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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아침입니다. 뭐 특별한 거라도 있나요? 그냥 희망사항입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냥 겨울 날씨, 조금 쌀쌀합니다. 어제의 태양일 것이고 창밖으로 내다보면 평범한 휴일의 아침입니다. 그런데 그런 날들 속에 선을 긋는 것은 우리만의 짓입니다. 만물의 영장이 할 수 있는 독특한 구별입니다.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만들고 싶은 욕망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런 보이는 구분이 보이지 않는 구분을 충동질하는 것이지요. 하기야 그래서 발전해온 것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새로운 시작이라고 명명하고 또 하루를 시작해봅니다. 이 때 누구나 하는 인사부터 하지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일단 공지사항이 있습니다. 몇 달 이어온 ‘쉽게 읽는 요한계시록’이 다음 주로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이후로 설교는 없습니다. 교회사역 은퇴는 진작 했지만 그래도 설교를 몇 년 더 끌고 왔습니다. 이제는 정말 쉬려고 합니다. 혹 어디서 부르면 직접 가서 글이 아니라 말로 해드릴 것입니다. 그동안 읽어주시느라 고생하셨고 감사합니다. 단 영화 이야기는 계속될 것입니다. 아직 두 눈이 멀쩡하니까요. 그것도 재미없다 싶으시면 알려주십시오. 이멜 계정에서 지워드리겠습니다. 그나저나 글로 오가는 일도 그만하고 눈으로 만나고 싶군요. 새해에는 그런 날이 있기를 희망합니다. 건강하십시오. ^&^
2022년 첫날에
쉽게 읽는 요한계시록 22
김종우 목사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계 21장)
세상에서는 나이가 들면서 자라갑니다. 그 반대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자라가는 대로 나이도 먹게 마련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육신은 그렇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은 어떨까요? 자라고 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얼마나 자랐는지 분간이 잘 안 됩니다. 어쩌면 그래서 제멋대로 신앙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교회를 수십 년 다닌 사람이나 겨우 1, 2년 다닌 사람이나 뚜렷한 차이가 무엇인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하기야 차이가 없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에서 혹 나이가 열 살이 되었는데 입에 젖꼭지를 물고 다닌다면 큰일 난 것처럼 난리날 것입니다. 아니 그 부모가 밖에 데리고 나오지도 못할 것입니다. 뭔가 잘못된 것이지요. 정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영적인 나이나 성장은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본인도 크게 괘념치 않습니다. 자라거나 말거나 천국 가는데 지장 없다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경계합니다. 히 5 : 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때가 오래 되었으면, 나이가 들었으면 당연히 젖을 끊고 단단한 식물을 먹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여전히 젖 타령을 하고 있으니 걱정스럽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그럽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 1년, 5년, 10년 아니면 20년 된 성도입니까? 햇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영적인 성장은 신앙 년수와 교회 출석 일수와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알 것입니다. 평생 교회를 다녔어도 성경 66권, 어느 성경이 신약에 있는지 구약에 있는지도 구분 못하는 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성경을 알 턱이 없습니다. 그러고도 예수 천당, 천국 간다고 자신하고 믿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 나라, 천국이 그렇게도 싸구려 나라입니까? 정신 좀 차리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성공하려면 두 가지를 잘 만나야 한답니다. 하나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때입니다. 사람을 잘 만나는 것은 때로는 은혜이고 때로는 자신의 노력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 잘 만나는 것은 은혜입니다. 그러나 친구를 가리는 것은 스스로 할 일이지요. 그런데 때, 시대를 잘 만나는 일도 은혜입니다.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지요. 단지 시대를 분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몫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눅 12 : 54 - 56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붊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한 마디로 시대를 분변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내가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세상에서도 대한민국의 시대에 살면서 조선 시대의 문화로 살면 웃음거리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하나님 백성이라 하는 유대인들, 특히 서기관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백성을 가르치는 목자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먼저 잘 알아야 바르게 전해줄 수 있습니다. 