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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만찬으로의 초대] (27) ‘성찬 제정과 축성문’
구원은 인간의 참여 없이 주어지지 않는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당신 이름으로 모인 곳”(마태 18,20)에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교회와 우리의 삶 안에 현존하신다. 그 가운데서도 성체와 성혈의 형상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방식은 가장 특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특별한 방식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를 위한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로 내어주심으로써 우리 가운데 신비롭게 머무시길 원하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5-56)
감사 기도에서 사제가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이는 …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라고 말하며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도록 빵과 포도주를 축성할 때, 그것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교회는 언제나 이러한 믿음을 간직하고 고백해왔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봉헌물들을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신 것은 인간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사제가 말을 하지만, 그 말의 효력과 은총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이는 내 몸이다.’ 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봉헌물들을 변화시킵니다.”(요한 크리소스토모, 「유다의 배반에 대한 강론, 1,6)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
새 「로마 미사 경본」(제3표준판)의 각 모국어 번역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부분 가운데 하나는 감사 기도의 축성문에서 라틴어 원문의 “pro multis”의 번역과 관련된 문제였다. 우리말 새 「로마 미사 경본」 안에서도 “모든 이를 위하여”에서 “많은 이를 위하여”로 바뀐 이 표현은 마태오 복음과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잔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하신 성찬 제정 말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8; 마르 14,24 참조).
한편 루카 복음에서는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루카 22,20)라고 말한다. 일찍이 교회는 예수님의 성찬례 제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두 성경 문구를 결합시켜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란 형태로 오늘날의 감사 기도 제1양식인 로마 전문 안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이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전례 개혁을 통해 새로 만들어진 다른 모든 감사 기도에도 반영되었다.
따라서 “많은 이를 위하여”란 표현은 앞서 보았던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전례문을 변형 없이 원문에 충실하고 정확하게 옮기고자 한 결과로 우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물음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닌가? ‘많은 이를 위하여’라는 번역은 예수님의 죽음이 지닌 구원의 보편적 가치를 축소시키는 것이 아닌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우리나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기존 모국어 미사 경본에서 ‘많은 이’가 ‘모든 이’로 번역되었었던 데에는 이와 같은 물음들이 주된 동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곧 ‘많은 이’를 ‘모든 이’로 해석하여 번역함으로써 주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의 보편성을 모호함 없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12년 독일 주교회의 의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 점을 인식하면서도 “pro multis”에 대한 더 정확한 번역으로 “많은 이를 위하여”란 표현을 사용하도록 강조하셨다. 그리고 신자들을 위해서 그 의미를 설명해 줄 세심한 교리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셨는데, 여기서 표명된 교황의 관점들은 ‘pro multis’의 번역에 관한 구체적인 지침을 담은 2006년 경신성사성의 회람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해 주었다. 이 관점들을 종합하여 “많은 이를 위하여”란 표현이 지닌 의미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님의 성찬 제정 말씀에서 비롯한 “많은 이를 위하여”란 말은 전례문 안에서도 하나의 해석의 형태가 아니라 성경의 표현 그대로 정확히 번역함으로써 예수님의 말씀 자체에 대한 교회의 특별한 존중을 드러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이 표현과 함께 이사야 53장에 나타난 주님의 종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셨고 예언자들의 말이 당신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셨다.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이사 53,11). 곧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교회의 존중과 성경 말씀에 대한 예수님의 충실함이 “많은 이들을 위하여”란 표현의 사용을 선택하도록 이끄는 주된 이유이다.
둘째, 이 표현으로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를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죽으셨다는 신앙의 가르침이 변경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찬례란 구체적인 맥락 안에서 “많은 이를 위하여”란 표현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구원이 인간의 의지나 참여 없이 기계적인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성찬례는 우리가 신앙으로 맞이해야 할 은총의 선물이자 살아야 할 사랑의 신비인 것이다.
[봉헌 생활의 날 특집] ‘시간 전례’란 무엇인가
“항상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 따르는 신앙인의 노력
주님 성탄 대축일에서 40일째 되는 2월 2일은 주님 봉헌 축일이다. 교회는 이날을 ‘봉헌 생활의 날’로 지낸다. 봉헌 생활의 의미를 되새기며, 봉헌 생활을 하는 모든 이들이 합당한 삶을 살도록 격려하고 기도하기 위해서다.
