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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게시판 스크랩 좋은글 브로큰 플라워- 이제 그들을 찾아 나서도 될까?
†커플사지기♡㏇ 추천 0 조회 29 06.09.08 09: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영화속연애] 브로큰 플라워- 이제 그들을 찾아 나서도 될까?

 

 

 

 

그 남자가 말을 걸어 왔을 때, 나는 서울역 지하보도에서 영화 포스터를 보고 있었다.
“저기요.”
힐끔 돌아보니 50대 중반의 아저씨다.
“혹시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란 노래 알아요?”
“예...”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 아닌가?)
“혹시 지금 그 테잎 가지고 있어요?”
“아니요.” (내가 노래교실 강사도 아니고 김종환의 테잎을 가지고 다닐 리가 있나.)
아니요 다음에 왜요? 라고 묻지 않았던 탓일까? 남자는 준비한 대답을 내뱉을 기회를 잃어버린 탓인지 잠시 허둥거리더니 대신 “아, 예....”하고 말줄임표만 부려 놓고 그냥 돌아섰다.

나는 포스터로 눈길을 돌렸다. 그런데 몇 걸음 걷던 남자가 다시 돌아서더니 다가왔다.
“실은 말입니다. 내가 오늘 25년 만에 옛날 애인을 만나고 왔어요.”
이번엔 아예 몸을 돌려서 풀샷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안경을 쓰고 양복을 입고 한 손에 우산을 쥐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어느 회사의 김부장님 모습이다.
딸 나이 뻘인 어린 처녀가 맹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피를 토하듯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고 보니 술 냄새도 어지간히 풍겼다.
“25년 만에 만난 옛날 애인이 가르쳐 줬어요. 둘이 노래방에 가서 불렀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너를 바라볼 수 있다면, 물 안개 피는 강가에 서서 작은 미소로 너를 부르리...
너무 열심히 부르고 있어서 차마 돌아설 수 없었다. 한 소절을 마친 아저씨는 한 걸음 더 다가서더니 아까보다 더 애절하게 말했다.
“내가요, 마음이 너무 아파요. 그래서 선배랑 술을 한 잔 하고 좀 전에 헤어졌는데 그런데도 진정이 안돼요. 학생이...학생 맞죠? 학생이 왠지 내 이야기를 왠지 들어 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나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학생 아닌데요.”
그러거나 말거나 아저씨는 가슴을 두드리고 우산을 흔들어대며 외쳤다.
“내가 미칠 것 같아요. 이대로는 집에 갈 수가 없어요. 잠시만 시간 좀 내줘요. 내 이야기 좀 들어줘요.”
지금 같으면 그냥 내빼고 말았겠지만 그때의 나는 단순하고 착했다. 딱히 바쁜 일도 없으니, 미칠 것 같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날 밤 나는 남대문 근처 어느 이층 다방에 앉아 한 남자의 절절한 옛 사랑 이야기를 한 시간 반이나 들어야 했다. 

 

‘장교로 복무하던 시절 만난 여기자와 뜨겁게 연애했으나 홀어머니의 반대에 부딪쳐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
막상 정리해 보니 한 줄에 불과한 이야기, 그러나 시간으로 풀어내면 더없이 길고, 마음에 남겨진 감정으로 풀어내면 끝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녀와 헤어지고 어머니가 원하는 여자와 결혼해 자식 둘을 낳고 그럭저럭 잘 살아오던 그가 불현듯 옛날 애인을 떠올리게 된 건 그 무렵 우리나라를 초토화 시킨 IMF 때문이었다. 대기업 부장으로 일하다 개인 사업을 시작한지 몇 년 되지 않아 IMF 직격탄을 맞게 되었고 결국 사업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고. 아이들은 벌써 대학생이고 벌어놓은 돈도 있었기에 생계에 큰 지장은 없었지만 갑자기 일을 놓게 되자 생의 허무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살아갈 날에 대한 희망이 거세된 자리에 들어찬 살아온 날에 대한 미련은 오십줄에 들어선 그를 집요하게 따라다녔고 그 미련의 중심에는 자신이 버린 여자와 차마 정리하지 못한 죄책감이 들어 있었다. 결국 여자를 찾아 나서게 되었고 수소문 끝에 여자와 연락이 닿았다.

