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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676
11월16일[연중 제32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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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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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sR46MCKb494
[인천교구 김동완 니콜라오 신부님 집전(김포본당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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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공동체가 곧 하느님 나라입니다!>
인류 역사상 그리도 수많은 사람이 간절히 꿈꾸어왔던 하느님 나라가 대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0~21)
이 말씀을 대체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아마도 이렇게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육화 강생으로 인해 이미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당신의 발길이 머무는 곳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둘러서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는 군중들은 이미 하느님 나라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누군가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삶 속에 실천한다면 그는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 그리스도인이 경건한 마음으로 성체성사에 참여해서 지극정성으로 성체를 영한다면 그는 이미 하느님 나라에 입국한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내가 몸담은 바로 이곳, 나의 삶의 자리여야 마땅한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지닌 가장 두드러진 특징 하나는 ‘하느님의 다스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곳이 어디이든 상관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 그분의 사랑과 봉사, 섬김과 희생의 정신이 흘러넘치는 곳은 모두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이제부터 ‘하느님 나라가 대체 어디일까?’ 하는 마음에 고개를 여기 저기 돌릴 필요가 없겠습니다. 우리 본당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 수도 공동체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 가정 공동체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느 머나먼 다른 하늘 아래 계시는 것이 아니라 자질구레한 우리들의 일상사 안에 현존하심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때로 하느님께서는 빛바랜 사진첩 같은 우리들 인생사 안에 항상 함께하셨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우리네 인생, 결핍과 죄 투성이로 실패한 듯해 보이는 우리들 삶 안에 굳건히 자리 잡고 계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강생으로 인해 이미 우리 가운데 도래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왔지만 아직 완결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 사이 중간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우리는 불완전한 몸이지만 완성된 하느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들인 것입니다. 늘 겸손하게 깨어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기다려야겠습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내 작은 두 손이지만 하느님 나라 건설에 조금이나마 기여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활짝 열어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실체를 우리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열쇠가 하나 필요합니다.
그 열쇠는 예수님께서 남겨주신 희생과 헌신, 십자가와 죽음의 삶입니다. 그 열쇠를 이용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간 우리가 얻게 되는 선물은 바로 깨달음입니다. 그 깨달음으로 인해 우리는 지상에서의 천국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넘어서 부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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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lhjFMBZ86Z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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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는 부모의 굳은살>
오늘 복음은 비유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하시며, 그 나라를 위해 당신은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당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당신의 피가 하늘 나라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영화 ‘언포기버블’(The Unforgivable)은 2021년에 발표된 드라마 영화로, 산드라 블록이 주연을 맡았습니다. 줄거리는 블록이 연기한 루스 슬레이터가 20년의 징역을 마치고 감옥에서 풀려나는 데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녀의 죄는 워싱턴주 스노호미시에 있는 집에서 자신과 다섯 살 된 여동생 케이티를 쫓아내려던 보안관을 살해한 것이었습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루스가 그들의 어린 시절 집에서 케이티를 키우고 있을 때, 아버지가 사망하고 어머니가 출산 중 사망한 후에 발생했습니다.
풀려난 후, 루스는 과거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회와 마주합니다. 어떤 직장에서도 그녀를 믿어주지 않고, 그녀를 좋아한다고 쫓아다니던 남자도 그녀가 경찰관 살인자라는 말을 듣자 그녀를 멀리합니다. 심지어 보안관의 두 아들은 그녀 동생을 납치에 그녀의 눈앞에서 동생을 죽이려 합니다.
그런데 루스는 보안관이 사실 자신들에게 잘해주었고 그런 사고가 일어난 것은 정말 잘못했으며 그렇게 해봐야 돌아가신 아버지가 좋아할 일이 없다고 설득합니다. 루스의 진심어린 사과에 보안관의 두 아들은 그녀들을 놓아줍니다.
