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희 金道熙 (1867 ~ 1924)】 " 신민회의 독립운동기지 개척 참여"
1867년 8월 23일 충청남도 임천군(林川郡, 1914년 부여군으로 통합) 내동(內洞)에서 태어났다. 활동 당시의 본적 및 주소는 경성부(京城府) 연지동(蓮池洞)이었다.
어려서 한학(漢學)을 수학하였고, 부친이 일찍 사망하여 1878년 호주(戶主)가 되었다. 임천군 인근의 부여(扶餘)·한산(韓山) 등지를 돌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903~1904년경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기독교에 입교하여 1908년부터 경신학교(儆新學校)에서 한문 교사로 재직하며 학교에 머물면서 생활하였다. 1909년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발기하여 조직하고 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신민회(新民會)에도 관계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국외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해 서간도(西間島) 이주를 추진하였다. 양기탁 등은 강제병합 이전에 이미 중국의 베이징(北京)·하얼빈(哈爾濱),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등 각지에 망명해 있던 이갑(李甲)·안창호(安昌浩)·김창만(金昌萬)·이종호(李鐘浩)·조성환(曹成煥) 등과 연락하여 국내에서 다수의 인민을 모아 서간도 안둥현(安東縣) 등지로 이주시켜 ‘국가적 조직을 가진 대단체’를 형성하고 청년 자제들에게 문무(文武)의 교육을 받게 하여 기회가 오면 독립을 꾀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에 1911년 1~2월에 이르기까지 한편으로는 동지를 규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선발자를 보내거나 물자를 조달하는 등의 준비를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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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학우회조직 보도의 김도희(『대한매일신보』 1909.8.17) [판형2] |
그러나 이보다 앞선 1910년경, 『대한매일신보』에서 서간도 이주에 대한 기사를 읽던 중, 이에 공감하여 ‘열성적인 서간도 이주론자’가 되어 망명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양기탁·임치정(林蚩正)으로부터 서간도 이주를 권유받자 적극적으로 찬성하여 함께 일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해 8월에 서울에 올라와 자신과 함께 거주하던 주진수(朱鎭洙) 등에게 서간도 이주를 권유하였다. 서간도에 토지를 매입하여 무관학교(武官學校)와 교회 등을 설립하고 이를 기반으로 청년들을 교육하여 규모가 큰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해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이들이 찬성하자 그해 9월 먼저 서간도의 실황을 시찰하고 오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9~10월에 걸쳐 황해도 각지를 돌면서 선천(宣川)에서 이승훈(李承勳), 안악(安岳)의 양산학교(楊山學校)에서 김구(金九)·김홍량(金鴻亮)을 비롯하여 신천(信川)·장연(長淵)·송화(松禾) 등 각 군에서 유문형(柳文馨)·고정화(高貞華)·안윤재(安允在)·이승길(李承吉) 등 10여 명에게 서간도 이주자 모집을 요청하였다.
1910년 12월 20일경 서울 양기탁의 집에서 열린 주도자들의 이주 회의에 참석하여 모집 방법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계획하였다. 이 자리에서 안태국(安泰國)·주진수 등과 함께 조선 13도에 각 1명씩 주임을 두어 이주자 모집을 담당하게 하였다. 주진수는 강원도, 안태국은 평안남도, 양기탁·임치정은 경기도, 김구는 황해도 등으로 분담하여 주임의 임무를 맡기로 하였다. 또한 주진수와 협의하여 1911년 1월 중에 일찍이 박만준(朴晩俊)으로부터 예치한 1,200원 중 일부를 서간도의 토지 및 가옥 매입과 단체 이주 준비에 쓰도록 준비하는 등 서간도 이주 추진 과정에서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이같은 활동 중 1911년 1월 4일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그해 7월 22일 경성지방재판소(京城地方裁判所)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동지들과 함께 항소하였으나, 그해 9월 4일 경성공소원 재판에서도 원 판결은 취소되고 다시 징역 2년 형을 받았다. 옥고를 치르던 중 1912년 9월 27일 ‘칙령(勅令) 제24호’에 의거하여 사면(赦免)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에서 한문을 강의하거나 조선사적(朝鮮史蹟) 연구에 뜻을 두고 집필 활동 등을 하면서 생활하다가 1924년 9월 25일 향년 58세에 갑자기 뇌출혈로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