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우 국기원 부원장의 ‘태권도 과거’충격적 고백!
http://www2.donga.com/docs/magazine/new_donga/200204/nd2002040010.html
* 시드니 올림픽 승부 개입했다
* 최홍희와 김운용의 태권도 주도권 쟁탈전
* 김운용에 태권도6단 준 내막
* 가라테 본딴 초창기 태권도
* 이승만·박정희의 태권도 휘호 원조싸움
* 경기화로 국제스포츠 된 사연
―부원장께서 무예를 처음 접한 건 언제입니까.
“해방 직후죠. 사춘기의 꿈이라고 할까. 17세 무렵 막연하게 무림의 고수를 꿈꾸고 있었는
데, 어떤 사람이 소공동에 가면 18계를 가르치는 곳이 있다고 하잖아. 그래서 거기를 찾아갔
죠. 그곳이 바로 일제시대 유도 도장이었는데, 그때는 조선연무관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유도
부와 권법부를 만들었어요. 그때부터 권법부에서 가라테를 배운 거죠. 권법이 바로 일본 가
]
라테거든요. 일본말로 부르면 국민감정도 있고 하니까 권법이라고 부른 겁니다.”
―‘장군의 아들’이나 ‘시라소니’ 같은 영화를 보면, 광복 직후의 주먹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사람들도 가라테를 배웠나요.
“내가 알기로 깡패 중에 가라테를 제대로 배운 놈은 없어요. 그냥 떼거지로 몰려다니면서
몽둥이로 때리니까 강해 보였던 거지, 진짜 실력으로 붙었으면 김두환이고 시라소니고 형편
없었을 걸. 운동으로 성공하지 못한 ‘쪼다’들이 주먹계에 들어간 경우는 간혹 있었고.”
―당시 가라테는 당수(唐手)로 불렸죠.
“당수(唐手)로 쓰는 사람도 있고 공수(空手)라고 쓰는 사람도 있었죠. 당수나 공수를 일본
말로 옮기면 가라테가 되거든. 모두 같은 내용인데 도장별로 특색 있게 보이기 위해 권법이
다 당수도다 공수도다 그렇게 불렀어요.”
―부원장께서는 조선연무관에서 가라테를 배우다가 지도관을 새로 여신 겁니까.
“초창기 조선연무관은 유도가 중심이고 한쪽 구석에 권법부가 있었어요. 그런데 조선연무관
이 6·25 때 부역을 했습니다. 조선연무관을 관장하던 이병석씨는 민족주의자였거든요. 그래
서 정치적으로 곤란하니까 권법부 사람들이 다른 장소를 구해서 떨어져 나간 거죠. 을지로 3
가에 있던 한국체육관이 지도관 자리였어요.”
―무술단수로 부원장님은 몇 단까지 땄습니까.
“1년 넘어서 초단이 되고 2단이 되고 3단이 되고 그러면서 6·25가 났어요. 서울이 수복되
고 4단 심사를 보는데 그때 내가 맹장수술을 받았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실기시험을 보
았고, 나는 추천으로 4단을 땄죠. 나중에 협회를 만든 뒤에는 9단까지 올라갔고요. 처음엔
권법 1단이었는데, 나중엔 태권도 9단이 된 겁니다. 명칭이 그렇게 바뀌었으니까.”
태권도계에서 무술단수를 얘기할 때 양념처럼 등장하는 게 김운용 회장의 실제 태권도 실력
이다. 태권도인들은 김회장을 ‘명예 10단’이라고 부르는 데 여기에는 이중적 의미가 담겨
있다. 그가 태권도계에 기여한 부분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실제 태권도 실력에는 의문을 던
지고 있는 것이다.
―‘태권도’라는 명칭은 1955년 4월11일 최홍희 총재가 중심이 됐던 ‘명칭제정위원회’에
서 결정됐습니다. 세계적인 권위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도 태권도의 창시자는 최홍희씨로
나와있고요. 이건 인정하시죠.
“최홍희가 독단적으로 ‘택견’을 한문으로 옮기면서 ‘태권(跆拳)’으로 했던 거죠. 태권
은 지축 태(跆)와 주먹 권(拳)을 합한 뜻입니다.”