때를 분별해야 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때에 맞는 언약(약속,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아담 때에 지켜야 할 말씀과 노아 때에 지켜야 할 말씀, 그리고 모세 때 지켜야 할 말씀이 다릅니다. 모세 때를 살고 있으면서 노아에게 말씀하신 방주를 지으며 신앙하겠습니까? 말도 안 되지요. 유대인들은 자기네 때가 어느 때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약속하신 메시야가 자기네 눈앞에 와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우치려 하신 말씀입니다. 눅 16 :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이제 복음의 시대가 열렸다는 사실을 저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알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야 바른 신앙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뿐만 아니라 백성을 그렇게 인도하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시대를 가르는 기준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3 가지가 바뀐다고 했습니다. 시대와 백성 그리고 법(말씀)입니다. 초림 때를 봅니다. 그 전은 구약시대이며 아브라함의 후손 즉 혈통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입니다. 그 때의 법은 바로 구약성경(율법)입니다. 예수님 이후에는 신약시대이며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법은 구약성경의 약속이 이루어진 이야기와 새 언약이 들어있는 신약성경입니다. 다음 재림 때를 봅니다. 예수님 다시 오시면 새로운 시대가 열립니다. 마 19 : 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그 때는 신약의 약속 곧 계시록이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마 8 : 11 - 12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 때 ‘나라의 본 자손들’이 누구입니까? 재림 때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은 쫓겨나고 새로운 하나님 백성(동서로부터 오는 많은 사람)이 창조될 것입니다.
그 때 선포되는 말씀(하나님의 법)은 신약성경의 약속(계시록)이 이루어진 사실을 증거하는 말씀이 됩니다. 예수님 초림 때는 구약성경을 이룬 사실을 증거하셨습니다. 재림 때는 신약성경이 이루어진 사실을 증거하실 것입니다. 여태 우리가 보아왔듯이 예수님은 그 말씀을 누구에게 주셨습니까? 환상 속에서는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실제 그 사건이 이루어질 때는 바로 그 ‘사도 요한’격의 한 목자가 등장할 것입니다. 그래서 계 1 : 1절에 나오는 계시의 전달 과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 예수님 - 천사 - 요한 - 종들, 그렇습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전해질 때는 한 목자에게 옵니다. 누구를 통해서요? 천사 곧 영(성령)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약속하신 말씀이 이해됩니다. 요 14 :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곧 진리의 영입니다.(17절)
문제는 이렇게 나타납니다. 초림 때 예수님이 오셔서 구약성경이 이루어진 것을 선포하니 하나님 백성이라 칭하던 유대인들이 믿지 않고 거부하고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백성의 자격을 잃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재림 때 예수님이 천사(보혜사)를 보내 함께 하시는 목자를 통해 신약성경이 이루어진 것을 증거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백성(이 때는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따라오겠습니까? 역시 배척하고 핍박한다는 말입니다. 여태 자기네가 듣고 가르치는 말하고 다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다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충돌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나라의 본 자손들은 쫓겨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교회와 이스라엘이 먼저 심판받는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 백성이 다시 창조될 것입니다.
천국어로 바꾸어 이야기합니다. 구약의 성전은 ‘하늘’이고,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은 ‘땅’입니다. 신약의 하나님 계신 곳 하늘은 ‘교회’이고 그 백성, 땅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앞의 것이 끝나면 그것이 ‘처음 하늘, 처음 땅’이 되고 뒤의 새 것이 등장하면 그것이 ‘새 하늘, 새 땅’이 되는 것입니다. 계 21 :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새로운 시대 새로운 하나님의 성전이 생기고 하나님 백성도 새롭게 창조됩니다. 이전의 교회(하늘)와 하나님 백성 그리스도인들(땅)은 심판받습니다. 그래서 처음 하늘 처음 땅은 없어지고 새 하늘 새 땅이 생겨납니다. 요한이 그것을 보는 것입니다. 바다도 없어지지요. ‘바다’를 ‘세상’이라 하였습니다. 그 세상은 마귀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마귀의 나라를 ‘바벨론’이라고 하였지요. 그 바벨론은 앞에서 무너졌습니다.(계18장) 심판을 받았지요.
