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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
요한일서 4:7-13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이미 언급한 것처럼 요한일서에는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표현이 6번 나옵니다. 그리고 그 표현과 함께 참으로 중요한 당부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본문에서 “사랑하는 자들아”가 두 번 나오고 당부 내용은 동일합니다. 7절을 보니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고 당부하고 11절에서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합니다. 이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니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주제는 “서로 사랑하라”는 요한의 당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만 (아가페)라는 단어가 15번 나옵니다. 매 구절마다 2번씩 나오는 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께 속한 자들아, 하나님의 자녀들아, 아가페의 사람들아! 하나님의 사랑으로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을 받은 자들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의 생명으로 태어난 사랑의 하나님의 자녀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도 요한은 7-8절에서 진리를 말합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전부 하나님께 속한 (아가페) 사랑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아가페 사랑을 하는 상태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상태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들이기에 하나님을 압니다. 그러나 사랑을 하는 상태에 있지 않는 자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8절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아가페 사랑을 하는 생명이 있는 자들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입니다. 위로부터 태어난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들 안에 (아가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아가페 사랑을 합니다. 하지만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전혀 모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헷갈리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완벽하게 주의 자녀와 아닌 자를 구분하십니다. 우리 자신도 아가페를 하는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자는 그 사실을 압니다. 즉, 옛사람에게서 나타나지 않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 나의 삶을 통해 나타나는 것을 보니 내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로부터 거듭난 사람은 체험적으로 이 사실을 압니다. 그럼에도 물론,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의 길이와 높이와 넓이와 깊이의 만분지 일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만큼 깊고 신비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 누차 말씀 드린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실감하는 때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 간에 서로 사랑하는 때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증거되는 뚜렷한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우리도 나타내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과 마태복음 5장은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주의 자녀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묘사는 이 땅에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께서 기대하시는 모습입니다. 그 모습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눅 6:32-35)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해야 할 사랑은 자연적, 세리적, 세상적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한편, 우리는 아가페 사랑과 세상의 사랑을 잠깐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가페 사랑은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나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죽이며 믿음으로 새사람으로 살아갈 때 나타나는 훈련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진리 안에 있는 사랑이고,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언약적 사랑입니다. 이 땅에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옛사람을 가지고 사는 동안 신자는 반드시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일 때만이 이 사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사랑은 자기를 부인하는 희생적, 의지적 사랑입니다. 이렇게 나타나는 사랑은 성령의 열매로 드러납니다. 이에 성령의 열매는 아홉 가지 열매지만 그 뿌리는 아가페 사랑이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내는 아홉 가지의 다양한 성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세상적 사랑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육체적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간교한 위선의 가면을 쓴 거짓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은 순간적이며 기분 및 감정에 의존하며 조건적입니다. 그 거짓 사랑의 뿌리를 추적해보면 놀랍게도 이기적인 옛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사랑이 있습니다. 이런 이기적 세상적 사랑은 자신들의 유익과 세력을 위해 임시적으로 협력하며 힘을 모으려는 바벨탑의 거짓 사랑이고, 육체적일 때는 정욕에 이끌리는 짐승적인 거짓 사랑이요 나아가 변태적 사랑이며, 간교함으로 사람을 속일 때는 마귀적이며 위선적인 거짓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세상적 사랑의 한 가지 특징은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혹시 이 자리에 내 안에 아가페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이 안 되는 분이 있습니까? 더 늦기 전에 이기적인 삶과 마음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기 바랍니다. 주 하나님께서 죄사함과 함께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생명을 은혜로 받은 후에 철저하게 주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주의 말씀을 순종하려고 노력해 보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부인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한다면 우리 안에 들어온 그리스도의 아가페 생명이 아가페 사랑의 삶을 여러분을 통해 나타낼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만 속해 있던 아가페 사랑은 어떻게 사람들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까? 즉,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어떻게 아가페 사랑을 하는 생명을 넣을 수 있습니까?
