감옥 안에 있는 죄수들이 서로를 비교하면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행위와 비슷합니다. 남을 속이거나 주먹다짐을 하거나 뇌물을 받았거나 남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마약을 한 사람들이 감옥 안에 있는 또 다른 강력 범죄자들 곧 강도짓 한 사람, 살인한 사람, 강간한 사람들을 향하여 나쁜 놈들이라고 비난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들 죄인이요 다들 스스로 그 죄 값을 갚을 수 없는 채무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의 지극히 거룩한 기준에 의하면 모든 사람들은 다 흉악합니다. 다 더럽습니다. 욥기 15:14~16 말씀에 이르기를
“사람이 어찌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겠느냐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가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하물며 악을 저지르기를 물 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을 용납하시겠느냐”
고 하였습니다. 욥기 25:4~6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
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인간, 곧 철학자, 종교가, 사회사업가, 법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착한 모든 사람들도 자기 죄 값으로 죽을 자일뿐이지, 결코 다른 사람의 죄를 한 치도 옮길 수 없고 그 사람을 죄의 흉악한 징벌과 심판에서 조금도 구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로부터 구출받고 죄의 무서운 징벌로터 사람을 구출해내는 길은 인간 자신 안에서는 불가능하고 그 구원은 오직 인간 밖에서 와야 합니다. 죄가 전혀 없고 강하고 완전한 자가 우리의 죄를 다 청산해줄 수 있도록 와서 우리를 도와줄 때 가능합니다. 그렇게 사람을 무서운 죄에서 구출해주는 구원자를 모세의 율법에서는 ‘기업 무르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학적 용어로 ‘구속(救贖)한다’라고 말합니다. 이 구속자는 히브리 말로 ‘고엘’인데, 곤경에서 그 친척을 구출하는 자라는 뜻을 가진 자입니다. 대가를 대신 지불해주고 친척의 모든 재산, 논과 밭과 집을 되찾아주는 일을 하는 구속자인 ‘고엘’ 제도에 대하여 맨처음 기록된 율법 규정은 레위기 25장에 나옵니다. 레위기 25장 23절 이하에 이르기를,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라고 하였습니다. 병이 들거나 기근이 들거나 사업에 실패를 해서 가지고 있던 기업들을 다 팔아 치워서 가진 것이 없고 빚만 잔뜩 짊어지고 자식들까지 종으로 팔려갈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 그의 가까운 친척이 그를 위하여 빚을 대신 다 청산해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유력하여 경제적인 능력이 있으며 빚진 친척을 위하여 기꺼이 자기 재산을 내어주어 빚쟁이의 고통으로부터 자기 친척을 구출해내는 그 사람을 일컬어 ‘기업 무르는 자’ 히브리어로 ‘고엘’인 것입니다.
이렇게 극히 가난하여 아무 희망이 없는 가까운 친척을 구한 고엘의 대표적인 사람으로서 성경이 예로 드는 사람이 바로 모압 여인 룻의 남편이 된 보아스입니다. 룻은 모압 땅에 이사온 유다 땅 베들레헴 출신 엘리멜렉의 가문에 시집왔는데 시집 오자마자 시아버지가 죽고 그 남편도 시아주머니도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덩그렇게 홀로 남겨두고 다 떠난 마당에 이 젊은 소녀는 혼자 된 자기 처지를 비관할 겨를도 없이 남편과 두 아들을 떠나 보낸 깊은 상실감에 젖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돌보려고 자기 친정과 고향과 모국 모압을 버리고 시어머니 나오미에 함께 낮선 유다 땅 베들레헴에 돌아와서 시어머니를 봉양하려고 어린 소녀가 들판에 나와 보리 이삭을 줍고 보리를 떨어서 밥을 지어 시어머니를 봉양했습니다. 그 어린 소녀 룻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베들레헴에 경건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보아스라는 사람을 예비하셨으니, 그는 자기 친척 집안 나오미가 모압 땅에서 다 망해서 돌아온 것을 알고 그 며느리가 고국을 떠나 시어머니를 모시고 효도하며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섬기려는 아름다운 마음을 전해듣고 마침 자기 논에 보리 이삭을 주우러 온 룻에게 보리 이삭을 일부러 떨어뜨려 줍게 하라고 종들에게 배려해줍니다. 그 시어머니 나오미는 자기 집을 일으킬 유력한 구속자 고엘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이 보아스인 것을 잘 알고 지혜롭게 룻을 조언하여 보아스로 하여금 나오미 가정의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감당하도록 이끕니다. 보아스는 기꺼이 그 무거운 책임을 감당하고자 자기 재산을 희생하고 나오미 가정의 기업을 다시 찾아 주고 룻과 결혼하였으니, 그 아들 오벳이 곧 다윗 왕의 할아버지입니다.
