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 150 글쓴이: Lucius Cornelius sulla 조회: 12 날짜: 2004/09/05 20:31
신성로마제국의 출발점에 관하여
이 경 구
Ⅰ. 문제의 제기 2. 오토제국의 성격
Ⅱ. 논의의 전개 Ⅲ. 논의의 마무리
1. 샤를마뉴제국의 성격
Ⅰ. 문제의 제기
중세를 대표하는 정치적 공동체로서의 신성로마제국에 관해서는 그동안 수많은 학자들이 많은 연구를 해왔다. 이 제국을 지도하였던 황제들의 정책 및 사상, 황제들과 교황들간의 갈등관계, 그리고 하나의 제도로서의 제국의 의미, 성격 혹은 이념에 이르기까지 많은 연구들이 이루어져왔다. 본인도 그동안 신성로마제국의 대표적인 황제들의 정책과 그들의 제국이념에 관한 여러 편의 논문과 저서를 통해서 나름대로 이 제국의 성격을 규명하려고 노력해 왔다.
연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심각한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학자들이 이 제국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다양한 논의를 하고 또 매우 세부적으로 연구를 수행하면서도 정작 아주 기본적인 하나의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 제국의 출발점에 관한 것이다.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962년 오토대제가 교황 요한네스 12세로부터 황제로 대관한 사건을 신성로마제국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중등학교 교과서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으며,1) 대학의 문화사나 서양사 개론서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2) 심지어는 백과사전까지도 그 입장을 그대로 취하고 있다.3)
우리나라 학계의 경우 이렇게 962년 오토대제의 대관식을 신성로마제국의 출발점으로 보려는 입장이 일반화되어 있지만,4) 세계적인 차원으로 시야를 확대해 보면 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이 문제에 관하여 외국의 학자들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 검색엔진 야후(Yahoo)를 통해서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이라는 주제로 서취를 해 보았다. 이 주제로 검색된 웹 사이트가 38만개 이상이나 되었다. 물론 그 중에는 이 주제와 간접적으로 관련된 사이트가 많이 있었고, 매우 간략히 이 문제를 취급한 사이트도 있었다. 이러한 사이트들을 제외하고 이 주제와 직접 관련된 대표적 사이트만을 골라서 검토를 해 보았다. 그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웹 사이트에 나오는 내용 중에서 거의 절반은 신성로마제국의 출발점을 800년 샤를마뉴 대관식 사건으로 보고 있으며,5) 나머지 절반가량은 그 출발점을 962년으로 설정하고 있었다.6) 그런데 문제는 그 사이트들을 작성한 사람이나 기관에서, 개인이나 단체의 입장에 따라서, 비판 없이 막연히 어느 쪽을 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성로마제국의 출발점은 하나일 것이고, 또 하나로 설정되어야만 할 것이다. 인터넷이 날로 큰 위력을 발휘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잘못된 정보나 지식이 미칠 부정적인 파장이 얼마나 큰 것인가는 새삼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비록 시기적으로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학자들이 진지하게 논의를 거쳐, 신성로마제국의 출발점을 하나로 설정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 문제를 논문의 주제로 선정하였다.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결론을 도출해내는 방법은 비교적 간단하다고 생각된다. 먼저 신성로마제국의 본질적 성격을 파악한 후, 그 본질적 성격이 언제 어떤 사건을 계기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는지 알아보면 될 것이다. 만일에 그 특성이 샤를마뉴 대관과 더불어 형성되었다고 한다면 그 출발점을 800년 사건으로 설정하면 될 것이고, 오토의 대관과 더불어 형성되었다고 한다면 962년을 그 출발점으로 설정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결론이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지 검증하기 위해서는 샤를마뉴제국의 성격을 오토제국의 성격과 비교해 보면 될 것이다. 만일에 그 비교를 통해서 양자가 같거나 아주 흡사하다면 800년을 신성로마제국의 출발점으로 설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고, 양자가 아주 이질적이라면 962년으로 그 출발점을 설정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다행히도 본인은 박사학위 논문과 저서를 통해서, 중세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파악하기 위해 중세의 대표적 황제들의 정책과 이념, 그리고 제국의 성격에 관해서 그동안 꾸준히 연구를 해왔다. 그동안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이러한 비교의 방법을 통해서 신성로마제국의 출발점에 관해서 논의해 보기로 하겠다.
Ⅱ. 논의의 전개
논의에 앞서 먼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용어의 개념에 관해서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현대의 사가들이 중세의 제국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신성로마제국’(sacrum Romanum imperium)이라는 정식 라틴어 명칭은 실제로는 콘라트 4세(1254년)에 이르러서야 나타났다.7) 정식 명칭은 이렇게 뒤늦게야 나타났지만, 그 제국을 특징짓는 용어들은 이미 샤를마뉴시대부터 사용되었다. 800년 대관식에서 고대 로마황제들이 사용하던 ‘존엄한 황제(Imperator Augustus)’라는 칭호가 샤를마뉴에게 부여되었으며, 대관 이후에 그는 공문서에서 ‘로마제국’(Romanum imperium)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8) 962년에 오토 역시 샤를마뉴와 동일하게 ‘존엄한 황제’라는 칭호와 ‘로마제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으며, 이 표현은 이후의 독일황제들에게 전통이 되었다.9)
그 이후에 프리드리히 바바롯사는 교황과의 투쟁에서 제국의 신성한 성격을 강조할 필요에 따라서 1157년에 최초로 ‘신성한 제국’(sacrum imperium)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10) 마침내 콘라트 4세에 이르러서 로마제국이라는 표현과 신성한 제국이라는 특성이 결합되어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이라는 용어가 정식으로 출현하였다.
