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10일 부활 제6주간 금요일
너희의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이며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요한 16,20-23ㄱ)
Your hearts will rejoice,
and no one will take your joy away from you.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 바오로를 격려하시고, 바오로는 이에 힘입어 코린토에서 일 년 육 개월 동안 복음을 선포한다. 거기에서 그는 유다인들의 악의적인 고발을 당하기도 하지만, 이를 잘 이겨 나간다(제1독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마치 여인이 아이를 낳는 것과 같다. 해산할 때에는 고통이 따르나 아이를 낳으면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듯이, 예수님의 부활로 기뻐할 때가 올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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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를 보면 바오로가 코린토에 있을 때 주님께서 환시 속에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과연 아무도 바오로에게 손을 대지 않았을까요? 오늘 독서에서는 바오로 대신 동료 소스테네스가 유다인들에게 붙잡혀 매질을 당하였지만, 바오로는 동족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혀 폭행당하였고(사도 21,27-36 참조), 카이사리아 감옥에 오랫동안 갇히기도 하였습니다(사도 23장 이하 참조). 그뿐만 아니라 매질과 굶주림, 헐벗음 등 온갖 고통을 감수해야 했고(2코린 11장 참조), 결국 로마에서 목이 잘리며 순교하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환시를 통하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한마디로 모순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손을 대어 해칠 사람이 없다고 하셨으나 폭행과 박해, 옥살이와 순교의 삶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에 그 답이 있습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바오로 사도는 온갖 고통을 받으며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박해를 당하고 고난을 겪어도 그가 가지고 있는 기쁨을 그 누구도 해칠 수는 없었습니다. 아이를 낳은 기쁨이 해산의 고통을 잊게 하듯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은 그 고통을 이겨 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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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혼자 사는 동생에게 사랑을 주지 못한 것이 늘 고통스러웠습니다. 저도 가정을 가지고 있고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동생에게 관심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희귀병에 걸려 혼자서 투병하는 것을 알고, 힘들지만 시간을 내서 동생을 간호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저를 짓눌렀던 근심이 오히려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느 교우가 복음 나눔을 하면서 전한 말입니다. 혼자가 되어 술로 방황을 하던 동생을 외면하고 있을 때는 늘 근심과 갈등을 안고 살았는데, 결단을 내리고 그를 돌보아 주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고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가정을 가진 사람으로서 동생을 돌보아 준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마음은 평화롭고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교우는 동생 때문에 겪은 갈등의 시간을 ‘영적인 해산’의 순간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려면 반드시 이런 ‘영적인 해산’의 순간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겨 내야 할 고통은 철저하게 외면하고 그저 안락함만을 좇으며 살면, 기쁨은 없고 오로지 ‘거짓의 나’를 붙잡는 삶만 남게 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께서 말씀하셨지요. “고통이 깊은 사랑일수록 그 향기는 짙다.” 신앙인에게는 이런 사랑의 향기가 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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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실험을 했습니다. 고양이가 고통 없이 새끼를 낳을 수 있도록 ‘무통 주사’를 놓았습니다. 그러고는 한곳에서 키웠습니다. 한편 옆 장소에는 정상적으로 새끼를 낳은 고양이와 새끼들을 길렀습니다. 새끼들이 커지자 어미에게 귀찮은 행동을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새끼를 낳은 어미는 자리를 옮겨 가며 끝까지 피해 다녔습니다. ‘무통 분만’을 한 어미도 한동안은 피해 다녔습니다. 하지만 계속 괴롭히자 나중에는 새끼를 물어 버렸습니다. 해산할 때 여인은 본능적으로 불안해합니다. 아이가 잘 태어날지 두렵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진통보다 아이에 대한 걱정이 훨씬 큽니다. 그만큼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두려움 때문에 ‘무통 주사’를 원하는 것은 은총을 외면하는 유혹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바뀌기를 바라십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새롭게’ 태어나기를 원하십니다. 불안과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닥칩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인간적 계산으로 피하려 들면 안 됩니다. 정면으로 부딪치며 도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은총을 체험합니다. ‘내 몫’으로 여기며 받아들이면 두려움도 깨달음으로 바뀝니다.
주님을 모시고 주님 안에서
-심흥보 신부-
기도를 하면 참으로 편안하고 기쁩니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무엇인가 내 주위의 사건들과 상황들이 잘 돌아갑니다. 주님께서 돌봐주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한다고 모든 것이 좋게 그리고 아무 일도 없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 주님께서는 위안과 평화를 가져다 주십니다. 또한 기도하면서 일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주님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잘하는 것도 아니요, 좋은 결실을 맺는 것만도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일할 때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으며, 비록 잘못되어도 되돌아올 수 있고,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아도 언젠가는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을 믿으며 일하고 또 그런 믿음과 희망으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끔 기도와 복음 묵상에 게을러지면, 왠지 모르게 공허해지고 답답하며 짜증이 납니다. 뒤늦게 깨닫고 다시 돌아가서 기도 자리에 앉으면 왜 그렇게 기도 시간이 힘겹고 무미건조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다시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무는 데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16,22)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 생활을 회복하면, 다시 주님 품 안에 안기게 되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평화와 안녕을 얻게 됩니다. 기도 중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복음으로 인도하고, 복음을 살기 시작하면서 힘을 얻게 되어, 주님과 함께하는 신앙생활을 회복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에게 축복과 은총을 내려주시며 주님 곁으로 불러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주님을 모시고 기쁘고 힘차게 살아갑시다.
한 축국선수가 경기 도중 상대편 선수와 부딪치며 정신을 잃었습니다. 급히 병원으로 실려 간 이 선수는 한참 뒤에 깨어났지요. 그리고는 “내가 누구예요?”라고 물으며 기억상실 증세를 보이는 것입니다.
얼마 후 그 선수가 퇴원해서 시합에 복귀하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답니다. 글쎄 전에는 별 볼일 없어 보였던 이 선수가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변신한 것입니다. 가지들은 그에게 어떻게 된 영문이냐고 물었지요. 그러자 감독이 말합니다.
“그가 병원에서 자신이 누구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제가 대답했죠. 너는 축구 황제 펠레잖아!”
이 선수는 자신이 축구 황제 펠레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즉, 자신을 최고라고 여겼기 때문에 최고의 모습으로 살 수 있는 것이지요. 자신을 최고로 여기느냐, 또 반대로 무능력한 인간으로 여기느냐는 자존감에 따라 백만장자의 인생을 살기도, 10원짜리 인생을 살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자신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습니까?
내 자신이 한없이 부족해 보이지만, 이 몸 역시 주님께서 창조해주신 거룩하고 소중한 몸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스스로의 소중함을 깨닫기 보다는 남들의 모습에서 부러움을 찾고, 남들의 모습을 더 원하는 어리석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을 향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 세상은 기뻐할 것임을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당연히 이 죽음은 제자들에게 큰 아픔과 상처로 가져다 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님을 이야기하십니다. 즉,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는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가르쳐주십니다.
이 부활로 인해 우리의 존재가 더욱 더 소중하고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음을,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유를 주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 각자에게 최고의 사랑으로 다가오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제 스스로를 더 사랑할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우리 각자는 주님에게 있어서 최고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삼류 리더는 자기의 능력을 사용하고, 이류 리더는 남의 힘을 사용하고, 일류 리더는 남의 지혜를 사용한다.(한비자)
근심을 기쁨으로 변화시키는 시간
-강은희 수녀-
예수님께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의 근심은 기쁨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하시며, 이 변화의 과정을 해산의 진통에 비유하십니다. 마치 해산을 앞둔 여인에게 산고가 예고되어 있듯이, 우리도 고통의 바다라는 인생에서 갖가지 근심의 시간들을 선고받은 채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몰랐다면 우리가 겪는 모든 어려움은 무의미하고 억울한 고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고통을 생명의 부활로 변화시켜 놓으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가 살면서 겪는 어려움 역시 사랑의 진리가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한 의미 있는 봉사와 희생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기 전까지는 그분의 제자들마저도 이것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훗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이전의 괴로움이 기쁨으로 변화됨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고통의 시간을 견디는 동안 견고해진 마음속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 때문에 생겨난 기쁨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과 닮아 가며 얻은 기쁨이기에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누구를 위한 근심인가 ?
- 강희재 신부-
고민하는 만큼, 고통을 견디어 내는 만큼, 인내를 하는 만큼 깊어지고 진해지고 충만해진다고 하신 옛 어른들의 말씀을 조금씩 조금씩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고민과 고통과 인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으로 인한 것은 예외입니다. 두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사랑과 생명’ 입니다. 자기 몸을 사랑하듯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겪는 고민 · 고통 · 인내여야 합니다. 누군가를 살리고 구원하기 위한 고민이고 고통이며 인내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뇌와 근심은 오직 아버지께서 당신께 맡기신 이들을 사랑하고 살리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본당 주임신부로 꼭 필요한 마음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마음이 바로 그 마음입니다. ‘사목 (cure of souls)’ 이어야 하는데, 자주 ‘업무 (work)’ 가 됩니다. 그러면 ‘사랑과 생명’ 을 위한 고민 · 고통 · 인내가 아니라 단지 일의 진척과 성과 그리고 자기만족을 위한 근심 속에서 오히려 교우들에게 고통과 화 (禍) 를 나누게 되고, 그 결과는 사랑도 생명도 아닌 분열과 상처로 인한 슬픔뿐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근심이 나와 형제를 사랑하고 일으켜 살리기 위한 근심이 될 때, 지금의 근심은 반드시 기쁨이 되고, 그 기쁨을 우리는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과 부활의 기쁨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장강(長江)의 작은 일렁임처럼
-김찬선신부-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會者定離. 만남이 있으면 반드시 헤어짐도 있다는 거지요. 그러나 이 말은 좋아서 만났다가 싫어서 헤어지는 그런 경우도 얘기하는 것은 아니지요. 이 말은 나의 원의와 상관없이 타자에 의해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게도 되는 경우를 애기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수없이 만나고 헤어지지만 대부분은 우리의 원의에 따라 만나고 헤어지기에 이런 만남과 헤어짐은 그리 대단한 것도 큰 슬픔도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슬픔은 원하지도 않는데 빼앗길 때 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만남과 헤어짐은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이 우리 믿음입니다. 저는 제 아버지를 제가 원하고 선택해서 만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 아버지를 얼굴도 못보고 헤어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일 친한 친구를 제가 선택해서 만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저희 각자를 수도원에 불러주셔서 만났고, 제 친구를 사별하게 된 것도 원하지 않았는데도 하느님이 데려 가셔서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성찰하게 되는 것은 원하지도 않는데 헤어지게 되면 슬프지만 하느님의 큰 섭리와 뜻 안에서 만남과 이별을 받아들인다면 만남과 헤어짐이 담담할 것이고 그래서 헤어짐도 크게 슬프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미 하느님과의 만남이 최고의 기쁨인 사람에게는, 그리고 모든 만남과 헤어짐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만남도 헤어짐도, 기쁨과 슬픔도 도도히 흐르는 기쁨이라는 長江의 작은 일렁임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일 아침에 그의 친구에게 찾아가 말했습니다.
