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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 I0 죄의 근원을 차단하라는 것(출20장17)
성경본문;출애급기20:17
17.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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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살아가는 삶에 작은 원칙이 있습니다.
“미련을 두지 말라!”
이 원칙을 시작한 것은 물건을 사고 나면 ‘억울한’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음을 경험하면서 부터입니다. 제가 처음 쇼핑이라는 것을 해 본 것은 유학생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모두 살 수 있도록 사회 시스템이 되어 있는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물건을 살 때면, 비슷하게 보이는 물건들의 가격이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늘 ‘sale’이라는 사인이 붙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싸게 물건을 사고 나면 만족감 보다는 혹시 ‘더’ 싸게 살 수 있지 않았는가? 라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죠. 실제로 같은 물건을 다른 매장에서 더 싸게 파는 경우도 보았구요.
그래서 그런 결심을 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물건을 산 후에는 절대로 다른 곳에서 값을 물어보지 않는다!
내가 물건을 산 후에는 가장 좋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자!
참 신기한 것은 ‘물건’ 혹은 ‘내가 소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이 남고, 가져도 만족이 쉽게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다루려고 하는 10번째 계명은 바로 그런 문제가 아닐까요?
결국 마음에서 해결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탐욕이 생기고, 탐욕으로 인해 일어나는 모든 죄들 말입니다.
어떤 분의 책에서 본 것 같은데, 십계명 전체는 1계명과 10계명 둘로 요약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인정하면 죄지을 것도 없고,하나님을 참으로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탐욕도 생기지 않으니 또한 죄 지을 일이 없다고 말입니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10계명 말씀은 마음에서 시작해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아마도 이런 그림을 그리며 시작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죄를 하나하나 열거하며, 그것을 금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될 때, 온전하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도하는 과정으로 들어가는 여정 말입니다.
탐욕이 무서운 것은 . . .
오늘의 계명이 앞으로 배우게 될 다른 계명과 다른 것은 ‘행위’에 대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 대한 것을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탐심’에 대한 것입니다.
본래 “탐내다”라는 말에는 어떤 대상에 대해 기뻐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한 기쁨은 필연적으로 ‘소유’에 대한 감정으로 인도하죠.
탐심의 문제는 욕망을 자극하는 기쁨보다는 소유하려는 욕망으로 인해 일어나는 ‘행동’의 결과가 악하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욕망이 ‘다른 사람의 것’에 대해 일어나는 감정이기 때문이죠.
탐심이 무서운 것은 실제적인 죄로 인해 발생하는 비극적인 일들 뿐 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는 것이죠. 성경에서 지옥은 표현하는 말 중에 하나가 ‘무저갱’입니다. ‘무저갱’의 뜻은 ‘바닥이 없는 것’입니다. 떨어져도 떨어져도 바닥이 없으니 얼마나 공포스럽습니까? 그런데 이 탐심이라는 놈이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는 인생은 지옥과 같은 인생입니다.
유명한 이야기죠. 하도 떠도는 버전이 많이 어떤 부자인지 모르지만, 미국의 갑부였던 앤드류 카네기에게 어떤 기자가 물었다죠.“얼마나 돈을 더 가지면 만족하겠습니까?”
그의 대답은 “조금 만 더”였다고 하죠.
탐심을 품으면 우리 마음이 지옥이 되는 반면, 탐심을 물리치면 우리의 삶이 천국이 되지 않을까요?
아마도 10계명의 정신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법’이 핵심이라면 마지막 계명에 핵심이 있는 듯합니다.
인류 최초의 범죄가 “탐욕으로 인한 불순종” 때문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창세기 3장에서, 뱀의 유혹을 받은 여자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6절에 보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사단의 유혹이 있기 전까지, 자신 속에 있는 탐욕을 건드리기 전까지 여자는 부족한 것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탐스럽기도”한 나무를 보게 됩니다.
여기에서 “탐스럽다”는 말은 히브리어의 ‘하마드’입니다. 탐욕을 유발시킨다는 것입니다.
다른 많은 먹을 것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그것이 먹음직스러웠고,자신에게 주어진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그것이 보기에 좋았고,하나님께서 충분히 살 수 있는 환경과 지혜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지혜, 즉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 지혜에 대한 욕심이 생기더니, 불순종의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여 40년 만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진입합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처음으로 직면한 난관은 당시 근동지방의 가장 강력한 성읍 중에 하나인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신 전쟁은 이스라엘을 완전한 승리로 이끌었고, 하나님은 전쟁을 통하여 순종하는 방법을 가르치시기를 원했습니다.