이처럼 보아스는 훗날 다윗의 가문에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의 고엘로 오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인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은 예외없이 무거운 죄로 인하여 그의 모든 전 존재가 다 파산 상태입니다. 죄로 인하여 저주 아래 처하여 도적질당하고 죽임당하고 처참하게 멸망당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어느 한 사람도 그 죄 값을 스스로 갚아낼 자가 없었습니다. 오직 한 가지 희망은 유력하고 강하고 부유하여 모든 죄의 빚을 다 청산할 자 고엘이 오는 것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완전히 파산당하고 노예가 되고 감옥에 가고 남편과 자식과 모든 재산을 다 빼앗길 위기에 처한 우리 인생들을 위하여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동정녀의 몸에 태어나게 하셔서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가까운 친척 골육인 우리가 죄에게 종이 되어 모든 것을 다 빼앗기며 고통과 좌절과 슬픔에 처한 모습을 보시고 십자가에 올라 자기의 생명을 다 쏟아서 죄 값을 완전히 치르셨으니, 이로써 우리의 죄값이 다 청산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죄로 말미암아 찾아오는 모든 저주를 홀로 그 온 몸으로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전혀 죄를 짓지 아니하신 우리 예수님의 거룩한 의를 그를 믿는 자들에게 선물로 주사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죄인들이 죽어서 필연적으로 맞게 되는 심판과 영벌을 다 담당하셨으니, 이로 인하여 그를 믿는 자들은 심판이 지나가고 영벌 대신에 영생이 주어지고 지옥 대신에 천국이 그들의 기업으로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참으로 우리의 친척 구속자 고엘이 되사 죄인들의 모든 죄와 그 죄 값을 다 청산해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감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주 예수께서 우리 죄의 빚을 청산하기 위하여 치르신 대가가 얼마나 혹독했는가를 잠시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랑하는 가족 중에 한 사람이 큰 빚을 지게 되면 가족의 이름으로 그 사람의 빚을 그냥 둘 수 없어서 힘을 모아서 그 빚을 갚아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가족들이 논을 팔기도 하고 밭을 팔기도 하고 빚을 얻기도 하고 통장을 탈탈 털기도 합니다.
제가 기억하는 것은 제 작은 아버님들이 제가 어렸을 적에 한번씩 시골에 내려오면 형제 중 장남이셨던 아버님이 작은 아버지에게 두툼한 돈 다발을 내놓고 보자기로 여러번 둘둘 싸서 허리에다가 묶기도 하고 다리 양말에다가 쑤셔 넣고 대님으로 또 매기도 하여 서울로 올려보내곤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훗날 들으니 작은 아버지가 노름을 좋아하여 돈을 다 잃어버려서 형편이 어려워져서 내려와 도와주었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렸을 때에 저희 집도 많지 않는 논농사를 지었으니 무슨 돈이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형제이기 때문에 그렇게 두툼한 돈을 싸서 흔연히 보내주셨던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이 기억이 납니다.
그렇습니다. 가족 중에 누군가 큰 빚을 지고 괴로움이 크고 집이 빼앗기고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는 모습을 보면 그냥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 빚을 대신 청산해주는 과정에서 가족들이 겪는 고통과 근심과 대가는 심히크고 무거운 것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한 사람의 빚을 청산하기 위하여 여러 가족들이 지불하는 희생과 헌신과 근심과 고통이 이렇게 클진대, 우리 모든 죄인들의 한없이 크고 무겁고 많은 억겁의 죄악들을 홀로 짊어지고 그것을 홀로 담당하고 갚으려고 하신 우리의 고엘이신 주님이 홀로 겪으신 그 슬픔과 절망감과 공포가 얼마나 크고 무거웠을까요? 주님께서 체포되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들어가실 때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가실 때에 고민하고 슬퍼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부탁하시고 조금 더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실 때에
“내 어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대속의 고난을 당하고자 하실 그 때에 주님은 인류의 붉고 검고 흉악한 모든 죄와 그 저주와 진노와 사망과 영원한 지옥 형벌의 잔을 마셔야만 죄인들이 살아날 수 있음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그 고통과 두려움과 슬픔과 절망이 너무 크기에 그 잔이 너무 흉악하고 독하기에 그렇게 괴로워하며 근심하며 온 몸을 땅 바닥에 대고 통곡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실 때에 겪으신 그 고난의 무게가 이처럼 무겁고 이처럼 고통스럽고 이처럼 두려운 일이었다는 점을 기억합시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 하나로 그 모든 고통을 몸부림치면서 기꺼이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의 모든 생명까지 내놓으시면서 우리의 죄의 속박과 무거운 죄 짐에서 우리를 건져내신 후에 우리의 고엘이신 주님이 맛보신 기쁨은 그 만큼 크고 놀라운 것이었기도 합니다. 이사야 53:10 이하의 예언을 보면,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자기 택한 자들을 살리신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의 행복과 기쁨에 대하여 이렇게 미리 예언해놓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이사야 53:10~12)
