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박석수 시인) 학창시절을 주로 수원에서 보내게 된다. 수원북중과 삼일상고를 거치면서 그가 보낸 문학소년 시절은 찬란하고도 험한 것이었다. 60 ~ 70년대 천재 문학소년들이 대개 그러하듯 문학에 대한 열렬한 지향과 더불어 정신적 조숙이 가져다준 방황으로 혼돈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수원의 여러 시인들과 교류를 하며 보냈다. 수원의 임병호 시인은 그의 고등학교 시절을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수원의 화홍문화제 백일장에 임병호 시인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두 사람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박석수 시인은 그 백일장에 참여하였고 심사를 본 임병호 시인은 그의 출품작이었던 「窓」이라는 시를 눈여겨보았던 모양이다. 백일장이 있던 그날 저녁 임병호 시인은 소설가 오영일 선생과 술잔을 기울이며 수인(囚人)의 시각에서 본 독특한 작품이 있었다고 대화를 나누던 중 더벅머리 고등학생이 다가와 자신이 바로 박석수라고 소개를 하면서 그들의 평생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이미 술을 미친 듯 마셔댔으며 문학에 미쳐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 박석수 시인은 학교가 끝나면 송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화홍문 근처 임병호 시인의 집에서 자주 숙식을 해결하곤 하였다. 임병호 시인과 화홍문 느티나무 아래서 당시 4홉들이 샛별소주를 마시며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지나가던 소년들과 주먹질하며 청년이 되어갔던 것이다.” - 요절시인 시전집 시리즈 8 박석수 편「십자가에 못박힌 한반도」 ‘쑥고개의 悲歌’ - 박석수론 (우대식 시인 해설) 중 일부. 그렇다. 박석수 시인은 고교생 때부터 뛰어난 작품들을 썼다. 필자의 여섯번째 시집 「아버지의 마을」 발문에서도 스스로 추억담을 펼쳐놨다. “임병호, 그는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지만, 나는 정반대였다. 수원에서 학생깡패로 이름깨나 날려 매일 싸움박질만 하고 다녔으므로 학교 공부는 늘 뒷전이었다. 나는 상처입은 짐승처럼 늘 으르렁댔고, 선후배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드둘겨 팼으며, 교복을 입은 채 술을 엉망으로 마셔댔고, 임병호 형을 만나 희떠운 소리로 이 땅이 왜 천재를 몰라 주느냐고 외쳐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가만히 건너다보기만 했다. ‘짜식’하면서.” 1971년 1월1일 오전이었다. 한동안 모습을 안 보이던 박석수가 남수동 우리 집엘 왔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어 필자는 ‘무슨 사고를 쳤나’ 하고 내심 걱정했는데 선량하게 씩 웃으며 종이봉투에서 4홉들이 소주 세 병과 신문을 슬그머니 꺼내 놓았다. 신춘문예 당선작품 ‘술래의 잠’이 실린 <대한일보>였다. 우선 박석수가 사온 오징어를 안주로 소주부터 비우고 집을 나가 선지국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신춘문예 당선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런데 당선소감이 없었다. 신춘문예 당선자가 심사위원을 비판했다고 하니 소감이 지면에 게재될 리 없다. 필자는 또 ‘짜식’하며 술잔을 건넸다. 박석수가 수원을 떠나 안양에서 잠시 머물더니 서울로 갔다. 그의 시 ‘서울에 와서 Ⅰ’ , ‘서울에 와서 Ⅱ’를 보면 서울생활이 그대로 드러난다. “내가 만나는 사람은 / 모두 입만 향기로뤘다”는 서울에서 박석수는 <소설문학> <직장인> <여원> 등 편집장으로 바쁘게 살았다. <문학사상> 편집장도 지냈다. 필자는 작품으로보다는 박석수 덕분으로 서울에서 문명이 알려졌다. 