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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열차가 하얼빈을 향하고 있었다.
이미 하얼빈 역엔 한 젊은이가 이토 히로부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중근이었다.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배후를 집요하게 캐물었다.
"이번 일을 누구와 상의하거나 알렸을 텐데."
"알리지 않았다."
"의병의 총지휘관은 누구이며 어디 있는가?"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른다."
"어떤 명령을 받았을 것이 아닌가."
"특별히 어떤 명령을 받은 것은 아니다."
"결국 혼자서 결행할 생각이었는가."
"그렇다."
그러나 안중근은 끝까지 암살배후를 밝히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베일에 가려진 인물. 그의 이름은 최재형이다.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 제작인은 이곳에 최재형의 직계 후손이 살고 있다는 제보를 접하고 찾아 나섰다.
최재형의 손자 최발렌틴씨다.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최재형의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최재형이 사망하기 2년 전에 찍은 사진이다.
"이분이 최재형, 이분이 최재형의 형인 알렉세이, 이 청년이 알렉세이의 아들인 레프입니다.
유일하게 남은 최재형 할아버지의 사진입니다."
손자의 노력으로 최재형의 모습은 가까스로 오늘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1962년 수여된 건국공로훈장이 전달되는 데에도 33년이 걸렸다.
한?러 수교이전 냉전논리에 가로 막혀 최재형은 사후 70여년간 그늘에 가리어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젊었을 때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부정으로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할아버지가 민족의 영웅이고 내가 이렇게 훌륭한 사람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쁩니다."
그런데 잠시 후 최발렌틴은 제작진에게 뭔가 보여줄게 있다며 깊숙한 곳에 간직한 서류 뭉치를 꺼내 보였다.
"이것은 최재형 할아버지의 딸인 최올가가 쓴 글입니다.
제목은 <나의 삶>이며 글의 첫 부분에는 최재형 할아버지에 대한 글로 할애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연해주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무슨 일을 했으며, 동포들을 어떻게 도왔는지
그리고 항일의병부대를 어떻게 조직했는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뒷부분에는 자신의 삶에 대해 기록해 놓았습니다."
최발렌틴씨가 최재형의 삶을 추적하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돌아가신 고모 최올가의 자서전이었다.
최올가는 어릴 적 직접보고 들은 아버지 최재형에 관해 꼼꼼한 기록을 남겨 놓았다.
1908년 러시아 연추(현 크라스키노)의 최재형 집에 한반도와 해외에 흩어져 있던 의병들이 집결했다.
항일의병들은 일본군과의 대대적인 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그 항전의 총책임자가 최재형이었다.
한반도를 잠식한 일본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무력인 군대를 1907년 해산시킨다.
의병들이 전국에서 일어나 격렬히 항거했지만 일본의 적극적인 진압으로 인해 설 곳을 잃어갔다.
뿐만 아니라 초라한 무기로 무장한 의병은 이미 일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국내에서의 무장항쟁이 어려워지자 의병들은 그 기반을 국외로 옮기게 되는데
특히 두만강과 접경지대인 러시아 연추로의 이동이 많았다. 그리고 연추엔 바로 최재형이 살고 있었다.
최재형은 흩어진 의병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모아 항일운동의 본거지를 마련했다.
의병들은 최재형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군자금을 제공받았다.
러시아에 있는 모든 항일의병 세력의 결합. 동의회가 창설된 것이다.
송지나 교수 극동대 한국학과
“최지형 집에서 동의회가 조직되고 그리고 안중근 같은 의사님들이 동의회에 가입해서 단지동맹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이 근처 최재형 집에서 단지동맹도 하고 동의회도 조직되고 독립운동에 아주 큰 의미를 갖고 있는 지역이에요.”
동의회는 총장인 최재형을 필두로 간도 관리사였던 이범윤이 부총장을 헤이그 밀사였던 이위종이 회장을 맡으며
그 아래 안중근 등의 주요 회원이 참석해 발기됐다.
최재형은 러시아 최초의 한글신문인 해조신문에 동의회의 취지서를 실어 일본과의 대격전이 멀지 않았음을 공표한다.
최재형의 계획은 러시아 국경을 넘어 한반도로 침투하는 국내진공작전이었다.
최재형은 의병들을 백명 내외의 소규모 부대로 나누어 두만강 일대로 향하게 했다.
1908년 7월 7일. 의병들은 일본수비대의 경비가 취약한 지점을 공격 러시아의 국경지대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인다.