자신과 헤어진 후 보란 듯이 잘 살겠다는 욕심에 눌러 결혼을 서두른 것이 화근이었다. 사기꾼 남편에게 몇 년을 시달리다 간신히 이혼을 한 뒤에는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몇 년을 고생하다 어느 소도시의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된 것이 불과 일년 전, 여자는 지금 충청도 어느 도시의 주공 아파트에서 고요하고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그녀도 어느새 오십 줄에 들어선 중년이 되어 있었지만 늙어버린 모습도 25년 만에 만난 격정을 막아서지는 못했다. 눈물도 났지만 가슴도 뛰었다고 했다. 한 나절이 어떻게 흘렀는지 몰랐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와 헤어진 후 그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만나고 싶은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다시 시작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 것이다.

 

 

 

그는 내게 자신이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허 참, 듣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방향제시까지 해야 하다니... 그때까지 제대로 된 연애 한번 못 해본 나로선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막막해서 창 밖을 내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는 남대문 거리에는 고단하게 취한 사람들만 비틀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문득 영화 한 편이 떠올랐다. 그 영화가 바로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이다.
“... 그러니까 메릴 스트립이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떠나는 걸 그냥 지켜보고만 있거든요. 따라갈 수 있었지만 가지 않았거든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가지 않았다고요.”
인생의 후반경기에 갑자기 찾아온 기회가 역전골이 될지 자살골이 될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면 이 공을 슬쩍 놓아버리는 게 낫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는 수첩에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라고 적으며 내게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했다.

 

 

어느새 8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만약 최근에 그 아저씨를 만났더라면, 나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대신 [브로큰 플라워(Broken Flowers)]를 권했을 것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따라가지 않은 메릴 스트립의 이야기가 아니라, 옛 애인들을 찾아 나선 빌 머레이에 관해 이야기 했을 것이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한때 컴퓨터 사업을 했으나 지금은 쇼파에 앉아 있거나 누워 있기를 즐기는 중년의 남자 돈 존스턴(빌 머레이)에게 어느날 핑크색 편지 한 통이 당도한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옛 애인이 19년전에 돈의 아들을 낳았으며 그 아들이 곧 아버지를 찾아갈 것이라는 일종의 예고 편지였다. 그리고 그 편지가 당도한 날, 그의 동거녀는 더 이상 당신의 정부(情婦)처럼 살 수 없다며 집을 나간다. 장난 편지로 치부하려는 그에게 옆집 사는 친구 윈스턴은 편지의 발신자를 찾아내야 한다고 충동질한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파악해야 현재와 미래를 대비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아예 나서서 여행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대신해 준다. 렌트카 안에서 들을 음악까지 구워서 건네준 오지랖 넓은 옆집 친구 덕분에 돈은 떠날 생각을 하게 된다. 무엇보다 친구 윈스턴이 찾아낸 옛 애인들의 프로필을 손에 잡은 이상 더는 쇼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길을 떠난다. 분홍색, 타자기, 아들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과거의 여자들로부터 은밀히 찾아내기 위해서 말이다.