사도 요한은 이에 대해 답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독생자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대상인데 그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보내신 목적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입니다. 쉽게 말하면 생명이 없이 죽어 있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그분의 독생자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생명입니까? 하나님처럼 아가페 사랑을 하는 생명입니다. 어떻게 그 생명이 우리 죄인들에게 임할 수 있습니까? 아들을 믿는 자에게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심으로 그 생명이 임합니다. 이후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들이니 아가페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9절의 “보내심”은 헬라어로 (아페스탈켄)인데 완료형입니다. 즉, 과거에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사건인데 그 효력이 지속적으로 나타남을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보내시는 성령도 (아페스탈켄), 즉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심’에 그 기원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육신은 주의 한량없는 사랑의 시작이고, 이후로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해 한량없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육신 이후 이 땅에서 살아가신 예수님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며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사랑의 무한한 절정이고, 또한 부활 승천하신 후에 만유의 주와 그리스도로서 성령을 보내심 역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예수님의 재림도 자기 백성을 향한 무한한 주의 사랑의 표현이고, 그 후 주의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공중 혼인 잔치를 마치고 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가 하나님과 연합하여 영원히 사는 것 역시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은 그분의 영원한 사랑의 표현을 역사 가운데 성육신으로 나타내심으로 주의 사랑을 우리에게 증거하시는 바탕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 독생하신 하나님, 즉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 주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나타나심입니다. 그래서 독생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수단이 되기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 아래 저주 가운데 있었고, 완전히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무엇보다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죄사함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화목 제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요약하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한 희생 제물이 되기 위해 독생하신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오신 사건이 성육신으로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온 우주 가운데 영원히 무한히 입증되는 순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아가페이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아가페는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하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사 그로 말미암아 우리로 살게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로 영생을, 즉 하나님의 아가페 생명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에, 연약할 때에, 원수로 행할 때에,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우리는 영원토록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바울이 이 사랑을 알기 원하여 언제나 자신과 성도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합니다.
[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3:14-19)
주의 사랑을 아는 것은 이처럼 너무나 신비하고 무한한 사랑이기에 사람의 힘으로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주의 영이 우리 마음을 충만하게 하실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그 사랑을 맛보며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실제로 맛보는 하나님의 사랑은 한없고 끝없는 아가페 사랑이기에 신자는 무한한 평강과 만족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롬 5:5).
사랑하는 여러분!
아들까지 내주시는 그 무한한 아버지의 사랑과,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기까지의 고통을 당하는 그 아들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한없이 무한하게 우리에게 전해 주시며 우리 영혼에 임하게 하시는 성령의 사랑은 우리의 말과 생각으로는 도무지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우리는 우리를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그리고 성령께 무한한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그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우리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성령 안에서 서로 아가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가 마땅히 (아가페토이, 아가포멘 알렐루스)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즉,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고 외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아는 자는 아가페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 속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빚진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지주의자는 깨달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많은 지식과 깨달음이 있어 보이지만 사랑이 없는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참 신자인지는 오직 하나님이 아시지만 사랑 없는 신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영지주의자에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 지식을 영지주의 지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 지식은 사랑의 행함이 없는 그저 교만한 신자를 만들어낼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지식이 있지만 사랑의 행함이 없다면 영지주의자들을 닮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하기 바랍니다. 제가 보기에는 많은 신학자들 중에 이러한 사랑 없는 영지주의자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느니라”(고전 8:1).
아무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실현은 역사 속에서 성육신부터 시작하여 온전한 순종의 삶과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를 살리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복음이 전파될 때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성령 안에서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성령이 그 사람 안에 내주하시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영생을 얻었다.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뜻입니다.
이에사도요한은한가지사실을분명하게알려줍니다. 그것은사랑의기원이사람에게는없고오직하나님께있다는사실입니다. 그러므로내가구원을받을자격이있다고말하거나내가하나님을선택했다고생각하는것은지독한교만이며어리석은생각입니다. 이에사도요한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도다”(요일 4:10)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신” 역사적인 사실에서 확증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화목제물’은 요한일서 2장 2절에서도 나타나는 용어인데 하나님의 어린양과 맞물립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면 그의 화목 제물 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를 속하기 위한 화목제물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과거의 사건이지만 그 효력은 계속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10절에서의 ‘죄’도 단수가 아니라 복수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신자들이 짓는 죄악들에 대하여 우리의 대언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원한 화목 제물 되심에 근거하여 용서하여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량의 효력은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계시는 우리의 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인 중보자의 역할로 인하여 신자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얼마든지 화목하게 만들 수 있고, 이는 우리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할 수 있는 그런 효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한한 화목의 효력을 가진 희생 제물이신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을 통일 시키는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영혼이 영원히 살아계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주의 보좌 앞에 나아가면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며 또한 영원한 희생제물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그 신자의 범죄가 완전하게 해결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옛사람에게 져서 비록 범죄할지라도, 그래서 하나님과의 사귐이 서먹해지더라도, 내가 내 안의 옛사람이 주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인정하면서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오면 내가 지은 죄악들에 대해 철저하게 사함 받고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생명이 없던 자로서 죽은 자였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 때문에 살아났습니다. 바울도 사도 요한의 진술과 동일한 고백을 합니다.