―최홍희씨가 쓴 ‘태권도와 나’를 보니까 당시 여러 명이 모여서 협의를 통해 만장일치로 ‘태권도’라고 정한 걸로 나오던데요.
*초창기 태권도는 가라테의 변형
반면 국기원 기술심의회 김병운 의장과 경희대 최영렬 교수가 감수한 ‘신편 태권도 대백
과’(2001)에는 태권도의 가라테 유입설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문구가 들어 있다.
‘광복이 되면서 태권도는 급진적인 발전의 계기를 맞는다. 일제치하에서 태권도는 가라테
의 영향을 받아 상당 부분 변질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선 공수도 당수도 수박도 등으로 혼용
되던 명칭을 태권도로 통일하였다.’
또한 한국체육대학 태권도학과 안용규 교수는 ‘태권도 역사·철학·정신’(21세기교육사,
2000)에서 가라테 유입설을 이렇게 정리했다.
‘태권도가 가라테 품세를 활용했거나 도장의 명칭을 당수 또는 공수로 썼다는 사실을 부정
할 수는 없다. 일부분이지만 수용할 것은 수용한 후 극복해야 한다. 왜냐하면 단지 근대 이
후에 태권도가 가라테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태권도의 뿌리가 통째
로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태권도 교본들이 태권도의 뿌리를 삼국시대 이전으로 잡고 있습니다.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하더라도 좀 무리가 따른다는 느낌이 듭니다.
“나도 그런 식으로 책을 쓴 사람이에요. 솔직히 우리가 내세울 게 없었잖아요. 초창기에는
태권도를 해외에 보급하는 과정에서 옛날부터 있었던 한국의 전통무술이라고 하면 명분도 서
고 잘 먹혀들었어요. 하지만 아무리 유사성이 있더라도 그것은 사실과 다른 겁니다. 역사적
원류로 본다면 중국 것이 일본으로 들어갔고 일본 것이 한국으로 들어왔다고 해야 설득력이
있죠. 일본 사람들이 중국 무술을 많이 개량해서 과학적으로 만들었어요. 한가지 문제가 뭐
냐 하면 일본 사람들은 유연성보다 근육성에 바탕을 두고 운동을 만들었단 말이에요. 그러니
까 몸의 움직임이 굳을 수밖에 없죠.
우리는 이걸 가지고 스포츠로 경기화하기 위해서 겨루기를 시킨 겁니다. 반면 일본 사람들
은 겨루기를 안하고 혼자 하는 운동으로 놔두었고, 중국에서는 손 맞춰서 하는 유연한 운동
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렇게 볼 때 태권도는 중간 입장에서 어느 쪽도 아니에요. 쉽게 얘기하
면 우지좌지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그거죠. 그런데 우리는 겨루기를 했기 때문에
급속도로 발전한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은 중국과 일본이 역으로 우리 걸 배우게 된 겁니
다. 자기들 무술은 보급이 잘 안되는 데다 젊은 아이들이 자기와의 싸움보다 치고 받는 걸
좋아하잖아요.”
―광복이 되고 도장을 연 사람들은 모두 가라테를 했나요.
“기본기를 놓고 볼 때 이렇게 막는다 저렇게 때린다 하는 건 모두 가라테와 똑같아요.”
―그렇다면 우리 전통무예와의 유사성은 없다는 얘기입니까.
“언뜻 보기에는 있는 것 같지만, 기본기가 완전히 달라요. 그래서 사실상 유사성이 없다고
봐야 합니다. 택견도 현대에 와서 많이 변질됐어요. 태권도 하던 사람들이 택견을 배우니까
발차기가 태권도 스타일로 나오는 거죠.”
―광복 이후 태권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영향을 끼친 무술은 가라테 뿐입니까. 다른 것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나요.
“그게 솔직한 대답입니다. 나도 별의별 것을 다 끌어들여서 책을 쓴 사람이지만, 이제는 밝
힐 때가 됐어요. 가라테를 가르치는 관장들이 모여서 태권도의 형틀을 만들었고, 그 실무작
업을 제가 했잖아요. 지금은 우리가 세계 정상에 있으니까 밝혀도 큰 문제가 없어요.”