바벨론(귀신의 처소)은 무너져 없어지고 마귀(옛 뱀)는 불못(지옥)에 떨어졌습니다. 모든 것이 정리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 나라가 내려오면 됩니다.(나라이 임하옵시며) 2 - 4절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여기 ‘하늘’은 분명 영계의 하늘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요 14 : 2 - 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제야 오시는 것입니다. 그동안 이 날을 위해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면 우리의 신앙의 소망이며 목적인 영생, 죽음이 없는 삶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시는 사망이 없답니다. 당연히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제는 눈물 흘릴 일도 없으리라 믿습니다. 이미 앞에서 예수님이 요한에게 보여주신 것이 있습니다. 계 7 : 15 - 17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찌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죄로 말미암아 떠나셨던 하나님이 드디어 이곳에 오사 그 백성과 함께 하시니 사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영생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선포하십니다. 계 21 : 5 - 8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 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 동안 마귀가 변질시켜 놓았기 때문이지요. 이제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그렇게 소망하며 기다리던 날을 볼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선포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요 19 :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무엇을 이루신 것입니까? 그야 약속을 이루신 것입니다. 당시는 구약의 약속을 이루신 것이지요. 이제 또 말씀하십니다. 계 21 :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 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무엇을 이루셨습니까? 이번에는 신약의 약속이지요.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반드시 이루십니다. 알파와 오메가, 시작하셨으면 끝을 맺으십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계 1 : 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하나님이 말씀하심) 17 - 18절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예수님이 말씀하심) 계 22 : 12 - 13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예수님이 말씀하심)
‘이기는 자’가 받는 유업에 대해서는 계 2, 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천국과 영생’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이겨야 할 대상은 마귀와 마귀 편에 소속한 자들입니다. 무엇으로 이길 수 있습니까? 계 12 : 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싸워서 이길 무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어린양의 피’(예수님의 보혈)이고 또 하나는 ‘증거하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 십자가 보혈은 마지막 때 그 효험이 나타납니다. ‘증거하는 말’이라 했으니 증거하려면 보고 들은 것이 있어야 합니다. 앞에서 본 바 ‘요한과 그 종들’이 이기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그 종들’은 요한을 찾아 그의 증거를 받아야 알게 됩니다.(계 1 : 1)
이제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계 21 : 9 - 12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여기 일곱 대접을 가졌던 천사는 계 16장에서 보았던 천사입니다. 그가 요한에게 말합니다.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보여준 것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나라,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로 빗대어 말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귀한 보석으로도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면 성이 내려오는데 성만 내려오겠습니까? 그냥 빈 성이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성의 주인도 있을 것이고 수행원도 있을 것입니다. 누구누구가 오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주님의 재림이라고 해서 예수님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지만 우선 누가 오십니까? 하나님이 오셔서 함께 해주신다지요. 당연히 예수님도 오십니다. 또 누가 같이 옵니까? 마 16 :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천사(영)들도 함께 옵니다. 대단한 하늘 조직체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우리 육안으로 보일까요? 아무튼 요한은 이 모든 것을 이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요한에게 이 하늘을 보여주시는 목적이 없을까요? 옛날 하나님이 모세를 시내 산으로 불러서 하늘을 보여주셨습니다. 왜요? 땅에 내려가서 그대로 만들라고요. 그래서 산에서 내려와 만든 것이 바로 성막입니다. 하늘의 모형이지요. 히 8 : 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하셨느니라” 하나님은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십니다. 마 6 :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어서 봅니다. 계 21 : 13 - 21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 사십 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세째는 옥수요 네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둘째는 자정이라”
요한이 자기가 본 대로 설명을 해줍니다. 그러나 이 또한 환상이고 비유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열두 문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고 열두 기초석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대를 총괄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을 뜻할 수 있겠지요. 하나님의 목적하신 바가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설명해준 대로 그려보면 정육면체가 그려집니다. 완전무결한 하나님 나라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성곽의 기초석이 역시 각종의 보석으로 명명됩니다. 그 성이 정금으로 되어 있다니, 정금은 하나님 말씀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그 거룩한 성은 변함없는 하나님 진리의 말씀으로 지어져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요 1 : 1 - 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모든 것을 말씀으로 지으시고 이루십니다.