[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도다
](엡 2:1, 3-6)
그러므로 우리는 죽었던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우리에게 주의 성령으로 영생을 주신 사건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둠과 죄 가운데 죽은 자가 스스로 살아나서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나 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창세기 3장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시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
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 3:8-10)
개역 개정은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라고 번역했는데, “거니시는”은 히브리어로 (므트할레크)라고 되어 있고 그것은 원형 (할라크)의 히쓰파엘 분사형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의 동서남북 사방으로 계속 쉬지 않고 아담과 하와를 찾아 뛰어다니시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탄과 손잡고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반란을 일으켜 타락한 아담과 하와를 주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랑하셨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어린양으로 죽게 될 여인의 그 씨를 믿고 의지하여 구원을 받으라는 자비의 증서를 내미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때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기 전에 그들 스스로 주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절대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시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들을 위한 희생 제물이 되기 위해 사람이 되셔서 친히 아담과 하와의 죗값을 영원한 율법의 공의를 위해 대신 치르십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아담이 언약을 지켰더라면 얻었을 영생을 하나님께서 친히 참 사람이 되셔서 그 언약을 대신 지켜 주심으로 영생을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 입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아마 말로 다 표현 못할 감사만이 그들 마음에 남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던 자였습니다. 지독히 교만했고 지독히 주께 반항했습니다. 그는 평생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로 행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반역자 중 반역자요 괴수 중에 괴수인 바울을 자기의 피로 용서해 주시고 도리어 그를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니 죄 사함 받고 거듭난 사도 바울은 주의 사랑 앞에 어떤 마음을 갖게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무런 말도 필요 없이 한없는 영광과 찬송을 돌리며 그저 주의 사랑에 억 만분지 일이라도 감사하고 싶어 주의 나라를 위해 수고하면서 주의 계명을 전심으로 지켰습니다.
베드로는 어떠합니까? 베드로는 저주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인함으로 자신의 호언장담뿐만 아니라 주의 제자로서도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사람들에게나 다른 제자들에게나, 특히 예수님 앞에 다시는 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용서하여 주시고 사도의 직분을 회복하여 주시고 심지어 성령으로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내재하여 주십니다. 그러니 베드로의 남은 삶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저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주께 충성하고픈 마음으로 한량없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이 괴수 중에 괴수요 교만한 사람 중 가장 교만한 우리를 찾아오셔서 구원하여 주신 것인데, 만일 어떤 사람이 “내가 주를 찾아갔고 내가 주를 선택했으며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뭔가 깨닫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시작했다”라고 말한다면 이 얼마나 무지하고 악한 사람입니까? 또한 그런 사람의 마음에는 얼마나 깊은 교만과 간교함이 숨어 있습니까?
혹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람의 장래 가능성을 보고 그 사람 안에 선한 것이 있으니 그런 사람들을 찾아내어 사랑하며 구원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담의 죄의 결과로 태어난 가인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찾아가지 않는 사람들은 소위 육에 속한 자들로서 죽은 자들인데 어떻게 그들이 먼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알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대적할 뿐입니다. 그들 안에는 선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롬 8:5-8)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또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 안에 선재적 은혜를 넣어주시고 그 후 나머지는 각 개인이 알아서 복음을 받아들이든 말든 선택하도록 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모두가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아들을 희생시키기까지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진리의 내용에 위배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0, 19).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나 구원 받은 자들은 오직 은혜로 구원 받았다고 고백할 것이요, 우리 주변의 불신자들을 대할 때는 내가 그들에게 복음의 메시지가 될 때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그들의 지정의는 완전히 망가져 있기 때문에 복음을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고 또한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십자가의 도는 오직 그들 보기에 미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시면 그들의 마음의 눈이 열리면서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백과 삶으로 주변의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러면 그들을 변화시키는 분은 오직 주 하나님이십니다.
[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18-21)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주권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우리 자신의 구원에 대해 한없는 감사를 드려야 하며, 또한 구원 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대하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자 된 우리가 그들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 있다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원수 된 우리에게, 연약한 우리에게, 죄인 된 우리에게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주의 생명과 나라를 얻은 자들입니다.
[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롬 5:6, 8, 10)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계속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이같이!’ 즉, 아들을 주시되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라고 보내 주셨고, 또한 그의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 된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주셨으니 이러한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님도 이 땅에 계실 때 동일한 당부를 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7).