여호수아서 6장 17-24절의 말씀에 보면,하나님께서 명령하시기를 전쟁에서 승리한 후 얻는 전리품 모두를 하나님께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처음 전쟁에서 하나님이 가르치시기를 원하셨던 것이 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그러기에 전쟁을 통하여 얻은 모든 것들은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물질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앞으로 이스라엘이 누리게 될 축복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분명히 가르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물건 하나라도 이스라엘 사람이 갖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물건을 훔치는 범죄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규칙을 깨뜨리고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물건을 도적질한 사람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범죄를 숨기고 있던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성 “아이”의 전투에서 비참하게 패하고 만 것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심판 하시고, 탐욕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아간을 잡아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과 함께 골짜기에서 돌로 쳐서 처형을 당하게 되는데, 이곳이 ‘아골 골짜기’ 즉 괴로움과 재난의 골짜기라 불리게 됩니다.아주 흥미롭지요.
인류 최초의 범죄와, 성경에 기록된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의 최초의 범죄가 탐욕으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탐심’이 결국은 믿음과 관계되어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믿음이란, 나의 삶을 향한 전적인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들의 물질적인 소유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믿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의 말씀-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자녀의 권세를 가졌다는 것은, 모든 유산을 상속받을 자격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위에서 소유하는 것은 우리가 받은 전체 유산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놀라운 권세와 축복을 다 맛보지 못했지만, 축복받은 자의 여유로 사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크리스천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본질적인 모습, 아름다움은 무엇일까요?
현재 소유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자족과 너그러움으로 살아가는 모습일 것입니다.
이 믿음을 상실하는 순간, 우리는 감사와 만족을 잃어버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가 시작됩니다. 이것이 탐욕의 시작입니다. 이 탐욕은 단지 도둑질의 가능성만 가지고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것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10계명이 오늘 우리들에게 주는 도전입니다.
우리들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들 가운데서 얼마나 많은 감사를 하고 있으며, 주어진 축복을 얼마나 누리고 있습니까?
제 10 계명이 우리의 삶에서 말하는 것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탐욕의 대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오늘 본문에서는 “네 이웃의 집”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어서 그 대상이 집, 아내, 남종, 여종, 소, 나귀의 순으로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서 “집”이라는 것은 단순한 건물적인 의미가 아니고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7장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여기서 “집”이란 건물의 의미가 아니고 노아의 아들들과 며느리들, 그리고 그의 모든 재산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사고에서는 “아내”역시 소유의 개념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탐욕의 대상으로 지정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제 7계명의 “간음하지 말라” 그리고 제 8계명의 “도적질하지 말라”라는 계명과는 중복 되는 듯 한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하면, 위의 두 계명이 남의 것을 탐내어 빼앗고 훔치는 행동을 금하고 있는 것이라면,제 10계명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러한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내면의 탐욕과 탐심 자체를 금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본래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회적인 부정, 불의 부패의 근원이 됩니다. 특히 없어서 일으키는 범죄가 아니라, 가진 자, 권력이 있는 자의 탐욕이 얼마나 무서운 범죄를 일으키는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탐욕에 대하여 아주 무섭게 질책합니다. 미가서 2장 1-3절에 보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 .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 진저,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서 재앙을 계획하나니
탐욕과 탐심이 인간이 범하는 모든 죄의 시발점이 되기에 예수님께서도 특별히 이 부분에 대하여 경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5절,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그리고 예수님은 이어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곡식창고에 가득 쌓아놓은 소출을 바라보면서, 더욱 많은 부를 축적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는 부자를 향하여, “생명을 거두어 간다면 네 소유가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질책하십니다. 이 비유의 결론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누가복음 12장 21절-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문제의 핵심은 물질적인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소유에 대하여 어떠한 생각과 태도를 갖느냐 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정신은,
1) 가치의 우선순위를 알라는 것입니다.
물질의 소유가 나쁜 것이 아니라, 영혼과 하나님께 대한 관심으로 우선순위가 바로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질을 소유하는 것 보다는 주님을 따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물질의 포기가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올바른 삶에 우선순위를 두라는 것이지요.
하나님과 재물을 동등한 위치에 둘 수는 없습니다.
이 우선순위를 아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독특한 “하나님 나라”의 방식입니다.
성경의 정신은 물질의 소유를 인정하지 않거나, 가진 자의 것을 강제적인 폭력의 수단으로 나누도록 하지 않습니다.
