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년(十年)을 경영(經營)하여 초려삼간(草廬三間) 지어내니,
나 한 간 달(月) 한 간에 청풍(淸風) 한 간 맡겨두고,
강산(江山)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 송순 시조 <십년을 경영하여> ―
정남향 우리 집 2층 베란다에서 마을 앞 들판과 강과 산을 바라보면 이 시조가 절로 떠오른다.
《대야 마을 향토지(鄕土誌) Ⅱ: 인문지리》
1987년, 합천호 조성 공사가 시작된다. 호수 상류에 위치한 대야 마을이 수몰지역이라, 대야 마을을 대상으로 수몰 사전에 실시한 여러 대학의 학술조사 과정에서 우리 마을 들판에서 신석기시대의 움집터, 큰돌 무덤, 다수의 토기들(1)이 출토되었다. 이로 보아 이르기는 BC 1만 년 전부터 이 터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셈이다.(2) 이 마을에 관한 최초의 문자 기록(3)에 남아 있기는,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조에 이 마을에 사임사(沙任寺)라는 절이 있었고 마을 뒷산도 그 이름을 따서 사임산(沙任山)이라 불렀다 한다.(4)
만 년간의 유수세월은 건너뛰고 내가 이 마을에 이주한 2004년 언저리부터 어깨 너머로 주워들어 알게 된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이 마을은 원래 동래 정씨 집성촌이었다. 동래 정씨의 거창 입향조(入鄕祖)는 정지운(鄭智耘)[1444~1499]이라 한다.(5) 무려 700년을 한 가문이 이 터전을 누린 셈이다. 윗담, 아랫담 두 부락으로 이뤄진 대야 마을은 원래 현재 마을앞 24호 국도 바로 아래쪽 들판에 위치하였다. 1989년, 합천호 완공으로 호수가 만수가 되면 마을이 물속으로 잠기는 형국이 됨에 따라 이를 피하여 국도 위쪽, 현재의 위치로 옮겨 온다. 수몰지구가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타향으로 떠나갔다. 하지만 지금도 동래 정씨 혈족들이 다수 남아있다. 마을 앞 들판에 주민들 소유의 전과 답이 총 18만 평이었다. 밭이 10만 평, 논이 8만 평. 쌀이 상대적으로 귀하여, 딸 아이가 시집 가기 전 쌀 한 말을 제대로 못먹었다 한다. 대신 밭 작물은 풍성하여 인근 마을로부터 사람들이 찾아와, 이를테면 고구마 줄기 껍질을 벗겨주고 배추를 얻어가거나, 곶감을 가져와서 무를 얻어가는 물물교환이 성행했다 한다. 그리고 마을 앞 풍치가 뛰어나기에 원근에서 관광버스를 대절해 와 해치(=해추=해채: 음식을 가져와 나누며 노는 일)도 하고 헤엄도 쳤다고 한다.
2003년 당시, 거창군의 주거지 환경 개선사업의 일환으로 이름 하여 ‘문화마을’이 수몰을 피해 옮겨온 원주민 마을 바로 위쪽에 조성된다. 상하수도, 전기, 전화시설, 가로등, 영산홍 위주의 조경 사업 포함, 26가구가 들어설 자리가 마련되었다. 2023년 현재, 아래 윗담 포함, 약 30가구에 70여 명이 거주한다. 여느 시골 마을처럼 거주민의 반수가 65세 이상의 고령층이다.
[주민 구성] (無順)
*** 현역 ***
적십자병원 원장 추교운 씨 / 봉사활동에 여념이 없는, 추원장의 처 김미경 씨 / 실내 인테리어 관련 업체 운영 신중완 씨 / 신사장의 각시 정익순 여사 / 미래개발 대표 마기완 씨 / 그의 처 엘리사벳(여진이 엄마) / (주)신창하이테크 대표 유연수 씨 / 석재 관련 종사 이상운 씨 / 그의 처 하옥정 씨 /
한국정책발전연구원 책임연구원 이수일 박사 / 이박사의 배필, 거창 창동초등학교 교감 쌤이자 수채화 화가 서미숙 씨 / 대야마을 이장이자 농업인 신귀자 씨 / 이장님의 서방님, 농업인 정순언 씨 / 국도변 대호주유소 사장님 / 석우마을(돌모리) 외딴 집 박길수 씨 / 『행복한 절』 주지스님 겸 『행복한 마을』 촌장 은산(隱山)스님 / 행복한 마을 사무장 도앙 스님 / 행복한 절에 귀의한 김민철 도반 / 카페 ‘휴(休)’ 임자 정미자 씨 / 운수업계 근무 장연세 씨 / 그의 각시, 요양원 관련 종사 김경숙 씨 / 운수업 종사 이명도 씨 / 사과나무를 1천 600주를 키우시는 사과농장 주인 정순하 씨 / 농장주의 배필 이난현 / 농장주 따님 부부 / 교육업계 종사 차여사님(함안댁) / 그녀의 아들 요식업계 근무 정용호 씨 / 그의 아들 정베니오(5세? 마을 최연소, 유일의 마스코트) / 박식하고 감수성 뛰어난 차성민 아우 / 귀농 지원자 박승우 씨 외 여러분.....