설명이 이어집니다. 계 21 : 22 - 25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예수님은 진작 당신 자신이 성전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요 2 :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이제 그곳은 해나 달의 비췸이 필요 없다 합니다. 즉 그곳에 들어온 자들은 이미 말씀을 깨달았으니 구태여 목자(해)나 전도자(달)의 가르침이 필요 없다는 뜻이지요. 말씀을 깨달아 받은 자들은 어두움의 자녀가 아니라 빛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살전 5 :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성 안에는 밤이 없습니다. 즉 말씀을 깨닫지 못한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이야기한다면 말씀을 깨닫지 못한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모든 영광은 오직 우리 하나님께 올립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26 - 27절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우리는 특히 거짓말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 거짓말이 아닙니다.
<해피 뉴 이어>
20세기까지만 해도 사랑의 고백은 남자가 하는 것쯤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21세기 요즘은 변했을까요? 꼭 남자여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할 것입니다. 남자여야 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저 여자는 다소곳해야 한다는 선입관이 만들어 놓은 오랜 관습입니다. 왜 그런 문화가 생겨났을까요? 옛날 ‘갑돌이와 갑순이’의 사랑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서로 미루다 결국 인연은 이루어지지 않고 서로 떨어져 멀리서 그리움만 태우는 이야기입니다. 어찌 보면 당사자들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 같지만 그런 사람을 배우자로 맞아 사는 또 다른 당사자들의 처지는 생각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불행은 두 사람만의 것이 아니지요. 글쎄 그들이 선택한 ‘차선의 배우자’들과는 행복하게 살았을까요? 뒷이야기는 모릅니다.
긴 교제의 기간이 있었지만 친구 이상의 관계로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망설임이지요. 왜 주저했을까요? 행여 거부당할까 두려웠을까요? 보통 그게 주된 이유입니다. 사랑의 거부는 본인에게 매우 깊은 상처를 안깁니다. 그리고 오래 갑니다. 그런 사실을 미리 알고 망설이는지 모르겠습니다. 처음에는 일반적으로 자존심의 문제이지요. 상대방에게 거부당한다는 것은 어쩌면 자존감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런 일을 당하느니 차라리 피하자는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그래서 좋아하면서도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취한다,’는 말이 나왔는지도 모릅니다. 무너질 때 무너지더라도 부딪쳐보자는 심보로 달려들어야 뭔가 이룰 수 있습니다.
사랑은 젊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긴 옥중생활을 기다리며 살 수는 없는 형편입니다. 어쩔 수 없이 이별을 통보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희망을 던집니다. 나도 너도 결혼해서 살게 되겠지. 그러다 혹시 모두 홀몸이 되어 다시 만난다면 우리의 인연을 다시 이어보자. 과연 그렇게 홀몸이 된 처지로 두 사람이 만납니다. 이제 딸을 결혼시키는 ‘캐서린’이 식장으로 사용하려는 ‘앰로스 호텔’ 입구에서 옛 연인 ‘상규’를 만납니다. 호텔 도어맨으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며칠 투숙객으로 있는 동안 종종 마주칩니다. 그리고 옛날을 추억하며 시간 내어 데이트도 합니다. 이루기 힘든 약속도 하지요. 한해의 마지막 날 눈이 내리면 상규의 먼저 간 아내가 우리의 첫사랑 인연을 이어가도록 허락하는 것으로 알자고.
크게 되려면 큰물에서 놀아야지. 하기야 도랑물에 대어가 살 수는 없습니다. 강으로 바다로 나가야 큰 물고기가 있는 법입니다. 그러니 크게 되려면 아무래도 이끌어주는 회사도 커야 되고 매니저도 많은 거래처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여태는 자신이 혼자서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많은 팬들을 수행하는 인기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다 크려면, 보다 크게 성공하려면 그만한 매니저가 필요합니다. 내가 붙잡고 늘어지면 보다 큰 나무로 자랄 수 있는 실력자를 잔가지로 머물게 만드는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형, 동생처럼 사이좋게 지내오며 살펴주었지만 그 은공에 대한 짐을 지우며 그의 앞길을 막는다면 너무 이기적인 조치입니다. 압니다. 그러나 그러면 나는 어쩌라고?
