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당기념관에 걸려있는 <청좌산거> 편액 글씨.
수당기념관에 걸려있는 <홍엽산거> 편액 글씨.
추사 글씨 <청좌산거>와 <홍엽산거>
글씨의 분간포백(分間布白)에 대한 말이 있다.
“성긴 곳은 말이 달릴 정도로 하고 빽빽한 부분은 바람조차도 통하지 못하게 하라. 항상 여백을 생각하면서 운필과 결구를 하면 기묘한 맛이 나타나게 된다.[疏處可以走馬 密處而不透風 常以計白而當黑 奇趣卽出]”
추사 생애보다 앞서면서 겹쳐지기도 한 청나라 서예가 등석여(鄧石如)의 말이다. <청좌산거>와 <홍엽산거>는 이 말의 기가 막힌 예다. 획 사이의 공간을 보면, <청좌산거>는 바람조차 통하지 않을 정도여서 숨 막힐 지경이다. 고난도의 글씨다. <홍엽산거>는 ‘엽(葉)’ 자와 ‘거(居)’를 보면 말도 달릴 정도로 시원하다. 이 두 가지를 어떻게든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추사다.
수당기념관 한 공간에서 탁월한 공간 구성의 결구를 한 두 작품을 만날 수 있으니 이 무슨 기묘한 인연인가?
*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 고택 사랑채 평원정(平遠亭) 마루 왼쪽에 ‘靑左山居’ 오른쪽에 ‘紅葉山居’의 뜻은 “동쪽에서 해가 뜨니 푸르름이 느껴지고, 서쪽으로 해가지니 단풍이 든다”는 우주 삼라만상의 이치를 알린다는 뜻이다
수당기념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청좌산거>편액 원본.
추사 글씨, <임한경명>.
<청좌산거> 글씨를 살펴본다. 간가결구(間架結構, 개개의 자획 간의 연결, 배합, 조합 형태와 여백의 배치를 포괄하는 말)와 필획 등을 분석해보면, <청좌산거>는 시기적으로 추사 이전에 나올 수 있는 글씨가 아니다. 추사를 기점으로 현대까지 본다면 이런 글씨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누가 있을까? 추사 외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수많은 비첩을 깊게 궁구하여 나온 글씨가 <청좌산거>이다.
그래도 그 연원을 찾아 볼 수 있다. 추사가 ‘한경명을 임서한 글씨[임한경명(臨漢鏡銘)]’에서다. 이 <임한경명>은 ‘한경명’을 그대로 따라 쓴 것이 아니라 추사 자신의 주관이 곁들여진 글씨다. 공교롭게도 ‘청(靑)’, ‘좌(左)’, ‘거(居)’ 자가 서로 겹쳐져 좋은 비교가 된다. <임한경명>보다 획을 더 두텁게 한 것이다. 윗부분을 무겁게 하고 아랫부분을 가볍게 한 ‘청(靑)’ 자는 자칫하면 어색하게 될 수도 있는데 잘 소화했다. ‘좌(左)’ 자에서 삐침의 시작 부분을 이렇게 꺾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산(山)’ 자를 보자. 원래 글씨의 키가 작은 글자다. 그렇기에 밑의 공간에 여유가 있다. <계산무진(谿山無盡)>도 이런 예다. 눈에 띄는 것은 <청좌산거>의 ‘산(山)’ 자를 키 높이를 가능할 때까지 최대한 작게 썼다. 사실 이렇게 구사한 것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공교롭게도 서로 마주 보고 걸려있는 <홍엽산거(紅葉山居)>에서 볼 수 있다. ‘산(山)’ 자는 서로 다른 형태를 하고 있지만 한 사람의 필법과 결구로 보아도 이상하지 않다.
<추사 김정희, 그 낯섦과 들춤 사이> 청좌산거(靑左山居) 1-3.
노재준(서예가, 예산고 교사) <예산뉴스 무한정보> 2019.01.07 13:54
강릉 선교장(船橋莊)에 걸려 있는 <홍엽산거> 현판 원본
* ‘居’자에서 ‘尸’의 마지막 획을 원래의 글꼴과 다르게 오른쪽으로 삐쳐 내렸는데. 이러한 자형은 <곽유도비임서(郭有道碑臨書)>에서 예를 보이고 있어 이 글자의 연원이 오래 되었음을 알겠다.
<곽유도비임서(郭有道碑臨書)>팔폭 병풍 중 제4폭에 '居'자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