가진 자가 탐욕을 자제하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가질 수 있도록 너그러움과 사랑을 베풀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신명기 24장 19-22절에 보면,
19-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20-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21-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22-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면, 하나님을 우선하는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을 위하며 포기 할 수 있는 이유들이 생기지만,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우선하는 삶을 살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선하여 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만,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것이 있다면, 탐욕의 마음이 들 때, 언제든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2)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구분하는 사람이 되어라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여 광야에서 훈련받는 동안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 중에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것을 주신다.”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가 심각하게 고민하며, 신앙의 자세를 되짚어 보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간구함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필요를 구하고 있는지, 정욕을 위하여 원하는 것을 구하고 있는 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주기도문을 통해 가르쳐 주신 아주 귀한 교훈 가운데 하나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구절입니다.
하나님과의 매일 매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도록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하나님.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삶의 기쁨은 아주 근본적인 신앙 안에서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고, 그것을 느끼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잠언 30장 7-9절의 말씀,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우리가 필요한 것을 구할 때,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합니다.필요한 것을 제공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 더 이상 우리들에게 탐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면서 인격적인 만남을 갖기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혹시 여러분은 너무 많은 것을 가짐으로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오늘도 당신의 삶에 필요한 것을 구하며, 필요한 것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살아가지 못하십니까?
말씀을 준비하면서 보았던 신승도 목사의 블로그에 보니, 10번째 계명을 어기면 크리스천의 아름다운 향기를 꺾어버리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성령의 열매를 이렇게 열거하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하지만, 탐심이 일어나면사랑 대신에 의심과 미움이 있을 것이고,희락 대신에 슬픔과 번민이,화평 대신에 심한 불안이,오래 참음 대신에 성급함이,자비 대신에 잔인함이,양선 대신에 인색함이,충성 대신에 불성실함이,온유 대신에 오만함이,그리고 절제 대신에 자만심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무서운 것이 이 계명을 어김으로 인해, 인간에게 적용되는 두 번째 돌 판의 모든 죄를 짓게 되는 시발점이 된다는 것이죠.
사람이 자기 부모를 봉양하는데 사용해야 할 재물을 보고 “고르반이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탐욕 때문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또한 모든 살인의 동기에는 부정한 욕망, 즉 자신의 만족이 채워지지 않음을 극단적인 행동으로 옮긴 것들이죠.
실제로 간음을 행하기에 앞서 언제나 육욕이 가득한 마음이 행동으로 옮겨졌다는 것이죠.
모든 종류의 도적질은 합법적인 방법에 의해 얻을 수 없는 것을 갖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거짓 증거를 하게 되는 악한 마음은 어쩌면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탐욕스러운 야망에 의해 자극되었을 것입니다.
이득을 취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굳이 거짓말을 하게 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이 계명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탐욕’은 벌써 공의로우신 하나님과 관계가 틀어져 있다는 것을,자비로우신 하나님께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탐욕이 일어나면 첫 번째 돌 판에 새겨진 네 개의 계명을 어기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은 자신의 이기심이 채워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런 이유로 인간들은 하나님 말고 끊임없이 다른 종류의 신들을 만들어 욕망을 채우려 합니다.
만족을 얻으려 하지만 여전히 목마르고 채워지지 않는 지옥을 경험합니다.
자신들을 위해 만든 거짓 신들과 형상들로 인해 ‘지옥’ 가운데 살게 되는 것이죠.
욕망을 채우려는 공허함은 인간들에게서 ‘쉼’을 앗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위해 주신 삶의 ‘여백’이 감사와 기쁨이 아닌, 욕망의 도구가 됨으로 인해 점점 피폐해 가는 삶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으로 인해 행해지는 일인지, 아니면 탐욕으로 인해 하는 일인지를 깊이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늘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진정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고,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참 신기하죠?하나님을 갈망하면 생수를 경험하는데, 육신의 욕망을 갈망하면 더욱 목마름을 느끼게 되는 것이 말입니다.
이 계명을 지킨다는 것.
이제 중요한 것은, 성경의 정신으로 돌아와 신앙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탐욕이 부족한 자의 산물이라면, 탐욕을 이기는 길은 충분한 사랑과 만족감을 가지고 사는 길이지요.
무엇이 우리의 삶을 만족하게 할까요?
우리 신앙의 놀라운 비결은, 어떤 때든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완벽하게 채우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과 관심을 우리가 지금도 받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의 첫 번째 고백이 있다면, 하나님께 받고 있는 사랑과 은혜의 감격이지요.