사실 콘라트 4세 이후에 이 제국은 볼테르의 표현대로 신성하지도, 로마적이지도, 제국도 아니었던 유명무실한 제국으로 전락하였다.11) 16세기 초 칼 5세 때에 이르러 반짝 영광을 누리기는 하였으나, 16세기에 신성로마제국은 이미 중세제국이 지니고 있던 유일한 보편제국으로서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였다. 이웃에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국가적 통합을 이룩한 프랑스가 유럽의 패권에 도전하였으며, 영국도 역시 절대왕정을 중심으로 민족적 통합을 이루고 왕권 중심의 강력한 국가로 도약하고 있었다. 이 때의 독일제국은 그 영토 면이나, 세력 면에서 중세의 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현저히 축소되어 있었으며, 또 유럽의 일부인 독일지역을 중심으로 그 제국의 역사가 전개되었다. 이러한 시대상황의 영향을 받아서 1512년에는 ‘독일인의 신성로마제국’ (Heilige Römische Reich Deutscher Nation)이라는 명칭이 나타났다.12) 이렇게 그 제국의 명칭은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제국의 역사와 함께 하였다. 30년 전쟁의 결과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독일은 사실상 영방국가로 전락하면서 제국의 실체는 사라졌다. 그러나 형식상으로 그 명칭과 명맥은 합스부르크가의 최후 황제인 프란츠 2세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렇게 볼 때, 이 제국이 쇠퇴한 시점은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난다. 즉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프리드리히 2세 시대를 마지막으로 이 제국은 중세적 제국의 특성을 대부분 상실하였다.13)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가 시작되면서 이 제국은 극도로 쇠퇴하였으며, 베스트팔렌 조약을 계기로 역사적 실체로서의 신성로마제국은 지상에서 사라졌다. 유명무실한 존재로 지속되던 이 제국은 1806년 나폴레옹의 라인동맹으로 해체되면서 종말을 고하였다.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은 이렇게 분명하다. 문제는 출발점이다. 서론에서 문제로 제기한 바대로, 이 제국의 출발점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기 위해서 먼저 샤를마뉴 대관의 의미와 그 대관과 더불어 수립된 제국의 성격에 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다.
1. 샤를마뉴제국의 성격
800년 12월 25일에 로마의 성 베드로 교회에서 교황 레오 3세는 손수 샤를마뉴를 황제로 대관하였다. 그러자 크리스마스 미사에 참석한 로마인들은 ‘신으로부터 대관한 아우구스투스’라고 샤를마뉴를 환호하였다.14) 이렇게 하여 고대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새로운 로마황제가 출현하였다. 이 사건에 임하여 샤를마뉴의 궁정시인 모도인(Modoin)은 고대 ‘로마제국의 부활’(renovatio Romani imperii)을 선언하였다.15) 물론 476년에 이미 사라진 서로마제국이 부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샤를마뉴 궁정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고대 로마제국의 부활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 때에 출현한 제국은 사실은 프랑크인들의 제국이었다. 800년 당시에 샤를마뉴는 실제로 유럽대륙에서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으며, 그는 로마를 포함한 이탈리아, 고올지방, 독일지역에 이르기까지 고대 로마황제들이 지배하던 유럽대륙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어느 면에서 샤를마뉴는 황제가 될 수 있는 외형적인 자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의 지위에 올랐다고 할 수도 있다.16) 그러므로 그 제국은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바대로 샤를마뉴제국 혹은 프랑크제국이었다. 그런데 교황은 왜 샤를마뉴를 로마황제로 대관하였으며, 샤를마뉴는 왜 이렇게 수립된 제국을 로마제국이라고, 그것도 고대 로마제국의 부활이라고 선언하였을까?