러시아 국경수비대는 7월 15일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한다.
"한인 의병부대는 경흥시 외곽과 두만강 상?하류에 있는 일본군 초소와 소규모 부대들을 모두 격파했다."
의병들은 곧이어 국내 진격에 나선다.
회령인근 전투에서 당시 일본군은 100명에 이르는 사상을 입은데 반해 의병들의 피해는 부상 4명에 그쳤다.
항일의병의 놀라운 변화. 그 핵심은 최재형의 무기지원이었다.
최재형은 러시아 군인들로부터 최신식무기를 들여왔던 것이다.
최재형은 과연 어떤 무기들로 의병들의 전투력을 향상시켰을까.
러시아 함대 창설 3백 주년을 맞아 세운 요새박물관은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는 다양한 무기들이 전시돼 있다.
이곳에 1900년대 초에 쓰인 러시아의 대표적인 총기가 전시돼 있다. 바로 모신소총이다.
모신소총은 2차 세계대전까지 사용될 정도로 당시 러시아 육군의 주력 소총이었다.
4kg 때의 비교적 가벼울 뿐만 아니라 유효사거리는 550m에 달해 당시 일본의 주력 소총인 38식 소총에 비해 앞섰다.
그렇다면 최재형은 러시아의 주력소총을 어떻게 구했을까.
당시 러시아는 러?일 전쟁에서 패해 일본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최재형은 그런 러시아 군인들을 설득해 심정적인 응원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국내진공작전에 활약상을 보여준 러시아 항일의병의 배경엔 최재형이 있었다.
최재형은 러시아 군사물자까지 끌어와 의병에게 조달할 만큼 그야말로 러시아 지역에 큰손이었습니다.
동의회가 필요한 상당한 금액의 군자금도 최재형의 자금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최재형은 함경도 노비의 아들이었습니다.
러시아로 이주한 계기도 1860년대에 발생한 함경도 지역의 심한 기근으로 인해 굶어죽지 않기 위한 것이었는데요,
그런 그가 어떻게 항일의병부대를 이끌 수 있는 힘을 키웠던 것일까요.
1869년 당시 10살이었던 최재형은 형과 아버지를 따라 고향 함경도를 떠난다.
삼엄한 국경경비를 피해 두만강을 건너 중국 훈춘으로 그리고 다시 러시아의 지신허로 이어지는 장정의 길이였다.
지신허는 1860년대에 정착한 초기 한인인 민자들이 세운 마을.
그러나 지금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한인들이 강제 이주되면서 그 자취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눈밭 사이 눈에 띠는 무언가가 있었다. 연자방아였다.
송지나 교수
“몇 년 전까지는 여기에 (연자방아가) 9개 있었어요. 작년까지는 3개 남았었고요.
그런데 오늘 겨우 1개 찾았습니다. 사람들이 자꾸 실어 내갑니다. 장식하느라고요.”
더 이상의 흔적은 없을까. 민가를 찾아봤다.
시지코프 보리스
"지신허 마을에 혼자 사시나요?"
"예, 혼자 삽니다."
시지코프 씨는 밭에서 발견한 한인들의 흔적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쟁기였다.
한인들은 조선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이곳 땅을 일구며 삶을 꾸려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초기 정착민들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거의 황무지에 가까웠고 이를 개척하기 위한 노력은 눈물겨웠다.
영국의 지리학자인 이사벨라 비숍은「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당시의 이곳 상황을 절대빈곤이라 표현하고 있다.
배고픔을 참을 수 없었던 최재형. 결국 지신허에 도착한지 2년 만인 12살에 가출을 하게 된다. 얼마나 걸었을까.
최재형은 하루 종일 걸어 포시헤트 항구에 도착했다. 인구에서 가장 큰 항구였다.
배고픔과 피곤에 지쳐 잠이 든 최재형을 발견한 사람은 포트르 세묘노비치라는 러시아 선장이었다.
선장부부는 최재형을 친아들처럼 귀하게 기른다.
특히 선장부인의 극진한 사랑을 받아 러시아어 뿐 아니라 문학과 과학 등에 서양학문까지 배우게 된다.
또 최재형은 선장과 함께 여행하며 세계정세를 익혀 나갔다.
그가 6년 간 항해한 경로는 무려 두 번의 세계 일주에 해당하는 거리다.
그리고 그의 나이 18살이 되었을 때에 최재형은 헐벗고 굶주린 소년에서 유식한 인텔리가 되어 있었다.