만일 오늘 여러분들 중에 이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잃어버리고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한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보다 더 큰 만족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큰 사랑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사랑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여러분들 한사람 한 사람에게 동일하게 큰 사랑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몇 해 전 포천에서 열린 중앙연회 평신도 수련회 강사로 갔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 장로님들 얼굴만 제게 크게 들어오는 겁니다.
저는 참석한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여기 있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에게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누구를 제일 사랑하겠습니까?”
두 말 할 여지없이 우리 교회 장로님들이지요.
그 날은 저를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계시던 장로님들이 너무 좋아서 말씀을 마치고 한 사람 한사람 다 허깅을 했습니다. 아마 다른 교인들이 보면서 참 이상하게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사야 49장 15절의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그래도 무엇이 부족하신가요? 아주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어 소개합니다.
주일학교 교장 선생님 앞에 두 어린아이가 서 있었습니다.
교회에 처음으로 온 아이들이기 때문에 주일학교 학생으로 등록하기 위해서였지요.
아이들에게 이름과 생일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키가 좀 더 큰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둘 다 일곱 살이에요. 내 생일은 4월 8일이고, 내 동생의 생일은 같은 해 4월 20일이에요”
이 말을 들은 주일하교 교장 선생님은 의아해하며 말했습니다.
“그럴 수는 없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사실이에요. 우리 중 하나는 양자거든요.”
교장 선생님은 자기도 모르게 “그러면, 누가 양자란 말이니?”하고 물었습니다.
이 말에 두 소년은 서로 바라보고 씽긋 웃었습니다.
“얼마 전 우리도 아버지에게 똑 같은 질문을 했어요. 그러나 아버지 말씀이 우리를 둘 다 너무나 사랑하셔서 누가 양자인지 잊어버리셨대요.”
사실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런 사랑을 받고 있지 않나요?
우리들의 모든 과거를 잊어버리신 하나님의 사랑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요한 것이죠. 이 사랑을 힘입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은혜의 삶’이죠. 이 은혜의 삶을 살아가면 우리는 영적 성숙을 경험합니다.
‘조금 더’ 채워져서 만족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충분히 부요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지난 해 젊은 목회자들을 위한 수련회를 인도할 때입니다. 앞에서 강의하시는 목사님이 상담을 전공한 분인데 저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만나교회 김병삼 목사님을 보세요. 저렇게 교회가 크고 부흥했지만 공황장애를 앓고 있어요. 교회가 크다고 행복한 게 아닙니다. . .”
그 때 강의 중간에 제가 손을 들고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그 말은 조금 고쳐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것은 맞지만 행복하지 않다는 말은 틀렸습니다. 공황장애가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제 속에 행복과 부요함을 빼앗아 가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그 목사님은 젊은 목회자들에게 교회의 크기에 관계없이 행복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커서 일이 많고 바빠서, 그렇게 살다 병이 찾아와서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현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고백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다른 것들을 부러워하는 것이죠.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오늘 당신의 삶에 감사가 있습니까?
저는 어제 어떤 집사님을 심방하게 되었습니다. 병원 건물을 짓고 감사 예배를 드렸는데, 위치도 좋고, 보기도 좋고 근처 어떤 건물이나 병원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공예배를 드릴 때 보다, 살이 많이 빠져 있었습니다.
식사를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의사로 가장 힘들었던 때, 전방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했던 때가 참으로 행복했다고요.
지금은 그 때보다 많은 것을 가졌지만, 그것이 행복은 아닌 것 같다고요.
저는 새로운 건물에서 축복기도를 하고, 더 깊은 은혜의 바다로 들어가서 축복을 받으라고 권면을 하고 왔습니다.
오늘 여기에 있는 분들이 부인하지 못할 것은, 결코 많고 적음으로 감사와 만족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바로 그것이“영적 성숙“의 가장 분명한 표징입니다. 탐욕을 버린 자만이 성숙된 신앙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탐욕을 버리는 영적 성숙의 축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마지막 십계명인 10번 째 금령은 단순히 죄냐 아니냐의 차원을 벗어납니다.
그 마음속에 탐욕이 들어가면, 하나님의 생각과는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속에 탐욕이 들어가면 여러 가지 변명들이 생각이 나고, 나 스스로를 정당화할 이유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소유하십시오!
래리 크랩이 쓴 [래리 크랩의 파파기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조금 소개해 보겠습니다.