그것은 교황의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라서 800년 샤를마뉴 황제대관식 사건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17) 우선 교황은 이 사건을 통해서 비잔틴황제들의 황제교황주의(Caesaro-Papism)로부터 벗어나기를 기대하였다.18)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에 교황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서서히 이탈리아인들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6세기 후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에 일시적으로 이탈리아가 비잔틴의 지배 하에 들어가기는 하였지만, 그의 사후 비잔틴인들의 세력이 콘스탄티노플로 축소되었고, 이탈리아에서는 라벤나 지역과 시칠리아 섬, 남부의 칼라브리아 일부 지역만이 제국의 세력 하에 남아있었다. 비잔틴황제는 라벤나 태수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이탈리아를 지배하였을 뿐이다. 특히 북부 이탈리아 지역에 거점을 확보한 롬바르드족이 본격적으로 세력의 팽창을 기도하기 시작한 8세기 초반부터 이들의 침략에 맞서 이탈리아인들의 정치적 지도자 역할을 담당한 실질적 인물은 교황이었다.19)
그러나 비잔틴황제는 고대 로마황제의 정통 계승자 자격으로서,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황제의 정치적 지배권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라벤나 태수를 통해서 그 권리를 행사해 오던 황제는 8세기 중엽(751년)에 라벤나 지역이 롬바르드 지배 하에 들어가 이탈리아에서 근거지를 상실한 후에는 교황을 통해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려고 하였다. 즉 교황을 라벤나 태수와 같은 황제의 행정관리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황제는 세속적인 권리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권리까지도 주장하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래 비잔틴황제들의 항구적 전통이 되어왔던 황제교황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기독교 세계의 최고 지배권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비잔틴인들의 황제교황주의 하에서 교황은 비잔틴 교회의 수좌대주교와 같은 지위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물론 세속적인 분야에서도 이탈리아에서 독립적인 지위를 누리고자 하는 교황과 교속 양면에서 최고의 통치권리를 주장하는 황제 간에는 필연적으로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그 갈등은 8세기 초에 성상숭배문제를 계기로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와 3세 때부터 노골적으로 표출되었다.20)
비잔틴황제의 지배 하에서는 이탈리아는 물론 기독교 세계에서 실질적인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 교황은 황제교황주의의 구속에서 벗어날 방도를 물색하였고, 그 최초의 결과로 나타난 사건이 바로 8세기 중엽에 교황 자카리아스의 피핀의 쿠데타에 대한 지원이었다. 부당한 쿠데타를 교황이 지원한 이유는 당시에 서유럽에서 유력한 인물로 부상하던 프랑크 지도자를 교회의 보호자로 세우려는 것이 근본 목적이었다. 교황은 유력한 인물을 보호자로 세워 비잔틴황제의 법률적 구조로부터 벗어나 서방교회의 독립을 누리고, 그 교회에서 실질적인 수뇌가 되고자 하였던 것이다.21)
어느 면에서 800년 샤를마뉴 대관식 사건은 이미 8세기 중엽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로마교회와 프랑크 왕국 간 제휴의 완성이었다. 800년 사건은 비잔틴황제의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교황의 사전 치밀한 계획의 결과였다. 교황이 로마황제를 세운 것도 비잔틴과의 관계를 단절하기 위한 계획적인 것이었다. 교황의 계획은 성공하였다. 800년 사건과 더불어 실제로는 프랑크 군대를 힘의 배경으로 삼고 있던 샤를마뉴 왕은 로마황제가 되었으며, 샤를마뉴가 지배하는 영토는 왕국에서 제국으로 바뀌었다. 이제 이 제국은 단순한 새로운 제국이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 수립된 제국은 이념상으로 로마제국이었다.22)
서부에 새로운 로마제국이 출현하였다는 것은 단순히 교황이 비잔틴황제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문제를 넘어서 새로운 차원의 문제를 야기하였다. 당시에 제국의 동부지역에는 콘스탄티노플에 중심을 둔 비잔틴제국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 제국은 고대의 로마제국을 단절 없이 계승하는 정통의 로마제국이다. 정통의 제국이 버젓이 존재하는 현실 속에서 교황이 새롭게 로마제국을 세움으로써 두 개의 제국이라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것은 하나의 보편제국만이 존재한다는 고대 로마인들의 제국이념에 정면 위배되는 일이었다.
교황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였을까? 이 문제에 대한 결정적 해결책으로 제창한 이론이 ‘제국의 이전’(translatio imperii) 논리이다. 800년에 신의 뜻에 따라서 제국의 중심이 콘스탄티노플로부터 로마로 이전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비잔틴제국에 이레네(Irene) 여제가 불법적으로 황제자리에 올라있었다는 사실이 이 이론에 타당성을 부여해 주었다.23) 아니 교황이 계획적으로 이 시점을 택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그렇다면 제국의 중심을 이전하게 만든 장본인은 누구일까? 샤를마뉴일까? 교황일까? 아니다. 만일에 그 장본인이 인간이라고 한다면, 설득력도 약하고 비잔틴인들의 더 큰 반발을 초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교황은 신을 끌어들였다. 신의 뜻에 따라서, 제국의 중심이 다시 로마로 이전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교황은 신의 뜻을 끌어들여 샤를마뉴제국의 수립을 정당화함으로써 비잔틴인들의 공격에 대응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신의 개입이라는 교황의 논리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였다. 샤를마뉴 대관에 신의 개입을 강조할수록 샤를마뉴의 권위도 동시에 상승하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제국의 수립에 임하여 비잔틴의 반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신의 논리를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었고, 신의 개입을 강조하면 교황과의 관계에서 황제의 권한이 높아진다는 문제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후의 중세역사에서 교황이 안게 되는 하나의 큰 딜레마였다.
