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쓰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백석 아들, 딸, 부인, 백석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뿐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이라 릴케’가 그러하듯이
-2024년 현역 시인들 설문조사 결과 ‘가장 좋아하는 시’,
백석의 ‘백석전집’(실천문학사, 2003)에서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 → 기억의 영상들이 비치게 되는 곳
(바람벽은 황해도 방언으로 바람쪽, 바람쭉, 바람팍이다. 흰바람벽은 흰색 창호지를 바른 문 인듯.
나를 외로움과 고독으로 가두는 이 사방의 벽을 말함.)
* 쓸쓸한 것 → 지배적 정서
* 좁다란 방, 희미한 십오촉 전등, 때글은 다 낡은 무명 셔츠 → 화자의 가난하고 쓸쓸한 삶 암시
* 달디단 따끈한 감주 → 고향의 어머니를 연상하게 되는 계기
*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 화자의 쓸쓸하고 외로운 내면의 풍경
* 가난한 늙은 어머니의 모습 → 고달프고 힘들게 살아오신 어머니의 일상을 떠올려 봄.
* 앞대 → 어느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그 남쪽 지방을 이르는 말. 아랫녘
* 개포 →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
*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 가의 나지막한 집 → 고향에 있는 화자의 집
* 바람벽에 비친 고향의 영상 → 고달픈 어머니의 모습과 단란했던 가족의 모습
그리움의 대상이자 동시에 쓸쓸함을 더해주는 대상임.
*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의인화, 쓸쓸한 자신의 처지를 위로하는 모습
* 글자들 → 화자의 내면 의식을 직접 드러내는 내용
비참하고 쓸쓸한 처지에 있는 화자 자신을 위로하는 내면 의식
현실적 패배와 정신적 승리 사이의 긴장감을 형성하면서 주제의식을 강화하게 됨.
* 나는 이 세상에서 ~ 태어났다. → 불행하고 쓸쓸하게 살지만 고결하게 살아가야 할 운명이라는 인식
* 내 가슴은 ~ 슬픔으로 가득 찬다.
→ 나는 남들보다 열정적이고 쓸쓸하고 행복하고 고통스러운 감정을 많이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결국 이러한 감정들을 고결한 정신으로 극복할 수밖에 없음을 감추어두고 말하는 것임.
* 울력하는 듯이 →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쳐 나를 도와주는 듯이
* 하늘이 이 세상을 ~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 화자 자신이 하늘의 은총을 가장 많이 받은 존재라는 사실에 자긍심을 느끼며 스스로의 처지를 극복하고자 함.
* 초승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 고결한 이미지의 사물들로, 화자 자신과 동일시 하는 대상들임.
* 프랑시스 잠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 → 불행하지만 고결하게 살았던 시인들
백 석(1912~?)
본명은 백기행. 1912년에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남. 오산 고보를 졸업하고 동경 아오야마 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함. 1934년에 귀국하여 조선일보에 입사했으며, 1935년 시 <정주성>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여 1936년 시집 <사슴>을 출간함. 1945년 해방 후에는 북한에서 문학 활동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