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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부여왕(夫餘王) 위구태(尉仇台)가 부여 무리를 거느리고 한반도로 건너가 세운 나라다. 흠정만류원류고(欽定滿流原流考)에는 당회요(唐會要)를 인용하여 백제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고, 구태라는 자가 고구려에 패하자 백가(百家)를 이끌고 건너왔다고 하여 백제(百濟)라 부르게 되었다고 썼다. 또 책부원구(冊府元龜)를 보면 구태의 성이 위(尉)라고 하였고, 통고(通考)에 백제는 후한(後漢)말 부여왕 구태가 세운 나라라고 하였으며, 삼국지(三國志)나 북사(北史), 수서(隋書) 등에는 구태가 후한말경의 인물이라고 적혀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구태가 대방고지(帶方故地)에서 백제를 세웠다고 썼다. 이 대방고지는 공손탁(公孫度)의 아들 공손강(公孫康)이 204년경에 지금의 항해도 지방에 설치한 대방군(帶方郡)이다. 일부 사학자는 이 대방고지를 북경동쪽 계(薊)방면 또는 남만주의 금주(錦州)방면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구태백제가 세워진 대방고지는 후한이 대방군을 설치한 지금의 항해도 지방이다.
위구태가 세운 백제는 후에 동이(東夷)의 강국이 되었다. 중국의 사서에 요서지방과 중국동해안지방에 백제군(百濟郡)을 두었다고 적혀 있는데 이는 구태백제(仇台百濟)이다. 일부 사학자는 비류백제와 구태백제를 혼동하여 요서지방과 중국동해안지방으로 진출한 백제를 비류백제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북사(北史)나 삼국사기 백제본기 등에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고 적혀 있는 백제는 비류백제가 아니고 구태백제이다. 비류.온조 세력은 한반도로 이주해 오기 전 지금의 요동지역(어하라)에 있었다. 고구려를 떠난 소서노가 10년간 장사를 하여 나라를 세운 어하라의 위치가 진.번의 경계지역이고 서쪽으로 바다와 접한 외진 곳(요하하류 동쪽)이라고 <환단고기>에 그 위치를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구태는 어떤 인물인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동명의 후손인 구태가 처음 나라를 대방고지에 세웠는데, 요동태수 공손탁이 그의 딸을 아내로 주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고 쓰여 있다. 그렇다면 부여왕 위구태는 왜 공손탁의 아들 공손강이 설치한 대방군으로 이동하여 백제를 건국하고 백제의 시조가 되었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한나라의 고구려 포위 전략을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 A.D 44년 후한 광무제(光武帝)는 고구려를 남쪽방면에서 포위하기 위해 청천강이남 지방을 점령 그곳에 낙랑군(樂浪郡)을 설치하고 군사를 주둔시켰다. 그 뒤 48년 후한은 고구려 북쪽에 있는 부여와 통교하여 부여를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이탈시켰다. 고구려는 이에 보복하여 49년 선비(鮮卑)와 함께 후한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 등지를 점령, 요서와 요동 및 청천강이남 지방에 설치되었던 낙랑군이 사라졌다.
그 후 104-106년경 후한은 요서와 요동지방을 다시 점령하여 한군현(漢郡縣)을 재건하였다. 이에 고구려가 재건된 한군현을 공격하자 120년에 부여왕은 아들 위구태를 후한에 보내 한.부여 동맹을 맺고, 부여는 이 동맹에 따라 고구려가 한군현을 공격하였을 때 왕자 위구태와 군사 2만 명을 보내어 한나라를 도왔다. 그 뒤 136년 부여왕이 후한을 방문하여 동맹관계를 강화하였고, 공손탁이 요동을 장악한 190년경에는 위구태가 요동군(遼東郡)에 내속(內屬)하였다. 공손탁은 부여와의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공손탁의 딸( 또는 종녀)을 위구태의 처로 주었다.