“어이, 친구 우리 오늘 골프 치러 가지 않겠나?”
“고맙네만 나는 가톨릭 신자 주일에는 성당에 가야 한다네.”
잠시 후, 그 골프 치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래? 그런가? 나는 자네의 그 믿음에 정말로 감탄사가 나오네. 자네 아는가? 내가 그 동안 자네에게 주일 아침에 열여덟 번이나 골프를 치러 가자고 한 것을? 그런데 자네는 열여덟 번 모두 거절했네. 정말로 자네의 믿음이 대단하네.”
그리고 계속 이어서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그런데 정말로 궁금한 것 하나 있어. 사실은 그 성당이라는 곳이 골프장보다 좋은 곳은 아닌가봐. 교회가 그렇게 좋고 중요한 곳이라면 적어도 한번쯤은 내게도 함께 성당에 가자고 권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골프장이 좋기 때문에 자네에게 열여덟 번이나 가자고 했는데, 자네는 나에게 단 한 번도 성당에 같이 가자고 하지 않더구먼.”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신앙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정말로 중요하고 정말로 좋은 신앙이라면, 내 이웃에게 권하고 함께 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겠지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나만의 신앙으로만 간직하려 할 때가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주님께 대한 체험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또 얼마나 감사한 분이신지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혼자만의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경험한 뒤 그들을 뿔뿔이 흩어집니다. 무서워서 벌벌 떨며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예수님 생전에 분명히 기쁨 소식을 세상 끝까지 전해야 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숨어 있었습니다.
아직 혼자만의 신앙생활의 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바뀌지요.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는 순간,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부활의 체험 이후 그들은 숨어 있던 다락방을 뛰쳐나와 세상에 예수님을 기쁜 마음으로 전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가장 좋으신 분이고 가장 중요하신 분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아직 이 단계에 이르지 못해서일까요? 아직은 미숙한 혼자만의 신앙생활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우리의 생활 안에서 느끼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성경을 읽고, 더 많이 주님의 뜻에 따라 사랑을 실천 할 때, 주님이 얼마나 중요하고 좋으신 분인지를 깨달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예수님의 명령인 선교를 정말로 기쁜 마음으로 실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행한 사람은 언제나 자기가 불행하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다.(버트런드 러셀)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양승국신부-
<사노라면>
살아가다보면 매사가 비관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죽을 지경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얼굴이 엄청 어둡습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불평불만이 폭포수처럼 흘러나옵니다. 마주 앉아있기가 점점 두려워 집니다.
물론 충분히 이해가 가지요. 한번 입은 상처가 빨리 아물지 않고 오래 갑니다. 그 어떤 위로 앞에서도 슬픔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빨리 떠나주었으면 고맙겠는데 느닷없이 찾아온 병고가 떠나지 않습니다. 당연히 지치기 마련이고, 삶이 비관적이 됩니다.
그러나 정반대의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이지 순간순간이 지옥과도 같은 나날을 보내면서도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미소를 짓고 살아가는 분들이 계십니다. 주변에서 바라볼 때 ‘하느님도 무심하시지’하는 한탄이 절로 튀어나오지만, 정작 본인은 아름다운 정원을 천천히 거닐고 있는 황후처럼 우아하게 살아갑니다.
시련 속에서도 기쁠 수 있는, 고통 가운데서도 행복할 수 있는, 비참함 속에서도 미소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근원적 기쁨’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쁨이란 주제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기쁨에는 여러 종류나 단계의 기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쁨이라고 다 같은 기쁨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외적인 기쁨, 스쳐지나가는 잠시의 기쁨이 기쁨의 전부가 아닙니다. 만수무강, 무병장수, 승승장구... 물론 이런 삶의 모습도 기쁨의 배경이 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기쁨은 자기 존재를 충만히 실현시키는데서 오는 기쁨이 아닐까요? 자신의 내면 안에 확고한 중심이 서 있음으로 인해 그 어떤 외부적인 요인에도 흔들리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데서 오는 기쁨이 참 기쁨이 아닐까요?
참 행복의 길, 참 진리의 길을 찾았기에 더 이상 헤매지 않고 수시로 다가오는 갖은 역경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해맑은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데서 오는 기쁨이야말로 진정한 기쁨일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우리 삶의 든든한 지주가 됨으로 인한 기쁨, 주님의 성령께서 내 앞길을 환히 밝혀주심으로 인한 기쁨, 그 기쁨이야말로 평생 우리가 추구해야할 기쁨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예수님 안의 참 기쁨은 한 인간을 치유하고 고무(鼓舞)시키는 힘이자 에너지입니다. 그 기쁨은 생명력을 낳습니다. 그 기쁨은 절망스런 상황 가운데서도 희망하게 합니다. 그 기쁨은 깊은 슬픔 가운데서도 미소 짓게 합니다. 그 기쁨은 결국 우리를 생명과 구원에로, 창조자이신 하느님께로 인도합니다.
우리의 나날이 늘 고통과 슬픔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지나서 돌아보면 많은 기쁨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사는 것 자체가, 삶 자체가, 하루하루가 기적이며 가장 큰 기쁨의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바닷가에 매어 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인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김종삼, 어부)
예수님의 말씀으로 체험하는 하느님 나라
- 김우성 신부-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빚어졌습니다. 그렇게 빚어진, 그 거룩한 순간은 하느님의 숨이 불어넣어지는 자비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생명과 진리로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이미 임하셨습니다. 죄는 하느님의 자비를 망각함으로써 움트는 것이기에 하느님 자비의 망각이 곧 원죄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저버릴 때 죄의 어두움은 우리 마음의 눈을 멀게 합니다. 죄 중에 있는 우리는 세상과 이웃을 자기 자신의 성공과 목적의 수단으로 바라보게 하고 자기 중심의 거대한 욕망의 우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무엇을 이루고자 합니까? 나는 세상 안에서 무엇이 되고자 합니까? 그러나 세상 안에서 무엇이 되고자 하기 이전에 나 스스로 무엇을 먼저 벗어던져야 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죄 때문에 우리 자신이 오히려 세상의 평화와 진리에 장애가 되고 있지 않은지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기쁨의 나라인 하느님 나라를 먼저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읽음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먼저 체험해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으로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고 깨닫게 되면 우리는 곧 그분의 말씀으로 창조한 세상, 자연과 이웃이 하느님 은총의 지고한 거처임을 봅니다. 그렇게 그분의 사랑은 이미 우리와 함께하고 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별을 앞두고
- 이영석 신부-
이별을 앞두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근심을 어머니의 출산에 비유해서 미리 위로해 주십니다. 분만의 고통 없이 어머니가 될 수도 없고 그 고통이 두려워 어머니가 되는 기쁨을 포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중에 올 큰 기쁨을 생각하면 현재의 근심과 고통은 견뎌낼 만하다는 격려의 의미가 예수님의 이 위로에 가득 담겨 있습니다. 사실 이별을 앞둔 이 순간, 제자들만 근심하며 슬픔에 잠겨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보다 훨씬 더 힘겨워 하셨을 겁니다. 아직 여물지 못한 제자들의 믿음을 아시기에 갓난아기와 같은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들 곁을 떠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젖도 떼지 않은 아기를 두고 떠나야 하는 상황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신뢰의 힘으로 슬픔 중에도 기쁨을, 절망 중에도 희망을,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랬기에 비록 당신도 고통스러우셨지만 제자들에게 희망 가득한 위로의 말씀을 건네실 수 있으셨습니다. 산달이 가까워지면 산모가 여러 가지 두려움을 갖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그중에 가장 큰 근심은 분명 분만의 고통일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 고통이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온전한 산모의 몫이긴 하지만, 함께 마음 졸이며 아파하는 가족이 있기에 그리고 고통과 함께하는 기쁨이 있기에 산모는 용기를 얻고 그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슬픔과 고통은 일종의 선물입니다. 나보다 더 슬픔에 잠겨 있고 나보다 더 고통스러워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 곁에서 우리를 격려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순간순간 나를 위해 마음 졸이고 계신 주님의 현존을 알아차릴 수만 있다면 우리도 그분처럼 슬픔 중에도 기쁨을,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볼 수 있으며 늘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싫지만
-김찬선신부-
노상 여자를 쫓아다니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여자는 그 남자에게 관심이 없다고, 오히려 귀찮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자도 싫지만은 아닌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자는 시험도 할 겸 작전을 짰습니다. 그렇게 쫓아다니던 사람이 그날 이후 모습을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일체 연락을 끊었습니다. 그러자 여자는 뭔가 허전하고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남자와 연관이 있는 곳에 가면 두리번거리기까지 하고 자꾸 전화 쪽으로 눈길이 가고는 했습니다. 그렇게 얼마를 지난 다음 우연을 가장하여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여자는 감추려고 해도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였고 둘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일부러 이런 작전을 쓰시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우리에게 이런 것은 필요합니다. 부재감과 상실감. 하느님의 부재와 상실이 가져다주는 쓰라림. 이런 것들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주님께 대한 갈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계셔도 그만, 안 계셔도 그만인 분일 수 없습니다.
기쁨은 갈망하고 기다리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내 삶에 기쁨이 없다면 갈망이 없기 때문이고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대한 갈망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주님의 부재와 상실을 싫지만 원합니다
고통과 기쁨
-전삼용신부-
제 앞방엔 저와 한 동네에서 태어나 함께 자란 친구 신부님이 살고 있습니다. 오늘 날도 덥고 해서 저녁으로 냉면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시골에서 함께 자랄 때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희가 자라던 시골은 전기도 안 들어오는 정말 시골이었습니다. 집도 몇 채 없었습니다. 어느 날은 온 동네가 엿 고는 냄새로 가득 차기도 합니다. 그런데 엿 고는 집은 그 집에 사는 가족 모두가 밤을 새야합니다.
아버지는 불을 때기 위해서 장작을 밤새 패야하고 어머니는 솥단지안의 조청이 눌어붙지 않도록 밤새 저어야하며 아이들은 밤새 때는 불 때문에 뜨거워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아예 엿을 고을 때면 장판지가 눌어붙지 않도록 방의 장판지를 다 걷어내고 불을 땝니다.
다른 집 사람들은 밤새 온 동네에 퍼지는 엿 고는 냄새를 맡으며 내일의 꿈을 꾸며 잠을 잡니다. 이렇게 한 집이 밤새 엿 고는 것이 끝나면 아침에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조청으로 만들 수 있는 온갖 종류의 먹을거리를 만듭니다. 쌀 뻥튀기에 조청을 입혀 과자를 만들고 깨나 땅콩으로 엿을 만들기도 합니다. 또 인절미에 찍어 먹기도 하고 그것을 굳혀 순수한 엿으로 먹기도 합니다.