루스의 여동생 케이티는 그날의 사건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케이티의 양부모는 루스가 보내오는 편지를 하나도 케이티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지금 잘살고 있는데 굳이 살인자 언니를 만나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케이티는 자신이 누구였는지, 어렸을 때 자기를 보호해준 어떤 흐릿한 기억의 여인이 누구였는지 궁금했습니다. 루스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지만, 사실 그날 보안관에게 총을 쏜 것이 자신이 아닌 케이티였음을 밝힙니다. 그녀는 고작 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었기에 케이티를 보호해주기 위해 대신 감옥을 살고 살인자로 낙인찍혀 견뎌왔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는 케이티는 언니를 끌어안으며 행복한 눈물을 흘립니다. 루스의 피가 케이티에게 하늘나라를 만들어준 것입니다. 사람은 다 불안합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생존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생명과 같은 피를 자신을 위해 흘려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불안이 가라앉습니다. 그 평화가 하늘나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라고 말합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피와 같습니다.
루스는 케이티를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그래서 케이티를 의롭게 했습니다. 케이티는 자기 잘못도 모른 채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니가 자기 대신 모든 죄를 뒤집어썼음을 알았을 때야 비로소 참 행복을 느낍니다. 누군가 자기를 위해 피를 흘릴 만큼 자기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태국 광고 중에 ‘어머니의 볶음밥’이란 제목의 광고가 나왔었습니다. 아이가 집을 나와 배가 고파 어쩔 줄을 모를 때 길거리 음식 장사하는 아주머니는 돈이 없어서 입맛만 다시는 아이에게 맛있는 달걀 볶음밥을 해줍니다. 아주머니는 아이가 양파를 싫어하는 줄 어떻게 알고 그것을 빼고 해줍니다. 알고 보니 돈이 없을 줄 알고 엄마가 여기저기 다니며 아이가 오면 밥을 그렇게 한 끼 해주라고 돈을 주고 간 것입니다.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먹습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입니다. 나를 사랑해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되는 것.
저도 부모님을 통해 하늘나라를 느낀 것은 부모님의 손과 발에 박힌 굳은살을 보고서였습니다. 그 굳은살은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를 때, 심지어 엄마가 나의 친엄마인지도 의심이 들 때 하늘 나라의 행복을 선사했습니다.
사람은 다 불안합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불안을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물질은 ‘피’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죽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생존에 대한 걱정을 덜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하도록 파견받았습니다. 그러나 먼저 내 안에 하늘나라를 간직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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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강의 중에 ‘가톨릭은 은총의 종교’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생명의 은총, 도움의 은총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입니다. 부처님도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소승불교는 그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엄격하게 적용하였습니다. 대승불교는 그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넓게 개방하였습니다. 엄격하든, 넓게 개방하든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가톨릭은 ‘은총’의 종교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면, 하느님의 사랑을 믿으면 하느님께서 골고루 비를 내리듯이, 어디에나 햇빛이 비추듯이 그렇게 은총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강의 중에 ‘은총 생활의 장애’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는 모두 은총을 받아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는데 ‘장애물’이 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 장애물은 대부분 밖에서 오는 줄 알았습니다. 나를 유혹하는 것들이 대부분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의 강의는 저의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장애물이 밖에 있다면 하느님께서 없애 주실 수 있다고 합니다. 장애물이 나의 마음에 있을 때는 하느님께서도 없애 주시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면 그때 비로소 장애물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토마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다른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그분의 상처를 직접 보고 만져보아야만 부활을 믿을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니체는 그동안 우리들이 가졌던 신앙과 교리에 대해서 냉철한 비판을 가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신은 죽었다.” 하느님 나라와 진리는 누군가로부터 얻는 것이 아닙니다. 정보와 인공지능이 알려 줄 수 없습니다. 내비게이션으로 갈 수 있는 곳도 아닙니다.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사람들이 진리의 빛을 볼 수 있고,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지혜’를 이야기합니다. “밤은 빛을 밀어내지만 악은 지혜를 이겨 내지 못한다. 지혜는 세상 끝에서 끝까지 힘차게 퍼져 가며 만물을 훌륭히 통솔한다.” 지혜는 하느님께로부터 온다고 말을 합니다. 우리가 참된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청원해야 하고, 하느님께 다짐해야 하고, 하느님과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과거의 먼 옛날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먼 미래의 이야기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이곳에서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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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7,20-25: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 바리사이들의 질문은 예수님의 인격과 그분의 행위를 통하여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왔음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아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21절) 우리는 그 나라에 합당한 자로 인정되도록 힘써야 한다. 그 나라는 우리 안에 있다. 우리 의지에 달렸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를 믿어서 의로움을 인정받고 온갖 덕행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이는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합당하다.