박환 교수 수원대 사학과
“최재형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최재형이 러시아의 러시아 학교에 입학한 최초의 한국인이라는 점입니다.
즉 최재형은 러시아 학교에 입학을 해서 러시아어를 처음으로 공부했고
그리고 그가 우연한 기회에 모스크바라든가 쌍트페테르브르크라든가 이런 지역을 또 다녀왔고
러시아인과의 여러 접촉 속에서 언어에 굉장히 탁월했기 때문에 그러한 언어를 배경으로 하고...”
러시아극동문서보관소에는 최재형의 러시아어 실력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다.
토로코프 소장 러시아극동문서보관소
“이 문서를 보면 최재형의 러시아어 실력이 뛰어났고 필기체도 잘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러시아어로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뒷부분에 최재형의 서명도 있습니다
러시아 정부에 보내는 최재형의 친필 서신. 개인전용편지지에 쓴 막힘없는 필체가 화려하다.
언어장벽이 없는데다 세계를 경험한 최재형.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의 적극적인 극동정책 추진에 의해 탄생한 도시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을 확보하는 게 쉽지 않은 러시아에게 있어 블라디보스토크는 그야말로 극동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1880년 블라디보스토크는 연해주의 중심도시로 떠오른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곳곳에 도로와 철도가 건설되며 무역중심 도시로 자리 잡는다.
이때 한인이주자들은 노동력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 블라디보스토크에 돌아온 최재형에게도 큰 역할이 찾아왔다.
1884년 연해주의 라지돌리노예에서 연추에 이르는 200킬로미터 도로가 개설될 때
최재형은 러시아어를 모르는 한인노동자들의 대변자로 도로건설에 참여한다.
러시아의 극동진출에 중요했던 이 도로는 지금까지 이용될 정도로 당시엔 대단한 공사였다.
최재형의 역할에 러시아 관료들은 깊은 신뢰를 보내게 되고 곧이어 최재형에게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온다.
1880년대 후반 한인들이 거주하는 연추는 군사도시로 한창 성장하고 있었다.
여름이면 러시아 해군의 대함대가 정박했고 보병도 만 명 이상이 상주했다.
그러다보니 무엇보다 급히 필요한 것이 군인들이 쓸 생필품이었다.
바로 이들을 상대로 한 군납업이 가장 큰 이윤을 낼 수 있는 사업으로 등장했다.
최재형은 연추에 한인들을 고용해 군납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최재형이 러시아 군대에 납품한 소만 한 달에 150마리. 러시아 돈으로 환산해서 9만 루블에 이르는 돈이다.
알렉산더 페트로브 박사 극동러시아과학원
“최재형의 소득은 매우 높았으며 당시 연간 10~15만 루블을 벌어들였습니다. 이는 매우 큰 액수였습니다.
1912년 당시 좋은 기업의 판매상들은 33~35루블, 고급요리사는 45루블,
노동자들은 10~15루블 정도의 월급을 받았다는 것을 볼 때 매우 큰돈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는 성실한 한인들은 최재형의 사업에 원동력이 됐다.
그렇게 해서 확대된 사업은 다시 한인들의 이익으로 돌아갔고 연추의 한인들은 그와 함께 부를 쌓아갔다.
모스크바대 한국학센터 이곳에서 근무하는 박미하일 교수는 연해주 연추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가 기억하는 최재형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아주 인기 있는 분이었죠. 왜냐하면 그 선생이 아주 교섭하기 쉬운 사람이었어요.
누구든지 최재형과 같이 동등한 사람으로서 대했어요.
그리고 누구나 최재형한테 가서 모든 어려운 생활문제를 토의할 수 있었고, 또 도움도 크게 받았습니다.”
당시 연추사람들은 집집마다 최재형의 사진을 걸어 놓았을 정도로 최재형의 인기는 대단했다.
1893년 34의 최재형은 한인 최초의 도헌으로 선출된다.
도헌은 우리나라의 군수와 유사한 자리로 최재형은 당당히 한인을 대표하는 러시아 행정조직의 일원이 됐다.
알렉산더 페트로브 박사
“당시 한인사회에서 최재형은 교양인이었으며 부유했기 때문에 극동지역의 한인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연추지방의 도헌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사람들은 만장일치로 최재형을 신임도헌으로 선출했습니다.