204년 후한은 부여와 함께 고구려를 압박하였으나 고구려의 세력이 더욱 강해지자 후한은 고구려를 남쪽 방면에서 포위하기 위해 공손강으로 하여금 둔유현(屯有縣) 이남 황지(荒地)를 점령케 하여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공손강은 대방군만으로는 고구려를 남쪽방면에서 포위하는 것이 벅 차자 위구태가 거느린 부여족을 한반도로 이주시켜 한반도를 장악하게 함으로서 고구려를 남쪽방면에서 포위하였다. 위구태는 공손강의 지원을 받아 부여족을 이끌고 대방고지로 이주하여 구태백제를 세우고, 온조백제와 마한을 정복하였다. 구태백제의 건국은 이렇듯 후한의 고구려 포위 전략과 관련이 있다.
온조백제와 마한 정복
위구태는 204년 10월 대방고지로 이동하여 구태백제를 세운 후 다음해 7월에 온조백제와 익산 금마 마한(馬韓)을 정복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온조백제는 초고왕 이전에는 왕 명칭이 "0婁王"이다가 초고왕 때부터 갑자기 高"나 "仇"가 들어가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이는 초고왕 때 온조백제의 왕통이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광개토왕비문 영락(永樂) 6년조에는 구태백제가 "伊殘(이잔)" 또는 "倭(왜)"로 비하되어 적혀 있고, 百殘(백잔 : 온조백제 지칭)을 속국으로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구태가 처음 대방고지에서 백제를 세웠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구태백제의 수도는 대방군에 있지 않았다. 북사(北史) 백제전(百濟傳)에는 백제의 시조가 구태라고 적혀 있고, 주서(周書) 백제전(百濟傳)에는 고마(固麻 : 웅진)에서 다스렸다고 적고 있으며, 양서(梁書) 백제전(百濟傳)에는 수도를 고마(固麻)라 불렀다고 적혀 있다. 이를 보면 구태백제의 수도는 웅진(熊津)에 있었다.
야마대연맹과 형제국이 됨
익산 금마 마한과 온조백제를 정복한 구태백제는 온조백제 초고왕 재위시기에 야마대연맹(邪馬臺聯盟)과 형제의 나라가 되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흠명천황본기(欽明天皇本紀) 2년에는 임나(任那 : 대마도)의 왜(倭)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에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로 섬겼다고 적혀 있다. 일본서기 신공황후본기(神功皇后本紀) 49년과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해이사금기(奈解尼師今紀) 13년에 의하면 구태백제는 야마대연맹과 온조백제 군사를 동원하여 7개 가야국을 평정하고 4읍을 항복받았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공황후 49년은 249년이 되나, 이 사건은 초고왕(재위: 166년~214년) 재위시기에 일어났으므로, 실제 이 사건이 일어난 시기는 208년경이다.
208년경에 일어난 사실이 신공황후본기 49년(249년)에 적혀 있는 것은, 일본서기 저자가 왜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 때 백제를 부형의 나라로 섬겼다는 것을 감추기 위하여 신공황후본기의 백제 관련 기사를 연도 순서대로 적지 않고 모두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 이후 연도에 늦추어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위 신공황후본기에는 백제와 야마대연맹 연합군이 비자화본(比自火本), 남가라(南加羅), 록국(록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고 4개 읍을 항복받았다고 적혀 있으나,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해이사금기 14년에는 신라가 (아라)가라를 구원하였다고 적혀 있다. 같은 사실이 삼국사기 열전 물계자전(勿稽子傳)과 삼국유사 물계자조(勿稽子條)에도 적혀 있다. 이후 5세기 말까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가야 관련 기사가 사라진다. 이는 그 기간 동안 가야가 백제의 세력권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가야 방면에서의 공격을 신라의 사가(史家)들이 왜와 같은 세력인 구태백제를 멸시하여 왜인 또는 왜병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부여를 백제 분국으로 만듬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 5년을 보면 구태백제는 238년에 장춘 방면의 부여를 분국(分國)으로 만들었다. “고이왕 5년 2월 부산(釜山)으로 사냥 가서 50일만에 돌아왔다. 4월 대궐 문기둥에 낙뢰가 있었다. 황룡이 그 문에서 날아 나왔다.” 위 부산(釜山)의 부(釜)는 부여를 뜻하는 고대말 불달(해님 天帝)의 아들이 사는 땅을 한자로 적으면서 해님을 뜻하는 불(不)을 부(不)로 읽고 뒤에 같은 음의 다른 한자(釜)로 적은 것이고, 산(山)은 들을 뜻하는 고대말 달(達)을 뒤에 한자로 적으면서 산(山)으로 적은 것이다. 그리고 사냥은 동족을 평정할 때 은유법으로 사용된 말이고, 낙뢰(震)는 임금을 뜻하는 辰(龍)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며, 황(黃)은 역(易)에서 중앙 또는 수도를 뜻하고, 용(龍)은 임금을 뜻한다. 위 문구의 의미는 백제왕이 2월에 부여로 출병하여 50일만에 돌아왔고, 4월에 부여를 다스릴 분국왕(分國王)을 임명하였다는 뜻이다.