*** 은퇴자 및 전업주부 ***
전직 거창 군수 양동인 씨 / 승강기밸리 소재 업체 근무 정의국 이사님 / 정이사의 곁사람 서승자 님 / 인쇄업계 종사 박노권 큰성님 / 젊은 시절, 서울 중부시장서 자수 가게 하시다 큰성님에게 낚인 형수님(경북 상주댁) / 내가 믿고 따르는 김희강 형님 / 그의 각시 전정숙 여사 / 운수업 종사 차소돌 씨 / 차 형님의 배필 윤여사(여수댁) / 윤여사와 갑장, 거창대학 근무 전력 정윤범 교수 / 기아자동차 근무 전력 정순찬 씨 / 윤씨 아저씨 부인(봉산댁) 마월분 여사 / 안의댁 / 정도석 어른 / 그분 부인 (가양댁) 추정애 여사 / 도석 어른의 친아우 고(故) 정의석 어른(마을 이장으로 봉사를 오래 하셨다.)의 사모님 / 임종두 씨와 그의 곁사람 정진호 부부 / 김봉댁 조정자 여사 외 여러분......
(제가 가진 정보는 이 정도입니다. 카톡 마을 단톡방 회원 명단에 (존칭 생략) 김갑희/김규보/양암댁 아드님/오병권/임종두/정정애/정진호/홍성남/Katie Mommy(누군가와 동일 인물인데 카톡 ID?)/Monparadis/도관(道觀)스님(?) 등등이 눈에 띄는데, 이분들은 잘 알지 못해 죄송합니다. 장차 교분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바랍니다.)
[문화재]
현존하는 대야리 문화 관련 유적 및 건물은 다음과 같다.
o 삼우당(三友堂): 경상남도 문화재 제155호로, 동래 정씨 21세 손 정시수(鄭時修)·정시웅(鄭時雄)·정시승(鄭時昇) 3형제의 학덕을 기려 후손들이 1913년에 세웠다.
o 화수정(花樹亭): 삼우당 앞에 있다. 팽다세연실(烹茶洗硏室)은 특이한 건축 구조를 하고 있으며, 1913년에 세웠다.
o 입암정(立巖亭): 동래 정씨 29세 손 정지선이 노닐던 곳에 아들 정규흥(鄭圭興)이 6각으로 정자를 지어 육모정이라고도 하며, 합천댐으로 인해 이건했다.
o 대아서당(大雅書堂): 동래 정씨 문중에서 1810년에 세웠다. 강신계(講信契)를 모아 후손들이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다. 앞뜰에 「강신계백주년기념비」가 우뚝하다.
o 오가재(五可齋): 1568년에 오가암(五可庵)을 창건해 묘소를 수호하다가 퇴락하여, 1745년에 복원하여 ‘오가재’라 했고, 2004년에 중건했다. 2011년 오가재 오른쪽에 입향조인 사직공파 14세손 정지운을 기려 ‘현신교위 동래 정공 유허비(顯信校尉東萊鄭公遺墟碑)’를 세웠다.
o 구종 형제 유적비(九從兄弟遺蹟碑): 9종반 간에 8문장가가 배출한 일을 후손들이 기리어 1974년에 세웠다.(6)
[기타 공공 시설]
o 청년 농창업 지원센터: 군청이 운영
o 마을회관
[사찰]
o 행복한 절: 디지털거창문화대전―삶의 의미―종교―불교 편 참조
http://www.grandculture.net/geochang/toc/GC06300382?search=F1
현재 절이 자리 잡은 곳은 원래 천도복숭아 농장(소유주: 정판석)이었다. 이후 감나무 농장(소유주: 최찬덕)으로 바뀌었다. 절을 창건한 만각(晩覺)스님(지금 주지 은산스님의 부친)이 그 터를 매입하여 불국토를 이뤄가고 있다. 다.
대웅전, 대웅보전, 은퇴하신 스님들의 보금자리 심검당(尋劍堂), 불교 공동체 거처 ‘휴심정(休心庭)’, 사찰음식점 겸 카페 ‘베지나랑’, ‘카페나랑’, ‘행복한 마을 사무국’을 일괄하여 ‘행복한 마을’이란 이름으로 소담한 '불국토(佛國土)'를 이루고 있다. 다음 달 7월 8일, 【'공(空)의 사원' 조감도 및 비전 발표회】를 예정하고 있다. 일취월장할 듯.
(여담 하나. 한때 이 마을에 점을 치고 굿을 하는 신당(神堂)이 들어서 있었다. 그런데 샤머니즘(Shamanism)이 섬기는 여러 제신(諸神)보다는 부디즘(Buddism) 부처님 한 분의 힘이 더 센 탓인지, 그래서 기가 눌린 탓인지 수년 전 20리쯤 떨어진 국농소 마을로 옮겨 가고, 급기야는 무당 여인(호적 이름: 허성미)이 지병으로 세 자녀를 남겨두고 44세에 귀천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업소 현황]
‘카페 휴(休)’, ‘카페나랑’, ‘베지나랑’, 그리고 조만간 개업 예정인 카페 하나. 작은 마을에 손님을 모시는 영업장이 네 곳이나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 마을의 자연 풍치가 뛰어난 까닭? 길지 명당이라는 까닭?