넓은 의미에서 세례와 견진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자녀가 된 모든 신앙인이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봉헌 생활이라고 할 때는 수도 공동체를 말한다. 수도원을 방문하면, 수도자들이 하루를 여러 순간으로 나눠 정해진 시각에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로 시간 전례다.
성직자들은 의무적으로, 수도자들은 수도회 회헌에 따라 이 기도를 바친다. 평신도들에게도 권고 사항(전례 100항: 「시간 전례 총지침」 27항, 32항)으로 제시되는 시간 전례는 교회의 공적 공통 기도이면서 교회 기도의 첫 자리다. 시간 전례의 유래와 의미, 구성 요소 등을 알아본다.
역사
유다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아침과 저녁에 거행되는 성전 제사와 연관 지어 기도를 바쳤다고 한다. 또 예루살렘 밖 사람들은 대신 회당에 모여 기도했다. 유다인들의 기도 특징 중 하나가 ‘시편’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이런 유다인들의 기도 생활은 예수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예수께서 홀로 군중을 떠나 기도하셨고(마르 1,35), 또 기도가 주로 밤에 이뤄진 것은 유다인들의 관습을 넘어섰다고 할 수 있다.
‘늘 깨어 기도하라’(루카 21,36; 마르 13,33)고 당부했던 예수는 수난이 다가올 때(요한 12,27 이하), 최후의 만찬 때(요한 17,1-26), 동산에서 고뇌에 젖었을 때(마태 26,36-46),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루카 23,34-46) 몸소 당신이 행동으로 기도의 모범을 보였다. 유다인들처럼 기도할 때 시편을 주로 이용했다.(마태 27,46) 예수의 기도 자취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 과제로 남겨졌을 것이다. 시간 전례의 시작은 그 연관성 속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한국가톨릭대사전」은 “시간 전례는 ‘항상 깨어 기도한다’는 이상을 현실 안에서 구체화하는 가운데 태어난 것이고, 그 직접적인 기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의 모범에 있다”고 밝힌다.
예수 부활 이후 사도 공동체는 기도하는 공동체였다. “유다인들과 달리 주님의 기도로 기도하라”고 쓰인 100년경의 「디다케」 증언을 참고할 때, 이 공동체는 유다인들이 하루 세 번 기도하는 관습을 받아들이면서 이를 그리스도교적으로 바꿨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 예수처럼 시편을 애용(콜로 3,16)했을 것이다.
1~3세기에는 교회 지도자들이 ‘항상 기도하라’는 그리스도교 이상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기도 시각을 일정하게 정하고 그에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는 모든 신자가 바쳐야 하는 것으로 간주됐다.
종교 자유가 주어지면서 시간 전례는 공동체 기도로 확립됐다. 구성 면에서도 주교좌식 시간 전례와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수도회식 시간 전례 등 크게 두 갈래 형태로 발전해 갔다. 주교좌식은 주교를 중심으로 소속 교구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모여 주로 아침, 저녁에 바치는 것이었고, 수도회식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더욱 정교한 구조를 갖춰 더 많은 시간 전례를 드리는 식이었다.
중세 이후에는 시간 전례가 공동체가 바치는 기도에서 개인이 홀로 바치는 기도로 변질되거나, 성직자나 수도자의 기도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례 개혁의 결과로 시간 전례는 ‘하느님 백성 전체의 기도’라는 본래의 공동체성을 재발견했다.
구성
시간 전례의 각 시간경에는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중심으로, ‘삼시경’(오전 9시), ‘육시경’(정오), ‘구시경’(오후 3시), ‘독서기도’, ‘끝기도’가 있다. 아침·저녁기도는 하루 가운데 가장 중요한 두 기둥이다. 독서기도는 성경 봉독을 기본으로 새벽에 드리는 기도이며, 끝기도는 일과를 마치며 바치는 기도다.