하지만 교황의 이론에 따라서, 결과적으로 샤를마뉴는 신에 의해서 세워진 황제, 즉 신성한 황제가 되었고, 그의 제국은 신성한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이었기 때문에 신성한 제국이 되었다. 그러므로 800년에 수립된 제국은 성격적으로 제국 내에서 기독교라는 종교가 중심역할을 하는 기독교제국이었다.24) 앞서 설명한 대로 교황의 의도에 따라서 800년에 수립된 제국은 고대 로마제국의 부활로서의 로마제국이었으며, 동시에 제국의 이전과 수립을 주도한 장본인은 하나님 신이었기 때문에 이 제국은 신성한 제국이었다. 실제로 황제가 된 이후에, 샤를마뉴는 로마황제로서의 역할과 신성한 군주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겸하였다. 로마황제의 자격으로 세속사에 있어서 최고의 수뇌로서 신민을 지배하였으며, 신성한 군주의 자격으로 종교에 관한 문제를 직접 관장하였다. 따라서 샤를마뉴 대관과 더불어 수립된 제국은 이론상이나 이념상으로 신성한 로마제국이었다.25)
2. 오토제국의 성격
오토대제는 962년 2월 2일에 교황 요한네스 12세로부터 황제로 대관하였다. 이로써 샤를마뉴가 대관한 이후 160여년 만에 독일지역에 또 하나의 새로운 제국이 수립되었다. 160여년의 간극을 두고 수립된 이 새로운 제국은 실제적으로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전의 샤를마뉴제국과 차이점이 있었다.
우선 영토의 차이가 있었다. 샤를마뉴제국은 서유럽의 대부분 지역을 포함하는 광활한 영토를 배경으로 출현하였던 데 비하여 오토제국의 영토는 독일과 중북부이탈리아, 부르군트에 국한되어 있었다. 다음으로 제국의 수립을 주도한 인종적 기반이 달랐다. 샤를마뉴제국의 인종적 주체는 프랑크인이었던 데 비하여 오토제국의 인종적 주체는 작센인들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시대의 성격에도 차이가 있었다. 샤를마뉴의 시대는 프랑크족을 중심으로 하여 정복을 통해 서유럽의 각 지역을 하나로 통합해 가던 시기였지만, 오토 시대는 카롤링 혈통이 단절되고 이민족의 침입을 거치면서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지역간에 발전의 차이가 발생하였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독일지역에서는 독일왕국이라는 독립왕국의 의식이 처음으로 싹트기 시작하였다.26)
오토의 제국 속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새로운 특징들을 중시해 온 사가들, 특히 독일의 민족주의 사가들은 오토제국의 독창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19세기에 후반에 활약하였던 피커(Julius Ficker)는 오토제국은 샤를마뉴제국과는 전혀 다르다고 평가하였다. 그에 따르면 샤를마뉴제국은 로마적 제국이념과 기독교적 세계관의 융합의 산물이었으며 어떠한 민족적 기반도 없었지만, 오토대제와 그의 계승자들의 제국은 민족적이고 독일적인 제국이었다.27) 그 이후에 린첼(Martin Lintzel)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로마제국이나 카롤링제국의 전통도, 심지어는 칼대제라는 모델까지도 오토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고 주장하였다.28) 배러클러프(Geoffrey Barraclough) 역시도 오토는 고대 로마적인 제국이념에 따라서 서유럽 전역에 대한 보편적 지배권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샤를마뉴를 그의 모델로 삼지도 않았으므로, 그의 제국은 고대 로마제국과 동일시되어서도, 그렇다고 서양의 기독교계와 동일선상에서 평가되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29)
이상 3명의 사가를 비롯하여 람프레히트(Karl Lamprecht), 브랙크만(Albert Barckmann) 등 많은 사가들이 오토의 황제정책은 로마적 이념이나 기독교적인 이념의 구현이 아니라 전적으로 독일국의 이익이라는 현실적인 정책 테두리 안에서 추진되었다고 평가하였다.30) 이렇게 주로 독일의 민족주의적인 입장에 서 있는 사가들은 오토의 제국을 새로운 독특한 제국으로 전제하고, 샤를마뉴제국과는 전혀 다른 독일 민족국가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바로 이들 사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신성로마제국은 곧 독일제국이며, 962년에 오토대제의 대관과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이론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물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측면에서 샤를마뉴제국과 오토제국 간에는 차이가 난다. 그렇다고 과연 독일의 민족주의 사가들이 주장하는 바대로 이념적으로 두 제국은 어떤 상관관계도 없는 것일까? 이 문제를 규명하려는 것이 본장에서 논의의 핵심이다. 앞장에서 이미 살펴본 샤를마뉴제국과 비교해 가면서 오토제국의 본질적인 성격에 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다.
논의의 순서상 먼저 오토 황제대관의 의미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오토 역시 샤를마뉴처럼 교황의 의도에 따라서 황제가 되었다. 962년에 교황 요한네스 12세는 오토에게 교황의 적들을 퇴치하고 교황을 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오토는 이 요청에 응하였고, 이탈리아 원정을 단행하여, 교황을 반대파 적들로부터 구해주고 그에 대한 보답의 형식으로 황제관을 받았다. 마치 샤를마뉴가 레오 3세를 세속귀족들의 폭력으로부터 구해주고 그 대가로 대관을 한 것과 흡사하다.