밤새 잠을 못 자고 일을 해야 하는 가족은 좀 안 됐지만 내일의 이런 기쁨의 잔치를 생각하며 기꺼이 고생을 감수합니다. 한 가족의 희생으로 온 마을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엿을 만드는 것이 어찌 아기를 낳는 고통과 또 아기를 낳은 후의 기쁨에 비길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세상사는 것이 항상 이 고통과 기쁨의 반복인 것 같습니다. 또 더 큰 기쁨을 위해서는 더 큰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것도 세상의 이치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제자들에게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미리 예고해 주십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은 어머니이고 제자들은 자녀들과 같습니다.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다는 출산을 겪어내고 자녀를 얻는 기쁨을 느끼신 분입니다. 따라서 어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이 ‘고통과 기쁨의 신비’를 터득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어떠한 시련과 고통도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기쁨의 열매가 있을 것임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나 힘들어하는 자녀들은 어머니의 말을 잘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지금은 다만 힘든 것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도 온갖 아픔을 이겨낸 어머니처럼 자녀들인 제자들에게 곧 다가올 진통의 시간을 잘 견뎌낼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세상 자체를 커다란 어머니 뱃속으로 비유합니다. 이 안에 새로운 생명이 준비되기 때문입니다. 근심과 고통 속에서 준비된 새 생명은 어머니인 교회의 고통으로 새로 태어나게 되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죽음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빼앗지 못하는 기쁨의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분과의 만남은 육체적인 만남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입니다.
어떤 수녀님께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냐고 물었더니,
“예수님께서 나를 불러주셨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 분은 그 확신으로 평생 수녀님으로서 그 기쁨을 잃지 않고 사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확신을 얻기 위해 얼마나 고민하는 시간이 많았겠습니까?
우리도 수많은 고통 가운데 있더라도, 그것은 주님께서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을 주시기 위한 과정임을 상기하며 힘을 냅시다
이별을 앞두고
- 이영석 신부-
이별을 앞두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근심을 어머니의 출산에 비유해서 미리 위로해 주십니다. 분만의 고통 없이 어머니가 될 수도 없고 그 고통이 두려워 어머니가 되는 기쁨을 포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중에 올 큰 기쁨을 생각하면 현재의 근심과 고통은 견뎌낼 만하다는 격려의 의미가 예수님의 이 위로에 가득 담겨 있습니다. 사실 이별을 앞둔 이 순간, 제자들만 근심하며 슬픔에 잠겨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보다 훨씬 더 힘겨워 하셨을 겁니다. 아직 여물지 못한 제자들의 믿음을 아시기에 갓난아기와 같은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들 곁을 떠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젖도 떼지 않은 아기를 두고 떠나야 하는 상황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신뢰의 힘으로 슬픔 중에도 기쁨을, 절망 중에도 희망을,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랬기에 비록 당신도 고통스러우셨지만 제자들에게 희망 가득한 위로의 말씀을 건네실 수 있으셨습니다. 산달이 가까워지면 산모가 여러 가지 두려움을 갖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그중에 가장 큰 근심은 분명 분만의 고통일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 고통이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온전한 산모의 몫이긴 하지만, 함께 마음 졸이며 아파하는 가족이 있기에 그리고 고통과 함께하는 기쁨이 있기에 산모는 용기를 얻고 그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슬픔과 고통은 일종의 선물입니다. 나보다 더 슬픔에 잠겨 있고 나보다 더 고통스러워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 곁에서 우리를 격려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순간순간 나를 위해 마음 졸이고 계신 주님의 현존을 알아차릴 수만 있다면 우리도 그분처럼 슬픔 중에도 기쁨을,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볼 수 있으며 늘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여러분들에게 이제 세 문제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잘 생각해보시고 맞춰 보도록 하세요.
1. 철수네 가족은 5명입니다. 첫째의 이름은 첫째, 둘째의 이름은 둘째, 셋째의 이름은 셋째, 넷째의 이름은 넷째입니다. 그렇다면 다섯째의 이름은 과연 무엇일까요?
2. 참새 백 마리가 전봇대 전깃줄에 앉아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총을 한번만 쏴서 참새 백 마리를 죽였어요. 어떻게 총을 한 번 쏴서 백 마리를 죽일 수 있을까요?
3. 어떤 한 아이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아이는 재래식(푸세식) 화장실만 가면 그곳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얘야. 재래식 화장실에 빠지려고 하거든 팔을 옆으로 쭉 뻗으렴. 그러면 안 떨어질 거야.”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아이는 재래식 화장실에 일을 보러 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 재래식 화장실에 빠지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아이는 팔을 옆으로 쭉 뻗었지요. 그리고 아이는 드디어 재래식 화장실에 안 떨어진 것입니다. 그 아이는 너무나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다시 재래식(푸세식) 화장실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답을 아시겠습니까? 그러면 이제 오늘 복음 말씀을 좀 보도록 하지요. 답을 이야기해 달라고요? 싫습니다. 답은 여러분들이 알아보도록 하시고, 오늘 복음 말씀을 보도록 할게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답도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면서 왜 질문을 하냐고 말씀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질문만을 던져 보았지요. 우리 모두 질문을 받고서 답을 제대로 알 수가 없으면 답을 물어보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주님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어제 복음 말씀(부활 제6주간 목요일)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치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실 때, 이렇게 수수께끼 같은 말씀 또는 비유 말씀을 하셨지요. 따라서 이 말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 답이 무엇인지를 예수님께 물어보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물어보지 않습니다. 단지 자기들끼리 “이게 무슨 뜻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판단하고만 있을 뿐이지요.
우리 역시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으려고 하지 않았을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일상의 삶 안에서 우리들의 행복을 위해서 하시는 많은 말씀들. 내 이웃을 통해서 그리고 주변의 환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그 말씀들을 우리들은 얼마나 경청하면서 잘 듣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 말씀을 잘 모를 때, 얼마나 주님 앞에 나아가 기도로써 주님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했을까요? 우리 역시 답을 물어보지는 않고, 스스로 판단하면서 잘못된 길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바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스스로의 몸 안에 갇혀 사는 모습을 원하지 않습니다. 대신 변화되어 주님 앞에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주님께서 하시는 올바른 답을 알 수 있으며, 그 답을 깨달은 뒤에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 간직하고 있던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기쁨은 아무도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참, 정답은 1. 철수네 가족이니까 다섯째는 철수겠지요? 2. 참새의 이름이 백 마리랍니다. 3. 안 빠졌다고 신나서 ‘만세’ 부르다가 빠졌답니다.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주님께 기도하세요. 이겨낼 답을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양승국신부-
<고통에 대한 의미 부여 작업>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가 이뤄내야 할 참으로 중요한 과제가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 삶에 대한 의미부여’라고 생각합니다. ‘내 인생에 대한 가치 부여’, ‘나란 존재에 대한 의미 추구’, ‘나 자신에 대한 존중과 예의’, 이것처럼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때로 별 의식 없이,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되는대로, 그저 닥치는 대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단 한번뿐인 우리네 인생, 얼마나 소중한 나날인데, 그렇게 살아가서야 되겠습니까?
내 삶에 대해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내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이 혹독한 고통에 대해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 아닐까요? 내가 오늘 지고 가는 이 십자가에 대한 가치 부여가 아닐까요? 매일 밀물 밀려들듯 내게로 찾아오는 일상의 십자가에 대한 의미 파악, 이런 노력들이 내 인생에 대한 가치 부여라고 생각합니다.
고통 가운데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 한 가지는 내가 지금 견디고 있는 이 고통이 별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데서 오는 고통입니다.
민주화 운동이 한창일 때 수많은 젊은이들이 좁고 차가운 감방에서 혹독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목적이 뚜렷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희생이란 큰 목표가 있었기에 그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었습니다.
10달 가까이 뱃속에 들어있던 아이가 막 세상으로 나오기 직전 산모가 겪는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통해 하느님의 축복인 고귀한 생명 하나가 탄생된다는 큰 이유로 인해 산모는 그 큰 고통을 기꺼이 견뎌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이 순간 겪고 있는 고통이 하느님을 위한 것도 아니고, 공동선을 위한 것도 아니고, 이웃을 위한 것도 아니고, 나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한 것도 아니고, 그저 아무 가치 없는 무가치한 고통일 때, 그 고통은 참으로 견디기 힘들 것입니다.
이런 고통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은 쉽게 좌절하게 됩니다. 삶에 대한 기대도 사라집니다. 쉽게 삶에 대한 끈도 놓아버립니다.
반대로 지금 이 순간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이 아무리 극심하다 할지라도, 그 고통에 대한 의미부여가 이루진다면, 신기하게도 그 고통을 극복할 힘과 용기가 생겨납니다. 아무리 고통스럽다할지라도 희망을 지니고 걸어가게 됩니다.
신비스런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아무리 극심한 고통이라 할지라도 그 고통의 가치를 파악하게 되면 더 이상 그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 축복으로 변화됩니다. 은총으로 승화됩니다. 감사로 변환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큰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보내고 계십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왜 하필 나인가?’ ‘왜 유독 내 십자가만 이렇게 무거운가?’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런 큰 십자가를!’ 라며 힘겨워하시는 분들,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고통 잠시뿐입니다. 우리의 이 고통, 견디고 견디다보면 어느새 축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죽을힘을 다해 감내해내고 있는 이 혹독한 슬픔, 머지않아 춤으로 바뀔 것입니다. 우리의 이 끝도 없는 불행, 오래 가지 않아 언제 그랬냐 는 듯이 행복으로 승화될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하느님께 취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감사’입니다. ‘찬미’입니다. ‘환호’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하느님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하느님의 또 다른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은 고통 속에서도 감사하는 신앙입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만족하는 신앙입니다.
근심을 풀라
-김찬선신부-
절에 가면 해우소(解憂所)가 있지요. 근심을 푸는 곳이라는 뜻이고 더 불교적으로 표현하면 번뇌가 사라지는 곳입니다. 화장실, 뒷간을 절식으로 이렇게 멋지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곰곰이 씹어보면 볼 일도 근심거리라는 뜻이고 볼 일을 보고나야 근심이 풀린다는 뜻이지요. 실상 설사 때문에 급한데 일을 볼 수 없다면 큰 근심거리지요.
우리는 기쁨과 즐거움을 같이 쓰곤 합니다. 두 말 사이에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같은 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있는 것이겠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같이 쓰는 말이 근심과 걱정입니다. 순전히 저의 해석이지만 ‘어떤 일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 씀’이라는 면에서 같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근심이 이미 생긴 문제나 일에 대해 부정적으로 마음을 쓰는 것이라고 한다면 걱정은 미래에 생길 문제나 일을 미리 앞서서 부정적으로 마음을 쓰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문제는 금방 해결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기에 근심도 하고 걱정도 하게 됩니다.