하는 일마나 안 된다. 이래 살아가지고 뭘 하나? 다시 한해는 저물어 가는데 살고자 하는 의욕도 희망도 없다. 마지막으로 있는 것 다 털어서 그럴 듯하게 지내보고 세상을 떠나자, 하는 마음에 유명한 앰로스 호텔에 투숙합니다. 전망 좋은 방을 택하여 그 좋은 전망을 보아도 자신의 앞은 감감합니다. 그런데 전화벨이 울립니다. ‘모닝콜 해드릴까요?’ 어쩌면 처음 들어보는 관심입니다. 아, 예. 몇 시에 일어나시겠습니까? 9시 반이요. 아침 아홉시 반이지요? 아, 예. 얼굴도 모르는 예쁜 목소리의 아가씨, 그것보다 처음 가져보는 다른 사람의 관심에 감동입니다. 이 쓸모없는 놈에게 관심을 가져주다니! 그것만으로도 감동이지요. 그 인연이 결국 생명을 건지게 해줍니다. 나아가 끊어진 희망의 끈을 이어줍니다.
집에 갑자기 고장이 생겨 경영하는 호텔에 한 달 간 임시 거주합니다. 그리고 만난 계약직 미화원 ‘이영’과 자주 마주칩니다. 호텔 엠로스의 대표 ‘용진’은 도우려고 하지만 이영의 사정은 그렇지 않습니다. 감히 경영주에게 가까이 하다니 혹 ‘꽃뱀’ 아니야? 하는 시선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러다가 혹 그나마 계약직까지 잃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사장은 비로소 ‘계약직’이라는 이 비정규직의 실상을 접합니다. 그리고 경영주로서의 윤리, 나아가 가진 자로서의 선한 마음을 품습니다. 사랑은 국경도 인종도 나이차도 계급도 뛰어넘는 법, 무엇이 걸림돌이 되겠습니까?
인연은 사람이 만드는 것일까요, 우연이 만드는 것일까요? 주말마다 자신의 인연을 찾지만 그 때마다 돌아서는 사람들, 그 속에서 눈이 마주치고 뜻하지 않은 곳에서 도움을 주고받고, 결국 인연을 새로 만들어냅니다. 짝사랑을 잃은 호텔 매니저 ‘소진’은 그렇게 ‘진호’를 만납니다. 성탄절과 연말연시 호텔에서 일어나는 이러저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려집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 ‘해피’한 새해를 만나면 좋겠습니다. 영화 ‘해피 뉴 이어’(A YEAR-END MEDLEY)를 보았습니다. 첫사랑, 짝사랑, 옛사랑, 풋사랑 등등 사랑 이야기의 만찬입니다.
<패신저스>
‘앞에 누릴 것을 좇아가다보면 자칫 현재 누릴 수 있는 것을 지나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좋은 일입니다. 개인도 그렇지만 우리 사회가 그렇게 해서 발전해 왔습니다. 개인의 인생을 보더라도 목표도 목적도 없이 그냥저냥 사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나름의 목표를 세우고 살아갑니다. 눈앞의 손쉬운 것도 있지만 몇 년 또는 한 생애를 걸고 달려가는 목표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너무 목표에 매달리다가 누려볼 기회들을 모두 놓쳐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행여 나이 들어서도 이루지 못하였다면 그 지나온 시간이 매우 안타까울 수 있습니다. 그러고 싶어서 한 것은 아니지만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말도 나옵니다. 작가인 ‘오로라’가 자기 아버지의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평범한 삶은 평범한 이야기나 만드는 거야.’ 그래서 오로라는 남다른 경험을 찾아 나섭니다. 작가는 대부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듭니다. 그래야 공감을 일으키고 감동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없는 이야기 억지로 만들어낸다는 것도 쉽지 않을뿐더러 자신의 감정이 들어갈 수 없으니 감동을 만들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니 직접 남다른 경험을 한다는 것도 복입니다. 어렵고 힘들었던 경험은 그만큼 독자들의 감정을 보다 깊은 곳으로 인도해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작가들은 일부러 그런 환경이나 상황으로 찾아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여 이야기 소재를 만드는 것입니다. 새롭고 색다른 경험은 글을 쓰는 사람에게 그만큼 유익합니다.