연해주의 지방행정부 역시 최재형이 도헌으로 선출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고향을 떠나 마지못해 찾아간 나선 곳 러시아 연해주. 그러나 희망의 땅이 되어 감에 따라
러시아 한인 이주민은 점차 늘어 1900년이 되면 10만 명에 달하게 된다.
최재형의 성공은 곧 한인들의 성공이기도 했다.
최재형이 이렇게 큰 성공을 이룰 수 있었던 데에는 세 가지 비결이 있습니다.
현지인 같은 러시아 실력과 그를 믿는 성실한 한인들의 노동력 그리고 또 마지막으로 뛰어난 사업수완이 그것이었죠.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그가 하는 사업들은 모두 번창해 나갔습니다.
최재형은 단순히 사업가로만 활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시의 외관을 정비하고 교육시설을 마련했습니다.
이런 성과들로 인해서 그는 1896년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을 해서 황제로부터 예복을 하사받고
또한 러시아 정부로부터 수차례에 걸쳐서 훈장을 수여 받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누렸던 것입니다.
헌데 그랬던 그가 왜 그의 모든 것을 걸고 이처럼 항일의병투쟁에 나섰던 것일까요.
1904년 2월. 러시아와 일본은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한판 격돌하게 된다.
하지만 전쟁은 오래 가지 않았다. 러시아의 참패였다. 최재형은 러일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조선인인 동시에 러시아 국적을 가진 러시아 국민이었다.
그의 분노는 깊었다. 게다가 이듬해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1905년)을 맺는다.
또한 헤이그밀사 사건을 빌미로 1907년에 고종을 퇴위시키고 군대마저 강제로 해산한다.
연이어 벌어지는 일본의 만행에 최재형은 구체적인 항일독립운동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때 계기가 마련된다.
간도에서 활동하던 이범윤이 최재형을 찾아 온 것이다.
일본이 러일전쟁에 승리하고 간도를 차지하자 간도 관리사였던 이범윤은 더 이상 그곳에서 활동할 수 없었다.
이범윤이 데리고 온 의병들은 상당수가 사냥을 하던 포수출신들이었고 제대로 된 무기체계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지원이 절실한 상황. 최재형은 군자금을 주기로 한다.
먼저 의병들에게 러시아 무기를 지급하고 군복과 숙식 또한 마련했다.
더 나아가 최재형은 러시아의 흩어져 있는 한인 의병들을 결집시켰다.
이 과정에 그의 자금 만 루블이 사용됐음이 연해주 군정장관에 보고 기록에 남아 있다.
이렇게 해서 1908년 4월. 러시아 최대 의병조직인 동의회가 발족됐다.
동의회 의병들은 바로 이곳에서 일본군을 대상으로 게릴라전을 벌였다.
빅토르비치 현지 안내인
“이 지역은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1900년대 초 항일의병들의 전투가 벌어졌던 곳입니다.
당시 항일의병들은 일본제국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지역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가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1908년 7월 7일. 동의회의 안중근, 엄인섭 등은 두만강을 건너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한다.
그리고 조선의 일본군 수비대 200여명과 여러 차례 교전해 타격을 주고 무사히 퇴각한다.
3개국을 넘나들며 공격과 후퇴를 할 수 있는 두만강 일대. 러시아와, 조선, 중국의 접경지대인 이곳은
동의회 의병들에게 전략상의 중요한 요충지였다.
박환 교수
“동의회는 그 당시에 1908년 7월에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합니다.
그래서 두만강을 건너서 신하산에 있는 홍의동을 공격하고 아울려서 회령, 영산을 공격 하였습니다.
이처럼 당시에 그 러시아 지경의 동의회는 국내진공작전을 활발히 전개하였습니다.
이러한 동의회 활동은 해외 독립군의 그러한 국내진공작전이라는 측면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와는 다른 의병들의 전술에 놀란 일본은 러시아를 본격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의병들이 러시아지역을 본거지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소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죠.
한편 러시아는 이런 일본의 요구를 더 이상 묵살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한 패전국이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주둔 항일의병들에 놀란 일본은 최재형을 항일의병의 배후로 파악하게 되고 러시아를 본격적으로 압박한다.
결국 러시아 정부의 입장이 바뀌게 되는데
“일본정부가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최재형의 활동을 즉각 감시하고 한인 부대의 활동을 금해야 한다.”
- 1908년 5월 24일 연해주 주지시가 아무르 총독에게 보낸 전문
최재형은 난관에 봉착했다. 가깝게 지내던 러시아 장교들도 그를 지지할 수 없었다.