저의 경우 평양에 평화 봉사소라는 큰 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돈이 마련되어 있지 않으니 근심거리이고 돈 문제가 해결되어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 걱정거리지요. 이렇게 이미 생긴 일과 앞으로 일이 되어 갈 것을 부정적으로 마음을 쓰면 근심과 걱정이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크게 근심 걱정하지 않습니다. 믿음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문제를 하느님께서 해결해주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얘기합니다. 근심 걱정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해결 능력이 없거나 부족한 나를 보면 근심 걱정이 되고 그래서 근심 걱정하지만 해결 능력이 없기에 해결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는 분, 즉 해결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하시고자만 하시면 하느님 뜻에 맞기만 하면 다 해결해 주실 것이기에 하느님을 믿고 맡기면 됩니다.
공중에서 재주를 부리는 써커스가 있습니다. 재주를 부리는 사람과 잡아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주부리는 사람과 잡아주는 사람이 0,1초의 차이도 없이 공중에서 만나야 떨어지지 않는데 0,1초의 차이도 없이 공중에서 만날 수 있도록 잡아주는 사람이 정확하게 마중 나와야 합니다.
0,1초 차이도 없이 공중에서 만나게 되더라도 잡아주는 사람이 잘 잡아줘야지 재주부리는 사람이 잘 잡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재주부리는 사람은 그저 잡아주는 사람을 믿고 두 손을 내밀기만 하면 됩니다. 믿지 못하고 재주부리는 사람이 잡으려 하면 떨어지거나 둘 중의 한 사람의 팔이 부러진다고 합니다.
그러니 재주부리는 사람이 할 것은 믿는 것이고 자기가 무엇을 하려 하지 않는 것이며, 완전히 내맡기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이 떠나더라도 그래서 시련이 닥치더라도 근심하지 마라 하십니다. 당신이 다시 오실 것이고,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바오로는 이런 믿음 때문에 사람들이 해치려는 상황에서도 느긋할 수 있었습니다
영광의 날이 오면
-백남해 신부-
“신부님, 아담은 배꼽이 있나요?” “배꼽?” 초등학생 요한이 폐부 깊숙이 찌르는 초 난감 질문을 해옵니다. “에~ 아~ 그러니까, 아담이 말이지.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어~ 배꼽이 있으면 어머니가 있을 테고, 그러면 최초의 사람이 아닌데. 배꼽이 없다면 사람이 아닌 것 같고. 어~.” 신부님의 곤혹스러운 얼굴을 재미있다는 듯이 들여다보는 녀석이 미워 죽을 지경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아, 신부님이 지금 잘 모르겠거든, 나중에 주교님께 여쭈어보고 이야기해줄게.” 이럴 땐 수단 자락 휘날리며 재빨리 도망가는 게 상책입니다. 아이들은 지뢰밭 같습니다. 가끔 대책 없는 질문을 해대면 땀이 ‘삐질삐질’ 납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답 없는 질문을 하는 것은 꼭 아이들만이 아닙니다. 어른들도 사는 일이 힘들고 지치면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 쉬듯, 원망하듯 주절주절 하느님께 떠들어댑니다. 꼭 어떤 답을 듣고자 쏟아내는 말들이 아닙니다. 그냥 넋두리하듯, 혼잣말하듯 그렇게 무거운 이야기들을 부어버립니다. 신부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이 힘들 때면 투덜대듯 하느님께 지청구를 해댑니다. 하느님께서 들으시고 빙긋 웃으시다가 꿀밤이라도 한 대 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는 말씀대로 주님 영광의 날이 오면 아무 의심 없이 기쁨만 남으리라 믿습니다.
인생을 맑게 해주는 것은
-서영남-
성령께서는 슬픔과 고통을 기쁨과 행복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전화위복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슬픔과 고통은 인생을 진지하게 하고 맑게 해줍니다. 고통을 겪어본 사람은 고통을 피하려는 사람과 달리 너그럽습니다.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슬픔과 고통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인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너그러움을 깨닫는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청송교도소에서 십팔 년째 형을 살고 있는 콜베 형제는 앞으로도 몇 년을 더 그곳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콜베 형제는 고통스런 현실 속에서도 잔잔한 기쁨을 나누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의 편지글을 소개합니다.
“봄비가 내리고 나서 꽃샘추위가 왔습니다. 저는 며칠 동안 허리가 아파서 혼났습니다. 비만 내리면 허리가 아프니 참 이상하지요. 아마 허리와 비가 사촌 사이인가 봅니다. 처지가 비슷한 사람끼리 사이좋게 지내다가 갑자기 원수처럼 돌아서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사람이 백 년 천 년 사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보면 잠깐 왔다가 가는 인생인데 왜 서로 싫어하고 싸움을 할까요? 사람이기에 그런가요? 요즘 공장에서 못 볼 것을 많이 봅니다. 서로 사이좋게 의지하며 살던 형제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잘났다고 싸움을 벌입니다. 얼마 전에 연 사흘 동안 계속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반장인 저는 싸움을 말리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수인들끼리 서로 싸움을 하면 징벌방인 독방으로 가게 됩니다. 형을 오래 산 저는 그 방이 어떤 곳인지, 거기서 겪는 고통을 잘 압니다. 저는 형제들이 독방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제가 머리 숙여 책임진다고 빌어서 겨우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튿날 개신교 구역장 두 명이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주먹질을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또 제가 대신 머리 숙여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또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세 번째는 저도 지쳐서 용서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때문에 끝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또 용서했습니다. 형제들이 저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는 형제들이 불쌍해서 용서하고 또 용서합니다.
다른 공장의 반장들은 형제 수인을 대하는 태도가 아주 다릅니다. 처음엔저도 안하무인처럼 살았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아’ 하면 저는 ‘어’까지 압니다. 저도 그렇게 살았지만 지금은 자비가 넘치는 분의 용서를 받고 그 사랑을 알게 되었으니 어떻게 이런 불쌍한 형제들을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이곳에서 저는 항상 불쌍한 형제들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청송에서, 콜베 올림.”
-박종현 신부-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바로 눈 앞에 찾아온 전날 저녁 밤이었습니다. 당신께서 어떻게 사람들에게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또 어떻게 돌아가시게 될 것을 미리 내다보셨던 예수님께서는 그 극심한 공포와 두려움 앞에서 당신 자신보다 갑작스런 혼란에 빠지게 될 제자들을 먼저 걱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세상 모든 이의 죄를 대신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셔야하는 십자가의 수난을 앞두고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 다음에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을 미리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부활을 맞이하기 전에 거쳐야하는 수난과 죽음의 고통이 너무나 지독하고 잔혹했기에 예수님은 수난의 전날 밤 몸서리쳐지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피땀까지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힘겨운 고난의 시간을 당신의 제자들도 잘 견디어낼 수 있을지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때가 올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마치 유언처럼 남기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에게 있어 희망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희망 한 줌을 가슴속에 품고 사는 사람은 어떠한 역경과 시련이 닥쳐와도 이겨낼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수난을 앞두시고 제자들에게 주시고자 했던 것은 바로 그들을 지켜줄 희망이었습니다. 당신은 비록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제자들이 당신의 부활을 기다리면서 그 긴박하고 절박한 상황을 잘 헤쳐나가기를 예수님은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이 죽으셨다가 부활하리라는 희망의 말씀을 미리 건네주셨던 것입니다.
사랑이신 예수님. 그분은 우리가 세상의 고통과 아픔들 앞에서 혹시나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을까 걱정해주십니다. 그리고 죽음마저 이겨내신 당신의 부활을 늘 깨우쳐주시며 그 모든 역경과 시련들을 이겨낼 힘과 용기와 지혜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큰 희망이고 가장 큰 위로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시련과 역경들을 헤쳐나가도록 합시다.
나의 기쁨, 하느님의 기쁨
-조영만신부-
스승 예수께서 이제 곧 떠나가심을 준비하며 제자들에게 남겨두시는 위로의 말씀을 고별인사의 형식으로 담아 전하는 요한복음 16장의 내용을 묵상하다보면 지극한 박해와 고통의 상황에서도 이들을 위로하시려는 스승의 마음을 전달하고자 요한복음서의 저자가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잘 전해집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는 그야말로 세상을 향한 ‘왕따’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지닌 가치는 세상의 가치와 너무도 달라 있었습니다. 세상은 똑똑하고 잘 살고 높은 자들이 판치는 곳이었는데, 그들은 정반대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그렇지요? 이기기보다는 져야 하고, 가지기 보다는 내놓아야 하고, 내 뜻대로 하기 보다는 하느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헤아려야 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세상을 거슬러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준다는 기쁨이 그들에게 기쁨이 될 수 없었고 세상에서의 즐거움이라는 것이 그들에게는 도리어 죄가 되고 짐이 되는 경우가 더 많았을 테니까 말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분명 세상 속에서 힘들었지만 그들이 받을 상, 그들이 받을 기쁨은 세상살이가 힘들면 힘들수록 더욱 더 빛이 났을 것입니다. 세상에 상대해서 그들은 확실히 표가 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갈수록 이것이 옅어집니다. 사실 우리 천주교 신앙인들이 그렇습니다. 별로 표가 잘 안 납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매력이기도 하겠지만 신앙적으로 놓고 본다면 뼈아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그 생활이 똑같다는 거, 안 믿는 사람들이 쫓고 바라는 그것을 똑같이 믿는 사람들도 따라가지 못해 안달을 하고, 안 믿는 사람들이 무시하고 폄하해서 바다도 막고, 농토에 철조망을 쳐서 생명이란 생명은 다 죽여 버리고 떠 빨리 살고, 더 소유하며 살고, 더 안전하게 살겠다고 닥치는데로 죽이고 내쫓고 갈라 세우는 일에,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믿으나 안 믿으나 똑같이 살 때, 오늘 복음은 전혀 우리에게 기쁜 소식으로 와닿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기쁨이 너희에게는 근심이 되겠지만 이 근심이 머지 않아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 말씀하시는 그분의 삶이 지금 우리들 안에서 파동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세상의 기쁨을 나도 못 쫓아 안달하며 사는데, 어이 이것이 근심이 될 것이며, 세상의 일 안 풀린다고 오만 근심 다 하는데 이 어이 하느님 안에서 기쁠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까?
오늘 복음이 그야말로 기쁨이 되려면 내가 사는 삶이 세상의 삶과는 좀 많이 달라야 합니다. 세상은 구하지 않는 것을 나는 구할 줄 알아야 하고, 돈만 되면 뭔 짓이라도 서슴치 않는 이 세태에 대하여 가슴 아파해야 합니다. 내 살자고 너 죽이는 일이 얼마나 염치없는 짓인지, 무명의 생명들을 향해서도 눈물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힘 있는 자들 따라가지 못해 안달하다가는 결코 예수님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세상의 즐거움 나도 채우겠다고 따라 나섰다가는 그 길에서 정말 예수님 만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즐거움, 예수님의 기쁨은 이 세상의 길 정반대편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하는 것에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거슬러 오름에 대한 당당함이 필요한 일입니다.