아침·저녁기도를 기본으로 주요 구성을 보면 ‘찬미가’, ‘시편과 찬가’, ‘성경소구와 응송’, ‘복음 찬가’(즈카르야의 노래, 성모의 노래), 청원기도, 주님의 기도, 마침기도 순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눈여겨볼 것은 ‘시편’이다. 시간 전례는 근본적으로 ‘시편’으로 구성된 찬미와 감사, 또 탄원과 청원을 드리는 기도다. 시편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으로 꼽힌다. 150편의 종교적인 시가(詩歌)들이 수록된 모음집으로, 하느님과의 직간접적인 만남을 통해 이뤄지는 이스라엘인들의 종교 심성을 표현하고 있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는 “시편은 ‘사람이 하느님께 드리는 말씀, 기도’로 기록돼 있다”며 “살아계신 하느님을 찾는 인간 체험을 시편만큼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고 평했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가 시편으로 기도했다는 면에서 시편은 예수님과 하나 되어 기도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만나게 한다.
탄원, 감사, 찬양 기도 등 각 시편의 성격은 각 시간경에 배분돼 있다. 아침기도에는 하루 시작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성격의 시편을, 저녁에는 하느님 은혜에 감사드리는 특성을 노래한다.
의미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는 신앙인들에게 기도는 본질적인 요소다. 그런 면에서 미사와 더불어 교회 고유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시간 전례다.
인영균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는 “중단 없는 기도가 교회의 존재적 소명이라고 할 때, 시간 전례는 ‘끊임없는 기도’에 부합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라며 “이 기도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더 잘 응답하려는 방편이며, 인간적인 약함과 나태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밝힌다. “중단 없는 기도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겸손한 신앙인을 위한 기도법”이라는 것이다.
시간 전례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하게 한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마태 18,20)이라는 말씀에서처럼, 하루의 정해진 시각에 바치는 기도는 하느님을 강하게 의식하도록 한다. 전례 기도는 파스카 신비와 직접 맞닿아 있으면서 기도하는 이와 그리스도를 더욱 밀접하게 연결해 주는데, 특별히 가장 뛰어난 전례기도 중 하나인 시간 전례에서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이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매일 정해진 때에 바치는 시간 전례의 특성은 규칙적으로 기도를 바칠 힘을 길러준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일상생활을 하느님께 봉헌하도록 하며 우리의 삶과 시간을 하느님 것으로 만든다.
또 하느님과의 끊임없는 대화, 찬미를 통해 신앙인들이 하느님 자녀로 태어나는 여정을 도와주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신비체를 하나로 만들어 준다.
베네딕토 성인은 “아무것도 하느님의 일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라”(성 베네딕토 규칙서 43,3)는 말로 시간 전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시간 전례는 근본적으로 공동체의 기도이기 때문에 신자들이 가정에서 혼자 바치게 되더라도 모든 교회 구성원들과 영적으로 함께 바치는 기도가 된다.
[전례 영성 - 파스카 신비] 그리스도, 우리의 파스카
기도하는 교회, 기도하는 그리스도
전례란 무엇인가? ‘아름다운 예식’인가, ‘거룩한 봉사’인가, 아니면 ‘법적 의무’인가? 20세기 전례 운동은 전례에서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actuosa participatio)를 증진시키는 가운데, 전례의 본질을 묻는 다양한 질문을 던졌다. 비오 12세 교황은 그 응답으로 회칙 「그리스도의 신비체」(1943년)에 이어 「하느님의 중개자」(1947년)를 반포하였다.
공식적인 전례의 정의는 이렇다. 전례란 “교회의 머리이신 우리 구세주께서 아버지께 드리는 공적인 경배이며, 동시에 신자 공동체가 그 창립자이신 그리스도께, 또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예배”(「하느님의 중개자」, 20항)이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드리는 예배가 전례란 뜻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에 대한 이 정의를 그대로 이어받아 “그러므로 전례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수행하는 것이다.”(전례 헌장, 7항)라고 선언하였다. 기도하는 교회와 기도하는 그리스도가 하나라는 뜻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파스카 신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헌장은 서두에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 오랜 세월 준비해 오신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선언한다.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특히 당신의 복된 수난과 저승에서 살아나신 부활과 영광스러운 승천의 파스카 신비”(전례 헌장, 5항)가 모든 그리스도교 전례를 이해하는 열쇠라고 말할 수 있겠다.