962년에 교황이 오토에게 도움을 호소하였을 때, 그 호소는 사실상 교황을 보호해 주고, 로마교회를 수호해 달라는 호소였다.31)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오토의 궁정고문이었던 리우트프란트(Liudprand of Cremona)의『오토 연대기』에서 확인된다. 이 글에 따르면 “교황은 사절을 보내 오토에게 성스런 로마교회를 적들로부터 구하여 이전의 영광과 자유를 회복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32) 로마시의 성문에 도착한 오토는 대관 직전에 실제로 그의 사절을 통하여 교황의 영지에 대한 수호자의 역할을 수행하겠다고 맹세하였다.
이렇듯 교황의 입장에서 볼 때, 오토의 황제대관은 교회의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결과에 대한 대가였다. 그러나 황제로 대관을 한 후 오토가 교황의 영지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자신에게 충성의 맹세를 할 것을 요구하였을 때 교황은 오토에게 실망하여 새로운 보호자를 물색하였다. 요한네스가 보기에 오토는 그가 기대하였던 보호자가 아니라 교회에 대한 전제자로 비쳤기 때문이다.
샤를마뉴의 대관과 마찬가지로 오토의 대관 역시 교황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추진되었다. 9세기말 이후 프랑크의 군주국이 해체되고 이민족의 침입으로 사회적 혼란이 가중됨에 따라서 로마교회의 특별한 보호자도 사라지게 되었다. 강력한 보호자가 없는 가운데 교황들은 세속귀족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빈번하게 교체되었으며, 그 권한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을 만큼 세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황은 교회를 수호하고 교황을 지켜 줄 보호자를 절실히 필요로 하였다. 황제권이 너무 강하여 교황의 권한까지를 요구하는 것도 교황에게는 짐이 되었지만, 그보다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강력한 인물이 부재하는 것이 교황에게는 더 큰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교황은 샤를마뉴와 같은 강력한 인물을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때에 오토가 등장하였다. 오토는 955년에 동쪽에서 독일 지역으로 침입해 오는 마자르족을 레히펠트(Lechfeld) 전투에서 격퇴함으로써 유럽세계에 그 명성을 떨쳤다. 교황은 곧바로 당시 유럽세계의 최고 실력자인 오토를 주목하였다. 오토와 제휴를 희망하는 교황은 오토가 마자르족을 격퇴한 사건을 이민족의 퇴치로 해석하였다. 이민족을 물리치고 기독교 세계를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공로로 교황은 오토를 황제로 대관하였다.33)
오토의 황제대관에 대한 교황의 명분은 기독교 세계의 보호였지만, 사실은 오토를 교회의 보호자로 삼아 교황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 대관의 실제적 목적이었다. 더 나아가 교황이 손수 대관하여 황제를 세우고, 황제를 세우는 주체로서 제국 내에서 최고 권한을 누리려는 것이 대관의 본질적인 목적이었다. 이처럼 교황에게 오토의 황제대관의 의미는 교회에 대한 수호자의 확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교황의 계획적인 의도에 따라 오토의 대관이 이루어졌지만, 황제대관은 오토에게도 위신과 권위를 높여주었다. 대관 이후 오토는 정통의 로마황제로 행세하려고 하였다. 로마황제로 자처하려는 오토의 의도는 몇 가지 측면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우선 칭호 면에서 오토는 대관이후에 정식으로 고대 로마황제들이 사용하던 칭호를 사용하였다. 대관이전에 왕으로서 오토가 사용한 칭호는 ‘왕’(rex), ‘동프랑크 왕’(rex Francorum Orientalium), ‘프랑크와 작센의 왕’(Francorum atque Saxonum rex) 등 이었다. 그러나 대관이후에 공식칭호가 ‘존엄한 황제’(imperator Augustus)로 바뀌었다.34)
다음으로 왕으로서 오토의 대관과 황제로서의 대관 사이에는 역할의 주체에 있어서 차이가 난다. 오토가 독일 왕으로 즉위할 때 그는 ‘프랑크인들과 작센인들’의 선출로 왕이 되었다. 그러나 962년에 로마황제로 대관할 때에 대관식에 관한 기사에서 보면 그는 샤를마뉴처럼 ‘로마인들과 성직자들’의 환호를 받아 황제가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35) 그것은 다름 아닌 로마황제로서의 오토의 지위를 정당화하려는 이유 때문이었다.
나아가서 오토는 샤를마뉴의 정통계승자를 자처하였다. 이미 독일 왕으로 선출될 때부터 오토는 프랑크제국의 정통 계승자임을 강조하였다. 오토는 강력한 작센 군대의 힘을 배경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오토와 동시대에 살았던 비두킨트(Widukind of Corvey)가 작성한 오토의 선출과 대관식에 관한 기사를 보면 이론적으로 오토는 ‘프랑크인들과 작센인들’의 선출에 따라 왕이 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36) 이민족인 작센인으로서 보편적 지배권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프랑크인들의 합법적인 계승자임을 내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동일 기사에 오토는 합법적인 선출의 장소인 아아헨(Aachen)에서 왕으로 대관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37) 이 표현을 통해서도 오토가 샤를마뉴의 전통을 중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아헨은 샤를마뉴제국의 실질적인 중심지로서, 샤를마뉴는 그곳에 궁전을 짓고 그곳을 제2의 수도로 삼았다.38) 오토는 그곳을 대관식 장소로 택하였고 그곳에서 프랑크 왕들이 선출되는 것과 같은 절차에 따라서 왕으로 선출되었다. 왕으로 선출된 오토는 프랑크의 관례에 따라서 마인츠의 대주교로부터 성직을 서임하였다. 그리고 그 대주교는 오토에게 프랑크제국에 대한 권한의 상징으로서 검을 수여하였다.39) 이렇게 오토는 샤를마뉴제국의 계승자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앞서 린첼이나 배러클러프가 오토가 프랑크인들의 전통을 중시하지 않았다고 평가한 것은 잘못이다.