신앙생활 10년을 하나 20년을 하나 이제 막 세례 받은 사람과 하나 다를 바가 없고, 어디 가서 “나는 자랑스러운 십자가의 신앙인이요, 이 십자표시가 나를 구원할 것이요.” 하고 식당가서 성호 긋는 것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어떻게 이 신앙으로 구원 받기를 바라겠습니까?
기왕지사 시작한 신앙생활 아닙니까? 개신교회 신자들은 어디 가서도 자랑스럽게 성서를 펴듭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이야기하고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도 어딘가 남다른데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신앙인이기 때문에 나는 세상과 이렇게 다르다고 자랑할 수 있는 꺼리가 좀 있어야, 그래야 나도 하느님의 기쁨에 함께 동참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새벽을 열며
어제는 날씨가 너무나 좋았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따뜻한 햇볕, 그리고 거리도 그렇게 깨끗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제 아침에는 기분 좋은 상쾌함까지도 느낄 수 있었지요. 왜 어제는 이러한 특별한 느낌을 받았을까요? 어제 역시 우리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날에 불과한데 말이지요. 그것은 그저께 날씨가 너무나 나빴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흐리고 비도 많이 온 그저께 날씨에 비해서, 어제의 날은 정반대로 맑고 깨끗함을 느끼기에 충분한 날씨였던 것이지요. 즉, 그저께에 비해서 정반대로 좋은 날씨였기에 더욱 더 좋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만약 계속 좋은 날씨만 계속된다면 어제의 날씨가 특별히 좋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비교되는 날씨가 있기 때문에, 어제의 날씨가 특별히 좋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들의 삶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바로 내게 주어진 고통과 시련의 시간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나의 좋은 날들을 더욱 더 부각시킬 수 있는 시간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좋은 날씨만 계속되었을 때 그 날씨의 소중함을 모르듯이, 고통과 시련이 없는 날의 연속에서 우리들은 주님께서 주신 삶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마라톤을 즐깁니다. 42.195Km.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닙니다. 이 마라톤을 뛰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처음에는 별 다른 표정이 없지만 결승점에 다다라서는 너무나 힘든 표정들입니다. 그만큼 마라톤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도 마라톤을 즐기는 사람들이 더욱 더 늡니다. 왜 그럴까요?
등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땀 뻘뻘 흘리면서 정말로 어렵게 정상에 올라갑니다. 힘들게 올라간 정상. 그러나 힘들게 올라간 그 거리를 다시 내려와야 합니다. 끔찍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등산을 너무나도 좋아합니다. 어차피 내려올 산을 왜 힘들게 올라갈까요?
맞습니다. 그 과정은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그 고통을 참아내고 이겨낸 뒤에 얻는 성취감 때문입니다. 그냥 무작정 힘들기만 하고 아무런 성취감을 느낄 수 없다면 사람들이 이러한 운동을 즐길까요? 하지만 고통을 모두 잊게 해 줄 큰 기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열성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고통과 시련이 내게만은 절대로 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에게 절대로 유익하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유익할 수도 있는 고통과 시련이지만, 우리의 나약함으로 이길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이러한 말씀으로 희망을 주십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산모가 새 생명의 해산으로 진통의 고통을 잊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 안에서 고통과 시련을 잊고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햇빛만 계속 비추면 사막이 된다.’라는 격언을 기억하면서 주님 안에서 고통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빠다킹신부
기쁨을 누릴 때
-김동하 신부-
해산을 눈앞에 둔 여자는 몸과 마음으로 크나큰 근심을 겪어야 합니다. 몸으로는 비할 데 없는 진통을 견뎌야 하고 마음으로는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불안해합니다. 근심으로 어쩔 줄 몰라 하던 여자는 새로운 생명인 아이를 낳고서야 비할 데 없는 기쁨에 에워싸입니다. 근심을 거쳐야 맛볼 수 있는 달디 단 기쁨은 삶을 이끄는 힘입니다. 살아가면서 근심보다는 기쁨을 더 많이 이야기합니다. 살림살이를 짓누르는 고통과 불안을 이겨내고자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지금은 아프고 고된 근심투성이에 지나지 않지만 내일은 새로운 생명이라는 기쁨을 맞이하고자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그동안 넘치도록 고통과 불안이라는 근심을 겪었습니다. 고귀한 한 분께서 근심의 절정인 죽음을 바쳐서 완전한 삶이란 생명을 되찾았습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내일이 죽음을 거치면서 오늘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다시 만나게 된 새 생명 안에서 기쁨을 누릴 때입니다.
기쁨을 잘 관리하는 노력
-윤영수 수녀-
주님은 당신과의 이별에서 오는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는 것에 대한 설명을 구체적으로 해주십니다. 산모가 아기를 낳을 때의 근심과 출산 후에 느끼는 기쁨에 비유하시며 참 기쁨을 확실하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주님 부활의 기쁨은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우리의 것임을 확언해 주십니다. 살면서 간혹 벅찬 기쁨의 순간에 서면 불안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 기쁨은 진정한 나의 것이 아니고 곧 누구에게 빼앗길 것 같은 불안 때문에 진정한 기쁨의 순간을 놓치고 마는 것이라고 합니다. 기쁨의 절정에서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고, 그 기쁨이 현실임을 확인하면 감격에 잠기게 됩니다. 이런 기쁨을 빼앗기지 않고 간직하게 된다는 보장을 주님이 해주십니다. 하지만 주님이 말씀하시는 기쁨은 지나가는 세상의 기쁨이 아닌 생명을 낳는 기쁨,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 안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몇 년씩 신앙생활을 쉬고 있는 교우에게 그 이유를 물으면 "세례를 받고는 참으로 기쁘고 행복해서 열심히 기도생활을 했는데 세상일에 관심 두고 몇 번 빠지다 보니 게을러지고 기쁨도 사라지고 해서 쉬게 된 것 같아요."라는 대답을 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기쁨을 체험하고 또 체험된 그 기쁨을 잘 관리하는 노력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화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오기까지는 재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랜 시간 동안 노력을 아끼지 않고 투신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신앙은 더욱 혼신을 다하는 정성이 들어가야 하리라고 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청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주신다."는 말씀에 힘입어 신앙의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살았을 때의 기쁨
-도정호 신부 -
오늘 복음에 ‘너희가 지금은 울며 애통해 하고 있고, 또 근심에 싸여 있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이제 제자들도 주님께서 당신 곁을 떠나실 거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을 하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스승 예수님께서 수난당하시고,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생활했던 지난날을 떠올렸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사람들에게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행하셨다.”(사도 10, 38)는 기억도 있습니다.
우리 스승님은 참 좋은 일을 많이 하셨다는 기억.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이 숨 쉬고 있는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기억과 사람을 사랑하셔서 가진 것마저도 내어 놓으셨고, 나누셨고, 아픈 사람 찾아가 함께 해 주시면서 위로와 힘을 주셨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셨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욕하고 모든 사람이 떠나갈 때 유일하게 당신만은 곁에 있으면서 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주셨고, 소외 받은 그와 함께 해 주시면서 힘을 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죄인이라고 사람들이 놀리고 모두가 포기하고 떠났지만 하느님만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믿게 하셨습니다. 스승 예수님은 그렇게 좋은 일을 많이 하셨다는 겁니다.
이런 스승님이셨기에 그만큼 예수님과의 이별은 울음이 나오고 떠나보내기에 너무나 애통하고, 앞으로 예상되는 일들에 대한 걱정이 앞서고, 스승이 안 계신 빈자리가 근심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별을 슬퍼하고, 애통해 하지만 당신을 증거하고, 증언하기 위해 어떤 사람으로 바뀔지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에게서 오는 위로와, 하느님에게서 오는 기쁨으로 인해 힘을 얻을 것이라는 점과 하느님을 알리고 당신의 부활을 증언하는 일에 투신할 것을 아십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의 사랑이 살아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안에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하느님의 선하심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듣도록 타인을 위해, 이웃에게 먼저 배려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많고, 함께 살아가도록 생각을 바꾸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이 결코 어둡고 무의미한 것만이 아니라고 알려주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살았을 때의 기쁨을 충분히 찾을 수 있는 세상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면서 사람과 함께 계시기에 제자들이 그 기쁨 때문에 살았고, 그 기쁨을 세상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았고, 그 기쁨을 세상에 빼앗기지 않은 것을 보여주었듯이, 참으로 아름답고 좋은 곳에 살면서 주님께서 주신 하루를 우울하게 시간을 보내지 말고 기쁘게 감사하면서 살아갑시다.
오늘 하루도 좋은 시간들이 되길 바랍니다............◆
<독서> : 주님으로부터 받는 위로와 격려를 통하여 고난을 이기는 바울로
-경규봉 신부-
바울로는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환상 가운데 주님을 만났다. 다마스쿠스(9,4)에서 주님을 만나 극적으로 회개한 이후 트로아스(16,9)와 예루살렘(22,17) 등지에서 그는 주님을 만남으로써 위로를 받고 힘을 얻었다.
그는 이후에도 환상 가운데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23,11; 27,23). 이처럼 환상 가운데 나타나신 주님께서는 바울로가 흔들림 없이 복음을 전하는데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었다.
사실 바울로는 고린토에 도착했을 때 두려워서 몹시 떨었다(1고린 2,3). 고린토의 유대인들은 대단히 완고했고 바울로를 적대시했다. 더욱이 회당장 그리스보와 같은 지도자급 인사가 개종하였으니 바울로에 대해 박해가 얼마나 더 심해졌겠는가! 그래서 바울로는 두려움에 떨며 유대인들의 박해가 더 심해지기 전에 조용히 고린토를 떠나고자 했다(16,19-19; 17,13-14).
이처럼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에게 주님께서는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신다. 아무도 그를 해치지 못하도록 지켜주시겠다고 말씀하시며 위로와 격려를 하신다. 이 도시에는 복음을 듣고 구원받아야 할 선택된 하느님의 백성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로는 1년 6개월 동안 그곳에 머물며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유대인들은 아카이아 지방의 총독으로 갈리오가 부임하자 바울로가 불법적인 종교를 전한다는 명목으로 바울로를 고발하였다. 그러나 총독은 이 사건이 민사나 형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유대교와 관련된 문제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고발을 기각하고 그들을 법정에서 몰아냈다.
이처럼 바울로에 대한 유대인들의 고소가 기각되고 총독이 유대인들을 냉대하는 것을 보자 반유대적 감정을 품고 있던 그리스인들이 책임자격인 회당장을 무고죄로 매질하였다. 바울로는 그곳에서 머무르다가 브리스킬라와 아킬라 부부와 함께 시리아로 떠났다. 바울로는 하느님께 정한 서원의 기간을 마치자 겐크레아(고린토와 가까운 곳으로 고린토의 외항이며 교통의 요충지)에서 머리를 깎았다(민수 6,2-21 참조).