예컨대 사무실에 찾아오거나 만나는 문인들 한테 “임병호 시인을 아느냐”고 묻고, 머뭇거리면 “수원에 사는 임병호 시인도 모르느냐"고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 “나의 문학적 스승 세 명(김대규 천승세 임병호) 중 한 명”이라고 공공연히 여기 저기에 밝혔다. 시를 쓰는 필자를 <소설문학>에 기획특집 인물로 소개하기도 했다. 필자 사진이 여러 장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박석수 시인은 현대시사에서 송탄, 나아가 평택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소설가라고 할수 있다.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 몇몇 곳에 상처처럼 남겨진 기지촌의 문제를 이처럼 정면으로 다룬 작가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우대식 시인의 평가는 옳다. 박석수의 ‘쑥고개’ 연작시들은 한반도를 눈물나게 한다. 처연하다. “큰일 났습니다. / 박석수 시인이 / 오늘 새벽 일곱시 / 강남시립병원에서 / 세상을 떠났습니다. // 1996년 9월 12일 아침 / 박건호 시인이 / 전화를 했다. // 몇 년을 그렇게 / 뇌종양으로 고생하더니 / 기어이 떠나는구나 // 병상에 누워 / 말없이 빙그레 웃기만 하더니 / 홀연히 떠나는구나 // 아내의 지극한 정성도 / 속절없이 / 우리 곁을 떠나가는구나 // ‘술래의 잠’에서 깨어나 / ‘술래의 노래’를 부르더니 / 이제 누구를 찾을 것인가. // 발인은 / 14일 아침 일곱시랍니다. / 장지는 / 용인 천주교묘지입니다. // 박건호 시인의 통화가 끝나자 / 가슴 속이 어두워졌다.” - ’朴石秀, 먼저 떠나다’. “임병호 문학비는 / 나, 박석수가 세운다. // 내 무덤 앞에 / 시비 세워 주겠다더니 / 박석수가 / 먼저 죽었다. // 약속도 / 지키지 못한 / 못난 놈. // 박석수 문학비는 / 나, 임병호가 세우겠다. // 석수야, / 이승 일 모두 잊고 / 편히 쉬어라. // 오늘은 / 술에 너무 빨리 취해 / 슬프다.” - ‘약속’. 박석수가 밤하늘의 별이 된 그해 한탄한 필자의 졸시다. 지난 15일 저녁 송탄에서 박석수 시인과 생전에 가깝게 지냈던 몇몇 사람들이 모였다. 이승하 · 우대식 시인이 함께 엮고 도서출판 ‘새미’가 출간한 박석수 시집 ‘십자가에 못박힌 한반도’를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이승하 · 우대식 시인은 요절시인 시전집 시리즈로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나를 불러주오’(김민부), ‘청보리의 노래’(임홍재), ‘오늘 죽지 않고 오늘 살아 있다’(김만옥), ‘나는 너와 결혼하겠다’(이경록), ‘ 저문 날의 삽화’(이비오), ‘꽃의 민주주의’(송유하), ‘빗발 속의 어둠’(김용직), ‘십자가에 못박힌 한반도’(박석수), ’첫사랑에 실패해본 사람은 더욱 잘 안다’(원희석), ‘나는 계집 호리는 주문을 연마하며 보냈다’(진이정)를 발간한 큰 족적을 남겼다. 그날 모인 김영대 박해석 우대식 이상권 이성재 이수연 이윤훈 이태용 이혜경 임병호 조순조 홍일표 초록도서관 관장 그리고 평택시민시민 김기수 편집국장 · 강경숙 기자 등은 박석수 시인의 생애와 일화를 주고 받으며 그를 추모했다. ‘박석수 시비(詩碑) 건립 얘기가 나왔다. 1949년 출생 당시 평택군 송탄면 지산리 805번지, 지금의 송탄 터미널 건너편 새로 난 소방도로에 접한 그의 생가 인근에 있는 초록도서관 경내에 건립됐으면 좋겠다는 말이 주류를 이뤘다. 소설작품까지 망라한 전집 완간 후 시비를 건립해도 늦지 않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결론은 시비를 먼저 세우는 데 뜻이 모아졌다. 문제는 시비건립 부지 사용과 건립비용이다. 박석수를 추모하는 사람들의 성금도 뜻이 깊지만 평택시의 지원으로 초록도서관 경내에 건립되는 것이 가장 보기에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택 송탄에서 태어난 훌륭한 시인을 평택시가 추모하고 업적을 기리는 일은 행복이다. 보람이다. 시사(市史)에 빛나는 사업이다. “박석수 문학비는 나, 임병호가 세우겠다“고 약속한 필자에게도 막중한 책임이 있다. 그날 밤 송탄에서 박석수가 엣날처럼 옆자리에 있는 것 같아 술잔을 자꾸 권했다. * * *