오토가 정통의 로마황제를 자처하였다는 점은 비잔틴황제와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오토의 사절 리우트프란트가 비잔틴의 궁정을 방문하였을 때, 그의 언행에서 오토의 세계관이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968년 오토의 사절로서 그가 비잔틴황제 니케포루스(Nicephorus) 2세를 접견하였을 때 그 황제는 오토의 황제칭호 사용을 비잔틴의 황제권에 대한 찬탈로 간주하고, 로마를 포함한 이탈리아에서 오토의 행위를 비잔틴제국의 영토에 대한 침략행위로 규정하였다. 이에 대하여 리우트프란트는 오토가 이탈리아 원정을 통하여 반도들로부터 로마교회의 평화를 회복하고 교황의 권한과 명예를 회복해 주었기 때문에 그 결과로서 교황으로부터 황제관을 받았다고 응수하였다.
계속해서 그는 콘스탄티누스 기진장을 인용하여 이탈리아는 물론 전서방세계를 콘스탄티누스가 교황에게 주었기 때문에 교황이 그 주인이 되었고, 주인인 교황이 그 지배권을 오토에게 주었기 때문에 이탈리아에 대한 오토의 권리는 정당한 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하였다.40) 오토는 샤를마뉴의 대관과 더불어 제국의 중심은 이미 콘스탄티노플로부터 로마로 이전되었으며, 그러므로 서방세계의 주인인 교황으로부터 신의 뜻에 따라서 황제로 대관한 오토가 샤를마뉴가 지녔던 제국, 즉 신성한 제국을 합법적으로 계승하는 정통의 로마황제라는 것이다.41)
오토의 로마황제 칭호의 사용에 대하여 비잔틴황제들이 사칭이라고 공격해 왔을 때 오토가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는 교황이 샤를마뉴에게 적용한 바로 그 이론이었다. 즉 제국의 이전논리와 신으로부터 대관한 신성한 군주라는 논리, 그리고 교황으로부터 대관한 황제가 합법적인 황제라는 논리였다.
그러나 오토에게 교황의 논리를 강조한다는 것은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었다. 비잔틴과의 관계에서 오토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서는 교황의 역할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교황의 역할을 강조하면 할수록 교황과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황제의 지위가 약화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것이 오토가 안고 있던 딜레마였다.
이 딜레마는 리우트프란트가 비잔틴황제의 공격에 맞서 콘스탄티누스 기진장을 근거로 제시한 데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리우트프란트는 이미 전 세계를 콘스탄티누스가 교황에게 주었기 때문에 교황이 세계의 주인이요, 그 교황으로부터 대관하는 황제가 정통이라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 논리는 비잔틴황제에게 대항할 수 있는 결정적인 논리가 될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황제에 대한 봉건적 주군으로서의 교황의 지위를 인정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오토대제가 직면한 이 딜레마는 사실 이후의 독일황제들에게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이러한 딜레마를 알면서도 샤를마뉴처럼 오토 역시 게르만족으로서 이론적으로 로마인의 후예들을 지배할 권리가 없었기 때문에 로마황제를 자처하였다. 오토가 그의 제국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로마황제임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념적으로 로마황제가 다스리는 로마제국은 전 세계를 포괄하는 보편제국이었기 때문이다. 로마황제가 된다는 것은 이 세계제국을 다스릴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오토가 독일의 범위를 벗어나 이탈리아를 포함한 세계로 지배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명분이 필요하였고, 그 필요를 로마제국이라는 이론으로 해결하였다. 로마황제로 대관함으로써 오토는 독일은 물론 이탈리아를 포함한 서방기독교 세계를 지배할 정당성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오토의 제국은 이념상으로 로마황제가 지배하는 로마제국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제국인 오토의 제국은 과연 어떤 성격을 띠고 있었는가? 오토는 황제로 대관하기 전부터 ‘왕-사제'(rex-sacerdos)로서 확고하게 독일교회를 장악하고 있었다. 왕이 이렇게 교회를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왕은 신성한 존재라는 당시의 일반적인 믿음 때문이었다. 그 믿음이란 왕은 ‘신에 의하여'(a Deo) 세워진 신성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의 평화를 지키도록 신성한 권위로부터 검을 받았다는 것이다. 성직서임이라는 신비로운 과정을 거쳐 신은 왕에게 성스러운 신의 권한의 일부를 부여하였기 때문에 왕은 동시에 사제가 되었다. 왕은 사제로서의 지위에 오르면서 신과 일반신도들 간의 중개자가 되었으며, 교회를 다스릴 의무를 지게 되었다. 신의 대리자로서 오토는 교회의 보호자요 동시에 교회의 지배자가 되었다.42)