반병률 교수 한국외대 사학과
“1908년 7월부터 9월까지 2개월여 동안에 의병들이 국내로 국경지대 뿐만 아니라 깊숙이 투입침공작전을 벌였는데
그런것들이 현실적으로 나타나게 되니까 일본정부는 명확한 근거를 확보한 셈이죠.
그것을 근거로 러시아 정부에 항의를 하니까 러시아 정부 입장에서 볼 때는 그것을 그냥 묵인할 수 없는 거죠.
방치할 수 없는 거죠. 그 다음부터 러시아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의병들을 통제하고 금지하는 정책으로 전환하게 됩니다.”
게다가 당시 운테르베르게르 극동 지역 총독은 한인들에게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자였다.
곧 러시아 정부는 한인 사회를 압박하기 위해 러시아 국적을 가진 한인들을 징집하기 시작했다.
의병의 근간이었던 젊은이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관리되지 않고 흩어져 있던 무기들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무장투쟁은 일본의 압박과 러시아의 타협으로 인해 위기에 처했고
연해주 한인사회를 항일무장투쟁의 거점으로 이끌던 최재형은 한순간에 러시아의 골치 덩이로 전락했다.
갑작스러운 러시아의 입장 변화로 곤란해진 최재형.
일본의 음모로 그는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러시아의 심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누명은 곧 벗겨졌지만 이 일로 인해서 최재형은 도헌에서 물려나야만 했습니다.
전처럼 눈에 띠는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최재형. 그는 이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러시아극동문서보관소엔 최재형이 무장투쟁 대신 새로운 길을 모색한 증거물이 남아 있다.
연해주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발행한 대동공보가 그것이다.
1909년 연해주엔 이미 10만이 넘는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급격히 증가한 한인들을 한곳에 결집시키기 위한 효과적인 무기로 최재형은 신문을 선택한 것이다.
알렉산더 페트로브 박사
“대동공보는 연해주 지역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기사를 많이 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최재형은 러시아에 거주하던 한인동포들에게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해 한반도 독립을 이룰 것을 촉구했습니다.
대동공보는 강렬한 항일 성향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과 러시아 정부는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최재형의 대동공보 기사나 논설엔 일본에 대한 과격한 표현들이 자주 눈에 띤다.
대동공보는 러시아 뿐 아니라 중국, 미국, 멕시코, 영국 등 한인이 거주하는 전 세계로 뻗어 나갔다.
일본이 대동공보에 긴장했음이 당시 재러한인관계보고서에 나와 있다.
무장투쟁대신 선택한 신문을 통해 최재형은 보다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추진해 나갈 수 있었다.
1909년 가을 한 남자가 대동공보사를 찾아온다. 연추에 대동공보 통신원인 안중근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상을 만나기 위해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기사를 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안중근은 왜 최재형을 찾아온 것일까. 당시의 기억을 최재형의 딸인 최올가는 그녀의 자서전에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여기 있습니다. 연해주 연추에 안중근이 살았고 그는 거사를 준비하며 암살 연습을 했습니다.
내 동생 소냐는 마당에서 놀다가 이런 모습을 엿보게 되었고 안중근은 이후 하얼빈으로 가서 일본군 장군을 사살했습니다.”
최재형은 거사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리고 곧 구체적인 계획이 세워졌다. 처단 장소는 하얼빈 역.
러시아의 영향아래 있기 때문에 재판은 러시아 법정에서 진행될 가능성이 컸다.
체포 시엔 공개 재판을 통해 대한제국의 사정을 세계에 알릴 수 있었다.
드디어 1909년 10월 21일. 대동공보 편집실에 머물던 안중근과 우덕순은 신문사를 통해 마련된
얼마간의 자금과 권총 3정을 들고 대동공보사를 나섰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차를 타고 하얼빈을 향했다.
그 사이 최재형은 대동공보의 주필이자 변호사인 미하일로프를 대기시키고 있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 마침내 이토 히로부미의 모습이 안중근의 시야에 들어왔다.
안중근의 총알은 정확히 이토 히로부미를 관통했다.
마침내 조선 침략의 원흉이 사라진 것에 대해 한인 동포들은 감격스러워 했다. 최재형은 지체할 수 없었다.
러시아 변호사를 즉각 하얼빈으로 보낸다.