238년에 위구태가 부여로 출병한 것은 위(魏)나라의 사마의(司馬懿: 사마중달)가 고구려와 연합하여 위구태의 인척 되는 요동의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위구태는 장춘방면의 부여로 출병하여 부여를 지킨 후 부여를 떼어 내어 구태백제의 분국(分國)으로 만들었다. 구태백제가 장춘 방면의 부여를 분국으로 만든 것은 그때까지 요동의 공손씨와 구태백제가 동맹세력이었는데, 공손씨가 위나라에 토벌됨으로써 장춘방면의 부여가 고립되자 고구려와 위나라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부여를 구태백제왕이 직접 관장하지 않고 분국왕을 두어 관장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246년 부여의 간위거왕(簡位居王)은 위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에게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필요한 군량미를 공급하였다. 238년부터 구태백제와 위나라는 적대국이 되었는데, 간위거왕이 구태백제의 적대국인 위나라에 군량미를 공급한 것으로 보아 장춘방면의 부여는 위나라의 이간전술에 넘어가 246년경부터 구태백제의 세력권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요서지방으로 진출
“백제는 본래 요동군의 동쪽 천여 리에 있는 고구려와 더불어 있었다. 그 후 고구려는 요동군 지역을 공략하여 차지하였고, 백제는 요서군 지역을 공략하여 차지하였다. 백제의 치소는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 313~314년경에 구태백제는 모용씨(慕容氏)와 동맹을 맺고 요서에 백제군을 두었다. 그 위치는 당나라 재상 두우(杜佑)가 지은 통전(通典)에 당나라 때 유성군(柳城郡)과 북평군(北平郡) 사이라고 적혀 있다. 백제의 요서 진출은 모용씨의 고구려 포위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국동해안지방에 진출
316년에 구태백제는 중국동해안지방으로 진출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를 보면 “비류왕 13년(316년) 봄 가물었다. 큰 별이 서쪽으로 흘렀다. 왕도의 우물이 넘치고 검은 용이 우물 가운데서 나타났다.”다고 적고 있다. 위 문구 중 큰 별이 서쪽으로 흘렀다는 것은 백제 대장군이 서쪽으로 진출했다는 뜻이고, 왕도의 우물(井)이 넘쳤다는 것은 백제가 강성해졌다는 뜻이며, 검은(북쪽 지칭) 용(龍:왕)이 왕도의 우물(井) 가운데서 나타났다는 것은 요서와 중국동해안지방의 백제 대장군이 바다를 통하여 왕도로 와서 후왕으로 임명되었다는 뜻이다.
광개토왕의 공격으로 구태백제계 일본으로 피신
백제는 고구려와 적대관계를 피하였으나 구태백제가 313~314년에 고구려의 적국인 모용씨와 동맹을 맺은 후부터 백제와 고구려는 적대관계로 변하였다. 369년에 고구려 고국원왕이 보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주둔하여 온조백제의 민가를 약탈함으로써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때 일어난 전쟁은 371년에 구태백제를 등에 업은 온조백제가 평양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킴으로써 이 전쟁은 백제가 승리하였다. 그 후 392년 7월에 광개토왕은 온조백제를 공격하여 10여 성을 빼앗고 같은 해 10월에 관미성을 빼앗았다.