사탄이 쫓겨나고 죄가 다스리지 못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의 기쁨입니다.”(로마 14,17)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있고 의로움이요 평화이며 기쁨이라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나라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반대로 영의 생명을 죽이는 불의와 전쟁, 침울함 속에 있는 사람은 이미 악마의 나라의 시민이다. 하느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는 이미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것이다. 이 삶 속에 무엇을 끌어안고 사느냐가 문제이다. 그 나라는 은총과 진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세상 종말에 그분은 아무도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1티모 6,16)으로서 하느님 같은 영광에 싸여 내려오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번개가 빛을 내는 것처럼 오시겠다고 하신다. 아버지의 위엄을 입으시고 천사들을 거느리신 채 만물의 하느님이요 주님으로 오실 것이다. 그 나라는 먼저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온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먼저 구원의 수난을 겪으시고, 당신 육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무너뜨리시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 이 세상의 지배자를 파멸시키시고, 아버지께로 올라가셨다가 때가 되면 정의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시편 96,13)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하여 우리 자신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자신의 진정한 변화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임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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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다룹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이 말씀에서 “가운데에”라고 옮긴 그리스 말은 ‘- 안에’, ‘- 속에’, ‘누군가의 깊은 곳에’라는 뜻을 가집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풀어 보면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너희 속에, 너희 마음속 깊은 곳에 있다.’가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내일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점집을 찾고 사주를 보거나, 사적 계시에 집착하거나, 사이비 또는 유사 종교에 빠지는 것은 실제로 고통스러운 현실을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거짓 위로에 자신을 맡기는 것은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격이자 불난 데 기름을 붓는 격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믿음과 신앙은 정확하게 계량하거나 측정할 수 없어, 이를 향한 여정도 그저 막연하고 모호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체적 표징이나 확실한 ‘계시’ 또는 강렬한 은사에 목말라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목마름을 악용하면서 인류 역사 안에서 이단과 사이비가 끊이지 않았으며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유혹의 손길을 뻗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믿음과 희망을 두어야 할 곳은 하느님 한 분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가 우리 한가운데에 있다고 명확히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세례성사 때 우리 안에 뿌려진 하느님 나라의 씨앗은 지금 이 순간도 자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뜻을 찾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씨앗은 어느새 싹을 틔우고 훌쩍 자라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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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 나라의 도래>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루카 17,20-25)”
바리사이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은 것은, 종말의 날이 언제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날을 미리 알려 주는 어떤 표징이 있겠느냐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종말의 날’은 하느님 나라가 오는 날(시작되는 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라는 예수님의 답변은,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다.”(종말은 이미 시작되었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종말의 날은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는 날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는 날이다.”(이미 시작된 종말이 완성되는 날이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은” 종말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여기서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 마음속에”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신앙과 신앙생활 안에서, 사랑 실천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넓게는 이 세상 안에서 건설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시작과 건설과 완성은 세속 국가들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뜻입니다. (어떤 표징과 함께 오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루카 16,16)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누구든지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통해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가 어떤 특정 장소에 세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 세상 전체에서, 또는 우주 전체에서 건설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종말은 우주의 파괴와 소멸이 아니라 변화와 완성입니다. ‘종말 전의 재난들’은 회개하라는 경고일 뿐이고, 이 세상을 완전히 파괴해서 없애는 일이 아닙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은 “너희가 나의 재림을 하루라도 보기를 갈망할 정도로 심한 박해를 받을 때가 오겠지만”입니다.