기자는 대학 시절 한 학기 동안 택견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시 강의를 맡았던 사람은 한
국 택견의 마지막 명인으로 꼽히는 고 송덕기 옹에게 직접 사사한 도기현(현 택견계승회)씨
였다. 잘 알려진 것처럼 택견은 한국 전통무예를 논할 때 1순위로 등장한다. 그래서 태권도
의 역사성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택견과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도씨는 당시 “태권도에 한국적 정서가 반영된 것은 사실이지만, 기술적 측면에서는 가라테
를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부원장에게 택견 수련자들이 태권도에 대
해 품고 있는 의문점을 조심스럽게 던져보았다.
―우리 민족의 무예는 원래 3박자로 움직이는데 비해 태권도는 2박자 운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태권도는 전통무예라기 보다 일본 무예에 가깝다는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택견 입장에서 보자면 올바른 시각이죠. 나는 박자를 잘 몰라요. 하지만 태권도와 택견의
발차기 자세가 어떻게 다르다는 건 잘 알아요. 택견의 발차기는 무릎이 구부러지지 않고 곧
은 발로 올라가는데 요즘은 그런 자세가 나오지 않아요.”
―택견은 시작할 때 손을 앞쪽으로 모으고 정중하게 인사하잖아요. 반면 태권도는 손을 허리에 대고 기마자세를 취하고. 그게 일본적 특성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건 한국적 기준으로 일본적인 것을 구분하는 방법일 뿐이죠. 일본 가라테에도 다양한 유
파가 있고, 그 중에는 자세가 다른 것도 많아요. 중요한 건 손발을 움직여서 얼마나 강한 타
력을 만드느냐 하는 점입니다. 제가 볼 때 택견에는 그런 타력이 없고, 가라테에는 있다는
거예요. 중국 무술에도 그런 타력은 힘들어요.”
―태권도는 직선적인데 택견은 곡선적이므로 택견이 전통무예를 계승하고 있다는 주장은 어떻게 보세요.
“글쎄요. 힘은 거짓말을 못해요. 직선적이라야 강한 힘이 나오는 겁니다. 내가 주먹으로 때
리는 데도 여기서부터 둥글게 돌아나가는 것보다 곧장 나가야 파괴력이 있거든요. 어떤 경우
든 곡선은 직선의 힘에 미치지 못합니다.”
―한국 전통무예 중에 주먹을, 그것도 정권을 지르는 무예가 있었느냐? 이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맞는 얘기라고 봐요.”
―옛날 ‘무예도통지보’ 같은 걸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동작은 직선보다 곡선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그건 간단한 신체운동이나 보건체조로 볼 수도 있고, 다른 형태로 해석할 수도 있겠죠. 물
론 투기적인 요소가 어느 정도 가미됐겠지만, 과학적으로 발전한 가라테에 비하면 전혀 다르
다고 봐요.”
―결국 부원장님께서는 기술적인 수준으로 평가할 때 한국무술이 일본무술보다 뒤떨어진다고 보시는 겁니까.
“지금은 태권도가 경기화해서 앞서 있지만, 태권도가 처음 만들어질 때는 일본이 훨씬 앞섰
죠.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태권도는 가라테의 변형이니까요. 당시 한국무술은 송덕기 옹이 하
는 택견뿐이었고요. 하지만 택견은 보건체조 수준이었어요. 그러니까 동작이 부드럽게 나가
고 건강관리에 효과가 있는 거죠. 태권도도 강력한 힘을 가지려면 부드럽게 나가야 해요. 모
든 펀치가 힘을 가지려면 미는 것이 아니라 탁 끊어줘야 하거든요. 그렇게 하려면 부드러운
자세가 필요한 거고.”
이부원장은 태권도의 경기화를 가장 먼저 추진한 사람이다. 모든 스포츠는 경기화해야만 상
품성이 있다는 생각에서 다른 도장들이 품세 수련에 매달릴 때 한발 앞서 겨루기를 도입한
것이다. 태권도에서 겨루기가 시작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겨루기에서는 주먹보다 발차
기가 효과적인데, 발차기는 전통적인 일본 가라테에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용인대 태권도학과 양진방 교수는 “가라테는 손 동작과 품세를 강조하며 겨루기가 없다.
따라서 발차기 겨루기 경기화 등은 현대 태권도와 가라테의 결정적 차이”라고 말했다. 즉
겨루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태권도가 가라테의 그늘에서 벗어났다는 설명이다.