하지만 일본의 주장으로 재판권은 일본으로 넘어갔고 일본 관선변호사가 선임됐다.
"이토 공이 만주를 순시한다는 소식은 언제 알았나."
"블라디보스토크로 오는 날 신문에서도 보았고 풍문으로도 들었다."
"신문, 어느 신문사인가?"
"대동공보사에 가서 신문을 보았다."
"따로 사람을 만나지 않았나."
"신문을 좀 보여 달라고 부탁을 했을 뿐이다."
일본은 암살의 배후를 밝혀내지 못했다.
안중근은 모두 혼자 꾸민 일이며 자금도 빌려서 마련한 것이라고 답변했다.
박환 교수
“안중근 의사가 활동했던 1909년에 그 당시에 러시아 지역의 항일독립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갔던 인물이
바로 최재형입니다. 최재형은 동의회의 총재였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지역의 항일독립운동의 모든 재원을
실질적으로 지원했던 그런 인물이 바로 최재형입니다.
따라서 최재형의 체포라고 하는 것은 러시아 지역 항일독립운동의 와해를 곧 의미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안중근 의사는 철저하게 최재형이라는 인물을 감쌌던 것으로 이렇게 보여 지고 있습니다.”
최재형은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끝내 안중근을 죽음으로부터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안중근이 일제에 의해 사형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최재형의 집에 안중근의 아내와 어린 자녀들이 찾아왔다.
최재형이 이들을 보살피기로 한 것이다. 최재형이 안중근을 위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후 연해주의 한인들에 대한 러시아의 감시와 압박은 심해졌습니다.
항일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말할 필요가 없겠죠.
이상설은 체포됐고 이범윤은 멀리 이르쿠츠크 지역으로 추방을 당했습니다.
최재형의 신상도 역시 위태로워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9천여 명의 회원이 가입한 권업회를 창설하는 등 독립운동을 그만 두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 갈 수는 없었습니다.
1916년 최재형은 러시아 당국에 의해 체포된다.
이미 조선을 합병한 일본이 최재형을 일본스파이로 몰아 러시아에 의도적으로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무혐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러시아는 최재형을 경계하며 그와의 관계를 끊어 나갔고 거래 또한 하려들지 않았다.
박환 교수
“최재형은 1914년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이후에 특히 그의 경제는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동안 있었던 부는 독립운동에 거의 사용을 했고
또 경제적인 활동은 일본과 러시아의 견제에 의해서 제대로 이루어 질 수가 없었습니다.”
연해주 우스리스크. 이곳은 최재형이 마지막 발자취를 남긴 곳이다.
한때 이루었던 부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이 집에서 최재형은 그의 말년을 보내게 된다.
그런데 1917년 러시아는 큰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바로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일본은 이 혼란을 틈타 1920년에 연해주를 무력으로 침입한다.
연해주에 사는 일본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 아래
대대적으로 러시아 혁명세력과 한일들을 체포하고 학살을 자행한 4월 참변을 일으켰다.
1920년 4월 5일 아침. 마침내 블라디보스토크를 지나 우스리스크까지 공격해온 일본군에 의해 최재형은 집에서 체포된다.
취조도 재판도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 항일운동의 거목 최재형은 일제에 의해 쓰러졌다(61세. 일제에 의해 총살).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고 러시아의 자산가가 되어 항일운동에 뛰어든 최재형.
하지만 최재형을 지켜줄 조국은 어디에도 없었다. 러시아 국적의 한국인 최재형.
자산가로서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었던 최재형.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하지만 최재형은 천천히 차갑고 어두운 역사 속으로 그렇게 잊혀져 갔다.
최재형은 가장 중요한 가치를 위해 자신의 생명과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는 항일독립운동의 공로는 최재형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수천 명 무명 전사자들의 이름이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기억하고 보존하기에 이미 늦어버린 역사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첫댓글 가슴이 뜨거워 저요..
역사와 위인들의 행적을 보았으면 느끼고 배워야 하는데 반짝 감상에 젖기만 하고...
그때보다 국민들의 주머니는 무거워졌으나 머리는 가벼워지고...
지금 일부 사람들 보면 해방된지가 언젠데 인제사 삼일 만세운동 하듯이 발악을 합니다.
독립운동은 일제때 했어야지.
비겁한 사람들은 도둑놈 나간 뒤에 악을 쓰고 더 요란하지요.
대단하신 분....존경스럽습니다...
전 이런글을 읽고나면 눈물이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