모든 성사와 준성사가 인간 성화의 도구가 되는 것도 바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에서 “그 효력을 이끌어”(전례 헌장, 61항)내기 때문이다. 파스카 신비는 전례 분야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에 관련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 헌장에서도 언급하듯, 모든 “그리스도인은 파스카 신비에 결합되고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화되어 부활을 향한 희망으로 힘차게 나아갈”(22항) 필요와 의무를 지니고 있다.
파스카, 그 새롭고 오래된 신비
‘파스카 신비’란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축제인 ‘파스카’란 말과 2-4세기 그리스 문화권에서 쓰던 ‘신비’란 말을 합쳐 놓은 표현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354-430년)과 성 대 레오 교황(400-461년)이 전례를 ‘파스카 신비’ 또는 ‘파스카 성사’라는 말로 설명했던 것을 20세기 전례 운동의 선구자들이 재발견하여 해석하면서, 파스카 신비가 전례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었다.
특히 독일의 베네딕토회 회원이었던 오도 카젤(Odo Casel, 1886-1948년)이 전례가 ‘신비’를, 더 정확하게는 ‘파스카 신비’를 현재화하는 행위라는 ‘오래된’ 관점을 ‘새롭게’ 밝혀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신비’(mysterion)란 말은 본디 이교도들의 비밀스러운 입문 예식을 가리키는 용어였으며, 신비란 어떤 추상적인 진리가 아니라, 예식의 형태로 구원 행위가 현재화되는 경배 행위였다.
그리고 공동체 예식에 참여하는 일원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구원 행위에 참여하여 구원을 얻게 된다는 믿음은, 구약 성경의 파스카 축제를 특징짓는 원리였다.
구약의 파스카
유다인들은 파스카 만찬을 함께 거행함으로써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주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들, 곧 자신들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구해 내시고 시나이산에서 계약을 맺으신 파스카 사건을 공동체 예식 안에서 기억하고, 선포하며,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것이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이었다. 여기서 출발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전례와 축일 시간표가 파스카를 기념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안식일의 의미도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기념하는 차원을 넘어 파스카 사건을 기념하는 날로 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되었고, 오순절 또한 파스카 축제를 마감하는 날이 되었다. 한마디로 파스카 만찬을 함께 거행한다는 것은 선택된 백성의 특권이자 의무였다.
신약의 파스카
구약에서 이스라엘 종교 생활의 중심이 된 파스카 축제 거행은 신약에 와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새로운 파스카 사건을 통해 그 참된 의미가 완성되었다.
희생되신,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1코린 5,7)께서는 우리를 이집트에서처럼 세속의 굴레에서 해방시키셨고, 당신 피로써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다. 2세기 사르데스의 멜리톤 주교는 파스카 강론에서 그리스도의 전 생애가 바로 파스카의 신비임을 역설하였다.
“양의 희생과 파스카의 축제 그리고 율법의 문자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생긴 모든 것과 더욱이 신약 시대에 생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목적으로 해서 생긴 일이기 때문입니다”(부활 팔일 축제 내 월요일 독서 기도 제2독서).
파스카 신비와 그리스도인의 삶
파스카 신비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윤리와 영성의 기초이다. 파스카 성야의 세례 서약 갱신 때 사제의 권고는 이를 아름답게 표현한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세례로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묻히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갑니다.”
주일의 성찬 전례도 하느님 백성인 교회를 일컬어 파스카 신비의 결과로고백한다.
“저희는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 선택된 겨레, 임금의 사제단, 거룩한 민족,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고 저희를 어둠에서 놀라운 빛으로 부르신 주님의 권능을 온 세상에 전하게 되었나이다. 이는 파스카의 신비로 이루어진 주님의 위대한 업적이옵니다”(연중 주일 감사송1).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파스카 신비를 올바로 깨닫고 열심히 살아 형제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널리 전하게”(사순 제4주간 화요일 본기도) 되는 것이고, 그렇게 “성자의 파스카 신비에 참여한 우리가 옛 죄를 깨끗이 씻고 새 사람이”(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영성체 후 기도)되는 것이며, 마침내 “파스카 신비로 새로워져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주님 부활 대축일 낮 미사 영성체 후 기도)되는 것이다.