바울로는 복음을 전파하는 가운데 많은 박해를 받았다. 갖은 욕설과 야유를 들었고, 심한 박해를 받았으며 적대자들의 돌에 맞아 혼절하기도 했다(사도 14,19). 그는 “감옥에도 더 많이 갇혔고 매는 수도 없이 맞았고 죽을 뻔한 일도 여러 번 있습니다. 유다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몽둥이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고 밤낮 하루를 꼬박 바다에서 표류한 일도 있습니다.
자주 여행을 하면서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도시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가짜 교우의 위험 등 온갖 위험을 다 겪었습니다. 그리고 노동과 고역에 시달렸고 수없는 밤을 뜬눈으로 새웠고 주리고 목말랐으며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며 헐벗은 일도 있었습니다.”(2고린 11,23-27)라고 고백한다. 뿐만 아니라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은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그를 줄곧 괴롭혔다(2고린 12,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모든 두려움과 고통을 이겨내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그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주님께 대한 깊은 체험을 통해서 그 모든 박해와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위로를 받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자신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앙인은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들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님으로부터 받는 사람이다. 주님으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받음으로써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위험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사람이다.
오늘 주님으로부터 용기와 힘을 얻고,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주님의 일을 하는 신앙인이 되자.....◆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 -박상대 신부-
세상의 기쁨은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예수님을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존재로 제거했다는 데 있다. 세상의 기쁨은 곧 제자들의 슬픔과 근심이요, 참혹함과 비통함이다. 예수님을 수난과 죽음으로 몰아 부친 세상이 승리에 취해 기뻐하는 가운데 제자들은 눈물을 흘리고 고통과 좌절을 맛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조금 있으면 세기의 대 역전극이 벌어질 것이다. 좀 더 기다려야 하겠지만, 제자들의 슬픔과 근심은 머지않아 기쁨과 즐거움으로 바뀔 것이다.(20절) 제자들이 기뻐하게 되면, 반대로 세상은 슬퍼하게 될 것이 빤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것은 성령의 몫이기 때문이다. 보호자시며 진리이신 성령께서 오시면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이 죄라고 지적하실 것이고, 이 세상의 권력자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로써 정말 심판을 받을 자가 누구인지를 보여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6,9-11 참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맞닥뜨리게 될 상황을 마치 해산을 앞둔 산모의 걱정과 고통에 비유하신다.(21절) 하느님 백성이 당하는 고통을 해산하는 여인에 비유하는 것은 예언문학에도 자주 나타나는 일이다.(호세 13,13; 이사 27,17-18; 예레 6,24 참조) 아이가 태어나면 사람 하나가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에 산모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듯이 제자들의 고통과 슬픔도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기쁨과 즐거움으로 바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쁨의 때와 기쁨의 이유를 말씀하신다. 바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22절) 부활의 기쁨은 산모의 기쁨에 비유되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산모의 근심과 걱정은 사라지듯이 예수님의 부활도 마찬가지로 제자들을 기쁨에 넘치게 할 것인즉, 부활은 새로운 생명에로의 탄생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죽음으로부터 생명이 살아나고, 고통으로부터 기쁨이 태어난다. 이 생명과 기쁨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빼앗아 갈 수 없다. 그 때가 오면 더 이상 의문도 질문도 없을 것이다.(23절) 그러나 오직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사건을 보는 자만이 생명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 슬퍼하거나 울고 있는 자는 부활의 좋은 증인이 될 수 없다. 부활의 진정한 기쁨을 누리는 자만이 참다운 부활의 증인이 된다. 반대로 예수님을 죽이고 기뻐했던 세상은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잘못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도 없을뿐더러 그 기쁨을 알 수도 없다. 결국 세상의 기쁨과 상대적인 제자들의 슬픔은 죽음과 부활 사이의 잠시 동안이겠지만, 대 역전극이 벌어진 후에 맞이할 세상의 슬픔과 제자들의 기쁨은 영원할 것이다. 여기서 잠시 기쁨에 대하여 살펴보자. 기쁨이란 인간의 기본 정서 중의 하나로서 슬픔과 대비되는 감정(感情)이다. 중요한 것은 감정이란 어떠한 대상에 대하여 가지거나, 어떤 분위기에 따라 일어나는 마음의 상태나 현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기쁨의 감정은 그와 반대되는 노여움, 슬픔, 두려움, 쾌감, 불쾌감 등과 같은 마음의 표현이다. 마음의 표현은 외적으로 드러날 수도 있고, 내적으로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외적으로 표현되거나 내적으로 머물게 되는 기쁨의 다음 단계가 더 중요하다. 기쁨은 마음의 현상이나 상태이기 때문에 필시 다음 단계의 동작을 유발시킨다. 즉, 기쁨을 맛보거나 누리는 주체(主體)는 일반적으로 자랑 또는 교만을 표하거나, 아니면 감사의 행동을 보이게 된다. 예를 들어 대학진학을 원하는 고등학생에게 응시한 대학의 경쟁이 심할수록 합격했을 때의 기쁨이 커지는 것이다. 이 때 고등학생의 기쁨은 다음 단계로 자랑, 아니면 감사를 유발시킨다. 자신의 힘으로 예수님과 하느님을 죽여 제거한 세상의 기쁨도 다음 단계로 자랑과 교만과 자만에 가득 차 우쭐댈 것이다. 이럴 때의 기쁨은 오히려 육체가 성취한 쾌락에 가깝다. 그러나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주님을 뵙게 된 제자들의 기쁨은 다음 단계로 감사의 정동(情動)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때의 기쁨은 정신적인 쾌감이다. 우리 자신도 늘 그렇다. 따라서 기쁨이 있을 때 자만과 교만에 빠지지 말고 겸손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럴 때 기쁨은 분명히 그 이상으로 커질 것이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주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과연 누가 빼앗아 갈 수 있겠는가?
"벽(壁)이 변하여 문(門)으로"
-이수철신부
오늘 말씀 묵상
중 예전 언젠가 나눴던 강론 주제,
‘벽이 변하여 문으로’가 생각났습니다.
‘벽과 문’ 참 풍부한 영적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무덤에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요즘 부활시기 계속되는 아침기도 독서 후 계응송 말씀처럼,
무덤의 벽을 뚫고 생명의 문으로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답답할 때
본능적으로 하늘이나 창밖을 바라봅니다.
참으로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벽을 대할 때면
누구나 답답함을 느끼지만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들판을 바라보면
한없는 자유를 느낍니다.
어제 마침 어느 성당의 노인 대학 노인들 80여명이
성지 순례 차 수도원에 들렸다 미사를 드렸는데,
이분들의 획일화된 붉은 유니폼의 옷들이
순간 벽처럼 느껴져 숨 막힐 듯 답답했습니다.
이래서 벽같이 느껴지는 단색의 옷들보다는
개성이 드러나는 다양한 색깔의 옷들이었다면
자유로운 문처럼 느껴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창 지닌 방이 좋은 방이듯,
좋은 마음의 창문 지닌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창문을 통헤 하늘 풍경을 보듯이,
마음의 창을 통해 영적 세계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은 만날 때 마다
영감이나 깨달음을 주어
우리를 자유롭고 평화롭고 기쁘게 합니다.
과연 나는 닫힌 벽같은 사람입니까?
또는 열린 문 같은 사람입니까?
영적 세계에서는 벽과 문이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미워하면 벽이지만 사랑하면 문입니다.
슬퍼하면 벽이지만 기뻐하면 문입니다.
절망하면 벽이지만 희망하면 문입니다.
화내면 벽이지만 웃으면 문입니다.
불신의 벽이요 믿음의 문입니다.
어둠의 벽이요 빛의 문입니다.
죽음의 벽이요 생명의 문입니다.
거짓의 벽이요 진리의 문입니다.
벽이 문이 되고, 문이 벽이 되고,...
무수히 반복하며 사는 우리 인생입니다.
어찌 보면 ‘벽과 문’은 우리 삶의 리듬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마음의 벽은 마음의 문으로 변합니다.
그대로 자유의 문, 기쁨의 문, 평화의 문이 되어 버립니다.
이래서 끊임없이 바치는 기도에 미사입니다.
기도와 미사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벽을 활짝 열린 문으로 바꿔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사라지면
곧장 우리는 답답한 벽이 되어 버립니다.
냉담으로 완고해진 이들이 이의 좋은 본보기입니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뵈올 때
기쁨의 문으로 변하는 근심의 벽이요,
아무도 이 기쁨의 문을 닫지 못한다는
주님의 분명한 말씀입니다.
바오로가 사도행전에서
환시 중에 만난 부활하신 주님이
바로 그의 문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모셨기에
주님의 선교사로서 험하고 답답한 세상 속에서도
늘 자유로운 문이 되어 평화롭고 기쁘게 산 바오로였습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벽 같은 우리를 문으로 바꿔주시어
당신 안에서 자유롭고 기쁘고 평화롭게 살게 하십니다.
아멘.
뭉치면 산다
-노성호 신부-
흩어져서 여러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 하나로 뭉쳐서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얼마나 더 효과적인지요. 2002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외쳤던 온 국민들의 함성이 그랬고, 손에 촛불을 들고 마음을 모았던 촛불 시위대의 모습이 그랬으며, 불의에 대항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그랬습니다. 결코 이뤄질 수 없을 것 같은 일이었고, 정말 미약한 사람들의 작은 손길 같았지만, 일치를 이루고 단합했을 때 그 잠재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었고, 결국 무언가 위대한 결실을 맺으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면 결코 이룩할 수 없을 일이었으나 모두 하나로 일치를 이루어 신화를 창조해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왔다는 네 가지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 ‘일치’, ‘친교’ 등의 의미가 중시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한 분이신 것처럼 그분의 아들 딸들인 우리 모두도 하나이고, 하나인 우리들이 이루게 되는 교회 또한 하나라는 사실. 그 누구도 소외되거나 버림받지 않고, 모두가 한 가족 한 형제로서 일치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랑의 공동체를 실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간직해 나가야 할 가톨릭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치와 친교의 모범을 몸소 보여 주셨고, 그 삶 안으로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기도해 줄 수 있을 때 더욱더 하나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양승국신부-
<흘러넘치는 축복의 잔>
저희 살레시오회의 가장 우선적 사목대상자들인 ‘가난한 청소년들’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라는 주제의 소논문 하나를 준비하면서, 단순히 경제적 가난만이 가난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현대에 와서 ‘가난한 청소년’이란 보다 포괄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 궁핍하기에 불편한 점이 많지만 튼튼한 가족구조 안에서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는 청소년과, 경제적인 풍요 속에서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거듭되는 부모의 불화로 인한 심각한 정서적, 심리적 문제를 안고 있는 청소년, 둘을 놓고 비교해볼 때 과연 누가 더 가난한 청소년일까요?
많은 청소년들이 물질적 가난뿐만 아니라 정신적 가난, 애정의 결핍, 영적 가난, 심리적 가난...등으로 힘겨워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결국 한 가난한 청소년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보다 포괄적인 사목적 접근이 요청됩니다. 포괄적인 사목적 접근이란 바로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 행하셨던 치료적 접근, 영적 접근, 전인적 접근입니다.