종말의 날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이고, 심판하시는 날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은(신앙인들은) 박해를 받게 되면 예수님께서 빨리 재림하셔서 박해자들을 심판하시기를, 또 신앙인들을 구원해 주시기를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루라도’ 라는 말은, 그만큼 심하고 혹독한 박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보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그 날이 언제인지 말할 수 없다.”로 해석됩니다.
우리는 종말의 날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순교자들이 희망도 없이 절망 속에서 죽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첫 번째 순교자인 스테파노 순교자는 순교 직전에 하느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영광을 직접 보았고(사도 7,55-56), 자신의 신앙과 순교가 옳은 일이라는 것을, 또 이제 곧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 확신과 기쁨 속에서 기꺼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가짜 메시아와 가짜 ‘재림 예수’가 많이 나타날 것이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라는 말씀은, 가짜 메시아와 가짜 ‘재림 예수’에게 속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진짜로 재림하실 때, 혹시라도 가짜 재림 예수라고 오해하는 일은 없을까? 그런 의문에 대한 답변이 24절의 말씀입니다.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번개가 치면 곧바로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누구든지 그분이 재림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당시의 제자들(신자들) 중에는 예수님이 수난과 죽음을 생략하고 곧바로 부활, 승천, 재림을 이루시면 좋지 않은가? 라고 생각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라는 말씀은, 십자가는 생략할 수 없는 필수 과정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죄인들 대신에 당신 목숨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신 일입니다. <각 개인의 인생도 마찬가지인데, 지상에서의 인생을 생략하고 곧바로 하느님 나라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에도 참여해야 합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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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제1독서의 대목은 지혜의 본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러 차례 반복해 읽다 보면 지혜의 매력에 푹 빠져들어 헤어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영혼이 즐겁고 행복해집니다. 거룩, 청절, 자유, 평온, 섬세, 통찰, 광채... 지혜를 가리키려 골라낸 단어들이 얼마나 영롱하고 찬란한지, 가히 '지혜의 찬가'가 울려퍼지는 듯하지요.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없는 거울이며,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이다."(지혜 7,26)
우리의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지혜이십니다. 구약에서 성경 저자들이 의인화한 지혜가 바로 육신을 취해 세상에 내려 오신 예수님이시지요. 지혜이신 예수님께서는 빛이신 아버지에게서 흘러나오는 광채이시고, 언제나 일하시는 아버지를 따라 일하시며, 선하신 아버지의 완전한 모상이십니다.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지혜와 함께 사는 사람만 사랑하신다.“(지혜서 7,27-28)
지혜를 사랑하고 갈망하며, 지혜를 만나 마음에 품은 이는 하느님의 벗이 되어 그분과 마음을 나누며, 그분의 목소리가 됩니다.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의 앞길이 꽃길만은 아닌 게 분명한데도, 지혜 문학 저자들은 내내 지혜를 얻기 위해 힘쓰라고 권고합니다. 무사, 무탈, 쾌락, 풍요의 세상 가치와 지혜는 방향을 달리하니까요.
그래서 지혜서 저자는 지혜를 소유하는 일의 고귀함을 전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께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신다고 다소 도전적으로 말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를 사랑하신다고 두루뭉실하게 넘어가지 않고, 사랑받는 조건을 아주 명백하고 정확하게 한정합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만!"
복음은 바리사이들의 질문에서 촉발된 하느님 나라 이야기입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바리사이들이 "언제 하느님의 나라가 오는지"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동안 보여 준 그들의 태도로 보아 질문의 의도가 그리 단순하고 순수하게 들리지는 않지요.