그러므로 신자가 예수님의 이 새계명을 지키는 것이 바로 보이지 아니하는 사랑의 하나님을 세상에 나타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친히 그 사랑을 체험하고 확신하게 되는 비결입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 4:12).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시간과 공간을 지으신 분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에 갇힌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근거로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인격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나타내는 것이요 주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나라의 실재를 누리게 됩니다. 이때 그러한 누림은 성령의 충만한 임재와 맞물립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심 같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 때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과 같으며,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우리를 통해 나타나는 실천적인 사랑으로 입증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순종함으로 서로 사랑을 실천할 때 그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 2:5).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그리스도인들의 상호간의 사랑을 통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인들 안에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내주하심으로 완성됩니다. 이후 우리는 다른 거듭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공유한 성령 안에서 서로 믿음과 사랑을 행사하며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와 형제들 사이의 아가페 사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성령을 공유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복음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또한 성령을 통해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하나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시는 신자들에게 당부합니다.
[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엡 4:2-6)
사도요한도마찬가지로
“그의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자는 하나님의 이 아가페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아가페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힘, 능력,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 안에 사랑으로 계시고, 사랑의 생명으로 계시는 성령 하나님이 우리 속에 있기에, 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온전한 아가페의 사랑을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25 …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
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성취하라
](갈 5:16, 18, 22-23, 25; 갈 6:2).
자, 만일 우리 안에 있는 이 아가페의 사랑이 우리 공동체에 나타나면 어떤 교회 모습이 될까요? 교우 간에 피차 뜨겁게 사랑할 때 그 공동체는 어떤 모습이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사랑 안에 말로 형용 못할 천국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이 어두운 불신 세상을 향해서는 하나님과 화평케 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을 통하여 어둠 가운데 있는 주의 택한 백성들이 주께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이제 오늘 설교를 하나님의 사랑을 시적으로 노래하며 마치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망가지고, 상하고, 부서지고 버려진 심령이 갈급하는 것이 있다면 사랑입니다.
살인과 전쟁과 기근과 탐욕과 재앙의 세상에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사랑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랑이십니다.
잔인한 사람들, 무정한 사람들, 배약하는 사람들, 미워하는 사람들, 이기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의 유일한 위로가 있다면 이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 만이 사랑이십니다.
보이지 않고 알 수도 없으신 하나님이시지만, 그분의 사랑을 통하여 그분은 보이며 우리는 그분을 알게 됩니다. 그분의 사랑이 없으셨던들, 우리는 영원토록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어둠 속에서, 고통의 그림자 속에서, 삶의 낭떠러지에서, 원수의 칼 앞에서도,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우리는 그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기억하면, 감사하게 되고 그분의 사랑을 노래하게 됩니다. 조용하고 평화롭고 부요한 때에만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기억함이 아니요, 좌절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믿고 아는 것이 우리로 모든 문제를 이기게 하는 해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노래는 언제 나옵니까?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알 때 나옵니다. 그 노래는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 나오는 감사의 찬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자유로워진 마음, 삶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마음은 높이 떠오르는 산 새들처럼, 주를 노래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의 감정과 입술은 잠깐 있다 없어집니다. 어느새 무뎌지고 우울하고 숨이 막히고 한숨이 나옵니다. 그럴 때 기억하고 돌아가야 하는 곳,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주만이 위대하신 진리요, 능력이요, 찬양을 받으시기 합당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하나님을 완전히 아는 자가 없으니, 사랑을 완전히 아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사랑은 독생하신 아들을 주심으로 증거됩니다. 피조물을 향한 그분의 사랑의 실재는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심입니다. 바로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이제 너무나 우리를 소유하시고 싶으신 질투적 사랑에서 사랑이신 하나님은 이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으로 우리 마음 속에 계십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사 아예 우리 마음 속에 와 계십니다. 그분은 나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사랑의 대상이요,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다 주신 사랑의 대상이며, 우리를 위하여 세상을 창조하셨고, 우리를 위하여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에게 새하늘과 새땅을 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셨습니다. 지금도 우리를 홀로 두지 않고 함께 하기 위하여 성령으로 우리 마음 속에 와 계시며 이제 우리를 위하여 친히 다시 오시사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온 세계가 다 지나가고, 모든 중생들이 왔다 가고, 세월은 계속 흐르더라도 영원히 변함없는 것!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우리는 결코 헤아릴 수 없으니 오직 찬송과 영광과 존귀만을 세세토록 주께 돌릴 뿐입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사랑의 영으로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4:13).
이것보다 더 확실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이는 하나님 자신이 주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오셔서 친히 증거하시는 증거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이후로 호흡 마치는 그 날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객관적으로 나타나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주관적으로 증거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며 주께서 주신 사랑의 생명으로 성령을 따라 아가페 사랑을 행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