물질적 가난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우선 펀드를 찾아야 하겠지요. 이어서 정서적, 심리적 가난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심리치료사, 의사와도 같은 전문가를 찾아야 합니다. 애정적 결핍을 보충해주기 위해서는 마음이 따뜻한 그 누군가를 찾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 차원에서의 지지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한 유능한 의사선생님께서 심각한 간경화 증세로 고생하던 한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거의 회복 불가능한 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의사선생님은 온갖 정성을 다해 치료에 임했습니다. 최고의 의료기술을 바탕으로 한 적절한 치료와 처방은 제대로 먹혀들었고, 드디어 환자는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서 그분이 다시금 응급실로 실려 왔습니다. 이유는 어느 정도 간 기능이 회복되었는지 확인해보기 위해 그분은 퇴원하는 즉시 엄청난 양의 술을 마시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과음상태에서 차를 몰다가 대형 사고를 저질러서 응급실로 실려 오게 된 것입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그 의사 선생님은 병에 대한 치료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셨답니다. 그분은 이제 전보다 훨씬 겸손한 자세로 환자를 대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증상에 대한 치료도 중요하지만, 정서적, 애정적, 신앙적 치료 역시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의사 선생님은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도 진지하게 상의하게 되었고 많은 효과를 보고 있답니다.
부족한 우리 인간들도 한 인간의 치유와 새 삶을 위해 이토록 노력하는데,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기울이시는 노력은 얼마나 큰 것이겠습니까?
한계와 모순투성이의 우리 인간들도 다른 한 인간에게 기울이는 정성이 이토록 극진한데, 하물며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배려는 얼마나 큰 것이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걱정과 근심, 갖은 스트레스로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오늘 우리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초산인 산모가 산달이 서서히 다가오면서 갖게 되는 걱정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생명을 잉태한다는 것에 대한 기쁨도 크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갖은 근심 걱정들이 꼬리를 물것입니다. 아이가 제대로 자리를 잡았는지, 만의 하나라도 기형은 아닌지, 얼마나 아플 것인지, 아이를 낳을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산모는 아이가 무사히 탄생함과 더불어 그간의 모든 고통을 다 잊어버립니다. 자신을 꼭 빼어 닮은 한 생명이 이 세상에 왔다는 것에 대한 기쁨과 충만한 행복만이 남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직접 대면하기 전까지 우리가 지니게 되는 근심걱정은 정말 대단합니다. 과연 하느님께서 내게 뭐라고 하실까, 잘못한 것 엄청 많은데 혼나지 않을까, 불붙는 지옥 불에 떨어지지는 않을까...
그러나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보는 순간, 그 모든 걱정과 두려움은 순식간에 사라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몇 천배, 몇 만 배 더 자비로우시겠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족한 우리의 인생이지만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실 것입니다. 자비로운 아버지께서는 지난 세월 우리의 모든 부끄러움과 죄악, 슬픔과 눈물을 말끔히 거두어가시고 흘러넘치는 축복의 잔을 우리 손에 들려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들고 있는 잔에 당신 사랑의 포도주를 흘러넘치도록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힘겹고 위태로웠던 인생길이지만 그래도 끝까지 하느님 저버리지 않고 잘 걸어왔다는데 대한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고통을 거쳐서 기쁨과 환희로
-강영구신부-
초록 생명이 찬란하게 피어나는 오월의 아침입니다. 당신은 느티나무가 저토록 푸르고 늠름할 수 있는 까닭을 아십니까? 철쭉꽃들이 눈부신 진홍색과 백색을 자랑하면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까닭을 아십니까? 거친 세월의 풍상(風霜)과 계절의 변화, 혹독한 겨울추위를 이겨냈기 때문입니다. 시련과 고통의 시간을 이겨내지 못한 나무들은 땔감이 되거나 뿌리 뽑혀 버림 받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통(苦痛)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고통은 기쁨과 환희, 생명과 부활의 바탕입니다. 고통 없는 기쁨과 환희, 시련 없는 행복, 죽음 없는 부활은 모두 거짓이며 허구입니다. 여인이 죽음 같은 산고(産苦)를 거치지 않으면 어머니가 될 수 없고 새 생명이 태어나지 못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통을 겪은 후에야 부활의 영광을 얻어 그리스도가 됩니다. 고통 자체는 아프고 괴롭지만 고통을 회피하면 거듭남의 기쁨도, 건너감(過越-Pascha)환희도, 성공과 행복도 누릴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고통의 길을 걸은 사람만 하늘나라(天國)를 누릴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그분의 말씀을 귀로 듣던 감성(感性)의 시대를 마감하는 아픔을 겪은 후에야 믿음의 시대로 건너갑니다. 감성(感性)의 세계에서 믿음의 세계로 건너가는 고통은 여인의 산고(産苦)에 비유할 만큼 아픕니다. 철저한 자기부정과 죽음의 과정을 거쳐야 믿음의 세계가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삶 속에 다가오는 크고 작은 시련과 유혹, 고통들을 하느님 자비의 손길로 받아들이십시오. 당신은 건너감(過越)의 기쁨과 환희를 누릴 것입니다.(一明)
기쁨'
-유광수신부-
용미리 납골당에 가면 고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는 곳이 있는데 그 내용을 묶어서 출판한 책이 "하늘 나라 우체국"이다. 거기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아버지 돌아가시리라 생각 못했는데.... 꼭 회복하시리라 생각했는데... 내 마음 불편할까봐 끝까지 음식을 먹어 주셨던 아버지. 겸손과 근면, 남에 대한 배려....
나는 아버지처럼 살기 힘들 것 같아요. 왜 그리 겸손하셨어요? 왜 그리 부지런하셨어요? 왜 그리 절약하셨나요? 왜 남에 대해 배려하셨나요?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병도 나지 않고 더 오래 사셨을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돌아가시는 날도 우리를 배려해 일부러 맞춰 놓으신 것처럼 아이들 방학 때 돌아가신 아버지. 모두들 아버지처럼 산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평화로울까요? 아버지한테 자랑스런 자식도 못되어 드리고 아버지 마음도 잘 헤아리지도 못하고. 용서해 주세요. 꼭 용서받고 싶어요. 길을 가다가 아버지와 비슷한 사람을 보면 깜짝깜짝 놀란답니다. 우리 아버지인가 하고요. 아버지, 가시는 길 편안하게 가시고 좋은 곳에서 잘 계세요. 나중에 만나요.
우리 가족은 다섯 손가락이었다. 아빠가 계실 때까지는 그랬다. 갑자기 엄지 손가락이 없어지면서 우리는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아픔을 느꼈다. 대단히 큰 아픔이었다. 모든 손가락을 받쳐 줄 만큼 강한 힘을 가진 그런 손가락이 없는 지금, 남은 우린 아픔 속에서, 불편함 속에서 자연스럽지 못한 모습으로 힘들어 하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아빠 앞에 서 있으니까 아빠 손도 잡아 주고 싶고, 안아 보고 싶고 그렇다. 내 손이 차가워서 아빠가 잘 잡아 주고 그랬는데. 어디 다닐 때면 아빠 팔짱 끼고 다니구. 아빠가 나 머리 쓰다듬어 주면 잠이 솔솔 오고 그랬는데. 나, 아빠랑 해 본 게 많아서, 아직도 아빠랑 같이 하고 싶은 게 많아서 그래서.... 그래서 너무 보고 싶어. 사랑하는 아빠, 내가 너무 좋아하는 우리 아빠.
어머니 손을 잡고 꼬불꼬불 논길 따라 눈 덮인 기찻길을 따라 이 마을 저 마을 따라다니던 그 시절 장사하던 때가 그리워요. 어머니는 주린 배를 조여 매면서도 아이들을 위하여 아랫목 이불 속에 보리밥 넣어 두었다가 싸 주시던 점심 도시락. 어머니 사랑이 크고 한이 없어 갚을 길 없네요. 생전에도 어머니 사랑 크시고, 돌아가신 후에도 크신 사랑 잊을 길 없어 오늘도 다녀가요.
한 자 쓰고 한 방울 ! 두 자 쓰고, 두 방울! 일 천 개의 글자들이 눈물 색으로 변하여도, 울어 보아도 시원치 않습니다. 목이 터져라 불러 보아도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 같아 속죄하는 마음으로 몇 자 적어 봅니다. 엄마! 정말로 따뜻하게 마음속으로 불러 보고 싶었는데, 이제야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주변을 돌아볼 수가 있게 됐는데 꼭 떠나셔야만 했는지요? 누가 불렀기에 그토록 바쁘게 떠나셨어요?
사랑으로 채우려 해도 채울 수 없는 건 어머님의 빈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 빼앗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제자들이 다시 보게 되면 얼마나 기뻐할 것인가? 죽었던 이를 다시 만난다는 것은 꿈속에서라도 다시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바램이고 그것이 사실로 이루워졌을 때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이 나와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제자들에게는 위로가 되고 기쁨을 줄 수 있는 말씀이겠지만 나와는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보낸 이들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다. 사랑하는 이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은 그리고 만나서 기쁨이 될 수 있는 사람은 그리워했던 엄마 아빠의 모습이지 예수님을 다시 뵙는 것이 그들의 큰 기쁨은 아닐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3 년동안 함께 생활했으니까 죽으셨던 분을 다시 보게 되면 기뻐하겠지만 한번도 예수님과 함께 생활을 해보지 못한 우리들이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된다고 해서 과연 기뻐하게 될까? 예수님이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아무런 정도 없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보게 될 때 정말 기뻐하게 되려면 우리에게 친숙한 모습이어야 한다. 엄마를 잃어버린 이에게는 엄마의 모습으로 다시 볼 수 있어야 하겠고, 아빠를 그리워하는 이에게는 아빠의 모습으로 다시 뵙게 되어야 할 것이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지금 우리의 사고 능력으로는 불가능하게 생각되겠지만 영적으로 성숙하게 되면 우리의 인식도 성장하기 때문에 지금과는 다른 차원의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잘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영적으로 우리가 성숙해지면 생각이 달라지고 느낌도 달라지고 따라서 기쁨과 평화를 느끼는 것도 달라질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적으로 성숙해지면 육적으로 느끼던 것과는 다른 영적인 맛이 있고 그것은 이 세상의 인연으로 얽메여 있지 않는 그 이상의 것이어야 할 것이다.
즉 이 세상 그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었다 하더라도 그 관계에 얽메이지 않고 그 관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리라.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우리에게서 빼앗지 못할 기쁨이라면 그것은 외부적인 환경에 지배받는 것이 아닌 내 마음에서 솟아나는 기쁨이어야 한다. 그것이 부활의 기쁨이 아닐까? 아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만이 맛보는 기쁨이 아닐까? 그것이 예수님이 정말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은혜가 아닐까?
이 기쁨은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고 말씀하셨던 대로 영적으로 새로 태어날 때만이 가능한 것이리라고 생각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했다고 해서 놀라지 마라."(요한 3,5-7)고 했던 영적으로 태어난 사람만이 맛 볼 수 있는 기쁨이리라.