[주님 만찬으로의 초대] (26) 성령 청원과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한 축성
성찬례에서는 우리 삶도 변화한다
“성찬례 거행의 중심에 놓여 있는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 청원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 주님의 명을 충실히 따르는 교회는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을 기념하면서, 주님께서 수난 전날 밤에 행하신 의식을 계속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333항)
어떻게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될 수 있는가? ‘실체변화’라고 부르는 성변화는 무엇을 통해 이루어지는가? 이에 관하여 동방과 서방 교회의 전통은 다른 강조점을 가지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동방 교회에서는 성령의 변화시키는 힘과 활동에 강조점을 두어 ‘성령 청원 기도’를 미사 거행에서 이루어지는 성변화를 위한 핵심 부분으로 보았다. ‘에피클레시스’(epiclesis)라 불린 이 기도는 사제가 하느님 아버지께 성령을 보내주시기를 특별히 간청하는 기도이다. 4세기의 동방 교부인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 주교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영적 찬미가로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한 후에 빵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피가 되도록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예물에 성령을 보내주시기를 청합니다. 성령이 닿는 것은 무엇이나 다 성화되고 변화되기 때문입니다.”(예루살렘의 치릴로, 「신비 교육」 5,7)
한편 서방 교회에서는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시키는 힘이 마지막 만찬에서 빵과 포도주 잔을 들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 곧 ‘성찬 제정 말씀’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4세기 서방 교회의 대표적인 교부인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말했다. “이 빵은 성사의 말씀 전에는 빵이지만 축성되면 그리스도의 살이 됩니다. … 사제는 거룩한 성사를 거행할 때 이미 자신의 말을 쓰지 않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성사를 거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란 어떤 말씀입니까? 그것은 확실히 만물을 창조하는 말씀입니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얼마나 큰 효력을 갖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 그래서 축성 전에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었지만, 축성 후에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암브로시오, 「성사론」 4,4,14)
사실 강조점만 다를 뿐 신학적으로 정초된 두 입장은 서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 전례는 본질적으로 거룩하신 삼위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에 따라 개정된 「로마 미사 경본」에 덧붙여진 새 감사 기도들 안에는 이 두 요소가 조화롭게 잘 결합되어 있다. 감사 기도를 이루는 다른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성령 청원 기도’와 ‘성찬 제정 말씀’의 의미는 언제나 감사 기도의 전체 구조와 통일성 안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성령 청원 기도(Epiclesis)
감사 기도 안에는 두 번의 성령 청원이 있다.
첫 번째 성령 청원은 예물에 대한 축성 기원으로 성찬 제정 말씀 전에 있다. 여기서 사제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도록 제대에 봉헌된 예물, 곧 빵과 포도주 위에 성령을 보내 주시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간구하오니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감사 기도 제2양식) “아버지, 간절히 청하오니 아버지께 봉헌하는 이 예물을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어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감사 기도 제3양식) 이때 사제는 예물에 두 손을 펴 얹고 기도하는 자세를 취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성령의 임하심을 가시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두 번째 성령 청원은 미사에 참여한 우리 자신(공동체)의 일치를 위한 기원으로 ‘성찬 제정 말씀’ 다음에 위치한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이들의 일치를 위해 간구하며 이렇게 말한다.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어 성령으로 모두 한 몸을 이루게 하소서.”(감사 기도 제2양식) “주님, 교회가 바치는 이 제사를 굽어보소서. 이는 주님 뜻에 맞갖은 희생 제물이오니 너그러이 받아들이시어 성자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저희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한마음 한 몸이 되게 하소서.”(감사 기도 제3양식) 그러므로 미사의 희생 제사에서 성령의 힘으로 변화되는 것은 빵과 포도주만이 아니라 또한 우리 자신이다. 미사가 거기에 참여하는 이들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단지 예식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성찬례 거행은 참으로 우리 자신의 변화를 위해서 필요하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더욱 깊이 결합시킴으로써 이것을 이루신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하신 성모님처럼 우리가 성령께서 활동하시도록 자신을 내어 맡긴다면, 성령께서는 매일의 미사 거행 안에서 우리를 변화시켜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 드리는 산 제물이 되게 하여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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