“진사왕 8년(392년) 7월에 고구려왕 담덕이 군사 4만명을 거느리고 북쪽 변경을 침공해 와서 석현성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군사를 부리는 데 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 못하니 한수 북쪽의 여러 부락들이 다수 함락되었다. 10월에 고구려가 간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왕이 구원에서 사냥하였는데 열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11월에 구원의 행궁에서 죽었다.” 같은 해 11월 구태백제는 기각숙니(紀角宿禰) 장군을 온조백제로 보내 진사왕을 죽이고 아신왕을 세움으로써 온조백제는 다시 구태백제에 복속하였다. 진사왕이 죽은 내용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상세히 적혀 있다.
“응신천황 3년(392년) 이 해 백제의 진사왕이 귀국의 천황에게 무례하였다. 그래서 기각숙니 우전시대숙니 석천숙니 목토숙니를 보내어 그 무례함을 책하였다 이 때문에 백제국은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기각숙니 우전시대숙니 석천숙니 목토숙니 등은 아화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일본서기에는 구태백제왕과 진사왕과의 관계가 응신천황과 진사왕과의 관계로 적혀 있다. 즉 응신천황과 구태백제왕이 동일인물로 적혀 있다. 이는 일본서기를 만들 때 멸망한 구태백제 존재를 말살하고, 구태백제왕이 한 일을 마치 대화왜(大和倭) 천황이 한 것처럼 일본서기를 왜곡하였기 때문이다.
온조백제가 다시 구태백제에 복속하자 광개토왕은 구태백제를 괴멸시켜야 온조백제를 계속 복속시킬 수 있다고 보고 그때부터 4년간 전쟁준비를 한 후 396년에 몸소 수군(水軍)을 이끌고 구태백제 지역에 상륙하여 구태백제의 수도를 점령하였고, 이어서 보기병으로 아리수(한강)를 건너 온조백제를 다시 항복받았다. 이때 수도 웅진이 점령당하자 구태백제 지배층은 왜국으로 피신하였다. 광개토왕비문과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는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백잔과 신라는 예로부터 우리의 속국이어서 조공을 바쳐 왔는데 왜(倭)가 신묘년(391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와 백잔.OO.신라를 깨뜨리고 그들을 신민으로 만들었으므로, 영락 6년에 왕은 친히 수군을 이끌고 이잔국을 토벌한 후 대군을 남진시켜..(중략)..왕은 발연히 대노하여 대군을 거느리고 아리수를 건너 선봉부대를 보내어 그 도성을 핍박하니 백잔왕이 곤핍하여 남녀 1천명과 세포 1천필을 바치고 귀복하였다. 백잔왕은 스스로 맹세하기를 ‘지금 이후부터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하였다. 태왕은 은혜를 베풀어 백잔왕이 처음에 깨닫지 못한 허물을 용서하고 뒷날 정성스레 순종할 것을 다짐받았다. 이 싸움에서 백잔국의 58성 700촌을 얻고 백잔왕의 동생과 대신 10명을 데리고 군사를 되돌려 도성으로 돌아왔다.” 이처럼 광개토왕비문에는 구태백제가 이잔(伊殘) 또는 왜(倭)로 적혀 있고,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는 이(伊) 또는 왜(倭)로 적혀 있다. 이 이(伊)는 부여 무리라는 뜻으로 부여 무리가 이주하여 세운 구태백제 무리가 이세(伊勢), 대화(大和) 등지로 이주하여 소국을 세우고 근국(根國)의 명칭을 사용한 무리를 가리킨다. 그리고 응신조왜(應神朝倭)는 왜(倭)로 적혀 있으며, 구태백제도 응신조왜와 동일세력이라고 비하하여 왜로 적었다. 왜는 서.남해 섬, 대마도, 일본열도 등지에 거주한 왜 무리 또는 이들과 같은 세력인 마한이나 구태백제를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