오토가 지배할 당시 10세기 후반의 사회는 더욱 기독교화된 사회였고, 그 사회의 기독교도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신성한 군주가 되어야만 하였다. 신성한 군주가 되기 위해서는 교황의 매개가 필요하였고, 그 필요 때문에 오토는 이탈리아 원정을 단행하였다. 그 신성한 군주의 모델은 세속의 황제이면서 동시에 교회의 지배자였던 샤를마뉴였다. 이 때문에 오토는 프랑크제국의 연속성을 강조하였고, 자신이 샤를마뉴의 정통 계승자임을 자처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오토의 입장은 당시대의 지성인들에게도 반영되었다. 당시의 지성을 대표하는 수도사 아드소(Adso of Montierender)는 950년경에 작성한 적그리스도에 관한 소논문에서 다니엘이 예언한 제4군주국에 대한 종말론적 해석을 시도할 때에, 서로마제국 몰락 후에 사람들은 종말에 관한 두려운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으나, 800년에 제국이 부활됨으로써 낙관론을 불러일으켰다고 해석하였다. 800년 사건은 로마제국의 재생으로 간주되었고, 이것은 적그리스도의 도래가 훨씬 훗날로 연기될 것이라는 해석을 낳게 하였다는 것이다. 아드소는 프랑크제국을 로마제국의 연장으로 보고 있으며, 다시 오토의 제국을 프랑크제국의 연속이라고 해석하였다. 또한 그는 오토의 제국을 기독교제국과 완전히 동일시하였다. 그에게 ‘로마적’이라는 표현과 ‘기독교적’이라는 용어는 상호 교체하여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43) 따라서 그에게 로마제국의 멸망은 곧 기독교제국의 멸망을 의미하였다.
후세의 사가들, 특히 중세제국의 역사에서 기독교적인 이념을 중시하려는 많은 사가들도 오토의 제국을 보편적인 기독교제국으로 해석하였다. 먼저 신성로마제국을 창설하는 데 작용한 이념의 체계를 신앙 속에서 찾고자 하였던 브라이스(James Bryce)는 “보편적인 신의 지배원리와 보편적인 제국의 원리가 결합되어 통일을 향한 운동으로 나타난 것이 신성로마제국의 창설이다. 그러므로 신성로마교회와 신성로마제국은 동일한 하나다”고 단언하였다.44) 스르비크(Heinrich Ritter von Srbik) 역시 브라이스와 같은 맥락에서 오토 대제는 전 세계에 대한 평화의 수여자요 기독교와 교회의 보호자로서, 이교도들의 정복자요 개종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보았다.45) 헤르(Friedrich Heer)도 같은 범주에서 오토는 기독교계의 보호자, 수호자,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강조하였다. 이들이 보기에 오토의 제국은 하나의 보편적 기독교제국이었다.46)
이렇게 오토대제와 그의 동시대인들은 오토의 제국을 보편적인 로마제국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념적으로 그 보편제국은 기독교제국과 동일한 개념이었다. 여기서 기독교제국은 보편교회와 동일한 개념이다. 그러므로 보편제국이나 보편교회나 하나의 동일한 공동체를 놓고 달리 부르는 명칭에 불과하다. 이러한 개념은 이미 샤를마뉴 대관과 더불어 형성되었다.
신에 의하여 황제가 된 오토는 당연히 신성한 황제가 되었고, 이 신성한 황제가 다스리는 오토의 제국은 마찬가지로 신성한 제국이었다. 왕으로 대관한 이후 왕-사제로서 독일교회를 통제하였던 오토는 교황으로부터 황제로 대관한 이후에는 황제교황주의를 토대로 하여 교황의 존폐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까지 행사하였다. 그러한 면에서 그의 제국은 성격적으로 기독교제국이었다.
이처럼 오토제국의 성격은 샤를마뉴제국의 성격과 본질적으로 동일하였으며, 이러한 이념은 그대로 후계자들에게 전달되었다. 왕-사제로서의 오토의 정책과 이념은 이후에 오토대제의 손자인 오토 3세에 이르러서는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는 로마황제요 기독교군주의 자격으로 로마를 중심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혁신적인 개혁 프로그램인 ‘레노바치오'(renovatio)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오토 3세의 이 개혁은 2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 하나는 고대 로마황제의 모방을 의미하였으며, 다른 하나는 기독교 군주의 모방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47) 이렇듯 오토대제가 샤를마뉴로부터 계승한 로마적, 기독교적 두 이념은 이후 오토 3세를 거쳐 살리에르가, 호엔슈타우펜가로 면면히 계승되어 중세 독일제국의 전통이 되었다.