경기 태권도와 가라테의 차이
―태권도의 경기화를 추진하시게 된 계기를 말씀해주십시오.
“간단해요. 혼자 하는 무술은 고달프거든. 상대가 있어야 서로 경쟁력이 생기고, 지지 않으
려고 애쓰다 보면 기술이 발전하는 겁니다. 다른 도장에서는 ‘사람 죽는다’고 반대할 때
우리(지도관)가 먼저 겨루기를 시작했어요. 그리고 얼마 있다가 일제시대 부민관이 있던 장
소에서 시합을 열었는데, 우리쪽 아이들이 다 이기다시피 했어요. 다른 도장은 시합을 안 했
으니까 질 수밖에 없었던 거죠. 처음엔 지도관의 겨루기를 두고 다른 도장에서 말들이 많았
어요. 사람이 죽는다고 난리를 쳤지. 그때 내가 ‘죽긴 뭘 죽어, 밥을 죽여?’ 라고 말했던
기억이 나요. 그러다가 다른 도장들도 노상 질 수는 없으니까 겨루기를 적극적으로 시키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우리 도장이 맥을 못 추는 신세가 됐어요.
저는 처음부터 태권도의 가치를 높이려면 경기화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부상자가 나
와서 욕도 많이 먹었지만, 그건 미미한 비율이었어요. 그보다는 싸우면서 선수들의 기술이
날로 발전했다는 점을 중시해야 합니다. 스포츠 전체를 볼 때 수기(手技)는 권투가 있기 때
문에 우리는 족기(足技)로 발전해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경기에서는 주먹을 못쓰게
하고 경기 규칙도 발공격 중심으로 만들었고….
이걸 가지고 일부에서는 ‘태권도가 발만 쓰는 건 아닌데 주먹 점수를 없애면 어떡하느냐’
고 항의해서 지금은 주먹을 쓰되 얼굴을 때리면 반칙을 주도록 고친 겁니다. 어떤 운동이든
스포츠로 발전하려면 뭔가 독특한 것이 있어야 돼요. 말하자면 축구는 발로 차는 거고 농구
는 손으로 던지는 게 특징이죠. 그래서 우리는 발 중심으로 가자고 결정한 겁니다. 만일 태
권도를 서로 엉겨붙어서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하는 경기로 만들었다면 아주 지저분한
싸움이 됐을 거예요.”
―경기화해야겠다는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으신 겁니까.
“싸움을 붙여보니까 재미있거든. 서로 지지 않으려고 경쟁을 하잖아. 솔직히 태권도를 배웠
다는 놈들이 밖에서 매 맞고 들어오면 기분 나쁘잖아. 그래서 매맞지 말라고 시킨 건데, 아
이들이 단순히 손발만 빨라지는 게 아니더란 말이에요. 제일 중요한 건 순간 포착력이 빨라
진 점입니다. 결국 경기화가 선수들의 말초신경까지 발달시켜놓은 거죠. 저는 실전 경험이
많아서 그걸 잘 알아요.”
―안전문제는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초창기엔 검도 선수들의 투구를 헤드기어로 이용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때리는 사람은 손
에서 피가 나고, 맞는 사람은 투구가 흔들려 머리에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이거 안되겠다
는 생각이 들어서 스펀지를 넣어서 헤드기어를 만들었죠.”
―저는 초등학교 때 1년쯤 태권도를 배웠는데, 당시 사범이 태권도는 자기수련이라고 자주 얘기했던 기억이 나요. 요즘 들어서 태권도가 경기화에 치중하다 보니까 자기수련 기능이 약화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건 옳은 얘기예요. 태권도는 스포츠로 인격을 기르는 운동이기 때문에 도(道)라는 말을
붙이는 거잖아요. 그런데 어떤 게 더 흥미있고 즐길 수 있느냐를 무시할 수는 없어요. 혼자
하는 품세는 고독하고 힘들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겨루기를 시작한 거고. 겨루기를 하다보
면, 이기면 이길수록 신이 나고, 지면 그날밤 잠을 설치면서 자기가 어떻게 맞았는지를 생각
하게 된단 말이에요.”
태권도는 유난히도 정치바람을 많이 탔다. 지금까지 한국 태권도계를 이끌어온 인사들의 면
면을 살펴보면 그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채명신 최홍희 김용채 김운용 최세창 이필곤….
