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김대지(1891~1942.10.26) 선생은 조국의 자주독립운동이 우선이었던 민족의 지도자이다.
김대지 선생이 그의 고향인 밀양에서 동화학원을 졸업하고 밀양에 청년회관을 건립하여 비밀결사 조직의 터전을 마련한뒤 이곳을 중심으로 항일투쟁단체인 일합사(一合社)를 조직하여 밀양지역의 청년들과 함께 독립운동의 전개방법을 모색하였다.
일합사는 1910년 나라를 빼앗긴 후 망국의 비애를 통감하고 국권 회복에 청춘을 바치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품은 20세 전후의 밀양 지방 청년들이 조직한 단체였다.
겉으로는 친목 단체이지만 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청춘을 바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방한 항일투쟁 단체이다.
1910년대 후반부터 국내 항일운동의 한계를 깨닫고 중국, 만주 등지를 왕래하며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는데 당시 선생의 활동은 2가지로 귀결된다.
첫째는 군자금의 확보이고 둘째는 대한광복회가 거의 와해되었기에 새로운 비밀결사 조직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도중 1918년 5월경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출옥 후 선생은 만주로 망명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전념하는데 당시는 3.1운동 직전이라 일제의 감시가 절정이었고 선생역시 주요 감시대상이었다.
망명 전 선생은 전 재산을 처분하여 비축한 자금과 일부 친지들의 의연금을 가지고 떠나게 되는데 아직 어린 두 남매, 임신 중인 부인, 그동안 뜻을 함께 했던 동지들과 대화도 못해 본채 야밤에 해외 망명길에 올랐다.
1919년 3월 말. 자주독립운동자 대표의 일원으로 김동삼, 이시영, 조소앙, 이회영 등의 애국지사들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준비를 위해 상해로 건너갔는데 이 무렵 상해에는 각 지역의 자주독립운동가들이 집결하여 그 숫자가 1000여명에 이르렀다.
당시 임시정부에서 선생은 조사원 자격으로 고향인 밀양에 파견되었는데 임시정부는 교통국과 연통제라는 비밀조직망을 활용하여 국내와 비밀연락을 주고받았고 군자금을 지원받는 활동을 해왔다.
주로 이 곳을 통해 임시정부는 군자금을 받았고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밀명을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조사원들은 자신들이 맡은 지방의 재산가들을 조사하여 임시정부에 보고하는 임무를 수행했는데 선생 또한 밀양의 사회 실태를 조사하며 독립자금을 조달하는데 모든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선생의 활동은 모두 비밀리에 이루어졌지만 부유한 재산가들을 직접 만나야했기에 엄청난 위험부담을 갖고있었다.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서 당연히 가족들과의 만남은 더욱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선생은 밀양에서의 실태 조사를 서둘러 종결짓고 1920년 이른 봄에 떠나게 되는데 이것이 선생의 마지막 고향 방문이 되었다.
선생은 단재 신채호 선생과 같이 만주 지방에서 지청천 장군을 만나 그의 동조를 얻는 일을 했는데 장사꾼으로 변장하여 며칠 동안 백두산 일대를 헤맨 끝에 산기슭의 한 귀틀집에서 지청천 장군을 만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자주독립운동 동지였던 김동삼 선생을 통해 서로의 경력과 활동상을 들은 바 있었기 때문에 쉽게 친숙해질 수 있었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이다.
김대지 선생은 지청천 장군에게 옥고를 치른 후 고향 밀양을 중심으로 폭력혁명을 수단으로 하는 비밀결사조직의 결성을 추진했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점을 피력하였다.
그 후 선생은 곽재기. 김동삼 등의 아나키스트 동지들을 만나 비밀결사조직의 창설을 논의하였고 젊은 청년들을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하는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던 도중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거나 재학 중이었던자들이 가담하였고 이들의 가세로 비밀결사조직의 결성은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김대지 선생은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들에게 상해 지역의 실정을 알렸고 무력투쟁의 정당성을 설명하였다.
이 무렵 한 청년이 선생을 찾아왔는데, 그는 바로 역사상 가장높은 현상금이 걸렸던 의열단장 김원봉이었다.
김원봉은 실제로 김대지 선생의 추천으로 의열단 단장이 되었고 김원봉을 키워낸 스승이자 의열투쟁의 멘토가 바로 김대지 선생이었다.
1919년 7월, 김대지 선생은 김원봉을 데리고 상해로 이동하여 폭탄 제조법과 사용법을 배웠는데 향후 독립운동사 특히 무장투쟁사에 큰 획을 그은 의열단의 인원구성, 무기구입, 폭탄 제조등에 대한 절차와 과정, 큰 그림을 직접 보여주고 가르쳐주었다.
김대지 선생은 1920년대에 의열단의 고문으로 의열단이 수차례 전개한 암살ㆍ파괴 운동에 사용된 무기와 폭탄 구입의 일을 전담했다.
이때 선생은 기밀부에 소속되어 의열단의 극비 중요 사항을 결정하는 과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당시 의열단 고문 활동을 하면서 만주지역의 여러독립운동 단체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노력을 하던 도중 김동삼 선생은 밀정의 고발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었고 김좌진 장군은 공산주의자 박상실이 쏜 총에 암살되었다.
이는 정신적인 동지이자 독립운동사의 큰 별들의 죽음이었고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 일들 직후 김대지 선생은 지병인 폐병과 기관지염이 극도로 악화되었고 설상가상으로 가정 형편까지 매우 어려워졌다.
김대지 선생의 마지막은 매우 안타깝게 되었다.
어린시절 잠시 익힌 한의학 기술로 간신히 생계를 이어나가던중 아내와 2명의 자녀를 잃게되는데 상황이 이렇게되자 평생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선생도 많이 지쳐셨다.
가족의 죽음 후 얼마 지나지않아 1942년 10월 26일 그토록 열망했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순국하셨다.
김대지 선생은 국내ㆍ외를 오가며 오직 우리 힘에 의한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일념으로 무장투쟁을 피력하고 의열단의 청사진을 디자인했고 자신의 안위와 가족보다는 조국의 독립을 항상 생각했던 위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