“제는 몸소 수군을 이끌고 웅진(공주), 임천(부여 임천), 와산(보은), 괴구(괴산), 복사매(영동), 우술산(대덕), 진을례(금산), 노사지(유성)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을 기해서 제천하고 돌아왔다.” 이때 광개토왕이 거느린 고구려 수군이 점령한 지역은 구태백제의 수도가 있는 웅진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 지방이고, 금강이남 지방은 점령하지 못하였다. 이때 구태백제 지배층은 일본으로 피신해 있다가 399년에 왜를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400년 광개토왕의 반격을 받아 임나가라(대마도)가 점령당하고 이어서 구주왜와 대화왜마저 광개토왕에게 항복함으로써 실패하였다. 그 후 404년에 왜와 구태백제 잔존 무리들은 고구려의 대방계(帶方界)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고, 광개토왕이 임나연정을 설치하여 왜를 통제하자 구태백제는 405년 아신왕을 암살하고 인질로 와 있던 전지(腆支)를 백제로 보내어 백제왕으로 즉위시켜 온조백제를 다시 장악하였다. 광개토왕이 임나연정을 설치하자 왜 지배층은 금강이남 지방으로 피신해 있다가 479년 임나연정이 망하고 487년에 백제가 대마도와 일본열도를 평정하여 인현조(仁賢朝)를 세우자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구태백제의 반격과 광개토왕의 재반격
영락 9년(399년)에 응신조왜가 신라를 침범하였다. 이를 보면 구태백제와 응신조왜는 396년에 고구려에 빼앗긴 남해의 제해권을 399년 이전에 도로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구태백제와 응신조왜가 신라를 공격하자 광개토왕은 영락 10년(400년)에 보기병 5만을 보내어 신라를 침범한 왜를 물리치고 추격하여 임나가라(대마도)를 점령하고 이어서 일본열도 왜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그 후 영락 14년(404년)에 구태백제는 왜를 동원하여 고구려 대방계(帶方界)를 공격하였다. 일본열도 왜는 영락 10년(400년)부터 임나연정의 통제를 받고 있었는데, 404년에 왜가 고구려 대방계를 공격하였다는 것은 임나연정의 일본열도 왜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전쟁에서도 왜가 패배함으로써 구태백제와 광개토왕간의 10여년에 걸친 지루한 전쟁은 광개토왕의 승리로 끝이 났다.
392년 이전까지는 백제가 고구려의 평양성을 점령하거나 국경 부근에서 서로 밀고 밀리는 싸움을 벌이다가 광개토왕이 즉위한 392년부터 404년까지는 백제가 고구려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하였다. 이는 광개토왕의 탁월한 외교술과 전략. 전술 때문이다. 광개토왕 재위 시 구태백제의 전략. 전술 과 고구려의 전략. 전술을 비교해 보면, 구태백제는 보병전술과 기마전술을 주전술로 사용하였고 상륙전술은 기마전술과 보병전술을 보조하는 전술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상륙전술에 동원된 배는 왜가 사용하는 소정(小艇)이었고, 이 소정에는 대략 20-30명 정도가 승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륙전술에 동원된 왜는 수천 명을 넘지 못하였다. 반면에 고구려는 광개토왕 이전까지는 기마전술과 보병전술을 주로 사용하다가 광개토왕 때부터 해상전과 상륙전에 대비하여 대규모 병력이 승선할 수 있는 대함과 수군을 대량으로 보유하였다. 그 결과 광개토왕 때부터 고구려 수군의 전투력이 구태백제 수군의 전투력에 비하여 월등히 우세해졌다.
구태백제왕이 한반도 백제지역 통치
396년에 있은 광개토왕의 구태백제 공격 이후 일본으로 피신한 구태백제왕은 온조백제를 다시 장악하기 위하여 405년 3월에 아신왕을 암살한 후 왜왕(倭王: 구태백제왕 지칭)에게 인질로 와 있던 전지(腆支)를 온조백제왕으로 즉위시켜 온조백제를 다시 장악하였다. 407년에 전지왕(腆支王)의 서제(庶弟) 여신(餘信)을 내신좌평(內臣佐平)에, 해수(解須)를 내법좌평(內法佐平)에, 해구(解丘)를 병관좌평(兵官佐平)에 각 임명하였다. 408년에 상좌평(上佐平) 제도를 만들어 여신이 상좌평에 앉아 백제의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모두 장악하였다.