또한 역대 대통령들도 태권도에 상당한 관심을 쏟아왔다.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날 태권도인
들이 시범을 보인 것이나, 군사정권 시절 학교와 군대에 태권도가 집중적으로 보급된 것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이런 현상은 태권도가 ‘국기’라는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광복
직후부터 맺어진 정치권과 무도계의 특수한 관계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
―태권도가 정치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김운용씨를 회장으로 모신 건 그 양반이 당시 태권도인들보다 좀 낫고, 자금 등 여러가지
로 도와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냉정하게 볼 때 태권도인 중에서는 마땅히 내세울 만한 사
람이 없었어요. 우리가 가진 역량이 뻔하거든요. 어떻게 보면 우리가 이용한다고 한 일인
데, 오히려 이용당한 측면도 있어요. 지금 시점에서 득과 실을 따져보면 득을 많이 본 게 사
실입니다.
군사혁명 시절에는 채명신 장군을 이용하려고 했는데 돈 한푼 내지 않았고, 그 다음에는 김
용채씨를 앉혔죠. 그 사람은 나름대로 국고지원도 받고 해서 기초를 잘 닦았어요. 공화당 청
년분과위원장을 지냈기 때문에 요로에 많은 협조요청을 할 수 있었거든요. 그 뒤를 이어 김
운용씨가 큰 일을 했고….”
―태권도계 인사들을 보면 과거 주먹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 태권도를 한 사람들이니까 뭐라 말하기 어렵네요. 문제는 그런 사람들로 해서 반사
적으로 상대방을 누르려는 저의가 숨어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어요. 이건 말하기 곤란
한 얘기인데, 상대방이 수 틀리게 나올 때를 대비해 제어장치로 갖다놓은 사람도 있고…. 결
국 그 사람들은 죄가 없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 죄인이죠.”
―총회나 이사회 같은 데서 사람들을 동원하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사소한 문제로 눈에 거슬릴 때가 많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을 내세
우면 좀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던 거죠.”
―태권도계의 해묵은 파벌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들어왔다는 뜻인가요.
“그렇죠.”
―얼마전 대한태권도협회는 우여곡절 끝에 두 정치인이 맞붙어서 구천서 전의원이 회장으로 당선됐습니다. 정치인이 회장을 맡는 건 문제가 없다고 보십니까.
“글쎄요. 일하기 나름이죠. 처음에는 누구나 잘 하겠다고 약속하지만, 들어와서는 공약을
지키지 않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태권도인들 스스로 태권도인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
래서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내가 태권도인들한테 몰매 맞아 죽을 얘기인지도 모르지
만, 심사비를 규정대로 받는 도장이 아마 별로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반성할 때가 된 겁니다.”
―1980년에 태권도계의 국보위 정화자 명단을 이부원장께서 직접 작성하신 경위를 설명해 주세요.
“국보위에서 정화자 명단을 내라고 통보가 왔잖아요. 그러니까 김운용씨가 고심하더라고
요. 그래서 나하고 의논해서 명단을 작성하고, 원로들도 다 퇴진하기로 결정한 거죠. 무더기
로 사람을 자르고 원로랍시고 눌러앉아 있으면 말이 안되니까 저도 일선에서 물러났던 거
죠. 저는 그 뒤에 김운용씨가 이규호 장관한테 얘기해줘서 컴백했고요.”
http://www2.donga.com/docs/magazine/new_donga/200204/nd20020400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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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술의 비중을 늘리자니 가라테와 구분이 모호해지고 주먹은 이미 권투가 대세이므로 그래
서 태권도는 독창성을 위해 다리중심으로 만들었다는...
그래도 처음 겨루기를 만든 순수한 목적은 관원들이 맞고 들어오지 말라고 실전을 위해 만들
었다네요. 그리고 그런 겨루기가 우리들의 생각과 다르게 태권도를 강하게 만들었답니다.
이걸보니 태권도가 무술로서 비난을 받아도 손의 비중을 늘릴수 없고 다리를 고집할수 밖에
없는 진퇴양난에 빠진 어쩔수 없는 상황이 대충 이해가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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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롬르백일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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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17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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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가 어렸을때 초창기 태권도를 배운적이 있었는데 그땐 정말 가라데와 유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