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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인간의 지혜로 만든 지고의 시스템도 지속가능한 건 없었다. 자유무역도 그러하다.
19세기 프랑스의 저명한 자유무역과 시장경제 옹호 경제학자였던 프레데리크 바스티아는 "상품이 국경을 건너지 않으면 군대가 넘을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즉, 국제 간 갈등을 감소시킬 자유무역이 평화 유지 수단으로도 작동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자유무역의 추진은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새로운 세계경제 질서 수립을 위한 브레턴우즈 회담 결과의 하나인 1947년의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창설 이후 본격화했다. 그 후 1980년대 영국 대처 정권과 미국 레이건 행정부의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규범을 기치로 경제적·사회적 관계를 시장 중심으로 전환해 양국은 ‘세계화(Globalization)’ 추진을 위한 내부 기반을 정비했다.
한편, 미국은 국제경제 질서 밖에서 섬이 됐던 냉전 당사자인 소련과 달리 중국을 포용해 국제질서와 민주주의 체제로 순치시키려는 의도로 ‘영구적 정상무역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2001년 중국을 세계무역기구(WTO)에 아무런 지정학적 교환 조건 없이 가입시켰다. 이를 기회로 중국은 값싼 노동력을 앞세워 세계 공장 노릇을 하는 공급망을 구축해 절대 빈곤을 탈출하는 계기를 마련했고, 더 나아가 민간부문의 산업 발전 확대를 통해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
이후 두 나라는 경제의 상호의존성과 공생관계를 상당 기간 유지했다. 중국은 저렴한 제품을 미국 소비자에게 공급함으로써 인플레이션 부담을 덜어줬고,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화는 위안화 절상을 막기 위해 다시 미국 재무성 채권으로 투자돼 재정적자를 메워 줬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2007년 금융위기 어려움으로 그동안 유지됐던 ‘공포의 균형’을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세계경제 질서에 편입돼 부를 축적한 중국은 시진핑 체제가 들어서자 ‘중국몽’이라는 패권 전략과 함께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국내외에 고취했다. 이는 곧 기존 서방 주도 시스템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질서를 그들이 주도하는 체제로 대체시키려는 숨은 의도를 드러내는 신호였다.
미·중 관계는 2016년 ‘미국 우선주의’를 표방하는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자 중국 상품에 관세를 부과하는 탈중국화(decoupling)를 시작으로 패권전쟁에 돌입했다. 뒤이어 등장한 바이든 정부는 대중국 첨단기술 분야 수출과 투자 통제를 비롯해 전방위적으로 전선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상품과 투자가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글로벌 경제환경은 국가안보 우선의 지정학에 밀려 제약을 받게 됐다. 더욱이 2019년의 세계적 코로나 대감염과 시진핑의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세계 공급망과 가치사슬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이에 더해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더불어 대유럽 에너지 공급 중단 조치는 그동안 세계시민들의 보편적 생활 향상을 가져왔던 세계화 동력에 커다란 타격을 가했고,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WTO의 기능 작동에 장애 요인이 됐다.
이처럼 서방세계가 중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일부 전체주의 국가들과 신냉전체제로 갈라지자,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은 그들이 추구했던 세계화가 환상이 아닌지 의구심을 갖게 됐다.
일부 지식인들은 ‘세계화는 죽었다’는 선언과 함께 세계화보다는 지리적으로 인접한 지역화의 효율성을 내세우기도 하고, 지정학을 우선해 자유민주주의 국가 간 안정된 무역과 투자를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또한 정부의 정책 지원을 통해 불안정한 중국 생산기지를 국내나 동맹국 또는 자국에 우호적인 국가로 옮기도록 기업에 유도하기도 한다. 따라서 세계화는 당분간 저비용 공급망의 효율성 고려보다는 국가안보와 자원 접근성이라는 안정성을 우선시하는 지정학 논리를 따라 재편성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에게 우려스러운 점은 이미 13개월째 무역적자가 이어지고 대중국 무역적자가 커 가는 현실이다. 이를 해결하려면 산업지원정책을 통해 첨단산업 분야의 대중국 기술격차 확대로 무역수지를 개선하는 동시에,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는 기업의 수출시장 다변화에도 정부의 실효적 지원이 따라야 한다.
중요한 문제는 서방 자유민주진영에 속한 우리의 입지 설정이다. 한때 쉽게 회자됐던 안미경중(安美經中)이란 안이한 이야기는 이제 설 자리가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유럽 각국의 대응에서 보듯이 어느 국가도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에서 이탈할 수가 없었다.
미·중 관계가 첨예하게 충돌할수록, 중국의 타이완 문제 처리가 악화될수록, 우리 선택의 폭은 좁아진다. 결국 경제논리보다 국가안보와 존립이 더 엄중한 현실이므로 동맹국들과 보조를 맞춰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