하느님 나라를 물리적인 실체로 여긴다면 이미 세상 한가운데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놓치기 쉽습니다. 육화하신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이고, 비록 거창하거나 요란하지 않아도 세상을 진리와 선으로 지탱하는 힘이 바로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루카 17,25)
이미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사람의 아들은 세상에서 고난과 배척을 받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과 교회가 고난받고 배척받는 이, 소외되고 죽어가는 이에게서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고, 겸허히 옷깃을 여미며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기를 바라십니다. 세상의 질서와 발걸음을 함께하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알아볼 수 있는 힘이 곧 지혜입니다. 그리고 이 지혜와 함께 사는 이를 하느님은 사랑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복음 환호송)
포도나무와 가지의 표상은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가리킵니다. 지혜와 우리의 관계도 다르지 않지요. 지혜를 찾아 얻고 지혜에 머무르는 이는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와 하나가 된 바로 그 지혜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입니다. 그 열매로 세상이, 교회가 양분을 얻어 더욱 선하고 아름답게 변화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전히 미완성의 불완전한 세상과 이웃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을 청하며, 그 지혜를 꼭 붙잡고 나아가시길 기원합니다. 이렇게 지혜를 찾아 매일매일 말씀의 샘물가로 모여드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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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불교에서 선승들이 주고받는 문답을 ‘선문답’이라고 합니다. 진리를 깨친 스승에게 제자가 질문을 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그 대화는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이라기보다는 질문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로 주고받는 대화가 아닌, 두 사람 각자의 혼잣말 같기도 합니다. 질문을 통하여 진리를 깨치지 못한 이를 더욱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선문답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주제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시기를 여쭈어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시기가 아니라 그 “모습”에 대하여 답을 하십니다.
“여기”, “저기”, “우리 가운데”라고 공간을 이야기하십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사람의 아들”의 날에 대하여 설명하시며 그날이 오기 전에 먼저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 안에서 또 다른 질문을 만들어 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일까?’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이라면 어떻게 볼 수 있는가?’ ‘볼 수 없는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데, 과연 어디에 있는가?’ 혼자서는 답을 찾기 어려운 질문들을 되뇌어 봅니다.
그리고 고민해 봅니다. “우리 가운데”, “우리”는 누구를 말하고 있을까요? 나는 어떤 사람들을 ‘우리’라고 말하고 있나요? 너무 쉽게 ‘우리’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 하느님, 우리 성당, 우리 공동체, 우리 가족, 우리 부모님, 우리 친구 ……. ‘나’를 포함한 ‘우리’이기는 하지만, ‘나’라는 말을 대신하여 ‘우리’라는 말을 쓰고 있지는 않은가요? 어째서 일까요?
어쩌면 나와 너, 그리고 그들이 ‘우리’가 되는 순간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때가 아닐까요! 나만을 생각하던 그 삶의 공간이 ‘우리’를 먼저 생각하여 행동하는 공간으로 바뀔 때 그 자리가 하느님의 나라가 아닐까요! 물음표가 느낌표가 되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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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으면>
좋은 곳, 아름다운 곳에 머물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특별히 신앙인은 더없이 좋은 곳, 하느님의 나라에 머물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17,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묵시록에는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모시는 곳에 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또 사는 곳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상태가 곧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내 마음 속에 오시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느님의 통치, 그리스도의 주권이 내 마음에 미치면 하느님의 나라요, 안 미치면 하느님의 나라가 세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는 육적인 눈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잘 볼 수 있습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내게는 이제 천당 영복이 시작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영복을 얻고자 한다면 하느님만을 열심히 공경하시오” 하고 말씀하시며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성 정하상 바오로는 “ ‘내 눈으로 천당과 지옥을 보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천당과 지옥이 있음을 믿으리요?’ 하는 이는 마치 소경이 제 눈 어두운 것을 생각하지 않고, 눈으로 하늘을 보지 못하니 해와 달이 있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고 말씀하시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촉구하였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먼 훗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자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13,34)는 새 계명 안에 성장되고 마지막 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 번 일상 안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기쁨 속에 있고, 거기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슬픔 속에 있습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고,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십니까? 그렇다면 사랑하십시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주님께서 눈물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세 번씩이나 넘어지시며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우리를 위한 사랑의 발걸음이었다면 우리도 어떤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사랑의 끈을 결코 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곳이 하느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왔고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믿는 이들이여,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합시다.”(성 베르나르도)
그러나 “안락의자에 앉기만을 원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성 필립보 네리).는 것도 잊지 마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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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하느님은 어떤 경우에도 주저하지도 동요하지도 않고 늘 침착함을 유지하십니다. 우리는 욕지거리를 들으면 침착을 쉽게 잃게 됩니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일을 부풀려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와 달리 하느님께서는 늘 침묵 속에서 침착함을 가지고 계십니다.