416년경에 구태백제왕 여영(餘映)이 전에 백제의 중국동해안지방 영유지의 장군으로 있다가 400년에 광개토왕에게 귀복한 백제장군들을 다시 구태백제에 복속시키고 중국동해안지방 영유지를 수복하였다. 진서(晋書)나 송서(宋書)에는 이 무렵 백제왕의 이름이 여영으로 적혀 있다. 양서(梁書)에는 여영이 온조백제 전지왕이라고 적혀 있으나, 여영은 진서에 의하면 416년에, 송서에 의하면 420년과 424년에 각 백제왕으로 나오는데, 전지왕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420년에, 일본서기에 의하면 414년에 죽었으므로 여영은 전지왕이 아니다. 420년에 구태백제왕 여영은 전지왕과 구이신왕을 제거하여 온조백제의 대를 끊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구이신왕(久尒辛王)이 427년에 죽었다고 적혀 있으나, 구이신왕본기(久尒辛王本紀)에 구이신왕의 즉위와 사망사실만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구이신왕은 420년에 전지왕이 제거될 때 같이 제거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삼국사기 백제본기 비유왕(毘有王) 29년 편을 보면 455년에 온조백제계 장군들이 3월 수도 한산(漢山)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그 반란의 규모가 매우 커서 비유왕이 진압하지 못하자 그해 9월에 흑룡(黑龍 : 요서 영유지 장군 지칭)이 한강을 통하여 수도로 와서 반란을 진압하였으며, 이때 비유왕이 반란군의 의해 죽었다고 적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비유왕이 구이신왕의 아들로 적혀 있으나 진서(晋書), 송서(宋書), 남사(南史) 등에는 여영 다음 백제왕이 여비(餘毗)로 적혀 있으므로, 비유왕은 구이신왕의 아들이 아니다.
이때 반란을 일으킨 온조백제계 장군들은 개로왕기(蓋鹵王紀) 21년에 나오는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尒萬年) 등으로 보이며 이들은 비유왕을 죽이고 고구려로 도망갔다가 475년에 고구려 군사를 끌어들여 개로왕(蓋鹵王)을 죽였다. 한편 458년 개로왕은 백제본국의 군사를 중국동해안지방 영유지로 보내었다. 이때부터 463년 사이에 백제는 난하 서쪽 요서지방을 다시 수복하여 465년에 그곳에 조선태수(朝鮮太守), 광양태수(廣陽太守) 등을 두었다.
수도를 웅진으로 옮김
475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이 점령되고 개로왕이 피살당하자 문주왕(文周王)은 도읍을 웅진으로 옮겼다. 479년에 동성왕(東城王)이 즉위한 후 백제의 국력이 다시 강화되었다. 동성왕은 487년에 대마도를 평정하고 다음해 488년에 일본열도를 평정하여 인현조(仁賢朝)을 세운 후 백제본국 군사와 대화왜(大和倭) 군사를 요서와 중국동해안지방으로 보내어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이에 당황한 고구려는 일년에 한번 보내던 북위(北魏) 사신을 이 해부터 495년까지 일년에 2-3번씩 보내며 북위와의 동맹관계를 강화하였다. 488년 동성왕은 북위를 물리치고 산동성 방면에 성양태수(城陽太守)와 청하태수(靑河太守)를 강소성 방면에 광릉태수(廣陵太守) 등을 각 두었다.
501년에 반란이 일어나 왜가 지원한 무령왕(武寧王)이 승리하여 백제왕으로 즉위하였다. 이 정변으로 동성왕이 죽고, 동성왕계인 요서와 중국동해안지방 출신들은 몰락하였다. 이에 요서와 중국동해안지방에 있던 백제장군들이 백제본국에 등을 돌리고 고구려에 귀복함으로써 백제는 요서와 중국동해안지방의 영유지를 상실하였다. 이로 인하여 백제의 국력이 약화되어 백제의 위상은 낮아지고 대화왜(大和倭)의 위상은 높아져, 백제는 대화왜의 종주국에서 대화왜의 지원을 받는 처지로 위상이 역전되었다.
수도를 사비로 옮김
성왕 16년(538년)에 수도를 사비(泗沘)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라 하였다. 그 뒤 무왕(武王) 때 백제는 일시적으로 익산(益山)을 임시수도 또는 별궁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익산에 王宮址, 王城址, 王陵 등의 유적이 있고, 王宮坪에서 백제 5부 중 중부를 상징하는 기와가 출토되었으며, 일본의 "觀世音應驗記"에 "百濟武廣王遷都枳慕密地新營精舍"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枳慕密地"는 익산으로 추정된다. 의자왕(義慈王) 20년(660년)에 백제는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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