그리고 지금은 영업을 중단한 '육모정식당'(‘카페 휴(休)’의 전신), 카페 '다사랑', 식당 '감투봉산장'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다.
[대야 마을에 얽힌 전설 하나]
「감토산 어원 추적」 (다음 카페 ‘차연’에 올린 글)중에 전설이 나와 있음.
https://cafe.daum.net/cafe.differance/Jtbc/950?svc=cafeapi
이상.
(2023년 계묘년(癸卯年) 초하(初夏) '참무릇' 정윤범 작성하다.)
=========================================================
(1) 발굴된 토기 다수가 거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풍수지리를 비과학적인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으로 치부하나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론의 차이일 뿐.
(2) [출처] 郡史편집위원회 편집 《居昌郡史》 (거창군: 금창인쇄사, 1997), p. 362, 364, 365.
(3) [출처] 정태준 지음 《거창의 명산》 (거창군: 거창문화원, 1993), p. 219, 220.
(4)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5) [출처] ‘디지털거창문화대전’ 동래 정씨 편
http://geochang.grandculture.net/geochang/toc/GC06300599
[참고] ‘한국향토문화대전’에는 대야리(大也里)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대야 마을은 4개 마을로 이뤄진 대야리의 한 마을)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대야리(大也里)는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의 남쪽에 있다. 대야(大也)·오가(五可)·용동(舂洞)·가천(加川) 등 4개의 자연 마을을 관할하고 있다.
[명칭 유래]
마을 뒤에 대밭이 있어 ‘대바지’라고도 하며 뒷산이 "잇기 야[也]" 자 같아서, 또는 냇가에 대장간이 있어서 "풀무 야(冶)" 자를 써서 ‘대야(大冶)’ 또는 대바지의 "바" 자를 아(雅)로 써서 ‘대아(大雅)’라고도 하였다. 옛날 거창 원님이 대바지 무우 맛에 반하여 마을 뒷산인 사임산을 감투봉[감토산]이라 이름 붙였다는 말이 전해진다. 오가는 다섯 번은 피난할 수 있는 곳이라 ‘오가리’라고도 한다. 한 도사가 나라 안 사람이 사흘 먹을 것이 있다고 하였는데 과연 이곳 금광에서 많은 금이 나왔다고 한다. 용동은 마을 뒷산이 풍수에서의 ‘방아공이’ 설이라 하고, 마을 근처에 방앗간이 있어 ‘방앗재’라고도 한다. 가천은 가천 냇가 산기슭 개천이 골짜기의 가장 안쪽에 있으므로 ‘안개천’ 이라고도 한다.
[형성 및 변천]
본래 거창군 무등곡면 지역으로 대바지 또는 대야라고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가천동과 합천군 봉산면의 가천동 일부를 병합하여 대야리라 하고 남하면에 편입되었다.
용동은 진양 정씨가 마을을 열었다고 전해진다. 가천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추사용(秋史庸)이 영월에서 옮겨 와 마을이 시작되었다 한다.
[자연환경]
대야리는 황강 주변과 황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의 하곡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대야리의 서쪽은 감투산을 뒷산으로 하는 대야 마을이 황강 변에 있고, 중앙은 무릉리에서 지산리로 통하는 고개인 빼재에서 발원한 개천 주변에 오가 마을이 있다. 대야리의 동쪽은 가조면에서 남류하여 황강으로 유입되는 가천천을 따라 가천 마을이 있다. 산지가 많고 농경지가 협소한데, 농경지는 주로 황강 주변과 가천천을 따라 발달되어 있다.
[현황]
2015년 12월 현재 전체 면적은 11.38㎢으로 이 중 대부분이 임야 8.44㎢이다. 논 0.3㎢, 밭 0.37㎢, 과수원 0.07㎢, 대지 0.13㎢ 등의 토지 이용 현황이 나타난다. 합천댐의 건설로 황강 주변의 많은 농경지가 수몰되었다.
2016년 4월 30일 현재 대야리의 인구는 101세대 194명[남자 94명, 여자 100명]이고, 남하면에서 가장 적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농업에 종사하며 주로 벼농사를 하고 있다.
합천댐의 상류 지역인 대야리는 남쪽의 황강 연안을 따라 고령·거창을 연결하는 국도 24호선이 통과하고 있으며, 주요 문화재로는 삼우당[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55호], 입암정(立岩亭), 오가재(五加齋), 대아 서당(大雅書堂) 등과 대야리 선사 시대 주거지 유적이 있다.
[참고] 디지털거창문화대전―삶의 터전―인문지리
http://www.grandculture.net/geochang/toc/GC06300011?search=A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