지구와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돌아와서 그곳을 이야기해준다면 사람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이야기에 빠져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도전합니다. 물론 지금의 독자들과는 매우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이지요. 우리가 지금도 고전을 읽으며 감동을 받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사람들의 공통적 감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2백 년이 넘는 시간의 공백이 있다 하더라도 이야기는 흥미를 일으켜줄 수 있습니다. 더구나 전혀 다른 세계에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꾸며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단한 도전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 떠나면 지금 가까이 했던 사람들은 다시는 만날 수 없습니다. 각오가 필요합니다.
기술자, 엔지니어라고? 여기서는 흔해, 그러니 가지고 있는 기술만큼, 그만한 대우도 받기 힘듭니다. 차라리 외딴 곳이라도 나를 필요로 하는 곳, 내가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곳, 그런 곳이 있다면 어디라도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도전하였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 다 털어서 비싼 여비를 내고 호화 우주선 ‘아발론’호에 탑승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는 데만 120년이 걸립니다. 그러니 그냥 간다면 우주선 안에서 인생 종칩니다. 당연히 그 직전까지 동면상태로 여행을 해야 합니다. 목적지 도착 4개월 전에 깨어나도록 장치가 되어 있습니다. 목적지는 지구에서 그만큼 떨어진 식민행성입니다. 그런 도전에 5천 명이 넘는 사람이 응했습니다. 모두 동면 중입니다.
무슨 사고였는지는 잘 모르지만 ‘짐’이 홀로 동면에서 깨어났습니다. 일어나 보니 혼자 깨어난 것입니다. 겨우 30년 정도 지났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정작 목적지에 도착하면 생존해 있을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앞으로 90년 가까이 더 살아야 하는데 가능하겠습니까? 왜 나만? 아무튼 되돌릴 수 없습니다. 인생 포기해야 합니다. 우주선 안에서 인생 끝내야 한다니, 이러자고 재산 다 투자하여 우주선에 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쩌지요? 주변에 아무도 없습니다. 한 사람 있기는 하여 말이 통하기는 하지만 감촉이 없는 로봇입니다. 1년의 외로움을 견디다 자살까지 시도하고 차마 행하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다른 동면자들을 둘러봅니다. 눈에 딱 들어오는 여성을 발견합니다.
오로라는 짐이 깨운 것입니다. 오로라가 부르짖은 대로 살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원수도 이런 원수가 있습니까?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쳐놓은 것입니다. 그나저나 어쩌겠습니까? 돌이킬 수 없는 일입니다. 무조건 받아들여야 합니다. 한 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래도 혼자보다는 둘이 나은 건가요? 어쩌면 다행이었구나 싶은 사건들이 이어집니다. 그 대단한 우주선에 결함이 있었던 것이지요. 원수가 되었다가 함께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칩니다. 다른 많은 승객들은 동면 중이니 모릅니다. 깨어있는 두 사람에게 수많은 생명이 달려있는 셈입니다. 이제는 원수가 아닙니다. 어떻게든 함께 협력해서 위기를 이겨내야 합니다. 그야말로 엄청난 경험이지요.
그저 그런 SF 영화와는 좀 다른 이야기를 그려주고 있습니다. 대단한 구경거리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정도의 장면들은 이미 다른 영화들에서 경험하였기에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거의 두 사람만의 이야기임에도 긴박감과 애틋한 로맨스가 있습니다. 사랑, 배신, 화합이 빠르게 전개됩니다. 그리고 그 연애담은 위기를 헤쳐 나가며 더욱 깊어집니다. 한정된 공간이지만 광활한 우주 안에서 두 사람은 부부가 되어 자기네 인생을 만듭니다. 어디이면 어떻겠습니까? 작은 몸이지만 우주보다 더 큰 우리의 마음이 있다면 얼마든지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영화 ‘패신저스’(Passengers)를 보았습니다. 2016년 작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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