둘째 아들 켄이 여덟 살이었을 때 우리는 센트럴 파크에서 숨바꼭질을 했다. 그 아이가 나무에 기대어 눈을 감고 열까지 세는 동안, 나는 다른 나무 뒤에 숨었다. 아이는 계속해서 나의 시야 안에 있었다. 2분가량 지났을까, 아이에게서 신명난 미소가 사라지더니 순식간에 공포에 질린 표정이 나타났다.
‘아빠가 어디에 있지?’ 아이의 눈빛에서 이런 의문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얼른 나무 뒤에서 나왔다. 그러자 아이는 “아빠!” 하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아빠를 못 찾을까 봐 겁이 났어요.”
그 순간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아빠가 사 주기로 한 장난감도 그 무엇도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가 원했던 것은 오로지 나와 함께 있는 것뿐이었다.
선교사이자 전도자인 스탠리(E. Stanley)는 이렇게 썼다.
“기도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얻는 일이다. 당신이 하나님을 얻으면 다른 모든 것은 뒤따라온다.
그러면 어떻게 이 탐욕의 마음을 제거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소유할 때 일어나는 일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소유할 수 있나요?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면 됩니다.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서처럼,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심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단순히 금지의 명령으로만 생각한다면, 결단코 축복된 삶을 살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 때문에 우리는 더욱 많은 죄책감에 시달려야 할 것입니다. 율법은 오히려 죄를 더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계명은 능동적인 사랑의 계명으로만 완성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 갈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바로 오늘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주님을 모시고 있을 때만, 가능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거짓증거하지 않으면, 훔치지 않으면 기본은 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축복해 주지 못하면 잘못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요즘 여러분들에게 이런 질문을 계속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마음속에 계십니까?”
“성령님께서 당신의 마음속에 계시므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십니까?”
제가 설교를 하면서 종종 경험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똑같은 설교를 해도,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실 때와 계시지 않을 때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중에 ‘충만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우리가 충만해 하나님의 영이 우리들에게서 흘러넘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인해 제 삶에 전면에 하나님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상용하시는데 우리의 조건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자녀 삼으셨기 때문입니다.“부요함”
바로 이런 감정입니다.디모데후서 2장 20 - 22절의 말씀,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결국 내가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는 것은, 내 속에 탐욕이 제하여진 만큼, 내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만큼 이라는 것이지요.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기도했던 것처럼,
내 눈을 감겨 주십시오
그래야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아 주십시오
그래야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탐욕을 정복한 사람들의 삶입니다.
이렇게 사는 자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며 살아갑니다.
우리 삶에 가장 큰 축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말씀은 남의 것을 소중히 여기라는 의미입니다. 남의 것도 귀하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왜 다른 사람의 것을 소중하게 여겨야 할까요?
다른 사람의 소유는 하나님이 그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내게 있는 소유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의 진짜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의 진짜 주인도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맡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남의 것을 탐내면 하나님의 주권을 범하는 것입니다. 탐심이 이렇게 큰 죄가 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부자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부자는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것을 모아두었으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며 누리자”라면서 자기의 영혼, 자기 생명이 ‘자기 것’이라고 외쳤는데, 예수님은 “네 것이라는 생명을 오늘 내가 도로 가져가면 네 자랑하던 수많은 재산은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자는 생명을 ‘자기 것’이라고 큰소리 쳤는데 하나님은 “그 생명을 오늘 밤 내가 도로 가져가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짜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내 삶의 주인은 누구인지 확인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내 물질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자주자주 하면서 사시길 바랍니다.
십일조 생활을 하십시오.
탐심을 물리칠 수 있는 실제적인 길은 온전히 십일조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십일조 생활은 하나님 나라에 내가 귀하게 쓰임 받는 것도 되지만 또한 그것은 내 삶의 탐심을 물리치는 힘이 됩니다.
베푸는 삶을 사십시오.
탐심을 물리치는 또 하나의 좋은 방법은 자꾸 손을 펴고 베푸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억지로라도 자꾸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며 사십시오.
탐심을 물리치는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어찌 탐심을 부릴 수가 있습니까? 사랑하면서 살 때 탐심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마십시오. 남의 것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내게 하나님이 맡긴 것을 소중하게 여기십시오. 내게 있는 것에 집중하십시오. 내게 있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내게 있는 것에 신실하고 충성하십시오.
열 번째 계명의 말씀을 마치면서 시편 23편 1절 말씀을 묵상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