그렇습니다. 그만큼 고통을 겪고 슬픔과 절망을 통과하면서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줌으로써 택한 백성들을 죄의 결박과 저주와 사망과 영벌에서 구출해내어 자유롭게 한 구주는 고엘로서의 사명을 감당한 기쁨과 행복과 만족이 그 영혼에 충만하였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6:21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이르신 말씀 중에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구주께서 우리를 말할 수 없는 근심과 고통 속에서 우리를 해산하였으나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고 죄의 결박에서 놓여나 구원의 자유와 행복과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을 보고서 자기가 겪은 그 고통을 전혀 기억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말씀에서 주님은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누가복음 15:7)
고 하셨습니다. 양을 잃어버린 목자가 그 잃은 양을 찾으러 거칠고 위험한 골짜기를 온통 헤매며 고생하였지만 마침내 절벽 아래 떨어진 그 잃은 양을 찾으면 기뻐서 자기 어깨에 매고 돌아와서 자기 동료 목자들을 다 불러 모아서 잃은 양을 찾았노라 기뻐하면서 함께 기뻐하며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온갖 희생과 고생을 다했지만 우리가 주님의 양우리 안에 평안히 돌아와 안전과 평안을 누리게 됨을 인하여 기뻐서 즐거워하며 천사들과 함께 천국에서 잔치를 벌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여 자기 목숨까지 기꺼이 내어주시고 그 무섭고 힘들고 슬프고 외로운 십자가의 고통을 홀로 끝까지 감당하신 우리 고엘이신 주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을 기억하면서 용기와 담력을 가집시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그처럼 큰 희생을 치러주겠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온갖 고통을 다 치르시고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시기까지 한 사랑하는 주님이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는 나의 구속자로 끝까지 내 편으로 남아주실 것이니, 우리 모두 강하고 담대합시다. 세상 모든 사람이 우리를 외면하고 우리를 버릴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붙들고 결코 홀로 두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저 지옥불이라도 기꺼이 뛰어들어 우리를 건져내시는 구속자가 여러분에게 있음을 믿고 힘과 용기를 냅시다.
주님은 이 거칠고 위험하고 험한 세상 길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실패하고 좌절하고 빚을 지고 삶의 무거운 무게 아래 휘청일 때에 홀로 두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돕는 고엘이라는 점을 기억합시다. 그는 우리 인생이 다 파산되어 희망이 없다고 모든 사람이 버릴지라도 끝까지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우리 빚을 대신 지시고 모든 환난에서 우리를 끝내 건져주실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복음 16:33)
우리는 이 주님의 약속을 믿고 담대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시고자 그처럼 고엘의 희생과 헌신과 사랑을 베풀었으니, 우리도 세상에 찢기고 힘들고 상처 입고 죄에게 종이 되어 끌려다니는 이들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주님과 함께 작은 고엘의 사명을 감당합시다. 누군가를 위하여 사랑으로 기도하며 내 것을 나누며 돕고 절망한 자의 곁에 함께 머물러 주는 것이 힘이 들고 때로는 두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랑하는 누군가의 작은 고엘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고난 당하는 자의 자리에 함께 있는 자에게는 주님께서 그 짐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힘을 주시고 재원을 더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주님께서 갚아주시고 열배, 삼십배, 백배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또한 완전한 고엘이신 우리 주님을 세상에 소개해주어야 하겠습니다. 인생이 지치고 빚지고 죄의 무거운 짐에 시달릴 때에 우리의 빚을 청산해주시는 구속자 고엘이 계시다는 것처럼 복된 소식이 없습니다. 아직도 완전한 고엘이 되신 우리 구주 예수님이 계심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외롭게 홀로 고통을 겪다가 절망과 슬픔 속에 좌절하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였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는 우리의 고엘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일에 힘을 쏟읍시다. 그리하여 세상의 많은 빚에 시달리고 죄의 빚에 시달려서 그로 인하여 지치고 두렵고 불안하고 슬프고 무력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해주는 고엘이신 구주 예수님의 증인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