상대의 화에 화로 마주하려 하고, 상대의 부정적인 말에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말로 상대하는 우리입니다. 이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래야 세상 안에서 잘 사는 것처럼 또 약자가 아닌 강자가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침묵하시며 우리를 바라보고만 계시는 하느님을 잘 이해하지 못하며,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하느님이 정말 계시는 것일까요?’
도대체 화를 내지 않는 저의 친구가 있습니다. 화를 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가만히 있습니다. 그래서 이 친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너는 화 안 나?”
친구는 자기도 사람인데 어떻게 화가 안 날 수 있냐면서, 대신 이것을 꼭 기억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자.”
하느님께서도 우리 입장에서 생각 중이십니다. 그래서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죄를 지어도 가만히 침묵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겸손을 계속해서 말씀하셨듯이, 그 시작은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삶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사는 사람은 어디에 사는 것일까요? 그곳이 어떤 곳인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 나라는 분명히 사랑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가득한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사랑이 아닌 다른 것을 쫓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가득히 안고서 조금이라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지면서, 점차 하느님 나라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침묵 속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이웃의 입장에 서서 사랑의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 나라 안에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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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에>
루카 17,20-25 (하느님 나라의 도래, 사람의 아들의 날)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에>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에
하느님의 나라가
서로 믿는
우리 가운데에
하느님의 나라가
서로 바라는
우리 가운데에
하느님의 나라가
서로 사랑하는
우리 가운데에
하느님의 나라가
서로 보듬는
우리 가운데에
하느님의 나라가
서로 내어주는
우리 가운데에
하느님의 나라가
서로 섬기는
우리 가운데에
하느님의 나라가
서로 북돋우는
우리 가운데에
하느님의 나라가
서로 자비로운
우리 가운데에
하느님의 나라가
서로 평화로운
우리 가운데에
하느님의 나라가
서로 살리는
우리 가운데에
하느님의 나라가
아직
우리 가운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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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우리 가운데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의 질문에 주님께서 언제 얘기는 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곧 우리 가운데 있다고 대답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있다!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든지 계신다고 우리 교회는 말하지요. 그러니 하느님 나라는 여기에 있다고 하는 곳에 있지 않고, 저기에 있다고 하는 그곳에 있지 않습니다.
나에게는 내가 있는 곳에 있고, 우리에게는 우리가 있는 곳 곧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니 이리저리 우왕좌왕하지 말고 줏대 없이 이 사람 저 사람을 쫓아 가지 말 것입니다.
내가 있는 지금 여기에 하느님 나라가 있다는 확신과 줏대를 가지고 있고, 우리의 사랑만 있으면 그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있다는 확신만 가지고 있으면 그때 하느님 나라는 우리에게 오고 거기서 하느님 나라를 만날 수 있겠습니다.
아!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는 내게 달려 있고 우리에게 달린 것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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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정주(定住)의 지혜>
-지혜 예찬(禮讚), 지혜를 사랑합시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어느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대가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듯 삶을, 이웃을, 진리를, 지혜를 모두를 사랑했습니다.
이 모두에 앞서 주님을 한결같이, 열렬히, 온마음, 온정신, 온힘으로 사랑했습니다. 탓할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내 사랑 부족일 것입니다. 잠자리 들기전 끝기도때 간절한 주님 사랑 고백의 찬미가 둘째 연은 늘 감동입니다.