어느 소설에서 그런 글을 읽었다. 당신이 시한부 인생이라면 무슨 일을 하겠냐고. 주인공은 옛날에 좋아했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한때 당신을 좋아했었다는’말을 하겠다고 했다. 다른 의도는 없다. 다만 한때나마 존재했던 진실을 알리고 싶을 뿐이라고 했다. 돈 존스턴도 진실을 찾아 떠난다. 다만 찾아간 그곳에 ‘좋아했었다’ 정도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혹은 쌍방과실로 만들어낸 상처들도 함께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

첫 번째 만난 그녀(샤론 스톤)는 반갑게 그를 맞아 즐거운 향응까지 제공하고, 두 번째 만난 그녀는(프랜시스 콘로이) 맛없는 저녁이나마 그에게 대접하지만 세 번째 만난 그녀(제시카 랭)는 오분 남짓의 대화만 그에게 허용한채 건네 준 꽃다발 까지 반사 해 버리고, 네 번째 그녀(틸다 스윈튼)는 보자마자 눈에 쌍심지를 켜고는 문전박대를 해 버린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그녀는 아예 죽어 버리고 세상에 없다. 환대 받으러 찾아간 길은 아니었지만 돈은 집을 떠난지 오래될 수록 점점 더 망가지고 구겨져 급기야는 얼굴에 상처까지 나게 되고 그녀들에게 들고 가는 꽃다발은 갈수록 간소해 지고 초라해진다.

 

 

 

이 영화는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한 아들과 그 아들의 애미를 밝혀내는 미스터리를 앞에다 깔아놓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누가’가 아니다. 누구든 상관없다. 다만, 그들을 찾아가는 ‘길’에 그가 서 있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빌 머레이는 다들 알다시피 무표정, 무거동 연기의 대가로 액션배우의 대척점에 서 있는 배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옛 애인을 만나러 간다는 것은 우리 인생 최고의 액션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내가 수유리 살고 옛 애인은 쌍문동 산다고 해도 그것은 최고의 여행이자 최고의 액션이 된다.

무표정, 무거동의 빌 머레이조차 다섯 여자를 만나고 돌아온 뒤에는 액션배우로 바뀌어 버렸다. 아들처럼 느껴지는 젊은 청년에게 먼저 말을 걸고 샌드위치를 사주고, 급기야 놀라서 도망치는 청년을 붙잡기 위해 달리기까지 한다.
8년 전 그 남자가 난생 처음 보는 젊은 처녀(학생 아닌)에게 말을 걸고, 다방에 앉아 25년 전의 연애담을 들려줄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옛 애인을 찾아 나선 자신의 과감한 액션에 스스로 흥분하고 감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돈 존스톤은 어떤 진실도 알아채지 못했고, 메릴 스트립은 농가에 남았다.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짐작컨대 적어도 옛날 애인과 다시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아마 격정이 지나간 뒤 찾아온 평범한 일상에 묻혔을 것이다. 지금은 60대 초반이 되어있을 그, 손자를 품에 안은 채 어느 공원길에서 나와 마주쳤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잠시 액션을 선보였던 기억만은 오롯이 남았을 것이다. 옛 애인을 찾아 비행기를 갈아타며 길을 떠났던 추억은 카드 명세서로, 낯선 남자와의 운명적인 시간은 메디슨 카운티 다리 사진으로, 그녀와 함께 보낸 꿈같은 한나절은 ‘사랑을 위하여’라는 노래 가사로 남아 있다가, 무심한 날 그들을 쿡쿡 찌르기도 하고 다시 흥분시키기도 하고 울게도 할 것이다.

 

가을바람은 자꾸 우리의 등을 떠밀며 큐사인을 보낸다. 그러나 모든 액션에는 신중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아무리 내 마음이 시한부 인생이라 해도 내 액션이 상대의 롱 테이크 인생에 스크래치를 낼 수도 있다. 모든 종류의 고백과 속죄가 위로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오만이다.

대부분의 인연은 헤어질 만 했으니 헤어졌다. 잊을 만 했으니 잊었고, 살만 했으니 살아졌다. 앞으로도 그럭저럭 살만 할 것이다. 적어도 IMF만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면 말이다.

 

[영화속연애] 아파트- 고통은 로맨스의 제물일까?

 

남녀불꽃로동당 명랑사회건설위
남녀문제 비전문가 미스
와플(marune@empal.com)

 

* 본 기사는 남로당(www.namrodang.com)에서 제공합니다. 퍼가실 때는 출처를 명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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