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읍에서 군북으로 가는 지방도로 1004호선 위에는 노란 은행나무 잎이 수북히 쌓여 늦가을 정취에 흠뻑 젖어들게 했다. 양쪽으로 펼쳐지는 들판과 낮은 산이 행복한 어울림으로 다가왔다.
기차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넘어가는 계티 고개를 지나면 함안군 군북면 추수가 끝난 들판이다. 공설운동장 건너편에는 군북 3·1 독립운동 기념탑의 마지막 손질이 한창이다. 군북교를 지나면 면소재지이다. 택시 정류소에서 철도 건널목을 건너면 넓은 들판 사이로 동촌리, 사촌리로 이어지는 쭉 뻗은 도로가 이어진다. 덕대리 마을 입구에 들어서는데 버스정류소에서 빈손수레를 가지고 있는 할머니가 손을 들었다. 마을버스를 타려면 2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며 신촌리 유동마을까지 태워달라고 했다.
할머니는 꼭두새벽에 단감을 한 광주리 손수레에 실어 마산 어시장에서 팔고 온다고 했다. 오늘은 장사가 잘돼 3만원을 벌었다고도 했다. 마을에서 내린 할머니는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검은 비닐 봉지에 단감을 담아 가지고 와서 연방 별 것 아니라며 미안한 모습으로 손에 쥐어주셨다. 참으로 따스함이 스며있는 아름다운 마음의 선물이었다.
군북면 지역을 답사하다보면 도로 변에는 군북 3·1독립운동 당시 순국했거나 고초를 겪었던 애국지사의 묘역 안내판들이 여럿 보인다. 신촌리와 사촌 마을 사이 애국지사 조용섭의 묘지 안내판을 따라가면 서산서당(西山書堂)이 백이산(伯裏山)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세월을 가늠할 수 없는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내려다보는 솟을 대문앞 마당에 1991년 세워진 중수비가 서산서당의 내력을 말해주고 있다. 어계(漁溪) 조려(趙旅)선생의 충성을 추모하기 위해 영남유림(嶺南儒林)에서 1713년에 건립한 것이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철폐되었다가 1962년 개축하였다.
서산서당은 백이산이 포근히 감싸안고 있어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안목에서 계획 된 것으로 보인다. 서당 마루에 앉아 땀을 식히면 숲 사이로 보이는 신촌리 들판과 냇물이 건물 안으로 들어와 원림(園林) 역할을 한다. 서당 앞 관리동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를 뒤로하고 내려와 폐교되어 인적이 끓어진 사촌 초등학교 앞에서 절골을 따라 의상대가 있는 사촌리 광려산 자락 원효암으로 길을 재촉했다.
사촌리를 지난 저수지 위쪽으로 난 숲 속으로 이어지는 굽이굽이 길은 답사를 다니지 않는 사람은 맛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길이다. 끓어질 듯 이어지는 콘크리트 포장 도로는 승용차 통행이 가능하다. 원효암으로 가는 길에는 다른 절집처럼 번듯한 이정표가 없어 보물 찾기를 하듯이 찾아가야 한다. 원효암에는 대웅전과 요사채를 짓고있는 불사가 한창이다. 공사로 인하여 어수선한 분위기가 있지만,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15호인 칠성각과 의상대를 찾아보는 답사는 어렵지 않다.
원효암 (元曉庵)칠성각(七星閣:불교에서 칠원성군을 예불의 대상으로 모신 집)은 원효대사(元曉大師)와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수도(修道)한 곳이라 전하나 창건 연대와 연혁은 알 수 없고, 절의 이름을 원효암이라 하고 의상대(義湘臺)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의상대사가 창건(創建)한 것으로 추정되나, 확실하지는 않다.
지난 여름 우리나라에 커다란 상처를 남기고 간 태풍14호 매미는 원효암 칠성각에도 생채기를 남기고 갔다. 칠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추녀를 받치고 있는 서까래에는 새까만 곰팡이가 피어있고, 내부를 둘러보아도 빗물이 새어 들어온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칠성각 옆면과 후면에는 시주를 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걸려있다.
칠성각에서 10m쯤 되는 곳에 있는 의상대에서 바라보는 군북 들판의 조망은 시원스럽다. 의상대 추녀 밑에는 겨울나기를 위한 장작이 차곡차곡 쌓여 있어 절집의 고즈넉함을 느낄 수 있다. 원효암(元曉庵)은 6·25때 소실되고 의상대는 소실되지 않았으나, 절집 기록에 의하면 1370년에 세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