“우리는 잠을자도 주님과함께, 꿈에도 당신만을 뵙게하소서 언제나 한결같이 당신영광을, 새는날 밝아올제 찬미하리다”
얼마나 절절한 주님 사랑의 고백인지요! 오늘은 서울 베네딕도 수녀원의 주보성녀이며 중세의 신비가이자 베네딕도회 수도자 였던 성녀 대 젤투르다 동정 기념일입니다. 성녀의 신심의 특징은 예수성심에 대한 강렬한 사랑 체험과 헌신입니다. 그래서 성녀는 영성사에서 ‘예수성심의 신학자’라고 불렸고, 예수성심 공경을 시작한 선구자 혹은 사도로 여겨집니다.
성녀는 중세의 신비신학과 신비주의에 중요한 역할과 기여를 했고, 특히 13세기 독일 교회 안에서 가장 위대한 신비가로 여겨집니다. 성녀의 풍부한 신비체험으로 인해 ‘독일의 테레사’로 불리기도 합니다.
1288년 심한 병을 얻게 된 성녀 젤투르다는 합병증으로 치유 불가능한 상태에서 예언의 은사를 받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병상에서 누워있던 성녀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수녀원의 시간전례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헬프타 수도원에서 오랫동안 중병으로 고통받던 성녀 젤투르다는 1302년 11월16일 바로 오늘 거룩한 임종어 “아! 신랑이 오신다.”라고 외치면서 세상을 떠납니다. 이때 성녀의 나이는 만46세 였고,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올려지지 않았지만, 1606년 교황청으로부터 공식 전례의 기도와 독서, 찬가에서 성녀를 공경할 수 있다는 공인을 받습니다.
이후 성녀의 축일은 전 세계 가톨릭 교회로 확대되었고, 1738년 교황 클렌멘스 12세는 다른 젤투르다 성녀와 구별하고 성녀의 영적인 깊이를 재평가하면서 ‘위대한(the Great)’이라는 칭호를 부여합니다.
성녀의 다음 연옥의 모든 영혼들을 위한 이 기도는 전통적으로 주님께서 성녀에게 주신 약속에 따라 이 기도를 바칠 때 마다 많은 영혼들이 연옥을 벗어난다고 알려진 기도입니다. 11월 위령성월에 바치기에 적절한 기도입니다.
“영원하신 아버지, 연옥의 모든 영혼들을 위하여, 모든 곳의 죄인들을 위하여, 내 가족과 가정 안의 죄인들을 위하여, 오늘 온 세상에서 드리는 미사성제와 더불어 당신 성자 예수님의 가장 값진 피를 봉헌하나이다. 아멘.”
성인들의 위대한 특징은 아마도 지혜와 사랑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지혜와 사랑의 깊이를 그대로 반영하는 성인들입니다. 참으로 열렬히, 항구히 지혜를 사랑한다면 “진리의 연인”이라 칭했던 성 아오스팅처럼, “지혜의 연인”이 되어 지혜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을, 지혜를 온마음, 온정신, 온힘으로 사랑할 것입니다.
지혜를 사랑합시다. 지체없이 오늘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지혜를 사랑할수록 오늘 기념하는 성녀 대 젤투르다처럼 날로 지혜를 알게되고 계속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을 닮아 갈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는 그대로 지혜에 대한 찬미이자 예찬입니다. 지혜서가 아니곤 어디서 이런 귀한 내용을 만날 수 있겠는지요! 생략하기가 너무 아까워 공부하는 마음으로 전문을 인용합니다.
“지혜 안에 있는 정신은 명석하고 거룩하며, 유일하고 다양하고 섬세하며, 민첩하고 명료하고 청절하며, 분명하고 손상될 수 없으며 선을 사랑하고 예리하며, 자유롭고 자비롭고 인자하며, 항구하고 확고하고 평온하며, 전능하고 모든 것을 살핀다. 또 명석하고 깨끗하며 아주 섬세한 정신들을 모두 통찰한다.
지혜는 하느님의 권능의 숨결이고, 전능하신 분의 영광의 순전한 발산이어서 어떠한 오점도 그 안으로 기어들지 못한다.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없는 거울이며, 하느님의 선하심의 모상이다.