Ⅲ. 논의의 마무리
신성로마제국이란 용어는 기본적으로 로마제국과 신성한 제국이 합해서 이루어진 용어이다. 오토대제로부터 시작하여 그 특성이 사라지기 시작한 프리드리히 2세까지 신성로마제국의 이념적 근간은 보편주의였다. 그 한 축이 로마적 보편이념이요 다른 하나의 축이 기독교적 보편이념이었다.48) 오토대제 이래 역대 독일의 황제들은 고대 로마황제의 정통계승자를 자처하였다. 비잔틴황제와 맞서 서부의 제국을 다스릴 자격을 지니기 위해서는 보편적 로마황제가 아니면 안 되었고, 그 때문에 로마황제를 자처하였던 것이다.
비잔틴황제와는 다른 차원에서 서유럽 공동체의 유일한 지배권을 주장하는 또 하나의 세력이 교황이었다. 교황은 이 공동체를 보편교회로 규정하고 교회의 최고 지배자로서 당연한 지배권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교황의 주장에 맞서 독일황제가 기독교 공동체를 다스릴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신성한 보편황제임을 내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때문에 오토대제 이래 독일의 황제들은 신으로부터 직접 제국을 지배할 권한을 받은 신성한 군주임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이념적으로 오토 이래 중세 독일제국은 보편황제가 다스리는 로마제국이면서 동시에 신성한 군주가 지배하는 신성한 제국, 즉 신성한 로마제국이었다. 이것이 중세 독일제국의 기본이념이다. 그렇다면 이제 서론에서 문제로 제기한 대로 샤를마뉴제국의 성격이 오토 이후의 독일제국의 성격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것만 증명이 되면 결론이 나는 셈이다.
먼저 샤를마뉴제국은 로마제국이었던가? 앞서 본론에서 살펴본 대로 샤를마뉴의 제국의 창설을 주도한 인물은 교황이었다. 교황은 샤를마뉴를 로마황제로 대관하였고, 황제가 된 샤를마뉴는 로마제국의 부활을 선언하였다. 이념적으로 800년에 고대 로마제국이 고대 제국의 수도 로마를 중심으로 부활한 것이다. 물론 교황의 본질적 의도는 새로운 제국을 창설하여 비잔틴황제의 세력을 이탈리아에서 배제하고, 서부 황제의 보호를 받아서 서유럽에서, 더 나아가 전 기독교 세계에서 유일한 권한을 누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샤를마뉴 입장에서도 단순한 게르만의 지도자인 왕으로 머무는 것보다 이념적으로 전 세계의 보편적 지배자인 로마황제가 되는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황의 논리를 수용하여 로마황제를 자처하였다. 따라서 샤를마뉴제국은 이념적으로 고대 로마제국의 연장이었다.
다음 샤를마뉴제국은 기독교제국이었던가? 역시 앞서 논의를 전개하면서 구체적으로 살펴본 대로 샤를마뉴는 신으로부터 대관한 신성한 황제임을 주장하였다. 물론 이 신성한 논리를 처음 내세운 인물은 교황이었다. 서부지역에 새로운 황제의 출현에 대하여 반발해 올 비잔틴황제에 맞서 교황의 대관행위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신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교황은 신에 의해서 대관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교황의 이론에 따라서 결과적으로 샤를마뉴는 신성한 황제가 되었다.
샤를마뉴는 실제로 신성한 기독교 군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종교회의를 주재하였고 성직자들을 임명하였으며 이교도들을 처벌하였다. 그의 제국 내에서 성직자들이 높은 직책을 차지하였다. 따라서 성격적으로 샤를마뉴의 제국은 신성한 제국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결론은 명확해졌다. 샤를마뉴제국이 로마적 보편성과 기독교적 보편성을 띤 최초의 제국이었고, 마찬가지로 오토의 제국이 로마적 보편성과 기독교적인 보편성을 띤 제국이었으며, 오토 이래 독일의 황제들은 샤를마뉴의 정통 계승자임을 강조하였다. 이념적으로 프랑크제국은 고대 로마제국의 연장이었고, 오토의 제국은 프랑크제국의 연속이었다. 따라서 오토의 제국은 로마제국의 연속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그렇다면 이제 신성로마제국의 출발점을 800년 12월 25일 샤를마뉴의 황제대관으로 설정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전북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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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ius Corn.. 신성로마제국의 신성이 기독교 공동체를 다스리는데 있어 교황 보다 우위를 점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군요! 잼나는게 프랑크 왕국이 로마제국의 연장이었고 오토의 제국은 프랑크 왕국의 연속일지니 오토제국=로마제국이라는 등식이라네요 ㅋㅋ [2004/09/05]
텔렌티우스 .. 흠.... 이이야기 많이 들엇지요. 그리고 이글을 아니 역사적인 사건순서로 볼때 하겐슐체의 말에 약간의 반대의사를 표현하겟습니다. 샤를마뉴제국을 신성로마제국즉 게르만의 로마제국의로 볼때 오토의 로마제국은 이를 계승한거나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샤를마뉴가 로마제국의 시초엿다면 오토제국은 혁신로마제국이 [2005/01/08]
텔렌티우스 .. 라는 이름이 맞다고 여겨집니다. 샤를마뉴제국의 여러가지제도를 개혁한 새로운 로마제국(혁신로마제국) [2005/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