깨달음에 이르는 사람, 소위 말하는 도통한 사람은 결코 이 세상 것에 얽메어 있지는 않는다.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은 부활하는 것이다. 부활은 새로운 태어남이다. 이 부활은 죽은 다음에나 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부활해야 한다. 부활하면 그 누구도 우리에게서 그 기쁨을 빼앗지 못할 것이다.
제 1권 "다가오시는 예수"를 갖고 함께 묵상나누기를 하면서 어느 자매가 다음과 같은 자신의 묵상을 글로 표현하였다. 이 자매의 글로 표현한 것이 바로 예수님을 다시 만난 기쁨이리라. 그 기쁨은 아무도 그 자매에게서 빼앗지 못할 기쁨이리라.
감사합니다. 주님 !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고 부르셨는데... 파아란 잔디 위에서도 잔잔한 호수가에서도 때로는 떠오르는 아침 태양과 같이 저무는 낙조의 여울 속에서도 그분은 밤낮없이 손짓하셨는데도... 스쳐가는 바람소리에서도 노도와 같은 파도 속에서도 당신의 손길 속으로 이끌어 주셨는데도... 나는 외면하고 뒤돌아서며 눈길도 마주치지 않했는데도....
그분은 조금도 섭섭해 하시거나 노여워 하시지도 않으셨으며 끊임없이 기다려 주시며 나는 방황의 끝자락에서 지치고 죄절과 절망 속에 일어설 수 없이 누워있을 때에 그분은 살며시 내 손을 잡아 주시며 "나다. 일어나거라. 나와 함께 가자."하고 나를 일으켜 주시는 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그 한 말씀으로 내 온 생애의 모든 어둠과 죄를 용서해주신분,
아무런 조건도 없이 사랑이라는 한 말씀으로 죽음의 긴 터널에서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신 내 사랑의 주님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기쁨의 삶 †
오늘 복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신자들 -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의 기쁨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기쁨'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특히 성령의 은사중에 하나로서, 이 기쁨이라는 희망 때문에 신자들은 세상의 고통을 이겨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쁨은 우리 인간들의 삶의 자연스런 표현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바라는 일이 성취됐을 때, 혹은 자신의 만족스러운 상태가 되면 그 기쁨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식들이 원하는 대학에 무난히 합격하던가, 취직시험에 합격하던가, 또 가족들의 생일, 환갑, 결혼식 등의 행사에서는 모두 기뻐하고 그런 날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반면에 슬픈 일들 무엇이든지간에 우리 또는 주변에서 없기를 바랍니다. 실제로 주변에서 죽음, 질병, 이별 등을 자주보면서도 나하고는 무관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아픔과 슬픔을 먼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근심에 쌓일 것이며, 해산하는 여인처럼 진통을 겪어야 한다고.... 분명히 예수님의 떠나심은 제자들에게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또한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고통도 따를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가르침이신, 낮아지고 버리고 무시당하고 또 희생하는 삶을 걸어가야 한다면,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우리의 삶이 실패한 듯이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그 다음 말씀은 슬픔과 고통 뒤에 오는 희망의 말씀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막상 떠나가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심정은 근심이 생기고 고통도 있겠지만, 그것은 단지 잠시간일 뿐이고, 그 시간만 인내하면 이 모두는 기쁨으로 바뀔 것이며 또한 이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서에서 말하는 기쁨을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기쁨이란 하느님 안에서 공동체적으로 누리는 기쁨을 뜻합니다. 구약성서에서는 축제 때나 하느님께 제사를 드릴 때 또는 왕이 즉위할 때에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성서에서는 기쁨이 예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즉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탄생하신 것 자체가 기쁨이며,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에 대해 알려 주신것도 또한 복음 기쁜 소식이었읍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도 또한 우리 신자들에게 기쁨이 됩니다. 그래서 교회 전례에서는 그 부활의 기쁨을 50일간이나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기쁨은 최종적으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생활을 뜻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때 기쁜 것입니다. 자녀가 성당에 잘 다니면 부모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 신자들에게 남편이 피정을 다녀오면 아내가 기뻐하십니다. 바로 그것은 성령의 협조를 받아, 하느님을 체험,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안에서 함께 휴식을 취할 때 그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내 기쁨이 그대들 안에 있고 그대들의 기쁨이 가득 차기를” 기원하십니다. ‘십자가 처형’이라는 끔찍한 죽음을 앞두고 기쁨에 관련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의도를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쉽게 납득하기 어렵겠지만, 오늘 우리는 이 복음을 더 깊이 묵상하면서 정말 사랑 그자체이신 성부의 모습, 성자의 모습, 그리고 거룩하고 위대한 활동을 하시는 성령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수난과 죽음에도 불구하고 기쁨을 누리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만약 그분의 기쁨이 십자가의 길과 연관된다면, 본능적으로 고통을 싫어하는 우리에게 굳이 기쁨을 간직하라고 당부하시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주님께서 기쁨을 누리시는 이유는 아버지의 사랑을 한껏 받으신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보존하시기 위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십니다. 일반 세상에서도 아들이 지녀야 할 덕행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덕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며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 순종의 실천이 제도적으로 강요되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원초적인 자유의지, 양심에 의해서 스스로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은 순수한 사랑의 표본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바지에 대한 사랑은 순수한 자유의지의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자유로운 것이기에 예수님이 아버지께 순종한 것은 가장 숭고한 자유의 표현입니다. 사랑이 강요될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의 순종도 강제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사랑 그 자체를 향한 순수한 행위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상호적인 것이기에 예수님의 순종은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실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그만큼 많이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사랑의 열기는 ‘주님의 열기’이기에 큰 물도 사랑의 열기를 끌 수 없고 강물도 그것을 휩쓸어 가지 못합니다(아가 8,6-7 참조). 이처럼 그분의 강렬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 죄를 기워 갚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시기까지’ 아버지의 사랑과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난에도 불구하고 기쁨으로 충만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든 민족 가운데서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행하는 사람을 환대하십니다. 성령의 은혜가 이방인에게까지 전해진다는 사실은 하느님 사랑에 경계가 없음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모든 이에게 쏟아진다면, 우리 역시 모든 이에게 사랑을 쏟아야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의 영인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부어 주신 성령은 사랑할 능력을 주시고 우리와 함께 계신 아버지를 알아볼 수 있도록 우리 의식을 비추십니다. 아버지를 알아본다는 것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깨닫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느끼는 순간 형제를 사랑할 힘과 용기가 솟아납니다. 그 때 우리는 형제가 나에게 엎드려 절하기를 바라지 않고, 나 역시 아버지의 자녀임을 겸손되이 받아들여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모든 인생고에도 불구하고 한없는 기쁨을 간직할 수가 있습니다. 삶의 기쁨은 사랑의 결과이지 사랑의 조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할 제6주간 금요일 어떤 수사님의 묵상글입니다.
오늘 수도원 옆에 있던 낡은 집한채가 포크레인으로 폭삭 내려앉았다. 몰론 사람이 모두다 이사가고 난 뒤의 일이다. 그냥 옆에서 지켜보는 것인데도 웬지 시원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속으로는 '저 포크레인 기사는 스트레스가 쏵 풀리겠다'고 생각하었다. 그리고는 모처럼 여유를 부리며 수도원 뒷동산을 돌아가며 산책을 해보았다. 평소에는 지나쳐버렸던 풀꽃들이 왜그렇게도 많은지 미처 몰랐다. 오늘따라 또 왜그렇게도 예쁘게만 보이던지... 내일도 모레도 그렇게 계속 보이거나 볼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그 날이 오면 너희가 나에게 물을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이날까지 살아오면서 참으로 궁금한 것이 많고 불만스러운 것도 많고, 해결된 것보다 해결되지 못한 것이 훨씬 더 많다. 오해하는 것도 많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둘이 아니다.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왜 같이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모르는 것이 하도 많고, 맨 정신으로 알아 들을 수 없는 것이 하도 많아서 그냥 정신이 빙빙 돌며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리고 가장 힘들게 만드는 것은 내가 나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하긴 진정한 의미에서 내가 나의 것이 아니니까, 그럴만도 하다고 여겨진다. 만일에 내가 나의 진정한 주인이라면 내가 나에 대해 모두 알 수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어야만 나는 매일 빠져드는 분노와 격정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우리의 격정, 욕심, 이기심 등으로 인해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날이 왔을 때, 그분은 우리를 완전히 해방시켜 주신다. 이 해방의 그날은 이 세상에서 우리는 볼 수 없다. 해방의 그날을 준비하기 위해 우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지금은 그분을 만나더라도 성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희미하게 그분을 볼 수 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수 있는 그날까지 우리의 방황은 아마도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비록 방황하더라도 그분을 향하면서 방황해야 할 것이다. 그분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나아가자.
이세상에서는 그 어떠한 것에서도, 그 어떠한 누구에게서도 나의 믿고 의지할 만한 곳이 없고, 희망할 것이 없다. 그분의 품안에 머물때 가서야 비로소 우리는 참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쁨과 평화는 누구도 우리에게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
오늘복음의 묵상마무리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근심을 덜어놓고 다함께 차차차...입니다. 해산할 여인이 신발을 바르게 놓고 죽음을 예비하는 네가브티적 사고방식이 아니라, 자식을 순산하여 첫 미팅을 하는 그런 생각을 하는 포지티브 사고방식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렇게 모든 가톨릭 신자들은 삶의 완전한 모범이신 주님으로부터 다양한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겸손해지는 것, 낮아 지는 것, 져주는 것, 모욕을 당하는 것, 결국에는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모든 것이 결국 우리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서 걸어가야 할 길, 진리요, 생명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무엇이든 더 잘해야 하며 남보다 앞서야 하고 남을 이겨야한다는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결국 우리 인생의 근본 가치관은 남보다 앞서야 하고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하며 남보다 높은 위치에 서야지만 행복해 질 수 있다고 교육을 받아 왔고 또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세상 속 논리에서 눈이 시뻘겋게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행복을 위해서라면 낮아지고 버리라 하는데 우리는 그 행복을 위해 높아지고 더 가져려고 하고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가르침을 단 한 번만이라도 진지하게 숙고해 보았다면,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근심거리와 걸림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배우고 알고 또 살아가고 있는 삶의 방식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실제로 우리 마음 안에서 종종 갈등을 일으킬 것입니다. 만약 이런 갈등과 근심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의 진실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거나 혹은 모르고 있다는 표시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주님 때문에 고민해 보지 않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지금부터라도 진지하게 고민해 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주님으로 인해 이미 고민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이제 실천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 때문에 고민도 하고 실천도 하고 있으며 또 진통을 겪으시는 분들이 있다면 이제 조금만 참아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실테니 말입니다. 아멘. ..........◆
[두올묵상팀] |
첫댓글 감사합니다...
이번 비로 인하여 정상적인 계절로 돌아왔네요. 오늘도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