지혜는 혼자이면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자신 안에 머무르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며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지혜와 함께 사는 사람만 사랑하신다. 지혜는 해보다 아름답고 어떠한 별자리보다 빼어나며 빛과 견주어 보아도 그보다 밝음을 알 수 있다. 밤은 빛을 밀어내지만 악은 지혜를 이겨내지 못한다. 지혜는 세상 끝에서 끝까지 힘차게 퍼져가며 만물을 훌륭히 통솔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대신 태초에 지혜가 있었다 말하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본질은 무지가 아니라 이런 지혜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바로 이런 지혜자체이신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이런 지혜야 말로 하느님의 모두이자 주님의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며 그대로 주님의 현존인 성령이요 사랑이요 진리이기도 합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도 바로 이 지혜뿐입니다. 바로 이 지혜의 육화이자 결정체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은 그대로 날로 지혜로워지는 지혜의 여정이며 성인들이 밟았던 여정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께서는 정주의 지혜에 대한 참 유익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그러니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오늘 지금 여기 우리 가운데에 있다.’
사막교부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했습니다. 바로 예수님 함께 계신 어디나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바로 여기서 정주의 지혜가 빛을 발합니다. 결코 부화뇌동, 경거망동하여 거짓 선동에 휘둘려 뿌리없는 사람들처럼 이리저리 떠돌지 말고 오늘 지금 여기 이 삶의 자리에 정주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살라는 주님의 다음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올 것이다.”
그러니 언제 주님께서 임재하실지 모르니 오늘 지금 여기 정주의 자리에서 지혜롭게 깨어 살라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도 우리 모두 정주의 지혜를 살라고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수수께끼 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빛과 그늘의 공존입니다. 부활의 영광에 앞선 십자가의 고난과 배척입니다.
현세에서 주님과 함께 겪는 고난과 배척을 부활 영광의 희망으로 잘 견뎌내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파스카의 은총이, 파스카의 기쁨이 능히 이런 어려움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정주의 지혜로 빛나는 삶을 살게 하시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지혜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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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17,21b)
<하느님의 나라!>
오늘 복음(루카17,20-25)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6)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신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신 공생활 시작의 첫 말씀입니다.
바리사이들이 궁금해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17,20-21)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에 와 있다.'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모습일까?' 루카4,18; 마태7,21; 1테살5,16-18; 로마14,17의 말씀들 안에서 그 답을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의 숙제(?)입니다.
이 말씀들 꼭 찾아서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이 말씀들이 이미 우리 가운데에 와 있는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습니다. 하지만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와 우리가 죽어 하느님 품으로 갈 때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 안에 들어간 이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함께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갑시다!'
오늘은 수능시험이 있는 날입니다. 하느님의 지혜로 수험생들이 평화 안에서 시험을 잘 볼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지혜는 어떠한 움직임보다 재빠르고, 그 순수함으로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한다."(지혜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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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dW6ButXpF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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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 21)
하느님의 나라는
입과 머리로
알아듣는
나라가
아닙니다.
묵묵히
기도하는
마음 안에
존재하는
나라입니다.
모든 일의
시작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하느님께로
향한
열린 마음이
하느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바르게 보는 일이
하느님을 신뢰하는
하느님 나라의
생활입니다.
마음이 없는
생활이 없고
생활이 없는
마음이란
없습니다.
마음을 키우는
생활의
복음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한가운데
우리의
마음 안에서
빚어지고
만들어지는
나라입니다.
우리 마음의
믿음과
정성으로
나누어지고
베풀어지는
마음의
잔치입니다.
그 마음을
잃지 않게
도와주시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보듬고
아껴주어야 할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더 이상
물러 설 곳도 없는
하느님의 나라이며
하느님을 닮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음을 열면
닫힌 사랑과
용서도
열립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
사랑을 위해
그 어떤 희생도
감내한 사랑의
마음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할
하느님 나라의
우리입니다.
끈기와
인내심을 갖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각별한 오늘의
마음입니다.
마음 쓰는 곳에
마음 가는 곳에
간절한
하느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마음의 눈을 뜨는
은총의 시간
삶의 본질을
꿰뚫는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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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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